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조너선 톰프슨 월턴 재커리의 개인적인 배경에는 그의 출생, 성장 과정, 가족 관계,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 중 군 복무를 포함한 주요 연대기적 사건들이 포함된다.
1.1. 출생 및 유년 시절
톰 재커리는 1896년 5월 7일, 노스캐롤라이나주 그레이엄 근처의 삭사파하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퀘이커교도 농부 가족의 11남매 중 일곱째로, 아버지 앨프레드 L. 재커리와 어머니 메리 엘비라 거스리 재커리 사이에서 태어났다.
1.2. 교육
그는 길포드 칼리지에 진학하여 야구 팀에서 투수와 외야수로 활약했으며, 팀의 주장을 맡았다. 재커리의 가장 주목할 만한 대학 경기는 1918년 4월 16일에 열렸는데, 당시 그는 노스캐롤라이나 주립 칼리지의 에이스이자 미래 메이저리거인 조지 머레이와 맞붙었다. 이 경기는 16이닝 동안 0대0으로 진행되다가 중단되었으며, 머레이는 20개의 삼진을 잡았고 재커리는 14개의 삼진을 잡았다.
1.3. 초기 경력 개발
1918년 여름, 재커리는 미국 적십자사에 합류하여 제1차 세계 대전 중 유럽에서 복무했다. 유럽으로 파견될 준비를 하던 중, 그는 코니 맥 감독이 이끄는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의 입단 테스트를 받았고, 아마추어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했던 가명인 '재커리 월턴'이라는 이름으로 두 경기에 등판하여 모두 승리했다. 유럽에서 1년을 보낸 후, 재커리는 애슬레틱스에 다시 합류하려 했으나 계약 제안을 받지 못했다. 1919년 여름, 재커리는 워싱턴 세너터스의 감독 클라크 그리피스에게 연락하여 입단 테스트를 받았고, 곧바로 메이저 리그 계약을 맺어 마이너 리그에서 뛰지 않고 곧장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다.
2. 주요 활동 및 업적
재커리의 야구 선수로서의 삶에서 가장 높이 평가받는 활동, 성과 및 기여는 워싱턴 세너터스에서의 활약과 1924년 월드 시리즈 우승, 그리고 베이브 루스와의 특별한 인연을 포함한다.
2.1. 워싱턴 세너터스 시절 및 1924년 월드 시리즈
1919년 세너터스에서의 첫 시즌에 그는 17경기에 출전(선발 7경기)하여 1승 5패, 평균자책점 2.92를 기록했다. 1924년, 재커리는 15승 9패, 평균자책점 2.75를 기록하며 202.2이닝을 소화했다. 그는 세너터스가 1924년 월드 시리즈에 진출하는 데 기여했으며, 그곳에서 존 맥그로 감독의 뉴욕 자이언츠와 맞붙었다. 세너터스의 2선발 투수(1선발은 월터 존슨)로서 재커리는 시리즈의 2차전과 6차전에 선발 등판하여 모두 승리했다. 특히 6차전에서의 그의 활약은 7차전으로 이어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세너터스는 월터 존슨의 활약에 힘입어 7차전에서 승리하며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2.2. 이적 및 주요 사건
1926년 2월, 재커리는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로 트레이드되었다. 그는 1927년 시즌 중반까지 브라운스에 머물렀고, 그 후 다시 세너터스로 트레이드되어 돌아왔다. 1927년 9월 30일, 재커리는 베이브 루스에게 당시 기록적인 60번째 홈런을 허용했다. 루스의 타구는 우익수 폴을 간신히 넘어갔고, 재커리는 그것이 파울이라고 의심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적대감은 없었으며, 재커리는 이듬해 뉴욕 양키스가 그를 웨이버로 영입하면서 루스의 팀 동료이자 친구가 되었다.
2.3. 뉴욕 양키스 시절 및 1928년 월드 시리즈
양키스에서 투구하며 재커리는 1928년 월드 시리즈 3차전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꺾고 승리 투수가 되었다. 양키스는 이 시리즈를 4경기 만에 스윕하며 재커리는 개인 통산 두 번째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1929년, 재커리는 12승 0패, 평균자책점 2.48을 기록했으며, 이로 인해 더 스포팅 뉴스는 그를 "아메리칸 리그 올해의 투수"로 선정했다. 비록 현대 기준으로는 충분한 이닝을 던지지 않아 평균자책점왕 자격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현재는 레프티 그로브가 1929년 평균자책점왕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당시 그의 낮은 평균자책점은 높이 평가되었다.
2.4. 후기 경력
1930년 5월, 재커리는 보스턴 브레이브스에 의해 웨이버로 영입되었고, 그 팀에서 세 시즌을 보냈다. 이후 1934년 브루클린 다저스와 계약했으며, 케이시 스텡겔 감독 밑에서 다저스 소속으로 48경기에 출전하여 12승 18패의 기록을 남겼다. 그는 필라델피아 필리스에서 잠시 뛴 후 1936년 은퇴했다.
2.5. 통산 기록
톰 재커리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19시즌 동안 활약하며 다음과 같은 통산 기록을 남겼다.
- 출장 경기 수: 533경기
- 투구 이닝: 3126.1이닝
- 승리: 186승
- 패배: 191패
- 완투: 185완투
- 완봉: 24완봉
- 평균자책점: 3.73
3. 투구 스타일 및 타격 능력
재커리는 구속보다는 정확성과 속임수에 의존하는 제구력 투수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주로 직구, 커브볼, 너클볼을 던졌으며, 다양한 다른 오프스피드 피치를 구사했다. 그는 종종 투구 속도를 조절하고 상대 타자들이 스윙을 유도하기 위해 낮은 구속으로 공을 던지는 경향이 있었다. 또한, 그는 마운드 위에서의 침착함으로 유명했으며, 위기 상황에서도 거의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매우 뛰어난 타격 투수이기도 했는데, 통산 타율 0.226 (1122타수 254안타)를 기록했으며, 79득점, 6홈런, 112타점, 62볼넷을 기록했다. 1926년에는 개인 최고인 14타점을 기록했고, 1928년에는 개인 최고 타율 0.306 (72타수 22안타)를 기록했다.
4. 은퇴 후의 삶
은퇴 후 재커리는 노스캐롤라이나주로 돌아와 담배 농사를 시작했다. 그는 1948년 6월 13일 양키 스타디움에서 베이브 루스의 등번호 3번이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는 행사에 참석했다.
5. 사망
톰 재커리는 1969년 1월 24일, 72세의 나이로 뇌졸중을 여러 차례 겪은 후 사망했다. 그는 1931년 결혼한 아내 에타와 두 자녀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6. 평가 및 유산
톰 재커리는 1929년 더 스포팅 뉴스로부터 "아메리칸 리그 올해의 투수"로 선정되는 등 야구계에서 인정받았다. 그의 야구 역사에서의 위치는 특히 1927년 베이브 루스의 60번째 홈런을 허용한 투수라는 상징적인 사건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이 사건은 그를 야구 역사에 영원히 각인시켰지만, 두 선수 사이에는 적대감 없이 오히려 팀 동료이자 친구로 발전한 관계는 그의 인품을 보여주는 일화로 평가된다. 그는 뛰어난 제구력과 침착함으로 알려진 투수이자, 타격에서도 좋은 능력을 보여준 다재다능한 선수로 기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