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토랄프 알베르트 스콜렘은 노르웨이의 크리스티아니아(현재의 오슬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사였으나, 그의 확대 가족 대부분은 농부였다. 스콜렘의 학창 시절과 초기 경력은 학문적 호기심과 다양한 분야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1.1. 어린 시절과 가족
스콜렘은 1887년 5월 23일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사였지만, 그의 대가족은 주로 농업에 종사했다. 그는 크리스티아니아(이후 오슬로로 개명)에서 중등 교육을 받았으며, 1905년에 대학 입학 시험에 합격하였다.
1.2. 교육
1905년, 스콜렘은 크리스티아니아 왕립 프레데릭 대학교(Det Kongelige Frederiks Universitet)에 입학하여 수학을 전공했으며, 물리학, 화학, 동물학, 식물학 등 다양한 과목을 수강하였다. 그는 학문 전반에 걸쳐 넓은 지식을 쌓았다.
1.3. 초기 경력 및 비르켈란과의 협력
1909년, 스콜렘은 물리학자 크리스티안 비르켈란의 조수로 일하기 시작했다. 비르켈란은 자화된 구체에 전자를 충돌시켜 오로라와 유사한 효과를 얻는 연구로 잘 알려져 있었다. 이로 인해 스콜렘의 첫 출판물들은 비르켈란과 공동으로 작성한 물리학 논문들이었다. 1913년, 스콜렘은 국가 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으며, '논리 대수학에 대한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을 완성했다. 같은 해 그는 비르켈란과 함께 수단으로 여행하여 황도광을 관측하기도 했다. 1915년 겨울 학기에는 당시 수리논리학, 메타수학, 추상대수학 분야의 선도적인 연구 중심지였던 괴팅겐 대학교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 분야들은 스콜렘이 결국 탁월한 업적을 남긴 분야들이었다.
1.4. 학문적 경력 및 대학 생활
1916년, 스콜렘은 크리스티아니아 왕립 프레데릭 대학교의 연구원으로 임명되었다. 1918년에는 수학 강사(Docent)가 되었고, 노르웨이 과학 및 문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스콜렘은 처음에는 노르웨이에서 박사 학위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정식 박사 과정에 등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 마음을 바꾸어 1926년에 '특정 대수 방정식 및 부등식의 정수 해에 대한 몇 가지 정리'라는 제목의 논문을 제출하여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의 명목상 지도 교수는 이미 1922년에 사망한 악셀 투에였다.
1930년, 그는 크리스티아니아 왕립 프레데릭 대학교(1939년에 오슬로 대학교로 개명)에서의 강의를 중단하고 베르겐에 있는 크리스티안 미켈센 연구소(Chr. Michelsen Institute)의 연구원으로 재직했다. 이 직위는 스콜렘이 행정 및 교육 업무에서 벗어나 순수하게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이 직위는 그가 베르겐에 거주해야 한다는 조건을 수반했는데, 당시 베르겐에는 대학이 없었고 따라서 연구 도서관도 부족하여 그는 최신 수학 문헌을 접하기 어려웠다. 결국 1938년, 그는 오슬로로 돌아와 오슬로 대학교의 수학 교수로 부임했다. 그곳에서 그는 대수학과 정수론의 대학원 과정을 가르쳤고, 수리논리학은 가끔씩만 강의했다. 스콜렘의 박사 과정 학생이었던 외위스테인 오레는 이후 미국에서 경력을 쌓았다.
스콜렘은 노르웨이 수학 학회의 회장을 역임했으며, 수년간 '노르웨이 수학 저널'(Norsk Matematisk Tidsskrift노르스크 마테마티스크 티츠스크리프트노르웨이어)의 편집자로 활동했다. 그는 또한 '마테마티카 스칸디나비카'(Mathematica Scandinavica마테마티카 스칸디나비카영어)의 창립 편집자이기도 했다.
1.5. 개인적인 삶
1927년, 스콜렘은 에디트 빌헬미네 하스볼(Edith Wilhelmine Hasvold에디트 빌헬미네 하스볼노르웨이어)과 결혼했다. 그의 공개된 개인적인 삶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다.
1.6. 은퇴 이후와 사망
1957년 은퇴한 후에도 스콜렘은 여러 차례 미국을 방문하여 여러 대학에서 강연하고 가르쳤다. 그는 1963년 3월 23일 갑작스럽고 예상치 못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지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2. 수학 및 학문적 업적
스콜렘은 디오판토스 방정식, 군론, 격자 이론, 그리고 특히 집합론과 수리논리학에 관한 약 180개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주로 국제적인 유통이 제한적인 노르웨이 저널에 논문을 발표했기 때문에, 그의 결과들은 때때로 다른 학자들에 의해 재발견되기도 했다.
2.1. 수리논리학 및 집합론
스콜렘은 수리논리학과 집합론 분야에서 선구적인 연구를 수행했다. 1922년, 그는 체르멜로 공리계의 "명확한" 속성이라는 모호한 개념을 1차 논리로 코딩될 수 있는 모든 속성으로 대체함으로써 체르멜로의 공리들을 개선했다. 이 결과로 도출된 공리는 현재 집합론의 표준 공리 중 하나가 되었다. 스콜렘은 또한 뢰벤하임-스콜렘 정리의 한 결과가 현재 스콜렘의 역설로 알려진 것임을 지적했다. 이는 체르멜로의 공리들이 일관적이라면, 그 공리들은 비가산 집합의 존재를 증명함에도 불구하고 가산 영역 내에서 만족 가능해야 한다는 역설적인 상황을 의미한다.
2.2. 모델 이론
스콜렘은 모델 이론의 선구자 중 한 명이다. 1920년, 그는 레오폴트 뢰벤하임이 1915년에 처음 증명한 정리의 증명을 크게 간소화하여 뢰벤하임-스콜렘 정리를 탄생시켰다. 이 정리는 가산 1차 이론이 무한 모델을 가진다면, 가산 모델도 가진다는 것을 명시한다. 그의 1920년 증명은 선택 공리를 사용했지만, 그는 나중에 (1922년과 1928년에) 그 공리 대신 쾨니히의 보조정리를 사용하여 증명을 제시했다. 스콜렘은 뢰벤하임과 마찬가지로 찰스 샌더스 퍼스와 에른스트 슈뢰더의 표기법을 사용하여 수리논리학과 집합론에 대해 저술했는데, 이는 페아노, '수학 원리'(Principia Mathematica프린키피아 마테마티카영어), '수리논리학 원리'(Principles of Mathematical Logic프린시플스 오브 매스매티컬 로직영어)의 표기법과는 대조적으로 변수 결속 한정자로 Π, Σ를 포함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스콜렘은 1934년에 비표준 산술 모델과 집합론의 구성을 개척했다.
2.3. 격자 이론
스콜렘은 격자 이론의 초기 연구자 중 한 명이다. 1912년, 그는 n개의 원소에 의해 생성되는 자유 분배 격자를 처음으로 기술했다. 1919년에는 모든 함축 격자(현재는 스콜렘 격자라고도 불림)가 분배 격자임을 보였고, 부분적인 역으로 모든 유한 분배 격자는 함축 격자임을 보였다. 이러한 결과들이 다른 학자들에 의해 재발견된 후, 스콜렘은 1936년에 독일어로 '특정 '격자' 또는 '래티스'에 관하여'(Über gewisse 'Verbände' oder 'Lattices'위버 게비세 '페어밴데' 오더 '라티체스'독일어)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그의 초기 격자 이론 연구를 정리했다.
2.4. 유한주의와 계산 가능성 이론
스콜렘은 완성된 무한을 불신했으며, 수학에서 유한주의의 창시자 중 한 명이었다. 스콜렘은 1923년 논문에서 원시 재귀 산술을 제시했는데, 이는 계산 가능 함수 이론에 대한 매우 초기 기여로서 소위 무한의 역설을 피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여기서 그는 먼저 원시 재귀를 통해 객체를 정의한 다음, 첫 번째 시스템으로 정의된 객체의 속성을 증명하기 위한 또 다른 시스템을 고안하여 자연수의 산술을 개발했다. 이 두 시스템을 통해 그는 소수를 정의하고 상당한 양의 정수론을 정립할 수 있었다. 만약 첫 번째 시스템을 객체를 정의하기 위한 프로그래밍 언어로, 두 번째 시스템을 객체에 대한 속성을 증명하기 위한 프로그래밍 논리로 간주한다면, 스콜렘은 이론 컴퓨터 과학의 무의식적인 선구자로 볼 수 있다.
1929년, 프레스버거 산술은 곱셈이 없는 페아노 산술이 일관성, 완전성, 결정 가능성을 가진다는 것을 증명했다. 다음 해, 스콜렘은 덧셈이 없는 페아노 산술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증명했으며, 이 시스템은 그의 이름을 따서 스콜렘 산술이라고 명명되었다. 쿠르트 괴델의 유명한 1931년 결과는 페아노 산술 자체(덧셈과 곱셈 모두 포함)가 불완전하며 따라서 결정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2.5. 주요 정리 및 개념
스콜렘의 이름이 붙여지거나 그가 기여한 주요 수학적 정리와 개념들은 다음과 같다.
- 스콜렘 표준형
- 스콜렘 산술
- 스콜렘-뇌터 정리: 단순 대수의 자기 동형 사상을 특징짓는 정리이다. 스콜렘은 1927년에 증명을 발표했지만, 에미 뇌터는 몇 년 후 독립적으로 이를 재발견했다.
- 스콜렘의 역설
- 스콜렘-말러-레흐 정리
- 뢰벤하임-스콜렘 정리
- P진수: 스콜렘은 디오판토스 방정식에 대한 연구에서 P진수 방법을 활용하여 중요한 기여를 했다.
3. 철학 및 사상
스콜렘은 완성된 무한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수학에서 유한주의의 창시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1923년의 '초등 산술의 기초'(The foundations of elementary arithmetic더 파운데이션스 오브 엘리멘터리 애리스메틱영어) 논문에서 원시 재귀 산술을 제시하며, 무한의 역설을 피하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의 이러한 접근 방식은 수학적 객체의 존재론적 지위에 대한 깊은 철학적 성찰을 반영한다. 그는 괴델의 완전성 정리가 1920년대 초에 그가 증명한 결과들의 당연한 귀결임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하는데, 이는 아마도 수학자와 논리학자들이 1928년 힐베르트와 아커만의 '수리논리학 원리' 초판이 명확하게 제시하기 전까지 완전성을 근본적인 메타수학적 문제로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다.
4. 평가 및 영향
스콜렘의 학문적 업적은 그의 독창성과 깊이로 인해 높이 평가받았다.
4.1. 긍정적 평가
왕하오는 스콜렘의 작업을 다음과 같이 칭찬했다.
"스콜렘은 일반적인 문제를 구체적인 예시를 통해 다루는 경향이 있었다. 그는 종종 자신이 발견한 순서대로 증명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는 신선한 비형식성과 함께 어느 정도의 미완성적인 느낌을 주었다. 그의 많은 논문들은 진행 보고서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의 아이디어는 종종 풍부하고 광범위하게 적용될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매우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그는 어떤 학파에도 속하지 않았고, 자신만의 학파를 세우지도 않았으며, 일반적으로 알려진 결과들을 많이 활용하지도 않았다... 그는 매우 혁신적인 인물이었고 그의 대부분의 논문들은 전문 지식이 많지 않은 사람들도 읽고 이해할 수 있다. 그가 오늘날 젊었다면, 논리학이 그에게 매력적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4.2. 비판 및 논란
스콜렘의 연구는 주로 노르웨이 학술지에 발표되어 국제적인 유통이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그의 일부 결과는 다른 학자들에 의해 독립적으로 재발견되기도 했다. 이는 그의 연구 방법론이나 사상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라기보다는, 그의 업적이 더 널리 알려지지 못하게 한 실질적인 한계로 볼 수 있다. 왕하오가 언급한 "어느 정도의 미완성적인 느낌"이나 "진행 보고서처럼 느껴지는" 논문들은 그의 독창성과 자유로운 접근 방식을 반영하지만, 동시에 학문적 엄밀성이나 완성도 측면에서 일부 아쉬움을 남길 수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4.3. 후대에 미친 영향
스콜렘의 수학적 아이디어와 방법론은 후대 수학 및 논리학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의 모델 이론에 대한 선구적인 작업, 집합론의 공리화에 대한 기여, 그리고 유한주의와 계산 가능성 이론에 대한 초기 연구는 현대 수리논리학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그의 원시 재귀 산술은 이론 컴퓨터 과학의 초기 개념적 기반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5. 관련 항목
- 레오폴트 뢰벤하임
- 모델 이론
- 스콜렘 산술
- 스콜렘 표준형
- 스콜렘의 역설
- 스콜렘 문제
- 스콜렘 수열
- 스콜렘-말러-레흐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