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필리프 3세는 1245년 5월 1일 푸아시에서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와 왕비 프로방스의 마르그리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에는 왕위를 계승할 것으로 기대되지 않았으나, 1260년에 형인 루이가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어린 시절 필리프는 어머니 마르그리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어머니는 그에게 30세까지 자신의 후견 아래 머물겠다는 맹세를 받아냈으나, 교황 우르바노 4세는 1263년 6월 6일 이 맹세에서 그를 해방시켜 주었다. 이후 루이 9세의 총신이자 궁정 관리였던 피에르 드 라 브로스가 필리프의 멘토가 되었다. 아버지 루이 9세 또한 그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특히 왕의 첫 번째 의무로서 정의의 개념을 심어준 《가르침》(Enseignements)을 저술하기도 했다.
1.2. 왕위 계승자로서의 준비
필리프는 1258년 3월 11일 루이 9세와 아라곤의 하이메 1세 사이에 체결된 코르베유 조약의 조건에 따라 1262년 클레르몽에서 루앙 대주교 외드 리고에 의해 아라곤의 이사벨라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그가 왕위 계승자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중요한 단계였다.
2. 통치 기간
필리프 3세의 통치는 아버지 루이 9세의 죽음과 함께 시작되었으며, 그는 아버지의 정책을 계승하고 프랑스 왕국의 영토를 확장하며 국내외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을 겪었다.
2.1. 제8회 십자군과 즉위

오를레앙 백작으로서 필리프는 1270년 아버지 루이 9세와 함께 튀니스로 떠난 제8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다. 루이 9세는 출정 직전 마티유 드 방돔과 클레르몽의 시몽 2세에게 왕국의 섭정권을 맡기고 왕실 인장까지 위임했다. 카르타고를 점령한 후 십자군 진영에는 이질(또는 발진티푸스) 전염병이 창궐하여 필리프와 그의 가족들도 병에 걸렸다. 8월 3일 동생 발루아 백작 장 트리스탕이 먼저 사망했고, 8월 25일에는 루이 9세마저 사망했다. 루이 9세의 유해 부패를 막기 위해 '모스 테우토니쿠스'(mos Teutonicus모스 테우토니쿠스라틴어)라는 방식, 즉 유골을 운반하기 쉽도록 살을 발라내는 처리가 이루어졌다.
당시 25세의 나이로 이질에 시달리던 필리프는 튀니스에서 국왕으로 선포되었다. 그의 삼촌인 나폴리의 카를로 1세는 튀니스의 하프스 왕조 칼리프 무함마드 1세 알-무스탄시르와 평화 협상을 벌였다. 1270년 11월 5일, 프랑스, 시칠리아, 나바라 국왕들과 튀니스 칼리프 사이에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후에도 비극은 이어져, 12월 시칠리아 트라파니에서 매형인 나바라의 테오발도 2세가 사망했고, 2월에는 임신 중이던 아내 이사벨라가 말에서 떨어져 칼라브리아의 코젠차에서 사망했다. 4월에는 테오발도의 미망인이자 필리프의 누이인 나바라의 이사벨라마저 숨을 거두었다.
필리프 3세는 1271년 5월 21일 파리에 도착하여 사망자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다음 날 아버지의 장례식이 거행되었고, 새로운 국왕은 1271년 8월 15일 랭스에서 프랑스 국왕으로 대관식을 치렀다.
2.2. 영토 확장 및 왕령 강화
필리프 3세는 통치 기간 동안 왕국의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왕령을 강화하는 데 주력했다. 1271년 8월 21일, 그의 삼촌이자 푸아티에와 툴루즈 백작이었던 푸아티에의 알퐁스가 자녀 없이 사보나에서 사망하면서, 필리프는 알퐁스의 영토를 상속받아 이를 왕령으로 통합했다. 이 상속에는 이후 오베르뉴 공작령이 된 오베르뉴의 일부와 아제네가 포함되었다. 알퐁스의 유언에 따라 필리프는 1274년 베네생 백작령을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에게 양도했다. 몇 년 후인 1279년,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와의 아미앵 조약을 통해 아제네는 다시 잉글랜드에 반환되었다.
1271년 9월 19일, 필리프는 툴루즈의 세네샬에게 귀족과 시의회로부터 충성 맹세를 받을 것을 명령했다. 이듬해 푸아 백작 로제르 베르나르 3세가 툴루즈 백작령을 침공하여 여러 왕실 관리를 살해하고 솜뷔 마을을 점령했다. 필리프의 왕실 세네샬인 외스타슈 드 보마르셰는 푸아 백작령으로 반격에 나섰으나, 필리프의 철수 명령을 받았다. 필리프는 1272년 5월 25일 군대를 이끌고 툴루즈에 도착했고, 6월 1일 불본에서 아라곤의 하이메 1세를 만나 문제를 중재하려 했으나 로제르 베르나르는 이를 거부했다. 이에 필리프는 푸아 백작령을 황폐화시키고 주민들을 추방하는 작전을 감행했다. 6월 5일까지 로제르 베르나르는 항복하여 카르카손에 수감되었고, 쇠사슬에 묶였다. 필리프는 그를 1년간 투옥한 후 석방하고 그의 영토를 돌려주었다.
또한 필리프 3세는 1281년 기네 백작령을 획득했으며, 1286년에는 동생 피에르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알레송 백작령을 왕령으로 회수했다. 그의 아들 필리프와의 결혼을 통해 나바라 왕국까지 프랑스의 영향권 아래 두게 되었다. 이러한 영토 확장은 프랑스 왕실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2.3. 국내 정책
필리프 3세는 아버지 루이 9세의 국내 정책 대부분을 유지하고 강화했다. 여기에는 1258년 루이 9세가 통과시킨 봉건 전쟁 금지령이 포함되며, 필리프는 1274년 10월 자신의 칙령을 통해 이를 재강화했다. 그는 프랑스 내 유대인 문제에 있어서도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랐으며, 경건함을 동기로 내세웠다. 1271년 9월 23일 파리로 돌아온 필리프는 유대인들에게 표식을 착용하라는 아버지의 명령을 재시행했다. 1283년 그의 헌장은 유대인 회당과 유대인 묘지의 건축 및 수리를 금지했고, 유대인이 기독교인을 고용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유대인들의 '스트레피티'(너무 큰 소리로 찬송하는 행위)를 억제하려 했다.
필리프 3세는 성격적으로 우유부단하고 나약하며 수줍음이 많아 부모의 강한 성격에 지배당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평가된다. 그는 독실한 신자였지만 광신적이지는 않았으며, 초기에는 피에르 드 라 브로스의, 후에는 삼촌 나폴리의 카를로 1세의 지시를 따르는 경향이 있었다.
2.4. 외교 관계 및 분쟁
필리프 3세는 나바라 왕국과의 관계를 통해 프랑스의 영향력을 확장했다. 1274년 나바라의 엔리케 1세 국왕이 사망하자, 카스티야의 알폰소 10세는 엔리케의 상속녀인 어린 나바라의 후아나 1세로부터 나바라 왕위를 차지하려 했다. 알폰소 10세의 아들 페르난도 데 라 세르다는 군대를 이끌고 비아나에 도착했고, 알폰소는 동시에 손자 중 한 명과 후아나의 결혼에 대한 교황의 승인을 구했다. 엔리케의 미망인 아르투아의 블랑슈 또한 잉글랜드와 아라곤으로부터 후아나와의 결혼 제안을 받고 있었다. 침략군과 외국의 제안에 직면한 블랑슈는 사촌 필리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필리프는 영토 확장의 기회를 보았고, 후아나는 왕국을 보호할 군사적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1275년 필리프와 블랑슈 사이에 체결된 오를레앙 조약은 필리프의 아들(루이 또는 필리프)과 블랑슈의 딸 후아나의 결혼을 주선했다. 이 조약은 나바라가 파리에서 임명된 총독들에 의해 통치될 것임을 명시했다. 1276년 5월까지 프랑스 총독들은 나바라 전역을 다니며 어린 여왕에게 충성 맹세를 받았다. 그러나 친프랑스 조약과 프랑스 총독들에 불만을 품은 나바라 주민들은 친카스티야파와 친아라곤파 두 반란 세력을 형성했다.
1276년 9월, 필리프는 공개적인 반란에 직면하여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 2세를 군대와 함께 팜플로나로 보냈다. 필리프는 1276년 11월 또 다른 군대와 함께 베아른에 도착했는데, 이때 로베르는 이미 상황을 진정시키고 나바라 귀족과 성주들로부터 충성 맹세를 받아낸 상태였다. 반란은 빠르게 진압되었지만, 카스티야와 아라곤 왕국이 결혼 의사를 철회한 것은 1277년 봄이 되어서였다. 필리프는 나바라 전역에 가해진 피해에 대해 교황 니콜라오 3세로부터 공식적인 질책을 받기도 했다.
2.5. 아라곤 십자군
시칠리아 만종 사건 이후 필리프 3세는 삼촌 나폴리의 카를로 1세와 교황 마르티노 4세의 요청에 따라 아라곤 왕국에 대한 전쟁을 시작했는데, 이를 아라곤 십자군이라고 부른다. 1282년 시칠리아에서 필리프의 삼촌인 나폴리 국왕 카를로 1세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났다. 수년간의 과도한 세금에 분노한 시칠리아 폭도들은 많은 앙주인과 프랑스인을 학살했다. 이후 아라곤의 페드로 3세는 반란군을 지원하기 위해 시칠리아에 상륙하여 시칠리아 왕위를 주장했다. 반란과 침공의 성공으로 페드로 3세는 1282년 9월 4일 시칠리아 국왕으로 즉위했다. 이에 교황 마르티노 4세는 페드로를 파문하고 그의 왕국을 몰수한다고 선언했으며, 아라곤 왕위를 필리프의 아들 발루아 백작 샤를에게 수여했다.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카를로와 합류했던 필리프의 동생 알레송 백작 피에르는 레조 칼라브리아에서 사망했다. 그는 후사 없이 사망하여 알레송 백작령은 1286년 왕령으로 환수되었다.
필리프는 아내 브라방의 마리와 삼촌 카를로의 강력한 권유로 아라곤 왕국에 대한 전쟁을 시작했다. 이 전쟁은 교황의 승인을 받아 '아라곤 십자군'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한 역사가에 의해 "카페 왕조가 감행한 가장 부당하고 불필요하며 재앙적인 사업"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필리프는 아들들을 대동하고 대군을 이끌고 루시용에 진입했다. 1285년 6월 26일까지 그는 지로나 앞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도시를 포위했다. 강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필리프는 1285년 9월 7일 지로나를 함락시켰다.
그러나 필리프는 곧 역경에 부딪혔다. 프랑스 진영에 이질 전염병이 발생하여 필리프 자신도 병에 걸렸다. 프랑스군은 철수를 시작했으나, 10월 1일 콜 드 파니사르 전투에서 아라곤군에게 쉽게 패배했다. 필리프는 1285년 10월 5일 페르피냥에서 이질로 사망했다. 그의 아들 필리프 4세가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했다.
3. 결혼과 자녀
필리프 3세는 두 번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다.
3.1. 첫 번째 결혼: 이사벨라 데라곤
필리프는 1262년 5월 28일 아라곤의 하이메 1세와 그의 두 번째 왕비 헝가리의 비올란테의 딸인 아라곤의 이사벨라와 결혼했다. 그들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자녀들이 태어났다.
- 루이 (1264년 - 1276년 5월): 일부 기록에 따르면 계모의 지시로 독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 필리프 4세 (1268년 - 1314년 11월 29일): 필리프 3세의 뒤를 이은 프랑스 국왕. 나바라의 후아나 1세와 결혼했다.
- 로베르 (1269년 - 1271년)
- 발루아 백작 샤를 (1270년 3월 12일 - 1325년 12월 16일): 1284년부터 발루아 백작이 되었으며, 1290년 나폴리의 마르그리트와 첫 결혼, 1302년 쿠르트네의 카트린 1세와 두 번째 결혼, 1308년 샤티용의 마오와 세 번째 결혼했다.
- 사산된 아들 (1271년)
3.2. 두 번째 결혼: 마리 드 브라방
왕비 이사벨라가 사망한 후, 필리프는 1274년 8월 21일 브라방 공작 앙리 3세와 부르고뉴의 아델라이드의 딸인 브라방의 마리와 재혼했다. 그들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자녀들이 태어났다.
- 에브뢰 백작 루이 (1276년 5월 - 1319년 5월 19일): 1298년부터 에브뢰 백작이 되었으며, 아르투아의 마르그리트와 결혼했다.
- 블랑슈 (1278년 - 1305년 3월 19일, 빈): 1300년 5월 25일 공작이자 미래의 보헤미아의 루돌프 1세와 결혼했다.
- 마르그리트 (1282년 - 1318년 2월 14일): 1299년 9월 8일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 국왕과 결혼했다.


4. 사망
필리프 3세는 1285년 10월 5일 아라곤 십자군 원정 중 페르피냥에서 이질에 걸려 사망했다. 그의 나이 40세였다. 그의 시신은 '모스 테우토니쿠스'(mos Teutonicus모스 테우토니쿠스라틴어) 관습에 따라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 각기 다른 장소에 매장되었다. 살은 나르본 대성당으로 보내졌고, 내장은 노르망디의 라 노에 수도원으로, 심장은 현재는 철거된 파리의 자코뱅 수도원 교회로 보내졌으며, 뼈는 파리 북쪽의 생드니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5. 유산과 평가
필리프 3세의 통치는 프랑스 왕국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영토 확장과 재정적 결과 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5.1. 역사적 평가
필리프 3세의 통치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인 면과 비판적인 면이 공존한다. 그는 아버지 루이 9세의 정책을 대부분 계승하고 그의 행정관들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왕령은 크게 확장되었는데, 1281년 기네 백작령, 1271년 툴루즈 백작령, 1286년 알레송 백작령, 1271년 오베르뉴 공작령을 획득했으며, 아들 필리프의 결혼을 통해 나바라 왕국까지 프랑스의 영향권 아래 두었다. 이는 프랑스 왕국의 중앙집권화와 영토적 기반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그의 아라곤 정복 시도는 프랑스 왕실을 거의 파산 직전으로 몰고 갔으며, 이는 그의 후계자에게 재정적 어려움을 초래했다. 그는 우유부단하고 나약하며 수줍음이 많아 다른 강한 인물들에게 휘둘리는 경향이 있었다는 비판도 받는다. 특히 아라곤 십자군의 실패는 그의 통치의 약점으로 지적된다.
이탈리아의 시인 단테는 그의 작품 《신곡》에서 필리프 3세의 영혼을 연옥문 밖에서 다른 동시대 유럽 통치자들과 함께 상상했다. 단테는 필리프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작은 코를 가진 자"(the small-nosed더 스몰노즈드영어)이자 "프랑스 역병의 아버지"(the father of the Pest of France더 파더 오브 더 페스트 오브 프랑스영어)라고 불렀는데, 여기서 '역병'은 그의 아들 필리프 4세를 암시하는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