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폴 케네스 슈이(Paul Kenneth Shuey, Paul Kenneth Shuey폴 케네스 슈이영어)는 1970년 9월 16일생의 미국인 전직 야구 선수이다. 주로 구원 투수로 활약했으며, 메이저리그 베이스볼(MLB)에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1994년~2002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2002년~2003년), 볼티모어 오리올스(2007년) 소속으로 뛰었다.
슈이는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채플힐 재학 시절 대학 야구 팀인 노스캐롤라이나 타 힐스 야구 팀의 투수로 올아메리칸에 선정되었다. 인디언스는 1992년 MLB 드래프트에서 전체 2순위로 슈이를 지명했다. 신시내티 레즈의 마무리 투수 롭 디블과 비견될 만한 투수로 기대되었으나, 슈이는 마무리 투수보다는 셋업맨으로서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경력 전반에 걸쳐 부상이 잦았고, 이는 그가 마무리 투수로 자리 잡는 것을 방해했다. 건강할 때는 인디언스에서 셋업 투수로서 좋은 활약을 펼쳤다. 2002년에는 플레이오프 진출을 노리던 다저스로 트레이드되어 셋업맨 역할을 수행했다. 1999년에 처음 입었던 고관절 부상으로 인해 2004년에 은퇴할 때까지도 고통받았다. 실험적인 의료 시술을 받은 후 2007년 오리올스에서 잠시 야구계로 복귀했으나, 그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고 배스 낚시 프로 선수로 전향하여 "더블 A" 수준의 토너먼트에 참가했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폴 케네스 슈이는 어린 시절부터 야구에 대한 재능을 보였으며, 가족의 지원 아래 성장했다.
2.1. 어린 시절과 가족
슈이는 오하이오주 리마에서 태어났으나, 열 살 때 가족과 함께 노스캐롤라이나주로 이주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투구하는 법을 가르쳤다. 그는 에버렛 린제이와 함께 아메리칸 리전 및 베이브 루스 리그 야구를 했다. 슈이는 현재 노스캐롤라이나주 웨이크 포레스트에 거주하며, 아내 줄리(Julie)와 세 딸 모건(Morgan, 1997년생), 케이시(Casey, 1998년생), 케이트(Kate, 2006년생)와 함께 살고 있다.
2.2. 학창 시절 및 고교 야구
슈이는 노스캐롤라이나주 롤리에 위치한 밀브룩 고등학교에 다녔다. 밀브룩 고등학교 야구팀에서 그는 선발 투수이자 우익수로 활약했다. 밀브룩 고등학교 재학 중 가너 고등학교를 상대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는 노스캐롤라이나의 리서치 트라이앵글 올-트라이앵글 팀과 올-스테이트 팀에 선정되었다.
3. 대학 경력
슈이는 대학 시절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채플힐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며, 이는 그가 프로 무대에 진출하는 발판이 되었다.
3.1. 대학 시절 활약
슈이는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채플힐에 입학하여 NCAA 디비전 I의 애틀랜틱 코스트 콘퍼런스(ACC) 소속인 노스캐롤라이나 타 힐스 야구 팀에서 대학 야구를 했다. 그는 팀의 마무리 투수로 활약했다. 1990년에는 8승 1패, 8 세이브를 기록하며 프레시맨 올아메리칸과 올-ACC 투수에 선정되었다. 그는 31경기에 출전하여 팀 내 최다 출전 기록을 세웠으며, 타 힐스 팀은 ACC 정규 시즌 및 토너먼트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1991년에는 슬개건 파열 부상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즌 1.70의 평균자책점으로 팀 내 최고 기록을 세웠다. 1992년 시즌에는 69이닝을 던지며 3.13의 평균자책점과 87 탈삼진으로 팀을 이끌었다. 슈이와 채드 홀브룩은 팀의 최우수 선수에게 주어지는 S.H. 배스나이트 상을 공동 수상했다. 2001년까지 슈이의 통산 .818의 승률은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역사상 네 번째로 높은 기록이었다. 그는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에서 세 시즌 동안 모두 레터맨으로 활약했다.
3.2. 대표 경력
슈이는 1991년 여름 미국 야구 국가대표팀 소속으로 범미주 경기 대회에 참가했다. 또한, 1991년에 열린 제20회 일미 대학야구선수권에도 미국 대표팀으로 출전했다.
4. 프로 경력
폴 슈이의 프로 경력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 시작하여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볼티모어 오리올스를 거치며 이어졌다. 잦은 부상에도 불구하고 그는 메이저리그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4.1. MLB 드래프트 및 데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는 1992년 메이저리그 베이스볼 드래프트에서 전체 2순위로 슈이를 지명했다. 인디언스는 슈이가 신시내티 레즈의 롭 디블과 같은 마무리 투수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슈이는 1992년 싱글 A 사우스 애틀랜틱 리그 소속 콜럼버스 레드 스틱스에서 프로 데뷔를 했다.
1993년 시즌을 앞두고 베이스볼 아메리카는 슈이를 야구계 81번째 유망주로 평가했다. 그는 1993년 싱글 A 캐롤라이나 리그 소속 킨스턴 인디언스에서 15경기에 출전하여 1승 0패, 4.84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으며, 그 시즌에 더블 A 이스턴 리그 소속 캔턴-애크런 인디언스로 승격되었다. 1994년 시즌은 킨스턴에서 시작하여 13경기에 출전, 1승 0패, 3.75의 평균자책점, 8세이브를 기록했다.
1993년 인디언스 구원 투수 스티브 올린과 팀 크루스가 보트 사고로 사망하면서, 인디언스는 슈이의 성장에 대한 필요성이 더욱 커졌다. 슈이는 1994년 시즌 중 킨스턴에서 메이저리그로 승격되었는데, 이는 1986년 그렉 스윈델 이후 처음으로 싱글 A에서 곧바로 메이저리그로 승격된 선수였다. 그는 1994년 5월 8일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다. 5월 14일, 슈이는 한 이닝에 네 타자를 삼진으로 잡은 10번째 아메리칸 리그 투수가 되었다. 그는 또한 그 시즌 트리플 A 인터내셔널 리그 소속 샬럿 나이츠에서도 뛰었다. 베이스볼 아메리카는 1995년 시즌을 앞두고 슈이를 야구계 67번째 유망주로 평가했다.
4.2.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시절
슈이는 1994년과 1995년에 인디언스에서 21경기에 출전하여 0승 3패, 5세이브, 7.00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또한 1995년 인터내셔널 리그 소속 버팔로 바이슨스에서 뛰었으며, 햄스트링 부상으로 부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그는 더 많은 경험을 쌓기 위해 그해 겨울 푸에르토리코 야구 리그 소속 세나도레스 데 산 후안에서도 뛰었다.
1996년 시즌을 버팔로에서 시작한 후, 슈이는 인디언스로 승격되어 5승 2패, 2.85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그는 인디언스 소속으로 1996년 아메리칸 리그 디비전 시리즈에 세 경기에 출전했으나, 인디언스는 볼티모어 오리올스에게 패배했다. 1997년 시즌 시작과 함께 슈이는 인디언스와 3년, 최소 320.30 만 USD 보장 계약을 체결했다. 옵션 연도와 성과 보너스를 포함하면 4시즌 동안 최대 1160.30 만 USD의 가치를 가질 수 있는 계약이었다.

호세 메사와 마이크 잭슨이 인디언스의 마무리 투수로 활약하는 동안, 슈이는 중간 계투로 뛰었다. 그는 1997년 시즌에 세 차례나 부상자 명단에 올랐다. 1998년에는 주자가 득점권에 있을 때 상대 타율이 .132(53타수 7안타)로, 모든 아메리칸 리그 구원 투수 중 가장 낮았다. 건강할 때의 그의 강력한 투구는 인디언스에게 슈이가 언젠가 마무리 투수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주었다. 슈이는 인디언스 소속으로 네 차례 포스트시즌에 출전했으며, 특히 1998년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는 6과 3분의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1999년, 클리블랜드의 젖은 마운드에서 투구하던 중 슈이는 오른쪽 고관절 부상을 입었다. 이후 몇 시즌 동안 그는 관절순 파열 및 골극 제거를 포함한 여러 차례 고관절 수술을 받았다. 그는 1999년 시즌을 8승 5패, 3.53의 평균자책점, 6세이브로 마쳤다. 그의 8승은 클리블랜드 구원 투수 중 최다승과 같았다. 2000년, 새로운 인디언스 감독 찰리 마누엘은 슈이를 마무리 투수 역할로 전환하려 한다고 밝혔다. 슈이가 부상자 명단에 올랐을 때 스티브 카세이가 인디언스의 마무리 투수를 맡았다. 2001년에는 팔꿈치 인대 염좌로 또다시 부상자 명단에 올랐다.
4.3.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시절
2002년 트레이드 데드라인이 다가오면서 슈이 영입에 관심을 보이는 팀들이 늘어났다. 2002년 7월 28일, 트레이드 데드라인 직전에 슈이는 테리 멀홀랜드와 마이너리거 리카르도 로드리게스, 프란시스코 크루세타를 상대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로 트레이드되었다. 그 시즌 플레이오프 진출을 노리던 다저스는 슈이를 마무리 투수 에릭 가니에와 짝지어 경기 후반을 책임질 강력한 불펜을 구축하길 희망했다.
다저스 합류 초기에는 트레이드 후 첫 11경기에서 9.35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어려움을 겪었으나, 그는 투구 방식을 바꾸면서 이후 5경기에서 무실점을 기록하는 등 좋은 결과를 얻기 시작했다. 슈이는 2003년 시즌 말까지 다저스에서 뛰었다. 2004년 시즌을 앞둔 스프링 트레이닝 중, 그는 엄지손가락 인대 파열 부상을 입었으며, 재활 중 번트 타구를 처리하다가 고관절을 재차 다쳤다. 슈이는 이 시즌 전체를 부상자 명단에서 보냈다. 다저스는 2004년 시즌 슈이의 연봉 325.00 만 USD에 대해 보험사 하트포드 라이프 인슈어런스 컴퍼니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는데, 보험사가 자신들의 청구를 이행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4.4. 볼티모어 오리올스 시절
2004년 시즌 후 자유 계약 선수가 된 슈이는 2005년 시즌 재기를 시도하기 위해 인디언스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더블 A 애크런 에어로스에서 두 이닝을 던진 후 오른쪽 고관절 통증으로 은퇴했다.
슈이는 2006년 시즌 전체를 쉬면서 고관절 치환술을 받았다. 금속 고관절을 삽입하는 이 시술은 미국에서는 승인되지 않아 몬트리올에서 진행되었다. 2007년 2월 2일, 그는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었으며, 스프링 트레이닝 초대를 받았다. 그는 부상을 입어 팀에 합류하지 못하고 마이너리그로 내려갔다. 더블 A 보위 베이삭스에서 한 경기에 출전한 후, 오리올스의 트리플 A 산하 팀인 노퍽 타이즈에 합류했다. 그의 계약은 2007년 6월 19일에 메이저리그로 승격되었고, 그는 그날 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의 경기에 출전했다.
경력 초반에는 패스트볼 구속이 153 km/h (95 mph)에 달했으나, 금속 고관절로 인해 슈이의 패스트볼은 145 km/h (90 mph)에 도달하기도 어려웠다. 2007년 7월 1일, 그는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과의 경기에서 2002년 이후 첫 세이브를 기록했다. 그는 2007년 시즌을 22경기 출전, 9.82의 평균자책점으로 마쳤다. 그의 마지막에서 두 번째 등판이었던 8월 22일 더블헤더 첫 경기에서 그는 텍사스 레인저스에게 30대 3으로 패한 경기에서 마지막 9실점을 허용했는데, 이는 단일 팀이 기록한 최다 득점 아메리칸 리그 기록이었다. 패스트볼 구속이 증가하면서 슈이는 허리 부상을 입었다. 오리올스는 9월 5일 슈이를 방출했다.
4.5. 부상 및 재활
폴 슈이의 프로 경력은 잦은 부상으로 인해 큰 영향을 받았다. 1991년 대학 시절 슬개건 파열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뛰어난 활약을 이어갔다. 그러나 프로 입단 후에도 부상은 계속되었다. 1995년에는 햄스트링 부상으로 부상자 명단에 올랐다. 가장 심각했던 부상은 1999년 클리블랜드에서 투구하던 중 입은 오른쪽 고관절 부상이었다. 이 부상으로 인해 그는 관절순 파열 및 골극 제거를 포함한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아야 했다.
2001년에는 팔꿈치 인대 염좌로 다시 부상자 명단에 올랐고, 2004년 시즌을 앞둔 스프링 트레이닝 중에는 엄지손가락 인대 파열과 함께 고관절을 재차 다쳐 2004년 시즌 전체를 결장했다. 2005년 복귀를 시도했으나 고관절 통증으로 다시 은퇴했다. 2006년 시즌 전체를 쉬면서 몬트리올에서 금속 고관절을 삽입하는 고관절 치환술을 받았다. 이 시술은 당시 미국에서는 승인되지 않은 실험적인 절차였다. 2007년 오리올스에서 복귀를 시도했을 때, 그의 패스트볼 구속은 현저히 감소했으며, 구속을 되찾으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허리 부상까지 입어 결국 은퇴하게 되었다. 이러한 반복적인 부상과 재활은 슈이가 메이저리그에서 꾸준히 활약하고 마무리 투수로 자리매김하는 것을 방해하는 주요 요인이었다.
5. 선수 경력 이후
야구 선수 생활을 마친 후, 폴 슈이는 새로운 분야에서 도전을 이어갔다.
5.1. 낚시 선수 활동
2008년 기준으로 슈이는 지역 배스 낚시 토너먼트에 참가하며 프로 낚시 선수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배스 앵글러스 스포츠맨 소사이어티의 배스마스터 엘리트 시리즈에 참가하기를 희망했다. 그는 프로 야구 은퇴 후 프로 낚시 선수로서 "더블 A" 수준의 토너먼트에 참가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5.2. 코치 활동
2013년, 슈이는 바턴 불독스 여자 축구팀의 코치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또한 아버지로서 자녀들을 위한 투구 코치로도 시간을 보내고 있다.
6. 개인 생활
폴 슈이는 가족과 함께 안정적인 삶을 꾸려나가고 있으며, 개인적인 어려움을 극복한 경험도 있다.
6.1. 가족 관계
슈이는 아내 줄리(Julie)와 세 딸 모건(Morgan, 1997년생), 케이시(Casey, 1998년생), 케이트(Kate, 2006년생)와 함께 노스캐롤라이나주 웨이크 포레스트에 거주하고 있다.
6.2. 기타 개인사
슈이는 1996년 교통사고로 인해 발생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극복했다. 그는 2011년 킨스턴 프로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2012년에는 밀브룩 고등학교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7. 통산 성적
폴 슈이의 메이저리그 통산 성적은 다음과 같다.
7.1. 연도별 투수 기록
연도 | 팀 | 경기 | 선발 | 완투 | 완봉 | 세이브 | 승 | 패 | 홀드 | 블론 | 승률 | 타자 | 이닝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고의사구 | 몸에 맞는 볼 | 삼진 | 폭투 | 보크 | 실점 | 자책점 | 평균자책점 | WHIP |
---|---|---|---|---|---|---|---|---|---|---|---|---|---|---|---|---|---|---|---|---|---|---|---|---|---|
1994 | CLE | 14 | 0 | 0 | 0 | 0 | 0 | 1 | 5 | 1 | .000 | 62 | 11.2 | 14 | 1 | 12 | 1 | 0 | 16 | 4 | 0 | 11 | 11 | 8.49 | 2.23 |
1995 | CLE | 7 | 0 | 0 | 0 | 0 | 0 | 2 | 0 | 0 | .000 | 28 | 6.1 | 5 | 0 | 5 | 0 | 0 | 5 | 1 | 0 | 4 | 3 | 4.26 | 1.58 |
1996 | CLE | 42 | 0 | 0 | 0 | 0 | 5 | 2 | 4 | 7 | .714 | 225 | 53.2 | 45 | 6 | 26 | 3 | 0 | 44 | 3 | 1 | 19 | 17 | 2.85 | 1.32 |
1997 | CLE | 40 | 0 | 0 | 0 | 0 | 4 | 2 | 2 | 4 | .667 | 212 | 45.0 | 52 | 5 | 28 | 3 | 1 | 46 | 2 | 0 | 31 | 31 | 6.20 | 1.78 |
1998 | CLE | 43 | 0 | 0 | 0 | 0 | 5 | 4 | 2 | 12 | .556 | 222 | 51.0 | 44 | 6 | 25 | 5 | 3 | 58 | 3 | 0 | 19 | 17 | 3.00 | 1.35 |
1999 | CLE | 72 | 0 | 0 | 0 | 0 | 8 | 5 | 6 | 19 | .615 | 351 | 81.2 | 68 | 8 | 40 | 7 | 1 | 103 | 8 | 0 | 37 | 32 | 3.53 | 1.32 |
2000 | CLE | 57 | 0 | 0 | 0 | 0 | 4 | 2 | 0 | 28 | .667 | 270 | 63.2 | 51 | 4 | 30 | 3 | 3 | 69 | 0 | 0 | 25 | 24 | 3.39 | 1.27 |
2001 | CLE | 47 | 0 | 0 | 0 | 0 | 5 | 3 | 2 | 9 | .625 | 244 | 54.1 | 53 | 1 | 26 | 5 | 1 | 70 | 6 | 0 | 25 | 17 | 2.82 | 1.45 |
2002 | CLE | 39 | 0 | 0 | 0 | 0 | 3 | 0 | 0 | 12 | 1.000 | 150 | 37.1 | 31 | 1 | 10 | 1 | 0 | 39 | 2 | 0 | 11 | 10 | 2.41 | 1.10 |
2002 | LAD | 28 | 0 | 0 | 0 | 0 | 5 | 2 | 1 | 7 | .714 | 138 | 30.2 | 25 | 2 | 21 | 1 | 1 | 24 | 1 | 0 | 18 | 15 | 4.40 | 1.50 |
2002 합계 | LAD | 67 | 0 | 0 | 0 | 0 | 8 | 2 | 1 | 19 | .800 | 288 | 68.0 | 56 | 3 | 31 | 2 | 1 | 63 | 3 | 0 | 29 | 25 | 3.31 | 1.28 |
2003 | LAD | 62 | 0 | 0 | 0 | 0 | 6 | 4 | 0 | 10 | .600 | 281 | 69.0 | 50 | 6 | 33 | 3 | 4 | 60 | 3 | 0 | 24 | 23 | 3.00 | 1.20 |
2007 | BAL | 25 | 0 | 0 | 0 | 0 | 0 | 1 | 1 | 6 | .000 | 126 | 25.2 | 33 | 3 | 21 | 0 | 0 | 22 | 3 | 0 | 28 | 28 | 9.82 | 2.10 |
MLB 통산 | 11년 | 476 | 0 | 0 | 0 | 0 | 45 | 28 | 23 | 115 | .616 | 2309 | 530.0 | 471 | 43 | 277 | 32 | 14 | 556 | 36 | 1 | 252 | 228 | 3.87 | 1.41 |
7.2. 등번호
- 53 (1994년 ~ 2002년 중도)
- 44 (2002년 중도 ~ 2003년)
- 23 (2007년)
8. 평가 및 영향
폴 슈이는 1992년 MLB 드래프트에서 전체 2순위로 지명될 만큼 큰 기대를 모았던 유망주였다. 신시내티 레즈의 강속구 마무리 투수 롭 디블과 같은 유형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잦은 부상으로 인해 그의 경력은 순탄치 않았다. 특히 1999년의 고관절 부상은 그의 선수 생활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고, 이로 인해 그는 기대했던 마무리 투수 역할보다는 주로 셋업맨으로 활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이는 건강할 때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핵심 불펜 투수로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1998년에는 주자가 득점권에 있을 때 상대 타율이 .132로 아메리칸 리그 구원 투수 중 가장 낮은 기록을 세웠으며, 인디언스가 네 차례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1998년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는 무실점 투구를 이어가며 팀의 중요한 일원이었다.
슈이의 경력은 부상이 한 선수의 잠재력을 어떻게 제한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그는 메이저리그 복귀를 위해 미국에서 승인되지 않은 실험적인 고관절 치환술까지 감행하는 등 야구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비록 마지막 복귀 시즌은 부진했지만, 그의 투혼과 야구에 대한 열정은 주목할 만하다. 은퇴 후에도 프로 낚시 선수와 여자 축구 코치로 활동하며 새로운 분야에서 성공적으로 적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9. 관련 항목
- 메이저리그 베이스볼의 선수 목록
- 클리블랜드 가디언스의 1라운드 드래프트 지명 선수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