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프랑스의 물리학자 피에르 퀴리(Pierre Curie피에르 퀴리프랑스어)는 1859년 파리에서 태어나 1906년 사망하기까지 결정학, 자기학, 압전 효과, 방사능 분야에서 선구적인 업적을 남겼다. 그는 1903년 아내 마리 퀴리 및 앙리 베크렐과 함께 방사능 연구에 대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하며, 퀴리 가문의 노벨상 유산을 시작했다.
피에르 퀴리는 형 자크 퀴리와 함께 압전 효과를 발견하여 현대 기술 발전에 기여했으며, 자기학 분야에서는 퀴리 법칙과 퀴리 온도를 정립하여 물질의 자기적 특성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켰다. 또한 마리 퀴리와 함께 폴로늄과 라듐을 분리하고 '방사능'(radioactivity라디오액티비티영어)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며 방사능 연구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의 연구는 단순한 과학적 발견을 넘어 핵에너지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방사선의 특성을 규명하는 등 과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말년에는 영성주의에 대한 과학적 탐구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비극적이었지만, 평생의 연구 과정에서 노출된 방사선이 그의 건강에 미쳤을 잠재적 영향 또한 후대의 과학사에서 중요한 논점으로 다루어진다. 피에르 퀴리의 이름은 과학 단위, 원소, 연구소, 교육 기관 등 다양한 형태로 남아 그의 위대한 과학적 유산을 기리고 있다.
2. 초기 생애 및 교육
피에르 퀴리는 1859년 5월 15일 프랑스 파리에서 위그노 개신교 혈통의 의사 외젠 퀴리(Eugène Curie외젠 퀴리프랑스어)와 소피-클레르 퀴리(Sophie-Claire Curie소피-클레르 퀴리프랑스어)의 아들로 태어났다.
2.1. 어린 시절과 교육
피에르 퀴리는 학교에 다니는 것을 싫어하여 14세까지는 주로 아버지와 가정교사, 그리고 형인 자크로부터 홈스쿨링을 받았다. 어린 시절부터 수학과 기하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6세에 파리 대학교에서 수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고, 18세에는 같은 대학의 이학부에서 물리학 학위를 취득하며 뛰어난 학습 능력을 입증했다.
2.2. 초기 경력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학위를 취득한 후 곧바로 박사 과정에 진학하지 못하고, 대신 실험실 강사로 일하며 연구 활동을 시작했다. 1878년에는 '사이언시아트 상(Scienciate Award사이언시아트 상영어)'을 수상하며 초기 과학적 능력을 인정받았고, 소르본 대학교 부속 실험실의 부소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다양한 학교와 산업 공장의 과학 자문가로도 활동했다. 이후 1895년에 파리 대학교에서 자기학 연구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학위 취득 후 물리학 교수가 되었으며, 1900년에는 이학부 교수로 승진했다.
3. 과학 경력 및 연구
피에르 퀴리는 자기학, 압전 효과, 방사능 분야에서 다양한 선구적인 연구를 수행하며 현대 물리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의 박사 논문은 자기학에 관한 것이었으며, 특히 온도에 따른 물질의 자기적 특성 변화를 심도 깊게 연구했다.
3.1. 자기학 및 열역학 연구

피에르 퀴리는 자기학에 대한 박사 학위 연구에 앞서, 자화율 측정에 사용되는 매우 민감한 비틀림 저울을 설계하고 완성했다. 이 장비의 변형은 이후 해당 분야 연구자들에게 널리 사용되었다. 그는 박사 학위 논문 주제로 강자성, 상자성, 반자성을 연구하며 온도가 상자성에 미치는 영향을 발견했으며, 이는 현재 '퀴리 법칙'으로 알려져 있다. 퀴리 법칙에 나타나는 물질 상수는 '퀴리 상수'라고 불린다.
또한 그는 강자성 물질이 특정 온도 이상에서 강자성적 성질을 잃어버리는 임계 온도 전이를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했으며, 이 온도는 '퀴리 온도' 또는 '퀴리점'으로 알려져 있다. 퀴리 온도는 판 구조론 연구, 저체온증 치료, 카페인 측정, 심지어 지구 밖 자기장 이해 등 다양한 분야에 응용되고 있다. 이 연구에는 정밀한 저울, 전위계 등 섬세한 장비가 필요했다. 피에르는 또한 고감도의 과학 저울인 '퀴리 저울'을 제작하기도 했다.
3.2. 압전 효과 발견

1880년, 피에르는 그의 형 자크 퀴리(Jacques Curie자크 퀴리프랑스어)와 함께 결정에 압력이 가해질 때 전기 전위가 발생하는 현상인 '압전 효과'를 발견했다. 이 연구를 돕기 위해 그들은 압전 효과를 측정할 수 있는 석영 전위계를 발명했다. 다음 해인 1881년에는 역효과를 입증했는데, 결정에 전기장을 가하면 변형이 일어나는 현상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압전 효과는 현대 기술에 광범위하게 적용되었다. 예를 들어, 거의 모든 디지털 회로는 압전 효과를 활용한 수정 진동자에 의존한다. 태국어 출처에 따르면, 피에르는 석영과 로셸염 결정의 전기 전위차를 실험하며, 압력이 전위차에 영향을 미치고, 전위차를 높이면 결정 표면이 진동하여 사람의 가청 범위를 넘어선 고주파 음파를 발생시킨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러한 원리는 오늘날 마이크로폰이나 녹음기 등 다양한 음향 장치 개발의 기초가 되었다.
3.3. 방사선 연구의 선구자
피에르 퀴리는 아내 마리 퀴리와 함께 폴로늄과 라듐을 분리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들은 '방사능'(radioactivity라디오액티비티영어)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고 이를 심도 있게 연구한 선구자들이었다. 마리 퀴리의 유명한 박사 논문을 포함한 이들의 연구는 피에르와 그의 형 자크가 제작한 민감한 압전식 전위계를 활용하여 이루어졌다. 1898년 12월 26일, 퀴리 부부와 엠. G. 베몽(M. G. Bémont엠 지 베몽프랑스어)의 라듐과 폴로늄 발견에 관한 공동 발표는 2015년 미국 화학회 화학 혁신 공로상(Citation for Chemical Breakthrough Award화학 혁신 공로상영어)을 수상하며 그 업적을 다시 한번 인정받았다.

퀴리 부부의 연구는 영국 왕립학회의 주목을 받았고, 1903년 피에르는 런던에서 그들의 연구를 발표하도록 초청받았다. 당시 마리 퀴리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강연이 허락되지 않아 켈빈 남작이 그녀 옆에 앉아 있었고, 피에르가 연구 내용을 발표했다. 같은 해, 피에르와 마리 퀴리는 앙리 베크렐과 함께 방사능 연구에 대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피에르 퀴리는 그의 학생 중 한 명인 알베르 라보르드(Albert Laborde알베르 라보르드프랑스어)와 함께 라듐 입자에서 지속적으로 열이 방출되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핵 에너지'를 최초로 발견했다. 그는 또한 자기장을 이용하여 방사성 물질의 방출이 일부는 양전하를 띠고(알파선), 일부는 음전하를 띠며(베타선), 일부는 중성(감마선)임을 밝혀냈다.
3.4. 퀴리 원리 및 기타 과학적 기여
피에르 퀴리는 '퀴리 비대칭 원리'(Curie Dissymmetry Principle퀴리 비대칭 원리영어)로 알려진 원리를 정립했다. 이 원리는 물리적 효과는 효율적인 원인에 없는 비대칭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무중력 상태에서 무작위로 섞인 모래는 비대칭성이 없다(즉, 등방성이다). 여기에 중력장을 도입하면 장의 방향으로 인해 비대칭성이 생긴다. 그러면 모래 알갱이들은 깊이에 따라 밀도가 증가하며 '스스로 분류'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새로운 배열, 즉 모래 알갱이들의 방향성 배열은 실제로 분리를 야기하는 중력장의 비대칭성을 반영한다.
3.5. 영성주의 연구
19세기 말, 과학계에서는 샤를 리셰나 카미유 플라마리옹과 같은 유럽 과학자들이 수행한 영성주의 실험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다. 피에르 퀴리는 처음에 이러한 현상에 관심을 가졌고, 자기학에 대한 미해결 질문들을 해결하는 데 체계적인 초자연 현상 연구가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당시 약혼자였던 마리에게 "이런 영적 현상들이 나를 강렬하게 흥미롭게 한다. 나는 이것이 물리학과 관련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라고 편지를 쓰기도 했다. 이 시기 피에르 퀴리의 노트에는 그가 영성주의에 관한 많은 책을 읽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1905년 6월 파리에서 열린 에우사피아 팔라디노의 심령술 회의에 단순히 구경꾼으로 참석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목표는 영혼과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심령술 회의를 과학적 실험으로 보고 다양한 매개변수를 모니터링하며 모든 관찰 내용을 상세히 기록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를 무신론자라고 생각했다.
4. 결혼 및 가족
피에르 퀴리의 삶에서 마리 스크워도프스카와의 만남은 그의 과학적 경력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삶에서도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들은 공동 연구를 통해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과학적 발견 중 일부를 이룩했다.
4.1. 마리 퀴리와의 결혼 및 연구 협력

피에르 퀴리는 친구인 물리학자 유제프 비에루시-코발스키의 소개로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를 만났다. 피에르는 그녀를 자신의 실험실 학생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마리가 자신의 연구에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그녀에 대한 존경심이 커졌고, 그녀를 자신의 영감의 원천으로 여기게 되었다. 마리는 처음에는 피에르의 청혼을 거절했지만, 마침내 1895년 7월 26일 그와 결혼하는 데 동의했다. 퀴리 부부는 행복하고 애정 넘치는 결혼 생활을 했으며, 서로에게 헌신하는 모습으로 유명했다. 피에르는 마리에게 "우리가 꿈에 매혹되어 서로 가까이 삶을 보낼 수 있다면 아름다운 일일 것입니다. 당신의 애국적인 꿈, 우리의 인도주의적인 꿈, 그리고 우리의 과학적인 꿈을 말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결혼 이후 그들은 공동으로 방사성 물질 연구를 수행하며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하는 등 위대한 과학적 성과를 함께 이루어냈다.
4.2. 자녀와 후손
피에르와 마리 퀴리는 두 딸을 두었다. 장녀는 이렌 졸리오퀴리(Irène Joliot-Curie이렌 졸리오퀴리프랑스어)로, 그녀는 역시 물리학자이자 남편인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와 함께 방사능 연구에 참여하여 노벨상을 수상했다. 차녀인 에브 퀴리(Ève Curie에브 퀴리프랑스어)는 어머니 마리 퀴리의 유명한 전기를 저술했다. 에브 퀴리는 퀴리 가문 중 유일하게 물리학자가 되지 않았으며, 그녀의 남편 헨리 리처드슨 라보이스 주니어는 1965년 유니세프를 대표하여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피에르와 마리 퀴리의 손녀인 엘렌 랑주뱅-졸리오는 파리 대학교의 핵물리학 교수이며, 피에르 퀴리의 이름을 딴 손자 피에르 졸리오는 저명한 생화학자이다. 피에르 퀴리의 조부인 폴 퀴리(Paul Curie폴 퀴리프랑스어, 1799~1853)는 의사이자 헌신적인 맬서스주의적 인도주의자였다. 피에르 퀴리는 이 친할머니를 통해 바젤의 과학자이자 수학자인 요한 베르누이의 직계 후손이기도 하며, 1991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피에르-질 드 젠도 같은 혈통이다.
5. 사망
피에르 퀴리는 1906년 4월 19일 파리에서 불의의 사고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비가 내리던 날, 그는 케 드 콩티(Quai de Conti케 드 콩티프랑스어)의 번화한 도핀 거리(Rue Dauphine도핀 거리프랑스어)를 건너던 중 미끄러져 쓰러졌고, 그만 육중한 마차 아래로 깔리고 말았다. 마차 바퀴 중 하나가 그의 머리를 덮쳐 두개골이 골절되었고, 그는 즉사했다. 그의 아버지와 실험실 조수의 증언에 따르면, 퀴리가 평소 생각에 몰두하여 넋이 나간 듯한 성격이 그의 죽음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고 한다.
퀴리 부부는 의도치 않게 또는 자발적으로 라듐에 의한 화상을 입었고, 연구를 수행하는 동안 방대한 양의 방사선에 노출되었다. 그들은 방사선병을 앓았고, 마리 퀴리는 1934년 방사선 유발 재생불량성 빈혈로 사망했다. 심지어 현재까지도 1890년대 퀴리 부부의 모든 서류, 심지어 그녀의 요리책조차 방사성 물질을 함유하고 있다. 그들의 실험실 노트는 특수 납 상자에 보관되어 있으며, 이를 보려는 사람들은 개인 보호 장비를 착용해야 한다. 이 자료들은 대부분 프랑스 국립도서관(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비블리오테크 나시오날 드 프랑스프랑스어)에 소장되어 있다. 피에르 퀴리가 사고로 사망하지 않았다면, 그 역시 아내 마리, 딸 이렌, 그리고 사위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처럼 방사선 노출의 영향으로 결국 사망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1995년 4월, 피에르와 마리 퀴리의 유해는 본래의 안식처였던 가족 공동묘지에서 파리 팡테옹의 지하 묘지로 이장되어 안치되었다.
6. 평가 및 유산
피에르 퀴리의 과학적 업적은 당대에 여러 권위 있는 상과 영예로 인정받았으며, 그의 이름과 발견은 오늘날까지 과학 기술 발전의 중요한 이정표로 남아있다.
6.1. 주요 수상 경력

피에르 퀴리가 받은 주요 과학상과 영예는 다음과 같다:
- 노벨 물리학상 (1903년): 아내 마리 퀴리, 그리고 앙리 베크렐과 함께 "앙리 베크렐 교수가 발견한 방사선 현상에 대한 공동 연구를 통해 이룩한 탁월한 공로를 인정받아" 공동 수상했다. 이는 퀴리 부부가 노벨상을 수상한 최초의 부부가 되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 데이비 메달 (1903년): 마리 퀴리와 함께 영국 왕립학회로부터 수상했다.
- 마테우치 메달 (1904년): 마리 퀴리와 함께 이탈리아 과학회로부터 수상했다.
- 엘리엇 크레송 메달 (1909년): 마리 퀴리의 수상식에서 그가 이미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후에 수여되었다.
- 미국 화학회 화학 혁신 공로상 (2015년): 그의 라듐 및 폴로늄 발견 업적을 기리기 위해 ESPCI 파리테크에 수여되었다.
6.2. 과학적 기념 및 영향력
피에르 퀴리의 이름과 업적은 과학계 곳곳에 남아 그의 유산을 기리고 있다.
- 퀴리 (Ci): 방사능의 측정 단위로, 3.7 x 1010 붕괴/초 또는 37 기가베크렐 (GBq)에 해당한다. 피에르의 사망 직후인 1910년 방사선 회의에서 피에르와 마리 퀴리 부부의 업적을 기려 명명되었다. 이 명칭이 피에르 단독, 마리 단독, 혹은 부부 공동의 영예를 위한 것인지에 대한 약간의 논쟁이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부부 공동의 기여를 인정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 퀴리움 (원자 번호 96): 그의 성을 따서 명명된 화학 원소이다.
- 피에르 마리 퀴리 대학교 (파리 제6대학교): 1968년 파리 대학교의 이학 및 의학부가 분할될 때 설립된 대학으로, 과학 및 기술 분야의 연구와 인재 양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 퀴리 연구소와 퀴리 박물관 (파리): 퀴리 부부의 업적을 기리는 연구 및 교육 기관이다.
- 그의 초상화는 아내 마리와 함께 마지막 프랑스 프랑 500프랑 지폐에 새겨져 있었다.
- 피에르 에 마리 퀴리 역 (파리 메트로 7호선): 그의 이름이 붙여진 파리 메트로역이다.
피에르 퀴리의 연구는 자기학, 압전 효과, 방사능 분야의 기초를 확립하고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방사능 연구는 현대 핵물리학과 핵의학의 발판을 마련했으며, 핵에너지의 잠재력을 처음으로 인류에게 보여주었다. 그의 발견은 인류의 과학 기술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가 정립한 원리들은 오늘날에도 다양한 과학 현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