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Overview
프톨레마이오스 15세 카이사르(Πτολεμαῖος Καῖσαρ프톨레마이오스 카이사르고대 그리스어 (1453년 이전)), 흔히 별칭인 카이사리온(Καισαρίων카이사리온고대 그리스어 (1453년 이전), "작은 카이사르"라는 뜻)으로 불리는 그는 기원전 47년에 태어나 기원전 30년 8월 말에 사망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이다. 그는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7세와 함께 기원전 44년 9월 2일부터 그녀가 사망한 기원전 30년 8월 12일까지 공동 통치했으며, 이후 잠시 단독 통치자로 있었으나 결국 옥타비아누스의 명령으로 처형당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유일한 친아들로 알려진 카이사리온의 존재는 로마 공화정 말기의 격렬한 권력 투쟁에서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가졌다. 그는 악티움 해전 이후 옥타비아누스에게 중대한 위협이 되었고, 그의 죽음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종말과 이집트의 로마 편입을 확정 지었다.
2. Early Life
카이사리온의 개인적인 배경과 초기 생애, 그리고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7세 및 율리우스 카이사르와의 관계는 그의 짧은 생애와 로마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2.1. Birth and Parentage
카이사리온은 기원전 47년 중반에서 후반(일설에는 6월 23일) 이집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7세는 그에게 신성한 의미를 담은 왕실 이름인 테오스 필로파토르 필로메토르(Θεὸς Φιλοπάτωρ Φιλομήτωρ현대 그리스어 (1453년 이후), '아버지를 사랑하고 어머니를 사랑하는 신'이라는 뜻)를 부여하며, 그가 로마 공화정의 독재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들이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카이사르의 외모와 태도를 물려받았다고 전해지지만, 카이사르는 공식적으로 그를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카이사리온의 혈통에 대한 논란은 로마의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는 카이사리온이 이집트의 왕좌에 부적합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보다는, 그가 로마법상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후계자가 아니라는 것을 부정하기 위한 의도였다. 실제로 카이사르의 지지자 중 한 명인 가이우스 오피우스는 카이사르가 카이사리온의 아버지가 될 수 없음을 증명하려는 내용의 소책자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카이사리온에게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도록 허락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 문제는 나중에 카이사르의 양아들인 옥타비아누스가 클레오파트라와 대립하면서 더욱 논란이 되었다.
2.2. Childhood and Early Co-rule
카이사리온은 기원전 46년부터 기원전 44년까지 약 2년간의 유년기를 로마에서 보냈다. 이 기간 동안 그와 그의 어머니 클레오파트라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빌라였던 호르티 카이사리스에서 카이사르의 손님으로 머물렀다. 클레오파트라는 아들이 언젠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집트뿐만 아니라 로마 공화정의 수장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가 암살당하자,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리온은 이집트로 돌아왔다. 같은 해 9월 2일, 클레오파트라는 당시 세 살이던 카이사리온을 자신의 공동 통치자로 공식 선포하며 함께 파라오가 되었다. 비록 카이사리온은 이름뿐인 파라오였고 실질적인 권력은 클레오파트라가 쥐고 있었지만, 클레오파트라는 아들과의 관계를 이집트의 여신 이시스와 그녀의 신성한 아들 호루스의 관계에 비유하며 그의 신성성을 강조했다.


3. Reign and Political Significance
카이사리온이 파라오로서 통치했던 기간은 짧았지만, 그는 로마 공화정 말기의 격동적인 지정학적 상황에서 중요한 상징적 역할을 수행했다.
3.1. Royal Proclamations and Titles
기원전 44년부터 기원전 36년 안티오키아의 증여 이전까지 카이사리온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그로부터 2년 뒤인 기원전 34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알렉산드리아 증여에서 카이사리온과 클레오파트라 사이에서 태어난 자신의 세 자녀(쌍둥이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와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 그리고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에게 동방의 영토와 칭호를 추가로 부여했다.
이때 카이사리온은 '신 중의 신'이자 '신들의 아들', 그리고 '왕 중의 왕'으로 선포되었다. 이러한 거창한 칭호는 로마의 동맹왕 관계 관리에서 전례가 없는 것이었으며, 로마 인민의 '위대함'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3.2. Position in Roman Power Struggles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알렉산드리아 증여에서 카이사리온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진정한 아들이자 후계자'로 선언했다. 이 선언은 카이사르의 조카이자 양아들로서 권력을 주장하던 옥타비아누스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되었다. 이러한 선포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간의 관계에 치명적인 균열을 초래했으며,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인들의 '증여'에 대한 반감을 이용하여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전쟁 지지를 얻는 데 활용했다.
4. Death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7세 연합군이 패배한 후,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리온이 "어머니 없이 홀로 통치"할 준비를 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아마도 안토니우스와 함께 망명을 계획했을 수 있는데, 안토니우스는 레피두스처럼 은퇴할 수 있기를 바랐을 것이다.
카이사리온은 기원전 30년 옥타비아누스가 이집트를 침공하여 그를 찾기 시작했을 때 다시 역사 기록에 등장한다. 클레오파트라는 당시 17세였던 카이사리온을 안전을 위해 홍해 항구인 베레니케로 보냈는데, 이는 아마도 인도로 탈출하려는 계획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플루타르코스는 카이사리온이 인도로 보내졌다고 기록하면서도, 로돈(또는 테오도루스)과 같은 그의 교사들이 그를 이집트 왕국을 맡으라는 옥타비아누스의 거짓 약속으로 유인하여 다시 돌아오게 했다고 전한다.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0년 8월 1일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했다. 이 날짜는 이집트가 로마 공화정에 공식적으로 병합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무렵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전통적으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일시적으로 카이사리온이 그의 어머니를 계승하여 (비록 더 작고 약해진 왕국이 되었겠지만) 이집트를 통치하도록 허용하는 것을 고려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동료 아리우스 디디무스의 조언에 따라 알렉산드리아에서 카이사리온을 처형하라고 명령했다고 전해진다. 아리우스 디디무스는 "너무 많은 카이사르는 좋지 않다"(οὐκ ἀγαθὸν πολυκαισαρίη우크 아가톤 폴뤼카이사리ē고대 그리스어 (1453년 이전))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구절을 비틀어 말했는데, 이는 기원전 30년 8월 말, 아마도 8월 29일에 처형이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카이사리온의 죽음에 대한 남아 있는 정보는 많지 않다.
옥타비아누스는 이후 이집트에 대한 절대적인 통제권을 장악했다. 이집트의 전통적인 연대기 체계에 따르면 기원전 30년은 새로운 통치자의 통치 원년으로 간주되었다. 지속성을 위해 지역 주민들은 옥타비아누스와 그 이후의 모든 로마 황제를 파라오로 인정했지만, 그 어떤 황제도 이 칭호를 공식적으로 사용하거나 인정하지는 않았다.
5. Depictions
카이사리온의 현존하는 묘사는 극히 드물다. 1997년 알렉산드리아 항구에서 발견된 부분적인 조각상은 그를 묘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덴데라 신전의 하토르 신전 부조에 성인 파라오의 모습으로 어머니와 함께 두 번 묘사되어 있다. 또한 프타 신의 고위 사제 석회암 석비에도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리온의 카르투슈가 새겨져 있다.

폼페이에서 발견된 기원전 1세기 중반의 로마 벽화는 비너스가 큐피드를 안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는 클레오파트라 7세와 그녀의 아들 카이사리온을 묘사한 것으로 가장 유력하게 추정된다.

에드푸의 에드푸 신전에 있는 두 개의 매 신 호루스 조각상 중 하나에는 그 뒤에 더 작게 묘사된 카이사리온이 서 있다. 그의 유아기 모습은 클레오파트라의 일부 청동 주화에 나타나 있다.

기원전 47년 키프로스에서 발행된 한 동전에는 유아 카이사리온과 함께 있는 클레오파트라 7세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으며, 이 동전은 현재 영국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6. Egyptian Royal Names
카이사리온은 그리스 이름과 별칭 외에도 이집트어로 된 완전한 왕실 이름 세트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파라오로서의 그의 공식적인 지위와 신성성을 강조한다.
- Iwapanetjer entynehem - "구원하는 신의 상속자"
- Setepenptah - "프타에게 선택된 자"
- Irmaatenre - "라의 통치를 수행하는 자" 또는 "정의의 태양"
- Sekhemankhamun - "아문의 살아있는 이미지"
7. Ancestry
카이사리온의 가계도는 그의 혈통 관계를 명확히 보여주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로마 공화정 귀족 가문과의 연결을 나타낸다. 그의 복잡한 혈통은 당시 정치적 중요성을 더했다.
세대 | 이름 | 관계 |
---|---|---|
1 | 카이사리온 | |
2 | 율리우스 카이사르 | 1의 아버지 |
클레오파트라 7세 | 1의 어머니 | |
3 |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니어) |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버지 |
아우렐리아 코타 |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어머니 | |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 | 클레오파트라 7세의 아버지 | |
클레오파트라 5세 | 클레오파트라 7세의 어머니 | |
4 |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주니어) |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니어)의 아버지 |
마르키아 |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니어)의 어머니 | |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 아우렐리아 코타의 아버지 | |
루틸리아 | 아우렐리아 코타의 어머니 | |
프톨레마이오스 9세 라티로스 |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의 아버지 | |
클레오파트라 4세 |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의 어머니 | |
프톨레마이오스 10세 알렉산드로스 1세 | 클레오파트라 5세의 아버지 | |
베레니케 3세 | 클레오파트라 5세의 어머니 | |
5 |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I) |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주니어)의 아버지 |
퀸투스 마르키우스 렉스 | 마르키아의 아버지 | |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엘더) |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의 아버지 | |
프톨레마이오스 8세 퓌스콘 | 프톨레마이오스 9세 라티로스, 클레오파트라 4세, 프톨레마이오스 10세 알렉산드로스 1세의 아버지 | |
클레오파트라 3세 | 프톨레마이오스 9세 라티로스, 클레오파트라 4세, 프톨레마이오스 10세 알렉산드로스 1세의 어머니 |
8. Legacy
카이사리온의 짧은 생애는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파라오로서, 독립적인 헬레니즘 이집트가 로마 제국의 속주로 편입되는 상징적인 전환점을 대표한다. 그는 로마 공화정 말기의 격렬한 정치적 암투 속에서 하나의 도구로 이용되었으며, 그의 존재는 이집트의 고대 주권과 로마의 새로운 지배력 사이의 마지막이자 취약한 연결 고리였다.
옥타비아누스가 주도한 그의 처형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유일한 상속자로서 옥타비아누스의 주장을 공고히 하고, 그의 정통성에 대한 잠재적인 위협을 제거하는 결정적인 조치였다. 이는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로서 로마 제국을 확립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따라서 카이사리온의 비극적인 운명은 헬레니즘 왕국에서 로마로의 극적인 권력 이동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