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폴 글리 워너(Paul Glee Waner영어, 1903년 4월 16일 ~ 1965년 8월 29일)는 미국의 전설적인 프로 야구 선수로, 1926년부터 1945년까지 메이저 리그에서 피츠버그 파이리츠, 브루클린 다저스, 보스턴 브레이브스, 뉴욕 양키스 등 네 팀에서 20년간 활약한 우익수이다. 그는 피츠버그 파이리츠에서 15시즌 동안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으며, 은퇴 당시 피츠버그 역사상 최고의 외야수로 평가받았다. 워너는 1927년 내셔널 리그 최우수 선수상을 수상했고, 세 차례의 타격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또한 1942년 6월 19일, 통산 3,000안타를 달성하며 역사상 일곱 번째로 이 위업을 이룬 선수가 되었다. 그는 통산 타율 .333을 기록했으며, 1952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동생 로이드 워너와 함께 '포이즌 브라더스'로 불리며 메이저 리그 형제 최다 안타 기록(5,611안타)을 보유하고 있다. 피츠버그 파이리츠는 2007년 그의 등번호 11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하며 그의 업적을 기렸다.
2. 어린 시절 및 초기 경력
폴 워너는 오클라호마 준주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았으며, 프로 야구 입문 전에는 투수로 활약했다. 이후 마이너 리그에서 외야수로 전향하여 두각을 나타냈다.
2.1. 유년기 및 교육
워너는 1903년 4월 16일, 오클라호마 준주 해라에서 오라와 에타 워너 부부의 다섯 자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한때 시카고 화이트 스타킹스로부터 계약 제안을 받았으나 이를 거절하고 400 400 acre 규모의 농장에서 일생을 보냈다. 워너의 원래 중간 이름은 '존'이었으나, 6세 때 글리라는 이름의 삼촌이 산탄총을 선물한 후 '글리'로 바뀌었다. 그는 아버지의 농장에서 옥수수 속대를 치면서 타격 자세를 익혔다고 회상했는데, 이를 통해 공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방법을 배웠다고 한다. 워너는 난시가 있었지만 경기 중에는 안경을 착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안경을 쓰면 공이 작고 또렷하게 보였지만, 안경을 쓰지 않으면 공이 자몽 크기만 하게 보여 더 정확하게 공을 맞출 수 있었다고 한다.
워너는 오클라호마주 에이다에 위치한 이스트 센트럴 주립 사범 대학(현 이스트 센트럴 대학교)에서 야구를 했다. 1922년에는 투수로서 23승 4패, 평균자책점 1.70의 기록을 남겼다. 그의 아버지는 워너가 교사가 되기를 바랐지만, 워너는 프로 야구 선수가 되기를 원했고 결국 대학을 중퇴했다.
2.2. 마이너 리그 경력
대학 중퇴 후 워너는 캔자스 미주리의 클래스 A 서부 리그 소속 조플린 팀과 계약했다. 이후 루키 리그에 해당하는 머스코기 팀을 거쳐 1923년 샌프란시스코 실스의 클래스 AA 퍼시픽 코스트 리그로 트레이드되었다. 실스의 감독은 전 파이리츠 선수였던 도츠 밀러였다. 그는 실스에서 1924년 단 한 경기에 투수로 출전한 뒤 외야수로 전향했다. 샌프란시스코 실스에서 3시즌 동안 활약하며 통산 타율 .378을 기록했으며, 1925년 우승 시즌에는 타율 .401을 기록했다.
3. 메이저 리그 경력
폴 워너는 피츠버그 파이리츠에서 전성기를 보냈으며, 이후 여러 팀을 거치며 3,000안타를 달성하는 등 꾸준한 활약을 이어갔다.
3.1. 피츠버그 파이리츠 시절
1925년 10월, 내셔널 리그 소속 피츠버그 파이리츠는 워너와 팀 동료인 할 라인을 샌프란시스코 실스로부터 10.00 만 USD에 영입했다. 1926년 4월 17일 신시내티 레즈를 상대로 메이저 리그 첫 안타를 기록했다. 같은 해 8월 26일 뉴욕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6타수 6안타를 기록했는데, 이는 6개의 다른 방망이를 사용하여 달성한 것이었다. 그는 신인 시즌을 타율 .336으로 마쳤고, 22개의 삼루타로 내셔널 리그 선두를 기록했다. 또한 MVP 투표에서 12위를 차지했으며, 파이리츠는 3위를 기록했다.
1927년 폴 워너와 그의 동생 로이드 워너는 스타 선수로 발돋움했다. 두 형제는 그해 총 460개의 안타를 합작했다. 1927년은 폴 워너에게 최고의 해였다. 그는 개인 최다인 155경기에 출전하여 리그 최다인 237안타(팀 기록), 18삼루타, 타율 .380, 131타점을 기록했다. 그는 1927년 6월 3일부터 19일까지 14경기 연속 장타를 기록하며 메이저 리그 신기록을 세웠는데, 이 기록은 2006년 치퍼 존스에 의해 공동 달성되었다. 워너 형제의 활약에 힘입어 피츠버그는 1927년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다. 그의 유일한 포스트시즌 출전이었던 이 월드 시리즈에서 그는 5타수 15안타 3타점 타율 .333을 기록했지만, 파이리츠는 뉴욕 양키스에게 스윕당했다. 1927년 시즌 활약에 대한 인정으로 내셔널 리그는 그에게 내셔널 리그 최우수 선수상을 수여했다.
1928년 워너는 타율 .370을 기록했고, 리그 최다인 142득점(개인 최고 기록)과 50개의 2루타를 기록했다. 1928년 그의 223안타는 동생 로이드 워너와 함께 팀 역사상 두 번째로 많은 안타 기록이었다. 1929년에는 개인 최다인 15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또한 3년 연속 200안타 이상을 기록했고, 타율 .336, 43개의 2루타, 100타점을 기록하며 2위로 마친 파이리츠의 일원이었다. 1930년 시즌에는 신인 시절 이후 가장 적은 145경기에 출전했지만, 여전히 217안타와 타율 .368, 117득점을 기록했다. 1931년은 스프링 트레이닝 기간 중 부상으로 경기에 빠지면서 워너에게는 아쉬운 한 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50경기에서 180안타 타율 .322를 기록했다. 파이리츠는 폴의 커리어 중 처음으로 75승 79패를 기록하며 5할 미만의 승률로 시즌을 마쳤다.
부진했던 한 해를 보낸 후, 1932년 워너는 타율 .341과 215안타(개인 통산 다섯 번째 200안타 이상 시즌)를 기록하며 부활했다. 그는 154경기 전 경기에 출전했고, 62개의 2루타로 내셔널 리그 단일 시즌 2루타 기록을 세웠다. 5월 12일 경기에서는 4개의 2루타를 기록하며 메이저 리그 단일 경기 2루타 기록과 타이를 이뤘다. 1933년에는 개인 최저 타율인 .309를 기록했는데, 이는 그의 타율이 .320 아래로 떨어진 첫 번째 해였고 191안타를 기록했다. 1933년 시즌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이 첫 번째 MLB 올스타전을 개최한 해였으며, 워너는 예비 외야수로 선정되었다. 파이리츠는 1932년과 1933년 모두 내셔널 리그에서 2위를 차지했다.
워너는 1934년 타율 .362를 기록하며 두 번째 내셔널 리그 타격왕을 차지했고, 217안타(개인 통산 여섯 번째 200안타 이상)와 122득점으로 리그 선두를 기록했다. 그는 MVP 투표에서 2위를 차지했으며 두 번째 MLB 올스타전에 선정되었다. 1935년, 파이 트레이너 감독은 워너에게 독한 술을 끊고 맥주로 바꾸라고 제안했고, 그 결과 워너는 5월 18일까지 타율이 .242에 불과했다. 트레이너와 워너는 5월 19일 자이언츠와의 경기를 앞두고 술집에 갔고, 워너가 맥주를 주문하자 트레이너는 "말도 안 돼. 위스키 한 잔 줘"라고 말했다. 워너는 남은 경기에서 타율 .331을 기록하며 시즌을 타율 .321로 마쳤고, 78타점 176안타를 기록했다. 1935년 그는 세 번째 MLB 올스타전에 선정되었다. 1936년 워너는 타율 .373으로 개인 통산 두 번째로 높은 타율을 기록하며 세 번째 내셔널 리그 타격왕을 차지했고, 94타점(개인 통산 세 번째로 높음), 53개의 2루타(두 번째로 높음), 218안타를 기록했다. 1937년에는 타율 .354와 74타점을 기록하며 마지막으로 200안타 이상을 기록했다. 1937년 시즌은 그가 한 시즌에 200개 이상의 안타를 기록한 여덟 번째 시즌이었는데, 당시 타이 콥만이 그보다 더 많은 200안타 시즌(9회)을 기록하고 있었다. 또한 그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MLB 올스타전 선정이었다.

숙취 상태에서도 잘 치는 것으로 유명했지만, 1938년 구단의 요청으로 음주를 중단하자 타율이 .280으로 떨어졌다. 이는 그가 파이리츠 선수로 뛰면서 타율이 .300 미만으로 떨어진 단 두 번 중 첫 번째였다. 그 해 그는 69타점, 31개의 2루타, 175안타를 기록했다. 케이시 스텡겔은 그의 주루 기술을 칭찬하며 "그는 매우 우아한 선수여야 했다. 왜냐하면 그는 엉덩이에 병을 깨뜨리지 않고 슬라이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1939년 워너는 타율 .328, 45타점, 151안타를 기록하며 다시 반등했다. 이는 그가 100안타 이상을 기록한 마지막 시즌이었다. 그는 1930년대에 통산 3,152안타 중 1,959안타를 기록했으며, 이 10년 동안 5번의 200안타 시즌을 기록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MVP 투표에서 5번 표를 받았고, 1932년 4위, 1934년 2위, 1935년 24위, 1936년 5위, 1937년 8위를 기록했다. 1940년 시즌은 워너의 파이리츠에서의 마지막 시즌이었다. 그는 타율 .290, 32타점, 69안타를 기록했는데, 베이스를 밟다가 오른쪽 무릎 인대가 늘어나 3주 동안 경기에 나서지 못했고 회복 후에도 출전 시간이 줄어들었다. 워너는 1940년 12월 5일 방출되었다. 파이리츠에서 15년간의 커리어 동안 그는 2,154경기에서 2,868안타, 1,177타점, 558개의 2루타, 187개의 3루타, 타율 .340을 기록했다. 파이리츠는 워너가 팀에 있는 동안 3번만 패배 기록을 기록했고, 1926년부터 1940년까지 총 7번 내셔널 리그 상위 3개 팀 중 하나로 시즌을 마쳤다.
3.2. 후기 경력

1941년 1월 31일, 워너는 브루클린 다저스와 계약했고 조 메드윅과 함께 외야를 맡게 되었다. 인상적인 스프링 트레이닝 후 그는 주전 우익수 자리를 제안받았다. 그러나 11경기에서 단 6안타 타율 .171을 기록한 후 다저스에서 방출되었다. 그는 2주 후 보스턴 브레이브스와 계약했고, 그 시즌 106경기에서 타율 .267, 50타점, 88안타를 기록했다. 그는 다음 시즌에도 팀에 머물며 114경기에서 타율 .258, 39타점, 86안타를 기록했다.
워너는 1942년 6월 19일, 옛 파이리츠 팀 동료인 립 슈얼을 상대로 3,000번째 안타를 기록하며 타이 콥, 트리스 스피커, 호너스 와그너, 에디 콜린스, 냅 라조이, 캡 앤슨에 이어 역대 7번째로 3,000안타 클럽에 가입했다. 이 3,000번째 안타 달성에는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6월 17일 신시내티 레즈와의 더블헤더 2차전에서 강한 땅볼이 유격수 에디 조스트의 글러브에 맞아 굴절되며 내야 안타가 되어 3,000안타를 달성한 것으로 기록될 뻔했다. 그러나 워너 자신은 기자석의 공식 기록원에게 크게 손을 가로저으며 "기념할 만한 3,000안타는 완벽한 안타로 기록하고 싶다"는 이유로 기록 정정을 요구했고, 결국 안타는 취소되고 조스트의 실책으로 변경되었다. 이틀 뒤인 6월 19일, 그는 옛 소속팀 파이리츠와의 경기에서 좌익수 방향으로 깔끔한 안타를 날리며 3,000안타를 달성했다.
워너는 1943년 1월 19일 보스턴에서 방출되었다. 이틀 후 다저스가 그를 다시 영입했다. 발 부상으로 한동안 경기에 나서지 못했지만, 그는 82경기에서 타율 .311, 36타점, 70안타를 기록했다. 1944년 시즌은 그의 마지막 풀 시즌이었다. 그는 총 92경기에 출전했는데, 83경기는 다저스에서, 9경기는 양키스에서 뛰었으며 타율 .280, 17타점, 40안타를 기록했다. 1945년에는 양키스에서 단 한 경기에 출전하여 대타로 나와 볼넷을 얻어냈다.
메이저 리그 커리어 이후인 1946년, 그는 마이너 리그 플로리다 인터내셔널 리그 소속 마이애미 선삭스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뛰었으며, 그 해를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4. 은퇴 후 삶
폴 워너는 선수 생활을 마친 후에도 야구계에 대한 애정을 이어갔으며, 다양한 취미 활동과 함께 후배 선수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4.1. 코치 활동 및 개인 활동
은퇴 후 워너는 낚시, 수렵, 골프 등을 즐겼다. 그는 또한 필리스, 카디널스, 브레이브스에서 타격 코치로 파트타임 활동을 했다. 그는 파이리츠의 후배 딕 그로트에게 타격 지도를 했으며, 테드 윌리엄스에게는 '윌리엄스 시프트'에 대처하기 위해 타석에서 멀리 떨어져서 타격하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하지만 프랭크 루소는 "베이브 루스처럼 [워너는] 규율을 싫어했기 때문에 감독으로서는 적절한 인물이 아니었다"고 언급했다. 숙련된 골프 선수였던 워너는 70대 타수를 기록할 수 있었다. 그는 미국 야구 선수 골프 토너먼트를 시작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여가 시간에는 세네카의 글을 읽는 것을 즐겼으며, 한때 하이니 매뉴시와 함께 연기했던 코미디 스킷의 작가이기도 했다.
5. 사망
폴 워너는 1965년 8월 29일, 플로리다주 새러소타에서 폐기종에 폐렴이 합병증으로 작용하여 발생한 호흡 정지로 사망했다. 향년 62세였다.
6. 유산 및 평가
폴 워너는 메이저 리그 역사에 길이 남을 뛰어난 타자이자 외야수였으며, 그의 기록과 일화는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6.1. 주요 업적 및 기록
워너는 20년의 야구 경력 동안 내셔널 리그 타격왕을 세 차례 차지했으며, 통산 3,000개 이상의 안타를 기록했다. 그는 605개의 2루타를 기록했는데, 이는 그가 은퇴할 당시 역대 5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 그는 200안타 이상을 8차례 기록했고, 50개 이상의 2루타를 3시즌 동안 기록했으며, 1927년 내셔널 리그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 그의 통산 타율은 .333으로, 3,000안타 클럽에 속한 선수들 중 에디 콜린스와 함께 역대 5번째로 높다. 그의 191개의 3루타는 역대 10번째로 많다. 워너는 그의 경력 동안 한 번의 6안타 경기, 5번의 5안타 경기, 55번의 4안타 경기를 기록했다. 케이시 스텡겔은 한때 워너가 내셔널 리그 역사상 최고의 우익수라고 평가했다. 프랭크 루소는 "폴은 로베르토 클레멘테가 오기 전까지 피츠버그 외야에서 아마도 가장 강한 어깨를 가진 빠른 외야수였다"고 말했다. 타석에서 워너는 두려움 없는 선수로 명성을 떨쳤다. 그는 "나는 투수들이 나를 이기게 두지 않았다. 움찔하거나 두려움을 보이면 끝장이다"라고 말했다.
다음은 폴 워너의 통산 타격 성적표이다.
연도 | 팀 | 경기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볼넷 | 삼진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1926 | PIT | 144 | 618 | 536 | 101 | 180 | 35 | 22 | 8 | 283 | 79 | 11 | 66 | 19 | .336 | .413 | .528 | .941 |
1927 | PIT | 155 | 709 | 623 | 114 | 237 | 42 | 18 | 9 | 342 | 131 | 5 | 60 | 23 | .380 | .437 | .549 | .986 |
1928 | PIT | 152 | 697 | 602 | 142 | 223 | 50 | 19 | 6 | 329 | 86 | 6 | 77 | 13 | .370 | .446 | .547 | .992 |
1929 | PIT | 151 | 703 | 596 | 131 | 200 | 43 | 15 | 15 | 318 | 100 | 15 | 89 | 15 | .336 | .424 | .534 | .958 |
1930 | PIT | 145 | 665 | 589 | 117 | 217 | 32 | 18 | 8 | 309 | 77 | 18 | 57 | 15 | .368 | .428 | .525 | .952 |
1931 | PIT | 150 | 646 | 559 | 88 | 180 | 35 | 10 | 6 | 253 | 70 | 6 | 73 | 10 | .322 | .404 | .453 | .857 |
1932 | PIT | 154 | 697 | 630 | 107 | 215 | 62 | 10 | 8 | 321 | 82 | 13 | 56 | 9 | .341 | .397 | .510 | .906 |
1933 | PIT | 154 | 694 | 618 | 101 | 191 | 38 | 16 | 7 | 282 | 70 | 3 | 60 | 14 | .309 | .372 | .456 | .828 |
1934 | PIT | 146 | 677 | 599 | 122 | 217 | 32 | 16 | 14 | 323 | 90 | 8 | 68 | 8 | .362 | .429 | .539 | .968 |
1935 | PIT | 139 | 623 | 549 | 98 | 176 | 29 | 12 | 11 | 262 | 78 | 2 | 61 | 10 | .321 | .392 | .477 | .869 |
1936 | PIT | 148 | 666 | 585 | 107 | 218 | 53 | 9 | 5 | 304 | 94 | 7 | 74 | 4 | .373 | .446 | .520 | .965 |
1937 | PIT | 154 | 690 | 619 | 94 | 219 | 30 | 9 | 2 | 273 | 74 | 4 | 63 | 8 | .354 | .413 | .441 | .855 |
1938 | PIT | 148 | 680 | 625 | 77 | 175 | 31 | 6 | 6 | 236 | 69 | 2 | 47 | 7 | .280 | .331 | .378 | .709 |
1939 | PIT | 125 | 506 | 461 | 62 | 151 | 30 | 6 | 3 | 202 | 45 | 0 | 35 | 10 | .328 | .375 | .438 | .813 |
1940 | PIT | 89 | 261 | 238 | 32 | 69 | 16 | 1 | 1 | 90 | 32 | 0 | 23 | 0 | .290 | .352 | .378 | .731 |
1941 | BRO/BSN | 106 | 385 | 329 | 45 | 88 | 10 | 2 | 2 | 108 | 50 | 1 | 55 | 0 | .267 | .372 | .328 | .701 |
1942 | BSN | 114 | 404 | 333 | 43 | 86 | 17 | 1 | 1 | 108 | 39 | 2 | 62 | 8 | .258 | .376 | .324 | .701 |
1943 | BRO | 82 | 267 | 225 | 29 | 70 | 16 | 0 | 1 | 89 | 26 | 0 | 35 | 6 | .311 | .406 | .396 | .802 |
1944 | BRO/NYY | 92 | 173 | 143 | 17 | 40 | 4 | 1 | 0 | 107 | 17 | 1 | 29 | 0 | .280 | .401 | .322 | .723 |
1945 | NYY | 1 | 1 | 0 | 0 | 0 | 0 | 0 | 0 | 0 | 0 | 0 | 1 | 0 | .000 | 1.000 | .000 | .000 |
통산 (19년) | 2549 | 10762 | 9459 | 1627 | 3152 | 605 | 191 | 113 | 4478 | 1309 | 104 | 1091 | 174 | .333 | .404 | .473 | .878 |
6.2. 별명과 일화
폴 워너와 그의 동생 로이드에게 붙여진 별명인 '빅 포이즌'(Big Poison영어)과 '리틀 포이즌'(Little Poison영어)의 유래는 1927년 시즌 폴로 그라운즈에서 열린 한 경기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한 팬이 워너 형제를 향해 "퍼슨(Person)"이라고 외쳤는데, 뉴욕식 억양으로 인해 "포이즌(Poison)"처럼 들린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브루클린의 에베츠 필드에서 한 팬이 "저 워너 형제들! 항상 리틀 포이즌은 3루에 있고 빅 포이즌은 1루에 있네"라고 말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폴은 폴로 그라운즈의 자이언츠 팬이 그렇게 불렀다고 증언하는 등 정확한 진실은 불분명하지만, 뉴욕식 억양이 별명의 기원이라는 점은 공통적으로 알려져 있다.
워너는 "긴장을 풀기 위해" 타석에 들어가기 전 위스키를 마셨다고 한다. 술을 마시면 "공이 농구공처럼 보였다"고 언급했다. 케이시 스텡겔은 워너의 주루 기술을 칭찬하며 "그는 엉덩이 주머니에 술병을 넣고도 깨뜨리지 않고 슬라이딩할 수 있는 매우 우아한 선수였다"고 말했다.
그는 근시였지만 안경을 쓰지 않았다. 맨눈으로 보면 공이 자몽 크기로 보였지만, 안경을 쓰면 작게 보여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또한 "양손의 손가락 관절을 나란히 맞추라"는 그립 방식을 추천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6.3. 명예의 전당 헌액 및 영구결번

워너는 1952년 7월 21일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그는 "정말 오랫동안 바라왔던 일이지만,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며 "사실 이것이 내 인생의 목표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모든 야구 선수의 목표일 것이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1967년 동생 로이드 워너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면서, 그들은 해리 라이트와 조지 라이트 형제에 이어 두 번째로 명예의 전당에 함께 헌액된 형제 조합이 되었다. 폴(3,152안타)과 그의 동생 로이드(2,459안타)는 총 5,611개의 안타를 합작하여 펠리페 알루, 매티 알루, 헤수스 알루 삼형제(5,094안타)와 조 디마지오, 돔 디마지오, 빈스 디마지오 삼형제(4,853안타)를 제치고 형제 최다 안타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1927년부터 1940년까지 대부분의 기간 동안 폴은 포브스 필드의 우익수를, 로이드는 그의 옆 중견수를 맡았다. 1938년 9월 15일, 형제는 뉴욕 자이언츠의 클리프 멜튼을 상대로 백투백 홈런을 쳤다.
1999년, 그는 더 스포팅 뉴스의 '위대한 야구 선수 100인' 목록에서 62위에 올랐으며, MLB 올센추리 팀의 최종 후보로 지명되었다. 워너 가족과 파이리츠의 오랜 팬들이 당시 구단주였던 케빈 맥클래치에게 워너의 등번호를 영구 결번으로 지정해 달라고 반복적으로 요청한 노력은 결국 결실을 맺었다. 파이리츠는 2007년 7월 21일 휴스턴 애스트로스와의 경기 전에 열린 행사에서 워너의 등번호 11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는데, 이는 그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지 정확히 55년째 되는 날이었다. PNC 파크 내부에는 워너의 영구 결번을 기념하는 명판이 설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