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장 프레데리크 바지유(Jean Frédéric Bazille장 프레데리크 바지유프랑스어, 1841년 12월 6일 ~ 1870년 11월 28일)는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이다. 남프랑스의 몽펠리에에서 부유한 개신교 와인 상인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예술에 대한 관심을 보였으나, 가족의 조건에 따라 의학 공부를 병행했다. 1862년 파리로 이주하여 샤를 글레르의 화실에 다니며 클로드 모네,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 알프레드 시슬레 등 미래의 인상주의 화가들과 인연을 맺었다.
바지유는 풍경 속에 인물 군상을 배치하는 야외 사생 기법을 활용한 인물화에 뛰어났으며, 특히 햇살이 가득한 남프랑스의 풍경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그는 자신의 재정적 여유를 활용하여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동료 예술가들에게 작업실 공간과 그림 재료를 제공하는 등 인상주의 운동 초기에 중요한 지지자 역할을 했다. 바지유는 파리 살롱에 꾸준히 작품을 출품하고 때로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살롱 시스템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동료들과 함께 독립적인 전시회를 구상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불과 20대 초반에 여러 걸작을 남긴 그는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자원입대하여 28세의 젊은 나이로 전사했다. 비록 그는 1874년에 시작된 최초의 인상주의 전시회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의 작품과 정신은 인상주의의 탄생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사후에 그의 예술적 공헌은 정당하게 평가받았다.
2. 생애 및 배경
장 프레데리크 바지유는 프랑스 남부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예술적 재능을 키웠지만, 가족의 기대로 인해 의학 공부를 병행하게 되었다.
2.1. 출생과 가족
장 프레데리크 바지유는 1841년 12월 6일, 프랑스 랑그도크루시용 지방 에로주의 몽펠리에에서 부유한 개신교 와인 상인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몽펠리에 근처 카스텔노르레즈에 위치한 와인 생산 농장인 르 도멘 드 메리크를 소유하고 있었다. 바지유는 이러한 환경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2.2. 초기 예술적 관심과 의학 공부
바지유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였다. 특히 그는 외젠 들라크루아의 작품들, 예를 들어 알제의 여인들이나 사자 우리 안의 다니엘 등을 보고 크게 매료되었다. 예술을 향한 그의 열정을 인정한 가족은 그가 그림을 공부하는 것을 허락했지만, 동시에 의학을 공부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이에 따라 바지유는 1859년 의학 공부를 시작했으며, 1862년에는 의학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파리로 이주했다.

3. 예술 경력
바지유는 파리에서 의학 공부와 함께 본격적인 예술 교육을 시작하며, 인상주의 운동의 핵심 인물들과 교류하고 자신만의 예술적 기반을 다졌다.
3.1. 파리에서의 수학과 글레르 화실
1862년 말, 바지유는 파리로 이주하여 샤를 글레르의 화실에 입문했다. 이는 몽펠리에 출신으로 이미 그곳에서 공부하고 있던 카스텔노의 추천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글레르의 화실에서 그는 같은 시기에 입문한 클로드 모네,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 알프레드 시슬레와 만나 깊은 친분을 쌓았다. 1863년 부활절 기간 동안 바지유는 모네와 함께 퐁텐블로 숲 근처의 샤이앙비에르에서 야외 사생을 하며 긴밀한 우정을 이어갔다. 그는 부모님께 보낸 편지에서 모네를 "화가 지망생 중 가장 친한 친구"라고 칭하며 모네의 유익한 조언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같은 시기, 그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페테르 파울 루벤스와 틴토레토의 작품들을 모사하며 고전 회화 기법을 연구했다.


이 무렵 바지유는 사촌 르조네의 집에 모이던 예술가들 사이에서 폴 세잔을 알게 되었고, 세잔을 통해 아카데미 쉬스에서 공부하던 카미유 피사로와 아르망 기요맹과도 친분을 맺었다. 바지유는 세잔을 르누아르에게 소개하는 등, 글레르 화실과 아카데미 쉬스 그룹을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863년 여름을 몽펠리에에서 보낸 후 파리로 돌아왔을 때, 그는 글레르의 건강 악화로 화실 폐쇄가 논의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1864년 5월에는 모네와 함께 노르망디의 루앙, 옹플뢰르, 생타드레스에 머물며 작품 활동을 했다. 옹플뢰르에서 모네가 존경하던 선배 풍경 화가 외젠 부댕과 요한 용킨트를 만났다. 바지유는 부모님께 보낸 편지에서 옹플뢰르의 아름다운 풍경에 대한 감탄과 함께 의학 공부에 대한 싫증을 표현하며 3~4년 후에는 그림으로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고 싶다는 바람을 피력했다. 같은 해 여름, 그는 몽펠리에 교외의 한 마을에서 사촌 테레즈 데 우르를 모델로 《분홍 드레스》를 제작했다. 1864년 가을 의학 시험에 낙방한 뒤 몽펠리에로 돌아오자, 마침내 그의 부모는 그가 그림 공부에 전념하는 것을 허락했다.
3.2. 인상주의 화가들과의 교류
바지유는 클로드 모네,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 알프레드 시슬레, 에두아르 마네 등 인상주의 주요 화가들과 깊은 우정을 나누며 공동의 예술적 목표를 추구했다. 바지유는 동료 화가들 중 가장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기에,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나누어 그들을 도왔다. 그는 자신의 작업실 공간과 그림 재료를 제공하며 경제적으로 어려운 동료들을 지원했고, 이는 인상주의 운동 초기에 중요한 버팀목이 되었다. 일례로, 그는 1868년 1월 클로드 모네의 작품 《정원의 여인들》을 할부로 구매하여 모네의 경제적 어려움을 덜어주었다. 또한 모네의 장남 장의 대부가 되는 등 개인적인 유대감도 깊었다.

3.3. 예술적 영향과 기법
바지유는 외젠 들라크루아의 영향을 받아 풍부한 색채와 감각적인 표현에 관심을 가졌다. 또한 그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페테르 파울 루벤스와 틴토레토의 작품을 모사하며 고전 거장들의 구성력과 인물 표현 기법을 연구했다.
그의 주요 기법은 야외에서 직접 풍경을 관찰하며 그리는 야외 사생이었다. 바지유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추구했던 빛과 색의 순간적인 변화를 포착하려 노력했으며, 특히 인물화에서 이러한 야외 사생 기법을 활용하여 인물을 햇살 가득한 풍경 속에 자연스럽게 배치하는 시도를 했다。 그의 대표작인 《가족의 재회》에서 이러한 기법적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3.4. 작업실 생활과 예술계
바지유는 파리에서 여러 작업실을 옮겨 다니며 다양한 예술가들과 교류하고 인상주의 운동의 토대를 다졌다.
푸르스탕베르 거리 작업실 (1864년 말 ~ 1866년)
1864년 말, 바지유는 푸르스탕베르 거리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클로드 모네를 초대하여 함께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 겨울, 모네와 바지유는 바지유의 친척 르조네의 집에 자주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앙리 팡탱라투르, 샤를 보들레르, 쥘 바르베 도르빌리, 나다르, 레옹 강베타, 빅토르 마세, 에드몽 메트르 등 당대 저명한 예술가 및 지식인들과 교류했다. 특히 에드몽 메트르와는 리하르트 바그너에 대한 공통의 관심사로 인해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1865년 봄, 모네는 샤이앙비에르에서 대작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제작하기 시작하며 바지유에게 모델이 되어달라고 요청했다. 같은 해 여름, 샤이앙비에르에 도착한 바지유는 사고로 부상당해 거동이 불편한 모네를 돌보며 의학 지식을 활용해 그의 통증을 덜어주었다. 이 모습을 바지유는 직접 그림으로 남기기도 했다.
비스콘티 거리 작업실 (1866년 7월 ~ 1868년 1월)
1866년 7월, 바지유는 비스콘티 거리로 작업실을 옮겨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와 공동으로 사용했다. 알프레드 시슬레와 클로드 모네 또한 이곳을 자주 방문했다. 1867년, 바지유와 시슬레는 같은 왜가리 정물을 서로 다른 각도에서 그렸고, 르누아르는 작업 중인 바지유의 모습을 초상화로 남겼다. 바지유 또한 르누아르의 초상화를 그렸다.

라 콩다민느 거리 작업실 (1868년 1월 ~ 1870년 4월)
1868년 1월, 바지유는 르누아르와 함께 바티뇰 지구의 라 페 거리(1869년 12월 라 콩다민느 거리로 개칭)로 작업실을 옮겼다. 비스콘티 거리 작업실이 비좁아 더 넓은 공간을 찾은 것이었으며, 바지유는 아버지께 추가 임대료에 대해 보고하기도 했다. 라 콩다민느 거리 작업실은 에두아르 마네가 자주 찾던 카페 게르부아와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했다. 후에 인상주의 화가들은 카페 게르부아에 모여 "바티뇰파"라 불리게 된다. 라 콩다민느 거리 작업실에는 모네, 르누아르, 마네 외에도 에밀 졸라, 카미유 피사로, 폴 세잔, 귀스타브 쿠르베 등 다양한 예술가와 문인들이 방문했다.
1870년, 바지유는 이 작업실의 모습을 《라 콩다민느 거리의 작업실》이라는 작품에 담았다. 그림 중앙에서 팔레트를 들고 있는 인물이 바지유인데, 이는 바지유가 아버지께 쓴 편지에 따르면 마네가 그려 넣은 것이라고 한다. 모자를 쓰고 이젤을 바라보는 인물은 마네이며, 오른쪽에 피아노를 치는 인물은 바지유의 친한 친구 에드몽 메트르이다. 그림 왼쪽에 있는 세 인물은 정확히 특정하기 어렵지만, 아마도 모네, 르누아르, 그리고 자카리 아스트뤽으로 추정된다. 작품 속에는 바지유 자신과 친구들의 살롱 낙선작들이 그려져 있어 당시 아카데미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담고 있다.


1870년 4월, 바지유는 익숙했던 라 콩다민느 거리 작업실을 떠나 앙리 팡탱라투르가 작업실을 운영하던 보자르 거리로 옮겼다. 두 사람은 일본 미술에 대한 매력에 공감하며, 바지유는 《몸단장》에 일본 기모노를 입은 세 번째 여성을 그려 넣었고, 팡탱라투르는 일본의 영향을 받은 도예가 로랑 부비에의 항아리를 그림에 담았다. 바지유는 같은 해 《모란꽃과 흑인 여성》에도 부비에의 항아리를 그려 넣어 팡탱라투르와의 우정을 드러냈다. 이 작품은 바지유가 출정 전 파리에서 그린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3.5. 살롱 출품과 독립 전시 구상
바지유는 공식적인 파리 살롱에 꾸준히 작품을 출품하며 인정을 받으려 노력했지만, 살롱 시스템의 한계와 보수성에 불만을 품고 독립적인 전시를 구상했다.
1866년 살롱
바지유는 1866년 살롱에 《피아노 치는 소녀》와 《물고기가 있는 정물》 두 점을 출품했다. 그는 《피아노 치는 소녀》를 현대적 주제로 의도적으로 선택했지만, "현대적인 것을 선택했기 때문에 아마도 낙선할 것"이라고 부모님께 편지를 쓰며 낙선을 두려워했다. 결국 《피아노 치는 소녀》는 낙선하고, 그 자신이 크게 만족하지 않았던 정물화만 입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해의 살롱은 심사위원에 장바티스트 카미유 코로나 샤를 프랑수아 도비니와 같은 비교적 진보적인 화가들이 포함되어 바지유를 포함한 많은 젊은 화가들이 입선할 수 있었다. 그는 낙선 시 낙선전에 참여하겠다고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1867년 살롱
1867년 살롱은 전년과 달리 심사가 매우 엄격해져 바지유와 그의 동료 화가들 대부분이 낙선했다. 5월 초 바지유는 부모님께 보낸 편지에서 "올해 살롱은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평범한 것"이라고 평가하며, 1867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 전시된 밀레와 코로의 작품들, 그리고 곧 열릴 쿠르베와 마네의 개인전을 언급했다. 그는 이 편지에서 젊은 예술가들이 각자 2500 FRF를 모았지만 충분하지 않아 결국 독립적인 전시회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히며, 살롱으로부터 독립된 그룹 전시회를 구상했던 흔적을 보여주었다.
1868년 살롱
1868년 살롱에는 《가족의 재회》와 《꽃병》 두 작품이 입선했다. 《가족의 재회》는 몽펠리에 근교 메리크에 있는 그의 집 테라스에 모인 가족들을 모델로 한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남프랑스의 강렬한 햇빛 아래 인물과 배경의 강한 대비를 뛰어난 구도와 빛의 감수성으로 표현하여 인상주의 세계를 예고하는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바지유는 이 작품을 여러 번 손질하고 살롱 출품 후에도 개 모티프를 정물로 수정하는 등 변화를 시도했다.

1869년 살롱
1869년 살롱에는 《마을 풍경》이 입선했으나, 《그물 든 어부》는 낙선했다. 바지유는 부모님께 "전시회에 응모한 작품이 낙선했지만, 올해 살롱에서 훌륭했던 작품들과 운명을 함께 했으니 실망할 것이 없다"고 썼다. 그는 이 편지에서 "우리가 원하는 만큼의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작업실을 매년 빌리기로 결정했다. 우리의 동료들이 내년에 일을 시작할 것이고, 나로서는 기대되는 일"이라고 언급하며 살롱으로부터 독립하여 화가들 스스로 주최하는 전시회 구상을 계속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마을 풍경》의 입선에 장레옹 제롬이 강하게 반대했지만, 몽펠리에 출신의 관전파 미술학교 교수인 알렉상드르 카바넬이 찬성하여 바지유를 놀라게 했다.

1870년 살롱
1870년 살롱에는 두 점의 응모작 중 《여름 풍경》이 입선하고 《몸단장》은 낙선했다. 《몸단장》은 바지유가 급히 세 번째 여성을 그려 넣어 3월 살롱 제출 기한에 맞춘 작품이었다. 《여름 풍경》은 《그물 든 어부》에서 시도했던 현대 남성 누드화를 보다 설득력 있게 제시한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살롱에 전시된 이 작품을 본 비평가 자카리 아스트뤽은 "그의 캔버스에는 햇살이 넘친다"고 평했다. 바지유 자신도 작품의 평가에 만족하며 부모님께 "제 그림은 아주 좋은 자리에 걸려 있습니다. 모두가 제 작품을 보고 이야기합니다. 적어도 저는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았고, 앞으로 어떤 작품을 전시하든 주목받을 것입니다"라고 썼다.


4. 주요 작품
장 프레데리크 바지유는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인상주의 운동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여러 작품들을 남겼다. 그의 작품들은 특히 인물과 풍경을 결합한 야외 사생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 분홍 드레스 (1864): 147 cm x 110 cm, 오르세 미술관, 파리. 사촌 테레즈 데 우르의 뒷모습과 햇살 가득한 풍경을 결합한 초상화로, 바지유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 푸르스탕베르 거리의 작업실 (1865): 80 cm x 65 cm, 파브르 미술관, 몽펠리에.
- 샤이앙비에르의 풍경 (1865): 81 cm x 100.3 cm, 시카고 미술관. 바르비종파에 가까운 정적인 자연을 묘사한 작품이다.
- 자화상 (1865-1866): 109 cm x 72 cm, 시카고 미술관.
- 물고기가 있는 정물 (1866): 63.5 cm x 81.9 cm, 디트로이트 미술관.
- 비스콘티 거리의 작업실 (1867): 64 cm x 49 cm, 버지니아 미술관.
- 아오사기 (1867): 98 cm x 78 cm, 파브르 미술관, 몽펠리에.
- 르누아르의 초상 (1867): 61.2 cm x 50 cm, 오르세 미술관, 파리.
- 에그 모르트 (1867): 46 cm x 55 cm, 파브르 미술관, 몽펠리에.
- 가족의 재회 (1867-1868): 152 cm x 230 cm, 오르세 미술관, 파리. 야외에서 인물 군상을 탁월한 구도와 빛의 대비로 표현한 대표작이다.
- 그물 든 어부 (1868): 134 cm x 83 cm, 폰다시옹 라우 푸르 르 티어 몽드(Fondation Rau pour le tiers-monde), 취리히. 현대적인 남성 누드화를 시도했으나 다소 부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인다.
- 마을 풍경 (1868): 130 cm x 89 cm, 파브르 미술관, 몽펠리에.
- 에드몽 메트르의 초상 (1869): 83 cm x 64.2 cm, 내셔널 갤러리, 워싱턴 D.C..
- 여름 풍경 (1869): 158 cm x 158 cm, 하버드 대학교 포그 미술관, 캠브리지. 현대 남성 누드화를 설득력 있게 제시한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 몸단장 (1870): 132 cm x 127 cm, 파브르 미술관, 몽펠리에.
- 라 콩다민느 거리의 작업실 (1870): 98 cm x 128.5 cm, 오르세 미술관, 파리. 자신의 작업실과 동료 예술가들을 그린 그림으로, 아카데미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담고 있다.
- 모란꽃과 흑인 여성 (1870): 60.3 cm x 75.2 cm, 파브르 미술관, 몽펠리에. 바지유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출정하기 전 파리에서 그린 마지막 작품이다.
- 레 강변의 풍경 (1870): 137.8 cm x 202.5 cm, 미니애폴리스 미술관, 미니애폴리스.

5. 프로이센-프랑스 전쟁과 죽음
1870년 5월, 프레데리크 바지유는 조카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몽펠리에의 메리크 별장으로 돌아와 작품 활동을 했다. 그러나 두 달 뒤인 1870년 7월 19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하면서 그의 삶은 급변했다. 전쟁의 소식을 들은 바지유는 같은 해 8월 10일, 주아브 보병 연대에 자원입대했다.
1870년 11월 28일, 바지유는 오를레앙 근처에서 벌어진 보늘라롤랑드 전투에 참전했다. 전투 중 그의 지휘관이 부상을 당하자, 그는 지휘를 맡아 독일군 진지에 대한 공격을 이끌었다. 그러나 이 공격은 실패했고, 바지유는 두 발의 총상을 입고 전사했다. 그의 나이 28세였다.
전사 소식을 들은 그의 아버지는 위험을 무릅쓰고 곧바로 전장으로 향했고, 아들의 시신을 고향으로 수습해 왔다. 프레데리크 바지유는 일주일여 뒤인 12월 10일, 몽펠리에의 개신교 묘지에 안장되었다.
6. 사후 유산과 평가
바지유는 젊은 나이에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작품과 인상주의 운동에 대한 열정은 사후에 큰 영향을 미치며 정당한 평가를 받았다.
6.1. 사후 전시와 인정
바지유가 생전에 구상했던 살롱으로부터 독립된 그룹 전시회에 대한 염원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종전 후인 1874년부터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드가 등 바티뇰파의 동료들에 의해 현실화되었다. 이들은 "인상주의"로 불리며 초기에 혹독한 비평에 시달렸으나, 점차 대중의 인정을 받아 20세기에는 미술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1876년 제2회 인상주의 전시회에는 르누아르가 바지유와의 우정을 기리며 마네가 소유하고 있던 르누아르가 그린 바지유의 초상화를 빌려와 출품했다. 이 전시회를 찾은 바지유의 아버지는 아들의 초상화를 보고 감회에 젖었다. 바지유의 친한 친구였던 에드몽 메트르는 바지유가 생전에 구입했던 모네의 《정원의 여인들》과 마네가 소유했던 바지유의 초상화를 맞교환하도록 주선하여, 바지유의 아버지가 아들의 초상화를 소장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제2회 인상주의 전시회에는 바지유의 유작 두 점도 함께 전시되었다.
바지유가 남긴 유화는 약 70점 정도로 많지 않지만, 그의 작품들은 인상주의 탄생의 귀중한 기록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그의 대표작 《가족의 재회》는 야외 인물 군상을 탁월한 구도와 빛의 대비 아래 그려낸 작품으로 그의 뛰어난 재능을 보여준다. 그의 짧은 생애와 인상주의 운동에 대한 기여는 사후에 재조명되었고, 그는 인상주의의 중요한 선구자이자 지지자로 미술사에 자리매김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