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프톨레마이오스 13세 테오스 필로파테르(Πτολεμαῖος Θεός Φιλοπάτωρ프톨레마이오스 테오스 필로파토르고대 그리스어 (1453년 이전), 기원전 62년경 ~ 기원전 47년 1월 13일)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중 한 명으로, 기원전 51년부터 기원전 47년까지 이집트를 통치했다. 그의 별칭인 '테오스 필로파테르'는 "아버지를 사랑한 신"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는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뒤를 이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며, 누이이자 아내인 클레오파트라 7세와 공동 통치자로 즉위했다. 그러나 섭정 포티누스의 영향 아래 클레오파트라 7세와 권력 다툼을 벌이며 이집트 내전을 촉발시켰다. 이 내전은 로마 공화정의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사이의 내전과 얽히면서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폼페이우스를 암살하여 카이사르의 환심을 사려 했으나 오히려 카이사르의 분노를 샀고, 결국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과의 나일강 전투에서 패배하여 죽음을 맞이했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기원전 62년경에 태어났다. 그는 이집트의 파라오였던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우레테스의 아들이었다.
2.1. 출생과 가족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아버지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였다. 그에게는 여러 형제자매가 있었는데, 이들 중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그의 누이이자 공동 통치자였던 클레오파트라 7세이다. 또한, 누이인 베레니케 4세와 아르시노에 4세, 그리고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가 있었다. 그는 기원전 51년 봄, 11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파라오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3. 통치 및 권력 투쟁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섭정들에게 있었으며, 누이 클레오파트라 7세와의 갈등은 이집트 내부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3.1. 왕위 계승과 공동 통치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기원전 51년 봄,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뒤를 이어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파라오로 즉위했다. 그의 아버지는 유언을 통해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그의 누이인 클레오파트라 7세와 결혼하여 공동 통치하도록 명시했다. 이에 따라 두 사람은 공동 통치자로 이집트를 다스리기 시작했다. 기원전 50년 10월에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상위 통치자로 승격되었으나, 실제로는 환관 포티누스가 그의 섭정 역할을 수행하며 막후에서 권력을 행사했다.
3.2. 섭정과 권력 다툼
기원전 48년 봄,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섭정 포티누스는 클레오파트라 7세가 여왕으로서의 지위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에 반발하여 그녀를 폐위시키려 시도했다. 당시 주조된 동전에는 클레오파트라의 얼굴이 새겨졌고, 공식 문서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이름이 누락되는 등 클레오파트라의 독단적인 권력 강화가 두드러졌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포티누스를 막후 실세로 삼아 자신이 단독 통치자가 되기를 원했다.
이러한 시도 끝에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포티누스는 클레오파트라를 로마 시리아로 망명하도록 강요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는 시리아에서 곧바로 자신만의 군대를 조직하여 이집트로 돌아왔고, 이로 인해 이집트 내부에서 내전이 발발했다.
3.3. 알렉산드리아 내전
클레오파트라 7세가 군대를 이끌고 돌아오면서 이집트에서는 본격적인 내전이 시작되었다.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는데,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클레오파트라 7세의 또 다른 누이인 아르시노에 4세까지 기원전 48년부터 47년까지 왕위를 주장하며 내전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이집트의 권력 다툼은 한층 더 격화되었다.
4. 로마의 개입과 영향
이집트의 내전은 로마 공화정의 내부 상황과 밀접하게 얽히면서 국제적인 문제로 비화되었다. 로마의 주요 인사들이 이집트의 권력 다툼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4.1. 폼페이우스의 망명과 죽음
당시 로마 내전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패배한 로마 공화정의 장군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추격을 피해 이집트로 망명해 왔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그의 섭정 포티누스는 처음에는 폼페이우스의 망명 요청을 받아들이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환심을 사기 위해 폼페이우스를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기원전 48년 9월 28일 폼페이우스가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하자, 다음 날인 9월 29일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부하들인 아킬라스와 루키우스 셉티미우스는 폼페이우스를 암살했다. 이들은 승리한 카이사르가 이집트에 도착했을 때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한 행동이었다.
4.2.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개입
기원전 48년 10월 4일, 소수의 병력과 함께 폼페이우스를 추격해 온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했다.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측으로부터 사망한 옛 라이벌이자 동맹이었던 폼페이우스의 목을 선물받았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혐오감을 표하며 분노했고, 폼페이우스의 시신을 찾아 로마식으로 성대한 장례를 치러주라고 명령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클레오파트라 7세는 몰래 이집트로 돌아와 카이사르의 환심을 사는 데 성공했으며, 그의 연인이 되었다. 카이사르는 섭정 포티누스를 처형하고, 클레오파트라 7세가 공식적으로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의 결혼 관계를 포기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다시 이집트의 왕좌에 복귀시켰다.
5. 군사적 충돌 및 죽음
로마의 개입으로 이집트 내전은 더욱 격화되었고,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결국 군사적 충돌 끝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5.1. 알렉산드리아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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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 7세를 폐위시키려는 의지를 굽히지 않던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아르시노에 4세와 동맹을 맺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충성하는 군대 파벌을 조직하여 클레오파트라 7세와 카이사르를 따라 이집트에 온 비교적 소규모의 로마군에 맞섰다. 기원전 48년 12월 중순, 이들 교전 파벌 간의 전투는 알렉산드리아 시내에서 벌어졌으며, 이 전투로 인해 도시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 시기 즈음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소실 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5.2. 나일강 전투
기원전 47년, 페르가몬에서 로마의 증원군이 도착하자 전세는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에게 유리하게 기울었다. 이집트 나일강 삼각주 지역에서 벌어진 나일강 전투에서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의 군대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군대를 격파했다. 이 패배로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도시를 떠나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5.3. 죽음
기원전 47년 1월 13일,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나일강을 건너려다가 익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그가 도주하려 했는지, 아니면 협상을 시도하려 했는지는 불분명하다. 한편, 그가 전쟁으로 궁지에 몰려 배에서 떨어졌고, 갑옷의 무게 때문에 떠오르지 못하고 익사했다는 이설도 존재한다.
6. 후계 및 왕조의 지속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죽음 이후, 클레오파트라 7세는 이집트의 유일한 통치자로 남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어린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를 새로운 공동 통치자로 지명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4세는 기원전 47년부터 기원전 44년까지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이집트를 다스렸다. 그러나 결국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클레오파트라 7세와 카이사리온의 죽음과 함께 로마에 흡수되며 막을 내렸다.
7. 문화적 묘사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역사적 인물로서 다양한 문화 예술 작품에서 묘사되었다.
- 오페라: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의 1724년 오페라 줄리오 체사레 인 에지토(Giulio Cesare in Egitto이탈리아어, "이집트의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등장한다.
- 연극: 조지 버나드 쇼의 연극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에서 주요 인물로 그려진다.
- 영화: 1963년 영화 클레오파트라에서 리처드 오설리번이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역을 맡았다.
- TV 드라마: HBO의 TV 시리즈 로마의 에피소드 "카이사리온"에서도 등장한다.
- 비디오 게임: 2017년 역사 비디오 게임 어쌔신 크리드 오리진스에서는 그가 누이를 폐위시키도록 조종한 '고대 결사단'의 나약한 꼭두각시 통치자로 묘사된다. 게임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 아야가 그를 죽이려 화살을 겨누지만, 그의 배가 악어의 공격을 받아 그가 강물에 빠져 익사하면서 아야는 공격을 멈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