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펠릭스 모리소 르로이(Félix Morisseau-Leroy, Félix Morisseau-Leroy펠릭스 모리소 르로이프랑스어, Feliks Moriso-Lewa펠릭스 모리소 레와아이티 크리올어)는 1912년 3월 13일 아이티에서 태어나 1998년 9월 5일 사망한 저명한 작가이자 언어 운동가이다. 그는 입말로만 존재하던 아이티어를 문학적, 학술적 언어로 격상시키고, 이를 아이티의 공용어로 인정받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선구자이다. 1961년 아이티어가 공식 언어로 지정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학교 교육과 문학 창작에서 아이티어 사용을 확대하기 위해 헌신했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크리올 르네상스'로 불리며 아이티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모리소 르로이는 아이티어와 프랑스어로 다양한 작품을 발표했으며, 특히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를 아이티어로 각색한 《Wa Kreyon》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그는 작가, 교육자, 언론인으로서 활발히 활동하며 아이티 정부의 교육 관련 고위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프랑수아 뒤발리에의 독재 정권 하에서 망명 생활을 경험했으나, 파리에서 네그리튜드 운동의 주요 인사들과 교류하며 국제적인 시야를 넓혔다. 이후 가나와 세네갈 등 탈식민지 아프리카 국가에서 국민 문학 및 연극 발전을 돕는 데 기여했다. 1981년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 정착한 그는 현지 아이티 이주민 공동체의 통합을 이끌고 아이티어의 학술적 연구를 장려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언어를 통한 국가 통합과 문화적 정체성 확립이라는 자신의 신념을 실현하고자 노력했다. 그의 업적은 아이티 문학, 언어, 문화뿐만 아니라 디아스포라 공동체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 생애
펠릭스 모리소 르로이는 1912년 3월 13일 아이티 남동부 주의 그랑 고지에에서 교육 수준이 높고 유복한 물라토 가정에서 태어났다.
2.1. 어린 시절과 교육
그는 어린 시절 그랑 고지에 인근의 자크멜에서 교육을 받으며 프랑스어와 영어를 습득했다. 자크멜에서 그는 미래의 아내 르네를 처음 만났는데, 르네는 그의 승마 기술에 감탄했다고 전해진다. 1940년대에는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을 전공하며 학문적 깊이를 더했다.
2.2. 결혼과 가족
모리소 르로이는 자크멜에서 르네와 결혼했으며, 평생 그녀가 자신의 시에 영감을 주었다고 말하곤 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두 아들과 한 딸이 있었다.
3. 경력 및 활동
모리소 르로이는 작가, 교육자, 언론인으로서 다방면에서 활동하며 특히 아이티어 진흥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3.1. 교육자 및 작가로서의 활동
미국에서 귀국한 후, 그는 수도 포르토프랭스에서 교직에 몸담았다. 이 시기에 그는 거리에서 사용되는 아이티어에 주목하기 시작했으며, 이 언어가 글로 쓰일 때 국가를 통합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아이티에서는 프랑스어가 지식인 계층의 언어로 사용되었고, 아이티어는 대다수 서민의 언어였다. 그는 문학과 연극을 가르치는 한편, 작가이자 언론인으로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또한 아이티 정부에서 공공 교육부 국장과 국가 교육 총국장 등 고위 공직을 역임하며 교육 정책에도 영향을 미쳤다.
3.2. 아이티어 진흥과 크리올 르네상스
비공식적으로 '모리소'라고 불리기도 했던 그는 '크리올 르네상스'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아이티어(크레욜)의 사용을 장려하고, 문학 및 문화 창작에서 그 정당성을 확립하기 위한 운동을 주도했다. 아이티어는 대부분 농촌 지역에 거주하는 대다수 국민의 유일한 언어였기에, 모리소는 이 언어를 통해 국가를 통합할 수 있다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3.2.1. 아이티어의 공용어화와 문학적 지위 향상
모리소 르로이는 아이티어의 공용어 지정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으며, 1961년 마침내 아이티어가 공용어로 인정받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는 학교 교육에서 아이티어의 사용을 확대하고, 창작 문학에서 아이티어가 활용되도록 힘썼다. 1991년 장-베르트랑 아리스티드 대통령의 취임식에 초청받아 연설자로 나섰으며, 이 자리에서 아리스티드 대통령은 아이티어를 공식 언어로 재확인했다.
3.2.2. 주요 창작 활동
모리소 르로이가 가장 주목받은 업적 중 하나는 고대 그리스 비극 작가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아이티어로 번역하고 각색한 《Wa Kreyon》을 발표한 것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등장인물과 배경을 아이티 문화에 맞게 재해석했으며, 예를 들어 부두교 사제를 등장시키는 등 아이티적 요소를 가미했다. 《Wa Kreyon》은 1953년에 출판되었다.
3.3. 망명과 국제적 기여
프랑수아 뒤발리에의 독재 정권이 들어서면서 많은 유망한 작가들이 탄압받거나 침묵을 강요당했고, 자유로운 표현은 위협받았다. 모리소 르로이 또한 그의 작품이 독재자의 비위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무장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공항으로 끌려가 망명을 강요당했다. 그가 과거 뒤발리에와 학창 시절 동창이자 친구였다는 사실이 아마도 그의 목숨을 구했을 것이라고 전해진다.
파리로 망명한 모리소 르로이는 그곳에서 《Wa Kreyon》을 공연할 기회를 얻었다. 파리에 머무는 동안 그는 에메 세제르,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와 같은 네그리튜드 운동의 주요 인사들을 만났다. 이들은 그의 작업을 격려했으며, 모리소 르로이가 이후 아프리카 국가들과 미국에서 교육 활동을 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그는 다음으로 가나로 이주하여 7년 동안 교사로 재직하며 탈식민지 시대의 국가 극장을 이끌었다. 이후 세네갈로 옮겨 1979년까지 가르쳤다. 뒤발리에 정권에 의해 세네갈로 망명한 다른 아이티 작가들로는 장 브리에르, 제라르 셰네, 로저 도르생빌 등이 있었다. 그는 이들 아프리카 국가들의 국민 문학 및 연극 발전에도 기여했다.
3.4. 마이애미에서의 활동
1981년, 모리소 르로이는 대규모 아이티인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던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로 최종적으로 이주하여 남은 생애를 가족과 함께 보냈다. 그는 그곳에서 아이티어와 문학을 가르치며 이주민들과 그 후손들이 자신들의 문화유산 아래 단결하도록 도왔다. 또한 주간지 《Haïti en Marche》에 매주 칼럼을 기고했다. 말년에는 그의 백발 아프로 헤어스타일과 유머 감각이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1991년, 제프리 내프, 마리 마르셀 부토 라신, 마리 엘렌 라라크, 수즈 배런 등이 번역한 그의 작품집 《Haitiad and Oddities》가 마이애미에서 출판되었다. 이 책에는 원래 프랑스어로 쓰인 "Natif Natal"과 아이티어로 쓰인 "Boat People", "Thank You Dessalines", "Water"를 포함한 12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1995년에는 그가 자랑스러워했던 마지막 작품이자 아이티의 서사 소설인 《Les Djons d'Haiti Tom》(용기 있는 아이티 사람들)을 출간했다. 이 작품은 1915년 미국 해병대의 아이티 침공부터 1991년 장-베르트랑 아리스티드에 대한 첫 번째 쿠데타까지, 그의 고향 자크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4. 사상과 이념
펠릭스 모리소 르로이는 언어를 통한 국가 통합과 문화적 정체성 확립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아이티 인구의 대다수가 사용하는 아이티어가 단순한 구어가 아니라, 아이티 국민을 하나로 묶고 그들의 고유한 문화를 표현하는 강력한 수단이라고 믿었다. 프랑스어가 지배적이었던 당시 아이티 사회에서 그는 아이티어의 문학적, 학술적 정당성을 끊임없이 주장하며, 언어가 민족의 자긍심과 독립성을 상징한다는 사상을 전파했다. 그의 이러한 이념은 아이티어의 공용어화와 문학적 지위 향상을 위한 그의 모든 활동의 근간이 되었다.
5. 영향력과 유산
모리소 르로이의 활동과 작품은 아이티 문학, 언어, 문화, 그리고 디아스포라 공동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유산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5.1. 아이티 문학 및 언어에 미친 영향
그의 시집 《Dyakout I》(1953년)를 비롯한 아이티어 작품들은 6개 언어로 번역되어 출판될 정도로 국제적인 인정을 받았다. 그는 아이티어, 아이티 프랑스어, 프랑스어 문학에 대한 비평적 저술도 발표했다. 모리소 르로이는 자신의 작품과 활동을 통해 아이티 문학의 발전을 선도하고 아이티어의 위상을 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아이티어의 문학적 가능성을 입증하며, 아이티 국민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언어로 창작하고 소통하는 데 자부심을 느끼게 했다.
5.2. 국제적 영향
모리소 르로이는 교육과 리더십을 통해 가나와 세네갈의 국민 문학 및 연극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는 탈식민지 시대의 아프리카 국가들이 자신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또한 미국 마이애미에서의 그의 교육 활동은 이주민과 그 후손들이 아이티어로 글을 쓰고 연구하도록 장려했으며, 이는 미국 내에서 아이티어에 대한 학술적 연구가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5.3. 디아스포라 공동체에 대한 역할
마이애미에 정착한 후, 모리소 르로이는 아이티 이주민 공동체를 자신들의 문화유산 아래 단결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언어와 문학을 통해 이주민들이 고국과의 유대감을 유지하고, 새로운 환경에서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도왔다. 그의 노력은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문화적 구심점을 형성하고 사회적으로 통합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6. 수상 및 기념
펠릭스 모리소 르로이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그를 기념하는 활동들이 이루어졌다.
- 여러 작가들이 모리소 르로이에게 희곡과 시집을 헌정했다.
-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의 리틀 아이티 지역에 있는 한 거리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1991년, 그는 장-베르트랑 아리스티드 대통령의 취임식에 초청받아 연설자로 참석했으며, 이 자리에서 아리스티드 대통령은 아이티어를 공식 언어로 재확인했다.
- 캐나다의 학술지 《Étincelles》는 모리소 르로이를 '올해의 작가'로 선정했다.
- 1992년 3월 13일 발행된 뉴욕의 잡지 《Finesse》는 모리소 르로이의 80번째 생일을 기념하는 특별 헌정호를 발행했다.
- 1994년, 프랑스 학술지 《Sapriphage》는 그의 작품에 헌정하는 특별호인 《Haiti's Presence》를 발행했다.
7. 주요 작품
펠릭스 모리소 르로이의 주요 저작 목록은 다음과 같다.
- 《Plénitudes》(1940), 시집
- 《Natif-natal, conte en vers》(1948), 운문 단편 소설
- 《Dyakout》(1951), 시집
- 《Wa Kreyon》(1953), 아이티어로 각색된 희곡 (원작: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 《Dyakout I》(1953), 시집 (6개 언어로 번역됨)
- 《Haitiad and Oddities》(1991), 시집
- 《Les Djons d'Haiti Tom》(1995), 서사 소설
8. 사망
펠릭스 모리소 르로이는 1998년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 8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