1. 초기 생애 및 배경
하리스 실라이지치는 1945년 10월 1일,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회주의 공화국의 브레자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리슈티나 대학교에서 인문학 석사 학위와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며 학문적 배경을 다졌다.
2. 초기 정치 경력
실라이지치는 1990년 민주행동당 (SDA)에 입당하여 정치 활동을 시작했으며, 보스니아 전쟁 중 외무부 장관과 총리를 역임했고, 전쟁 후에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각료평의회 공동 의장으로서 정부를 이끌었다.
2.1. 외무부 장관 및 총리

1990년부터 1993년까지 보스니아 전쟁 기간 동안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의 초대 외무부 장관으로 재직했다. 전쟁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인 1993년 10월부터 1996년 1월까지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의 총리를 역임했다. 그는 보스니아의 초대 대통령인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의 핵심적인 조언자이자 가까운 동맹이었다. 1994년 5월 31일부터 1996년 1월 31일까지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의 초대 총리를 지냈다.
2.2. 각료평의회 공동 의장
전쟁이 끝난 후, 1997년 1월 3일 실라이지치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각료평의회의 공동 의장으로 임명되어 2000년 6월 6일까지 보로 보시치와 스베토자르 미하일로비치와 함께 직무를 수행했다.
2000년 의회 선거에서 그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당(SBiH)은 사회민주당과 연합하여 과반수를 확보하고 민족주의 정당들을 권력에서 밀어냈다. 이들은 여러 소규모 정당들과 연합하여 '변화를 위한 동맹'을 결성했다. 이 연립 정부는 선거법 통과를 촉진했는데, 이는 민주주의를 향한 중요한 단계였을 뿐만 아니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유럽 평의회에 가입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기도 했다. 사회민주당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당이 이끄는 정부는 2002년 10월 총선까지 이어졌으나, 정치 개혁 속도에 불만을 품은 유권자들이 민족주의 정당을 다시 권력으로 복귀시키면서 막을 내렸다.
3.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대통령직 (2006-2010)
2006년부터 2010년까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대통령직의 보스니아계 구성원으로서 주요 국내외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3.1. 선거 및 국내 정책
2006년 총선에서 실라이지치는 득표율 62.8%를 얻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대통령직의 5대 보스니아계 구성원으로 당선되며 강력한 정치적 복귀를 알렸다.
2007년,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는 보스니아 정부가 제기한 집단학살 공모 혐의에 대해 세르비아를 무혐의로 판결했다. 실라이지치는 법원의 판결에 실망감을 표했지만, 재판소가 세르비아가 집단학살 방지 및 처벌 의무를 위반했음을 인정한 사실은 환영했다.
실라이지치는 데이턴 협정을 협상했던 보스니아 대표단의 일원이었다. 그는 이 문서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집단학살을 종식시키는 데 필수적이었다고 강조했지만, 이후에는 국가 통일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인식했다. 2006년과 2007년에 데이턴 협정의 일부를 폐지하려는 강력한 조치와 주장을 내세우며, 그는 보스니아의 헌법에 직접적으로 반대하는 매우 논란이 많은 정치인으로 부상했다. 그의 주된 목표는 스릅스카 공화국의 존재를 폐지하고, 세르비아와의 특정 관계를 단절하며, 국가를 단일화 방향으로 개혁하는 것이었다.
그는 2010년 총선에서 대통령직 재선에 도전했지만, 25.10%의 득표율로 파흐루딘 라돈치치에게 5%, 당선된 바키르 이제트베고비치에게 9% 뒤지며 실패했다. 대통령 재임 기간 4년 동안, 실라이지치는 데이턴 협정 조항에 대한 불만을 표명하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 스릅스카 공화국 자치에 반대하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전역의 당국과 조직의 지지를 받았다.
3.2. 헌법 개혁 노력
유럽 평의회의 자문 기구인 베니스 위원회가 2005년에 발표한 의견은 데이턴 협정 10주년과 맞물려, 미국의 외교적 추진에 따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헌법 개혁에 대한 논의를 촉발하여 국가 기관을 현대화하는 방안을 모색하게 했다.
당시 사라예보 주재 미국 대사인 더글러스 L. 맥엘하니와 워싱턴 D.C. 주재 대사인 도널드 헤이즈는 미국과 당 지도자들 간의 협상을 이끌며, '4월 패키지'('aprilski paket')라고 불리는 헌법 개정안의 절충안을 제안하는 계획을 주도했다. 4월 패키지는 전반적으로 국가의 권한을 더 명확히 정의하고 부분적으로 확장하며, 기관을 효율화하고 소수 민족의 거부권한을 부분적으로 제한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개정될 헌법에는 무엇보다도 (각 구성 민족별로 8개월 대신 16개월마다 교대하는 두 명의 부통령을 두는) 단일 대통령직이 포함되었으며, 이는 국민 투표로 직접 선출되는 것이 아니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의회에서 간접적으로 선출되는 보다 의례적인 역할과 강화된 각료평의회 의장을 규정했다.
의회 승인 시점에서 헌법 개정안은 필요한 28표 중 26표만을 얻어 2표 차이로 부결되었다. 이는 실라이지치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당 (실체 투표까지 폐지하기를 원했던)과 크로아티아 민주연합 1990 분리파가 선거 전에 극단적인 입장을 취했기 때문인데, 이들은 제안이 보스니아 크로아티아인을 충분히 보호하지 못한다고 느꼈다. 미국은 2007년에 밀로라드 도디크 (당시 스릅스카 공화국 집권자)와 실라이지치 (당시 대통령직 구성원) 간의 추가 협상을 통해 4월 패키지를 구제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3.3. 외교 정책 입장

실라이지치는 크로아티아와의 복수국적 협정 비준에 반대했다. 당시 유효했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국적법에 따르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복수국적 협정을 맺지 않은 국가의 시민권자들은 보스니아 시민권을 상실하게 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약 50만 명에 달하는 보스니아 크로아티아인들이 2014년까지 보스니아 시민권 없이 지내야 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보스니아 대통령직은 결국 2011년 10월에 크로아티아와의 협정을 비준했다.
코소보가 세르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후, 실라이지치는 자국 내 세르비아 공동체의 강력한 반대 때문에 보스니아가 코소보의 독립을 조만간 인정할 가능성은 낮다고 말했다. 그러나 2008년 9월 제63차 유엔 총회에 참석한 실라이지치는 미국의 소리 인터뷰에서 자신이 코소보의 독립을 지지하며, 국제사법재판소가 코소보 독립의 합법성에 대한 의견을 발표해 달라는 세르비아의 요청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실라이지치는 보스니아 대통령직이 만장일치로 공식적인 발언을 허용하는 플랫폼을 채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개인적인 의견을 표명했다.
4.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당 (SBiH) 활동
실라이지치는 1996년 민주행동당 (SDA)을 탈당하여 독자적인 정당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당 (SBiH)을 창당했다. 그의 당은 다음 해 의회에 진출하여 보스니아 무슬림계 주요 정당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1996년 4월 13일부터 2012년 3월 6일까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당의 당 대표를 역임했다.
5. 개인 생활
5.1. 가족 및 관계
실라이지치는 2016년부터 보스니아 전 팝 가수인 셀마 무헤디노비치와 결혼 생활을 하고 있다. 두 사람은 15년 이상 교제해왔으며, 실라이지치는 자신의 시와 그녀의 음악이라는 예술에 대한 상호적인 경향이 처음부터 서로에게 끌린 요인이었다고 밝혔다. 이들은 사라예보에 거주하고 있다. 그는 이전에 마야 즈보니치와 결혼하여 아들 한 명을 두었다.
5.2. 건강
2020년 5월 27일, 실라이지치는 심장 혈관 상태 악화로 수술을 결정한 후 사라예보에서 성공적인 심장 수술을 받았다.
6. 수상 및 영예
실라이지치는 생애 동안 다양한 훈장과 명예 학위를 수여받았다.
공작 트르피미르 훈장 리본 1995년 7월, 크로아티아의 공작 트르피미르 훈장을 수여받았다.
- 2005년, 제네바 외교 및 국제관계 대학원으로부터 국제관계 명예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니샨-에-파키스탄 훈장 리본 2018년, 파키스탄 대통령 맘눈 후세인으로부터 파키스탄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니샨-에-파키스탄 훈장을 수여받았다.
7. 유산 및 평가
하리스 실라이지치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독립과 전후 재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보스니아 전쟁 시기 외무부 장관과 총리를 역임하며 국가의 외교적 입지를 다지고 전시 행정을 이끌었다. 특히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대통령의 최측근으로서 보스니아의 생존과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7.1. 역사적 의의 및 영향
실라이지치는 전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통합과 기능적인 국가 건설을 위한 노력을 지속했다. 그는 데이턴 협정이 전쟁을 종식시키는 데 필수적이었음을 인정하면서도, 이 협정이 국가 통일을 저해하는 장애물이 되었다는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다. 특히 스릅스카 공화국의 자치를 폐지하고 국가를 단일화하려는 그의 주장은 보스니아계 유권자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2006년 '4월 패키지'를 통한 헌법 개혁 시도는 비록 실패했지만, 이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당면한 민족적 분열과 복잡한 통치 구조를 극복하려는 중요한 노력으로 기록된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민주주의와 사회 발전에 기여하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7.2. 비판 및 논란
실라이지치의 정치적 행보에는 비판적 시각과 논란도 존재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데이턴 협정에 대한 그의 비판적인 입장과 이로 인해 발생한 정치적 대립이다. 그는 협정이 국가 통합을 저해한다고 주장하며 스릅스카 공화국의 폐지를 요구했는데, 이는 세르비아계 정치 세력으로부터 강한 반발을 샀고 국내 정치적 불안정을 야기하기도 했다. 또한, '4월 패키지' 헌법 개혁안 실패는 그의 정치적 협상력의 한계를 드러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는 그가 과도하게 민족주의적이고 타협하지 않는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러한 주장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직면한 근본적인 구조적 문제에 대한 논의를 촉발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8. 함께 읽기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역사
- 보스니아 전쟁
-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