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토머스 패트릭 오마리는 1960년 12월 25일 미국 뉴저지주 오렌지에서 태어나 펜실베이니아주 몬투어빌에서 성장한 전 메이저 리그 및 일본 프로 야구 선수이자 감독, 코치이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시카고 화이트삭스, 볼티모어 오리올스, 텍사스 레인저스, 몬트리올 엑스포스, 뉴욕 메츠 등 여러 MLB 팀에서 뛰었으며, 특히 일본 센트럴 리그의 한신 타이거스와 야쿠르트 스왈로스에서 6년간 매우 성공적인 선수 생활을 보냈다. 은퇴 후에는 애틀랜틱 리그 오브 프로페셔널 베이스볼의 뉴어크 베어스 감독을 역임하기도 했다. 일본 프로 야구에서는 타율왕, 골든 글러브, 센트럴 리그 MVP, 일본 시리즈 MVP 등 주요 타이틀을 획득하며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토머스 패트릭 오마리는 1960년 12월 25일 미국 뉴저지주 오렌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펜실베이니아주 몬투어빌에서 성장했으며, 아일랜드계 미국인 혈통을 가지고 있다.
3. 프로 야구 경력
토머스 오마리는 미국 메이저 리그와 일본 프로 야구에서 선수 생활을 하며 뛰어난 타격 능력을 선보였다. 특히 일본 프로 야구에서는 외국인 선수로서 여러 기록을 세우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3.1.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MLB) 경력
토머스 오마리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 의해 드래프트된 후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으며, 여러 구단을 거치며 선수 경력을 이어갔다.
3.1.1. 드래프트 및 데뷔
오마리는 1979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 지명되었고, 1982년 5월 8일 자이언츠 소속으로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다.
3.1.2. 다수 구단에서의 활동
메이저 리그 데뷔 후, 오마리는 1983년 135경기에 출전하며 주전급으로 활약했으나, 이후 9년간 메이저 리그와 마이너 리그를 오가며 정착하지 못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시작으로 시카고 화이트삭스, 볼티모어 오리올스, 텍사스 레인저스, 몬트리올 엑스포스(현 워싱턴 내셔널스), 뉴욕 메츠 등 총 6개 팀에서 뛰었다. 1985년 5월 23일에는 루이스 로사도와의 트레이드로 오리올스에 합류하기도 했다.
3.1.3. MLB에서의 성적 및 기간
오마리는 메이저 리그에서 총 9년간 활약했으며, 통산 466경기에 출전하여 1213타수 310안타, 타율 0.256, 13홈런, 131타점을 기록했다. 그의 메이저 리그 통산 성적은 다음과 같다.
연도 | 팀 | 경기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도루실패 | 희생번트 | 희생플라이 | 볼넷 | 고의사구 | 사구 | 삼진 | 병살타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1982 | SF | 92 | 327 | 291 | 26 | 80 | 12 | 4 | 2 | 106 | 27 | 0 | 3 | 1 | 1 | 33 | 9 | 1 | 39 | 11 | .275 | .350 | .364 | .714 |
1983 | 135 | 473 | 410 | 40 | 106 | 16 | 1 | 5 | 139 | 45 | 2 | 4 | 4 | 3 | 52 | 4 | 4 | 47 | 12 | .259 | .345 | .339 | .684 | |
1984 | 13 | 27 | 25 | 2 | 3 | 0 | 0 | 0 | 3 | 0 | 0 | 0 | 0 | 0 | 2 | 0 | 0 | 2 | 0 | .120 | .185 | .120 | .305 | |
CHW | 12 | 16 | 16 | 0 | 2 | 0 | 0 | 0 | 2 | 3 | 0 | 0 | 0 | 0 | 0 | 0 | 0 | 5 | 1 | .125 | .125 | .125 | .250 | |
'84 합계 | 25 | 43 | 41 | 2 | 5 | 0 | 0 | 0 | 5 | 3 | 0 | 0 | 0 | 0 | 2 | 0 | 0 | 7 | 1 | .122 | .163 | .122 | .285 | |
1985 | BAL | 8 | 14 | 14 | 1 | 1 | 0 | 0 | 1 | 4 | 2 | 0 | 0 | 0 | 0 | 0 | 0 | 0 | 2 | 1 | .071 | .071 | .286 | .357 |
1986 | 56 | 200 | 181 | 19 | 46 | 9 | 0 | 1 | 58 | 18 | 0 | 1 | 1 | 1 | 17 | 1 | 0 | 21 | 4 | .254 | .317 | .320 | .637 | |
1987 | TEX | 45 | 134 | 117 | 10 | 32 | 8 | 0 | 1 | 43 | 12 | 0 | 0 | 0 | 2 | 15 | 1 | 0 | 9 | 7 | .274 | .351 | .368 | .718 |
1988 | MON | 14 | 31 | 27 | 3 | 7 | 0 | 0 | 0 | 7 | 2 | 0 | 0 | 0 | 1 | 3 | 1 | 0 | 4 | 0 | .259 | .323 | .259 | .582 |
1989 | NYM | 9 | 11 | 11 | 2 | 6 | 2 | 0 | 0 | 8 | 8 | 0 | 0 | 0 | 0 | 0 | 0 | 0 | 2 | 0 | .545 | .545 | .727 | 1.273 |
1990 | 82 | 133 | 121 | 14 | 27 | 7 | 0 | 3 | 43 | 14 | 0 | 0 | 0 | 1 | 11 | 1 | 0 | 20 | 1 | .223 | .286 | .355 | .641 | |
MLB 통산 (9년) | 466 | 1366 | 1213 | 117 | 310 | 54 | 5 | 13 | 413 | 131 | 2 | 8 | 6 | 9 | 133 | 17 | 5 | 151 | 37 | .256 | .329 | .340 | .670 |
3.2. 일본 프로 야구 (NPB) 경력
오마리는 1991년부터 1996년까지 6년간 일본 프로 야구에서 활약하며 뛰어난 성적을 기록했다. 특히 한신 타이거스와 야쿠르트 스왈로스에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
3.2.1. 한신 타이거스 시절
오마리는 1991년 한신 타이거스에 입단하여 팀의 주전 3루수로 자리매김했다.
3.2.2.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절
오마리는 1995년 야쿠르트 스왈로스로 이적하여 선수 경력 중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3.3. 선수로서의 특징


토머스 오마리는 매우 뛰어난 선구안과 투수의 투구 패턴을 읽는 능력을 가진 선수였다. 외국인 선수 최초로 6년 연속 타율 3할을 달성하는 등 타격 면에서는 안정적으로 좋은 성적을 유지했다. 그러나 수비 중 번트 시프트를 취하지 않는 등 태만한 자세를 보이기도 했다. 그는 나가시마 시게오를 동경하여 작은 헬멧을 얕게 쓰고 스윙 시 헬멧이 날아가도록 했다. 또한, 경기 중 껌을 씹으며 오픈 스탠스로 타석에 서는 습관이 있었다.
4. 은퇴 후 활동
선수 은퇴 후 오마리는 감독, 코치, 스카우트 등 다양한 역할로 야구계에 계속 몸담았다.
4.1. 감독 경력
오마리는 1998년부터 2001년까지 미국 독립 리그의 뉴어크 베어스 초대 감독을 역임했다. 감독 첫 해인 1998년에는 선수로도 2경기에 출전했다. 2001년에는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여 첫 경기에서 내슈아 프라이드를 2승 1패로 꺾었으나, 결승에서 서머셋 패트리어츠에 2승 3패로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그의 감독 성적은 다음과 같다.
; 미국 독립 리그
연도 | 팀 | 전·후기 | 경기 | 승리 | 패전 | 무승부 | 승률 | 순위 |
---|---|---|---|---|---|---|---|---|
1998 | 뉴어크 베어스 | 전기 | 50 | 18 | 32 | 0 | .360 | 5위 |
후기 | 50 | 17 | 33 | 0 | .340 | 6위 | ||
1999 | 전기 | 59 | 24 | 35 | 0 | .406 | 5위 | |
후기 | 60 | 31 | 29 | 0 | .516 | 3위 | ||
2000 | 전기 | 70 | 38 | 32 | 0 | .542 | 3위 | |
후기 | 70 | 36 | 34 | 0 | .514 | 4위 | ||
2001 | 전기 | 63 | 38 | 25 | 0 | .603 | 1위 | |
후기 | 63 | 37 | 26 | 0 | .587 | 2위 |
4.2. 코치 및 스카우트 활동
2001년, 오마리는 한신 스프링 캠프에서 야쿠르트 시절 감독이었던 노무라 가쓰야를 예방했다. 이때 외국인 선수들에게 조언하는 능력이 높이 평가되어 이듬해 한신 코치로 부임할 가능성이 높았으나, 노무라 감독의 퇴단으로 무산되었다. 하지만 당시 구두 약속 때문에 베어스 감독직을 사임했던 그는, 이듬해인 2002년 한신 스프링 캠프의 임시 타격 코치로 복귀했다. 캠프 중 그의 열정적인 지도는 호시노 센이치 감독에게도 높이 평가되어, 그대로 특명 코치로 시즌 내내 팀에 동행했다. 경기 중에는 스코어러로 등록되어 벤치에 앉았으며, 유니폼 대신 저지를 착용했다. 2002년부터 2003년까지 특명 코치로 활동하며 조지 아리아스, 트레이 무어, 제프 윌리엄스, 제로이드 리건 등 외국인 선수들의 멘토 역할을 하며 2003년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오카다 아키노부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코치직에서 물러났다.
2004년에는 한신 타이거스의 주미 스카우트로 취임했다. 같은 해 10월, 라이브도어 베이스볼의 감독직 제안을 수락했으나, 해당 구단의 일본 프로 야구 조직 가입이 무산되면서 감독직 부임도 백지화되었다. 이후에도 한신의 주미 스카우트로 활동했지만, 그가 영입에 관여했던 외국인 선수들인 루 포드와 케빈 멘치가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면서 2009년 11월 한신과의 계약이 해지되었다.
2013년 10월에는 한신 1군 타격 코치 보좌로 9년 만에 현장으로 복귀했다. 다만, 2015년까지는 코치 정원 문제로 유니폼을 착용하지 않고 트레이너로서 저지를 입고 벤치에 앉았다. 2016년 10월 27일, 해당 시즌을 끝으로 코치 계약이 종료됨을 통보받았다.
2018년과 2019년에는 미국 고등학교 소프트볼 팀에서 코치로 활동하기도 했다.
4.3. 기타 활동
한신 스카우트 해임 후에는 프로 야구 협상 대리인 아른 텔렘의 사무실에 소속되어 일본인 선수들의 메이저 리그 진출을 돕는 가교 역할을 했다.
5. 수상 및 영예
토머스 오마리는 선수 경력 동안 다양한 수상과 기록을 남겼다.
5.1. MLB 수상 경력
오마리는 1989년 인터내셔널 리그 MVP를 수상했다.
5.2. NPB 수상 경력
오마리는 일본 프로 야구에서 다음과 같은 주요 수상 경력을 가지고 있다.
- 수위타자: 1회 (1993년)
- 최고 출루율: 4회 (1992년 - 1995년) - 외국인 선수 최다 기록
- 최다 승리 타점: 2회 (1995년, 1996년) - 특별상
- 최우수 선수: 1회 (1995년)
- 베스트 나인: 1회 (1995년)
- 골든 글러브상: 1회 (1992년)
- 올스타전 MVP: 1회 (1993년 2차전)
- 일본 시리즈 MVP: 1회 (1995년)
- 월간 MVP: 3회 (1994년 5월, 1995년 4월, 1995년 8월)
- 우수 JCB MEP상: 1회 (1995년)
5.3. 주요 기록 및 이정표
오마리의 일본 프로 야구 주요 기록은 다음과 같다.
- NPB 첫 기록:
- 첫 출장: 1991년 4월 6일,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열린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와의 1차전, 3번 1루수로 선발 출장.
- 첫 안타·첫 홈런·첫 타점: 위와 동일 경기, 4회 초 나카야마 히로아키로부터 우월 선제 솔로 홈런.
- NPB 이정표 기록:
- 100홈런: 1995년 8월 12일, 나고야 구장에서 열린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17차전, 7회 초 후루이케 다쿠이치로부터 솔로 홈런 (역대 183번째).
- NPB 기타 기록:
- 4년 연속 최고 출루율 (1992년 - 1995년) - 역대 2번째 (현행 계산식 적용 1985년 이후).
- 6년 연속 타율 3할 (1991년 - 1996년) - 외국인 선수 최초.
- 올스타전 출장: 3회 (1993년, 1994년, 1996년).
6. 평가 및 영향력
토머스 오마리는 일본 프로 야구에서 뛰어난 선수 생활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특유의 친근한 이미지로 일본 대중문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6.1. 일본에서의 문화적 영향
오마리는 선수 은퇴 후에도 일본에서 다양한 방송 활동과 광고 출연을 통해 대중적 인기를 유지했다.
- 라디오 프로그램**: 1993년과 1994년 마이니치 방송 라디오의 'MBS 타이거스 라이브'에서 CM 전 징글 음성을 담당했다.
- 텔레비전 프로그램**:
- 후지 TV의 'LOVE LOVE 아이시테루': 1997년 10월 18일 선수 은퇴 후 출연하여 한신 타이거스의 구단가인 '롯코 오로시'를 불렀다. 당시 요시다 타쿠로는 이 방송을 보고 "인생에서 가장 음악을 그만두고 싶었던 순간이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 장면은 2022년 7월 21일 동 프로그램의 최종회 스페셜에서도 방영되었다.
- TV 아사히의 '비트 다케시의 스포츠 대장': 2018년 5월 6일 출연하여 야구 대결 '레전드 9' 중 한 명으로 등장했다.
- 광고 출연**: 한신 전기철도 광고에 출연했다. 한신 특명 코치 및 주미 스카우트 시절 (2003년 - 2009년) TV 광고에 출연하여 한신 고시엔 구장에 주차장이 없음을 알리고 한신 전철 이용을 권장하는 내용이었다. 그는 일본어 (간사이 사투리 억양)로 "고시엔 구장에는 주차장이 없습니다" (コウシエンキュウジョウニハ、チュウシャジョウハ、アリマヘーン일본어), "한신 전철이 최고야!" (ハンシンデンシャガ、イチバンヤー일본어!)라고 말하는 모습으로 인기를 끌었다. 2007년과 2008년에는 당시 한신 투수 라이언 보걸슨의 부인 니콜 보걸슨과 함께 출연하기도 했다 (니콜이 영어로 말하면 오마리가 일본어로 번역하는 형식). 주미 스카우트 계약 해지로 2009년도 광고를 끝으로 하차했으며, 이듬해부터는 가와토 고조가 광고를 이어받았다.
- 음반**: '오마리의 다이내믹 잉글리시 ~오마리의 롯코 오로시~' (1994년 5월 25일 발매)라는 CD를 발매하여 6만 장을 판매고를 올렸다. 이 CD에 수록된 '롯코 오로시'는 음정 불안으로 일부에서 주목을 받았고, 라디오 프로그램 '코사킨 DE 와오!' (TBS 라디오)에서도 다뤄졌다. 1절은 일본어, 2절은 영어 가사로 되어 있다. 2012년 1월 9일 NHK-FM 방송에서 방영된 '세파 대항! 오늘은 하루 종일 "프로 야구 송" 삼매경'에서도 소개되어 MVS (최우수 송)에 선정되었다. 2014년 9월 10일에는 디지털 리마스터 복각판이 재발매되었다.
- 포스터**: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는 오마리의 포스터를 찾아볼 수 있었다.
6.2. 대중적 인식 및 일화
오마리는 일본에서 팬들과 언론에게 친근하고 때로는 예측 불가능한 인물로 인식되었다.
- 유행어**: 한신 타이거스 시절 "한신 팬은 최고야!" (ハンシンファンワ、イチバンヤァー!일본어)라는 수상 소감으로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야쿠르트 스왈로스 이적 후에는 "야쿠르트 팬 여러분, 응원해 주세요!" (ヤクルトファンノ、オウエン、クダサーイ!일본어)로 바꿔 사용했다.
- PKO 문제**: 1993년 한신 시절, 오마리, 짐 파초렉, 궈리젠푸 세 명의 외국인 선수가 모두 좋은 활약을 펼쳤으나, 외국인 선수 출전 규정으로 인해 2명만 출전할 수 있어 'PKO 문제'로 불리며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오마리 본인이 주전으로 자리 잡으면서 파초렉과 궈리젠푸 간의 경쟁은 'PK 합전'으로 불리기도 했다.
- 타율왕 경쟁 일화**: 1993년 수위타자 경쟁에서 로버트 로즈를 상대로 최종전에서 기습 번트를 성공시켜 타율을 끌어올린 일화는 그의 승부욕과 집념을 보여주는 사례로 회자된다.
- 구단과의 마찰**: 한신 시절 그라운드 안팎에서의 태도 문제와 감독의 지시 거부, 구단주로부터 "말썽꾸러기 아이"라는 비판을 받은 일화는 그의 자유분방한 성격을 보여준다. 또한 한신 프런트에 대한 불신으로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에게 요미우리 자이언츠 이적을 어필했던 일화도 있다.
- 개인 생활**: 한신 시절 고베 자택에 고가의 팩스 기기를 설치하여 미국 부모님과 매일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일화는 그의 가족에 대한 애착을 엿볼 수 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