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출생 및 성장 배경
태종 무열왕은 603년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신라 제25대 국왕 진지왕의 아들인 김용춘(金龍春김용춘한국어, 또는 김용수(金龍樹김용수한국어))이며, 어머니는 제26대 국왕 진평왕의 딸인 천명공주(天明公主천명공주한국어)이다. 그는 부계와 모계 모두 왕족 혈통을 이어받아 성골 신분이었다. 그러나 할아버지 진지왕이 재위 4년 만에 폐위되면서 그의 가계는 왕위 계승에서 멀어졌고, 이로 인해 김춘추는 진골로 기재되기도 했다.
1.1. 가계와 혈통
태종 무열왕의 조부는 아버지 김용춘 쪽으로는 진지왕이며, 조모는 지도부인 박씨이다. 어머니 천명공주 쪽으로는 외조부가 진평왕이고, 외조모는 마야부인이다. 천명공주의 여동생이자 김춘추의 이모로는 신라 제27대 국왕인 선덕여왕이 있으며, 또 다른 이모로는 선화공주가 있다. 선화공주는 백제의 의자왕의 어머니로 알려져 있어, 의자왕은 김춘추의 외사촌 형제이다. 김춘추의 부계와 모계 모두 왕실 혈통으로, 그의 성골 신분은 왕위 계승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1.2. 교육 및 초기 활동
김춘추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용모와 총명함을 지녀 세상을 다스릴 뜻을 품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재위 기간 동안 국정 전반, 특히 외교 문제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며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 이 시기에 그는 이찬의 관등에 올랐다.
642년 8월, 백제 장군 윤충이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당시 대야성 성주였던 이찬 김품석은 김춘추의 사위였는데, 그의 딸 고타소공주와 함께 죽임을 당했다. 이 소식에 큰 충격을 받은 김춘추는 백제를 멸망시키기로 다짐했다. 그는 원병을 얻기 위해 고구려에 사신으로 갔으나, 보장왕과 실권자 연개소문은 과거 진흥왕 때 신라가 점령한 죽령 이북 땅의 반환을 요구하며 김춘추를 억류했다. 김춘추는 김유신의 무력 시위와 고구려 대신 선도해의 도움으로 "돌아가는 대로 왕에게 아뢰어 땅을 돌려주게 하겠다"는 거짓 편지를 쓰고 풀려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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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7년에는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기도 했는데, 이때 그는 일본에 인질로 잠시 머물렀다는 기록도 있다. 같은 해 신라에서는 상대등 비담의 난이 김유신에 의해 진압되고, 선덕여왕의 사망으로 진덕여왕이 옹립되었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진덕여왕을 보위하며 정권을 장악했다.
이듬해인 648년 12월, 김춘추는 아들 김문왕과 함께 직접 당나라에 입조하여 당 태종의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그는 당의 국자감을 방문하여 강론을 참관하고, 신라의 의복 제도를 중국식으로 바꿀 것을 청했다. 또한 태종과의 사적인 만남에서 백제의 침략으로 신라가 위기에 처했음을 호소하며 원병 파병을 요청했고, 태종의 허락을 받아냈다. 이때 김춘추는 특진(特進)의 벼슬을, 아들 문왕은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의 벼슬을 받았다. 귀국길에는 아들 문왕을 숙위(宿衛)로서 당에 남겨두었으며, 자신은 서해상에서 고구려 순라병에게 나포될 위기에 처했으나 온군해의 희생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649년부터 신라는 관복을 당풍으로 바꾸고, 650년에는 진덕여왕이 당의 왕업을 찬미하는 「오언태평송(五言太平頌)」을 지어 보냈으며, 신라의 고유 연호를 폐지하고 당의 영휘 연호를 사용하는 등 친당 정책을 가속화했다. 651년에는 중국 제도를 본뜬 하정례를 처음으로 조원전에서 치렀고, 품주(稟主)가 집사부로 개편되어 왕정의 기밀 사무를 맡는 등 행정 체계도 개편되었다.
2. 결혼과 가족 관계
김춘추는 김유신의 두 누이동생인 보희와 문희 중 문희와 혼인했다. 《삼국유사》에는 김춘추와 문희의 혼인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김유신의 누이 보희가 서라벌 전체가 소변에 잠기는 꿈을 꾸자, 문희는 비단치마를 주고 그 꿈을 샀다. 며칠 뒤, 김춘추가 김유신의 집 앞에서 축국을 하던 중 김유신이 일부러 김춘추의 옷깃을 밟아 끊었고, 김유신은 자신의 누이동생에게 옷을 수선해 줄 것을 권했다. 보희는 부끄러워 사양했고, 문희가 대신 나서서 옷을 꿰매 주었다. 이 일을 계기로 김춘추와 문희는 가까워졌고, 김춘추는 김유신의 집을 자주 드나들게 되었다.
얼마 후 문희가 임신했으나, 김춘추는 이미 결혼한 몸이라 이를 비밀로 하려 했다. 김유신은 이 사실을 알고 크게 노하며 자신의 누이를 불태워 죽이겠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선덕여왕이 남산에 행차한 날, 김유신은 뜰에 땔나무를 쌓아 불을 질러 연기를 피웠다. 산 위에서 연기를 본 여왕이 연유를 묻자, 옆에 있던 신하들이 문희의 임신과 김유신이 누이를 불태우려 한다는 소문을 전했다. 여왕은 김춘추의 안색이 변한 것을 보고 "네 짓이구나. 당장 가서 구하라"고 명하여 김춘추가 문희와 정식으로 혼인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문희는 김춘추의 첫 부인인 보량(寶良)이 둘째 아이를 낳다가 사망한 뒤에야 공식적인 아내가 되었다. 그녀는 김춘추가 654년 신라의 제29대 국왕으로 즉위한 후 문명왕후가 되었다. 문희의 아들인 문무왕은 훗날 삼국 통일을 완성하게 된다. 김유신은 무열왕 재위 기간 동안 조정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이 되었고, 6년 후에는 상대등에 올랐다. 김유신의 또 다른 누이인 보희 또한 무열왕의 후궁이 되었다.
이 혼인은 왕위 계승에서 배제되었던 진지왕계(김용춘, 김춘추)와 옛 금관가야 왕족 출신인 김유신계(김서현, 김유신) 간의 정치적, 군사적 결합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는 성골 중심의 기존 구 귀족 집단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3. 외교 및 대외 관계
김춘추는 즉위 전부터 신라의 생존과 발전을 위해 활발한 외교 활동을 펼쳤다. 특히 백제의 대야성 함락 이후 백제 멸망을 목표로 삼고, 이를 위해 고구려, 일본, 당나라 등 주변국과의 관계 개선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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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2년 고구려에 원병을 요청하러 갔을 때, 고구려는 신라가 진흥왕 때 점령한 죽령 이북의 옛 고구려 땅 반환을 요구하며 김춘추를 억류했다. 이는 신라에게는 수용하기 어려운 조건이었고, 결국 고구려와의 동맹은 실패로 돌아갔다. 647년에는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으나, 일본은 신라에게 임나에 대한 조공을 폐지하고 인질을 보낼 것을 요구하는 등 신라에게 불리한 입장을 취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춘추는 당나라와의 동맹에 집중했다. 648년 당에 입조하여 당 태종을 만나 백제의 침략으로 인한 신라의 어려움을 호소하며 원병 파병을 간곡히 요청했다. 당 태종은 김춘추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이는 훗날 나당동맹의 초석이 되었다. 김춘추는 당과의 친밀한 관계를 위해 아들 김문왕을 당에 숙위로 남겨두었으며, 신라의 관복을 당풍으로 바꾸고 당의 연호를 사용하는 등 적극적인 친당 정책을 추진했다. 이러한 노력은 당의 신뢰를 얻어 백제 정벌에 필요한 군사적 지원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재위 기간 중에도 외교적 노력은 계속되었다. 655년, 고구려, 백제, 말갈 연합군이 신라의 북쪽 변경 33개 성을 공격하자, 무열왕은 즉시 당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당은 정명진과 소정방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하며 신라를 지원했다. 659년에도 백제가 신라 국경을 침범하자 다시 당에 원병을 요청하는 등, 무열왕은 당과의 군사 동맹을 통해 신라의 안보를 확보하고 삼국 통일의 대업을 추진했다.
4. 재위 기간 및 정책
654년 3월, 진덕여왕이 승하하자 상대등 알천이 왕위 계승을 사양하고 김춘추를 왕으로 추대했다. 김춘추는 국인들의 천거를 받아들여 신라 제29대 국왕으로 즉위했으며, 이로써 성골 중심의 왕위 계승이 끝나고 진골 출신 왕이 왕위에 오르는 신라 중대(中代)의 시작을 알렸다.
즉위 직후 무열왕은 왕권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아버지 김용춘을 문흥왕(文興王)으로, 어머니 천명공주를 문정태후(文貞太后)로 추봉했다. 654년 5월에는 이방부령 양수 등에게 이방부격 60여 조를 제정하게 하여 신라의 율령 체제를 정비하고 당풍의 행정 제도를 도입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무열왕은 왕권 강화를 위해 인사를 단행했다. 655년에는 문희 소생의 맏아들 김법민을 태자로 책봉하고, 다른 왕자들에게도 관등을 수여하여 왕실 중심의 권력 구조를 확립했다. 또한 대각찬 김유신에게 자신의 딸 지소부인을 시집보내 중첩된 혼인 관계를 통해 정치적 동맹을 더욱 공고히 했다.
654년 즉위와 함께 당 고종으로부터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신라왕에 책봉되었고, 655년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침략을 보고하며 당에 원병을 요청했다. 656년에는 당에서 귀국한 김인문을 군주로 삼았으며, 658년에는 아들 김문왕을 집사부의 시중으로 임명하여 왕실 직속 기구의 권한을 강화했다. 659년에는 김인문을 다시 당에 파견하여 백제 정벌을 위한 원병 파병을 요청하는 등, 친족 중심의 내각을 구성하여 왕권을 안정시켰다.
특히 660년 1월에는 왕위 즉위에 절대적인 공헌을 한 김유신을 상대등으로 임명했다. 무열왕 이전의 상대등은 화백 회의의 대표자로서 왕권을 견제하거나 왕위 계승 경쟁자의 자격을 가졌지만, 무열왕이 상대등을 직접 임명함으로써 화백 회의는 왕권 아래에 놓이게 되었고, 왕권은 더욱 전제화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러한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무열왕은 고구려 및 백제와의 본격적인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5. 삼국 통일 전쟁 참여
무열왕은 660년 백제 정복을 위한 대규모 전쟁을 개시했다. 3월, 신라의 요청을 수락한 당나라는 좌무위대장군 소정방과 좌효위장군 유백영 등이 이끄는 수륙 13만 명의 대군을 파병했다. 원병을 요청하러 갔던 김인문은 소정방이 이끄는 신구도행군(神丘道行軍)의 부대총관 자격으로 귀국했으며, 무열왕 자신도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總管)이라는 지위를 부여받았다.
무열왕은 바다를 건너온 당군을 맞이하기 위해 5월 26일, 대장군 김유신과 김진주, 김천존 등과 함께 5만 명의 신라군을 이끌고 서라벌을 출발했다. 6월 18일 남천정(현재 경기도 이천시 일대)에 이르렀고, 6월 21일에는 태자 김법민을 보내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덕적도에서 소정방을 맞아 7월 10일 백제의 사비성 앞에서 합류하기로 약속했다. 백제 공격을 위한 신라군 5만 명의 지휘는 태자 김법민과 대장군 김유신, 장군 김품일, 김흠순 등이 맡았으며, 무열왕은 금돌성(今突城)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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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9일, 김유신 등이 이끄는 신라군이 황산벌 전투에서 백제군을 격파했다. 동시에 당군도 백제군의 저지를 뚫고 기벌포로 상륙하여, 7월 13일 사비성이 함락되었다. 7월 18일에는 웅진성으로 도망쳤던 의자왕이 항복하면서 백제는 멸망했다. 사비성이 함락되었을 때, 김법민은 백제의 왕자 부여융을 말 앞에 꿇어 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예전에 네 아비가 내 누이를 억울하게 죽여 옥중에 묻었고 그 일 때문에 내가 20년 동안 마음 아프고 골치를 앓았는데, 오늘 너의 목숨은 내 손 안에 있구나!"라고 꾸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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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의 항복 소식을 들은 무열왕은 7월 29일 금돌성에서 소부리성(사비성)으로 이동했으며, 제감 천복을 당에 보내 승리 소식을 알렸다. 8월 2일에는 앞서 대야성 함락 당시 신라군에 내응했던 모척과 검일을 잡아 처형하고, 주연을 베풀어 신라 장병들을 위로했다. 이때 의자왕과 그의 아들 부여융을 마룻바닥에 앉혀 놓고 때로 의자왕에게 술을 따르게 하니, 백제의 여러 신하들 중 목메어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백제를 무너뜨린 뒤, 당군 사령관 소정방은 9월 3일 낭장 유인원이 이끄는 1만 명을 사비성에 남겨 지키게 하고, 포로로 잡은 의자왕을 비롯한 백제의 왕족과 고위 신료, 1만 2천 명의 백제 백성을 데리고 당으로 돌아갔다. 신라 측에서는 김인문과 사찬 김유돈, 대나마 중지 등이 소정방과 동행했으며, 왕자 김인태와 사찬 일원, 급찬 길나 등이 7천 명의 신라군을 이끌고 유인원을 도와 사비성을 수비했다. 당은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를 비롯한 5도독부를 설치하고, 웅진도독으로 왕문도를 파견했다. 왕문도는 9월 28일 삼년산성에서 무열왕을 만나 당 고종의 조서를 전달했으나, 예물을 주는 과정에서 급사하여 다른 사람이 일을 마쳤다.
의자왕이 항복한 뒤부터 백제 땅에서는 부흥군이 일어나 신라-당 연합군과 전쟁을 벌였다. 고구려도 11월 1일 칠중성을 공격하여 군주 필부가 전사하기도 했다. 백제 부흥군에 대한 공세에 나선 무열왕은 10월 9일 태자 법민과 함께 여러 군사들을 이끌고 이례성(尒禮城)을 쳐서 10월 18일 함락시키고 인접한 백제의 20여 성의 항복을 받아냈다. 10월 30일에는 사비성 남쪽 산마루에 있던 백제 부흥군을 공격하여 1천5백 명의 목을 베었다. 11월 5일에는 계탄(雞灘)을 건너 왕흥사잠성(王興寺岑城)을 공격해 7일 만에 함락시키고 7백 명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11월 22일 서라벌로 귀환하여 논공행상을 벌였는데, 황산벌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좌평 충상과 상영에게 일길찬 관등을 주고 총관직을 맡기는 등, 포로로 잡거나 항복해온 백제 관료들도 처벌하지 않고 관직을 내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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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를 멸망시킨 뒤 무열왕은 변경의 수자리 군사를 폐지하고, 압독주(押督州)를 옮겨 설치하고 도독을 임명하는 등 영토 재편을 단행했다.
6. 죽음
태종 무열왕은 661년 음력 6월에 5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영경사(永경寺) 북쪽에 장사 지내졌으며, 시호(諡號)는 무열(武烈), 묘호(廟號)는 태종(太宗)으로 추존되었다. 이는 한국 역사상 최초로 묘호를 사용한 사례이다. 당 고종은 무열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낙양의 낙성문(洛城門)에서 애도식을 거행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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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무덤

《삼국사기》는 태종 무열왕의 무덤이 영경사 북쪽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842번지에 위치한 선도산 동쪽 구릉의 서악리 고분군에 있는 다섯 고분 가운데 가장 아래에 자리한 원형 봉토분이 태종 무열왕의 능으로 비정되고 있다. 봉분의 면적은 1.42 만 m2로, 신라의 왕릉 중 피장자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몇 안 되는 무덤으로서 역사적 가치가 높다. 1963년 1월 21일에 대한민국 사적 제20호로 지정되었으며, 1972년부터 1973년에 걸쳐 주변 정비가 이루어졌다. 굴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추정되는 이 무덤은 다른 왕릉에 비해 봉분 장식이 소박한 편이며, 무덤 주위에 자연석으로 둘레돌을 돌렸다.
무덤 앞 동북쪽에는 『태종무열왕릉비』(국보 제25호)가 있는데, 일제강점기 이전에 이미 비석의 몸돌 부분은 사라지고 귀부(龜趺)와 이수(螭首) 부분만 남아있었다. 이수에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어 묘의 주인이 무열왕임을 확실하게 규명할 수 있다. 《대동금석서》에 의하면 비는 무열왕이 사망한 661년에 건립되었고, 비문의 글씨는 무열왕의 아들인 김인문이 썼다고 전해진다.
8. 화랑세기의 기록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태종 무열왕의 생애와 관련된 몇 가지 사실이 통설과 다른 내용으로 전해진다.
- 《삼국사기》를 비롯한 전통적인 사료에서는 김춘추의 아버지 김용춘의 다른 이름이 김용수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화랑세기》는 용춘과 용수가 서로 다른 인물이며, 진지왕을 아버지로 둔 형제라고 기록한다. 동생인 용춘이 천명공주와 혼인하여 춘추를 낳았으나 용춘이 먼저 사망하자 천명공주가 다시 용수와 재혼하여 김춘추는 용수의 양자가 되었다고 한다. 다만 『황룡사중수기』에는 용춘이 《화랑세기》의 기록과 달리 후대에도 생존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이는 《화랑세기》 위서론의 중요한 근거 중 하나로 지적된다.
- 젊은 시절 제18대 풍월주를 역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 《화랑세기》에 따르면 무열왕은 12대 풍월주 보리공의 딸 보룡(寶龍)과의 사이에서 아들 당원전군(幢元殿君)과 딸 여씨(呂氏)를 두었으며, 문명왕후와의 사이에서도 선원전군(仙元殿君)이라는 아들이 더 있었다고 한다. 또한 무열왕은 문희와 혼인하기 이전에 이미 보종과 양명공주의 딸 보라궁주 설씨와 결혼했으며, 처음 문희는 측실로 혼인했으나 보라궁주의 요절로 문희가 정실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문희의 언니인 보희와의 사이에도 지원(知元)이라는 왕자가 있었다고 적고 있는데, 이들 왕자의 실존 여부는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9. 평가 및 영향
태종 무열왕의 생애와 업적에 대한 평가는 시대와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제시된다.
9.1. 긍정적 평가
태종 무열왕에 대한 당대 신라인들의 평가는 매우 높았다. 이는 그에게 '태종(太宗)'이라는 묘호가 부여된 것에서도 알 수 있는데, 이는 삼국 시대 역사상 최초이자 신라에서 재위한 임금 중 원성왕과 함께 유이한 사례였다. 당 고종이 신라가 '태종' 묘호를 사용하여 천자의 칭호를 참칭한다며 고칠 것을 요구했으나, 신라의 신문왕은 "(당 태종처럼) 무열왕도 김유신이라는 성신(聖臣)을 얻어서 삼한을 통일하는 대업을 이루었다"며 완곡하게 거절하는 답서를 보냈다. 이에 고종은 그가 태자로 있을 때 하늘에서 "33천(天)의 한 사람이 신라에 내려가 유신이 되었다"고 한 일이 있어 이를 확인하고 놀라 묘호를 허락했다고 한다. 훗날 조선의 성리학자 김종직은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고려의 태조 왕건 이래 역대 군주들의 묘호를 시호로 대체하고자 하는 조선 성종에게 태종 무열왕의 선례를 들며 묘호를 굳이 뺄 필요는 없음을 주장하기도 했다.
성덕왕은 태종 무열왕의 명복을 빌고자 봉덕사를 지었으며, 혜공왕은 오묘(五廟)를 정하면서 김씨로서 처음으로 왕이 된 미추왕과 더불어,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한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을 대대로 헐지 않는 신주(世世不毁之宗)로 삼았다. 이는 애장왕 2년(801년)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만 따로 모시는 사당을 지어 신주를 옮길 때까지 계속되었다. 9세기 중엽 신라의 문장가였던 최치원은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890년경 건립)에서 무열왕의 업적을 찬양하며 "이때부터 우리는 한 번 변하여 노나라가 되었다", "두 적국을 평정하고 문명에 접하게 하여 주셨다"고 평했다. 이는 태종 무열왕이 신라 국내의 제도를 당풍으로 개편하여 '문명화'시키고, 당시 신라뿐 아니라 중국에게도 적국으로 여겨지던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하여 평화를 가져왔다는 의미이다. 또한 진성여왕 7년(893년)에 당의 태사시중에게 보내는 글에서 무열왕이 당과 수교를 맺고 원병을 청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을 언급하며 "3백여 년 동안 한쪽 지방은 무사하고 넓은 바다가 편안한 것은 곧 우리 무열대왕의 공로"라고까지 평가했다. 고려나 조선의 유학자들도 대부분 이와 비슷한 인식을 가졌다.
9.2. 비판적 시각
20세기 초, 한국이 일본에 의해 강제 병합되고 식민 지배하에 놓이면서, 기존의 한국 역사에 대한 비판과 함께 태종 무열왕은 외세를 끌어들여 민족사적 강역을 축소시켰다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을사늑약을 비판했던 장지연은 김춘추가 당병을 이끌어 동족(백제와 고구려)을 친 이 사건으로 인하여 한국 역사는 천여 년을 외국의 사상에 이끌려 다니며 자국의 위풍을 멸하고 타인의 위세가 늘어나게 되었다고 비판했으며, 이것이 한국이 하나로 뭉치지 못한 요인의 하나라고 주장했다.
신채호는 민족주의적 견지에서 고구려와 백제, 신라를 모두 '신성한 부여족', 즉 '조선 한민족의 형제'라 불렀다. 그는 당과 손을 잡고 고구려와 백제를 친 김춘추의 행동을 "도적을 끌어들여 형제를 죽인" 격으로, "다른 민족을 끌어들여 동족인 고구려, 백제를 없앤 역사의 죄인"이라는 혹독한 비판을 가했다. 특히 《독사신론》에서 그는 '삼국통일'의 역사적 의의를 비판하며 김유신과 김춘추의 공과 죄를 논했다. 이는 한국의 고대사를 반도 중심으로 보았던 종래의 역사 인식 체계를 만주 중심과 단군, 부여족 중심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남북국 시대론을 지지했던 안재홍도 신라가 당을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한 것은 평양이나 관북 일대를 비롯한 대부분의 북방 영토를 방기한 데다 당의 명령을 빌어 외세의 힘을 이용한 신라의 행동에서 후세 역사에 등장한 소위 '사대주의'의 대부분이 비롯되었다고 평했다. 해방 후에도 이러한 인식은 이어져, 손진태는 김유신이나 김춘추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동족을 공격하기 위해서 이민족과 연맹하는 것은 민족적으로 최대의 죄악"이며, 신라가 당과 손잡은 것을 "귀족 국가의 비민족적 본질"이라 비난했다.
9.3. 후대에 미친 영향
신라의 '삼한일통', 나아가 그것에 처음 불을 당긴 김춘추의 대당 사대 외교에 대한 비판에서 주된 쟁점이 되는 것은, 과연 김춘추가 활동할 당시 혹은 그 이전에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 사이에 서로를 '동족'으로 인식하는 관념이 존재했느냐 하는 것이다. 《구당서》 등에서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이 서로 말과 풍속이 같았다고 서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서로를 '동류'로 파악하는 의식이 있었을 거라는 점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부여 계열인 고구려, 백제와 삼한 중 진한 및 변한 계열인 신라는 시조 신화나 제사, 정치 체계 및 혼인 풍속 등에서 여러 차이가 있었고, 수백 년에 걸쳐 계속된 치열한 경쟁 속에서 특화된 이질성과 오랜 전쟁으로 인한 적대감이 상당히 누적되어 있었다. 나제동맹 역시 552년 한강 유역을 둘러싼 갈등으로 파탄났고, 554년 백제의 성왕이 신라의 매복에 걸려 전사하면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642년 김춘추와 연개소문 사이의 교섭은, 신라에게 죽령 이북의 한강 유역 전체를 내놓고 현재의 영남 지역에 국한된 약소국으로 남기를 요구하는 고구려의 제국주의적 태도와 한강 유역을 잃으면 패망을 면할 수 없다는 신라 지배자들의 인식이 타협의 여지 없이 상충되어 결렬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당시의 현실에서 당나라와 연합해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김춘추의 선택은 그가 현대 한국인이 아닌 고대 신라인, 그것도 신라의 지배자였다는 점을 냉정하게 인식하는 바탕 위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사방의 적에 둘러싸여 궁지에 몰리자 당 태종의 고구려 정벌 정책에 편승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전쟁의 결과로 당시 신라인들은 수백 년간 지속된 전쟁 상태의 종식, 백제 영토의 흡수, 중국 신문물의 수입에 의한 중화식 개혁 등 신라의 국가적 과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또한, 고구려 영토 역시 근·현대의 민족주의적 관점과 같은 인식이 없었던 고대의 신라 지배층에게 있어서는 땅을 상실하기는커녕 대동강 이남 지역(현재의 황해도)을 신라가 획득함으로써 영토를 확장하는 성과를 낸 것이었고, 당대 최강 국가인 당나라를 상대로 한 최선의 결과물이었다. 다만, 이러한 냉정한 평가는 김춘추가 한민족사의 영웅이라기보다 중요 인물 중 하나가 될 수밖에 없는 본질과 한계를 재확인시켜 준다.
백제의 영토를 흡수하고 한반도의 중남부 지역을 차지하게 된 신라는 후대의 한반도 통일국가인 고려, 조선의 모태가 되었기 때문에 7세기 말에 신라인들이 사용했던 '삼한일통'이나 '삼국통일'과 같은 말은 19세기까지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져 계속 쓰였다.
10. 가계도
태종 무열왕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구분 | 인물 | 설명 |
---|---|---|
조부 | 진지왕 | 신라 제25대 국왕 |
조모 | 지도부인 박씨 | 진지왕의 왕비 |
아버지 | 김용춘 (문흥왕) | 진지왕과 지도부인의 아들. 무열왕 즉위 후 문흥왕으로 추존. |
외조부 | 진평왕 | 신라 제26대 국왕 |
외조모 | 마야부인 | 진평왕의 왕비 |
어머니 | 천명공주 (문정태후) | 진평왕과 마야부인의 딸. 무열왕 즉위 후 문정태후로 추존. |
이모 | 선덕여왕 | 신라 제27대 국왕 (덕만공주) |
이모 | 선화공주 | 백제 의자왕의 어머니로 알려짐 |
왕후 | 문명왕후 김씨 | 김유신의 여동생. 본명은 문희. |
왕후 소생 자녀 | 문무왕 | 신라 제30대 국왕. 문명왕후의 아들. |
김인문 | 문명왕후의 아들. | |
김문왕 | 문명왕후의 아들. 강릉 김씨의 선조. | |
김노차 | 문명왕후의 아들. | |
김인태 | 문명왕후의 아들. | |
김지경 | 문명왕후의 아들. | |
김개원 | 문명왕후의 아들. | |
고타소공주 | 문명왕후의 딸. 김품석의 아내. | |
지소부인 | 문명왕후의 딸. 김유신의 아내. | |
원성왕의 증조모 | 문명왕후의 딸. | |
후궁 | 영창부인 보희 | 김유신의 언니. 문명왕후의 친언니. |
보희 소생 자녀 | 요석공주 | 영창부인 보희의 딸. 김흠운과 원효의 아내. |
김개지문 | 영창부인 보희의 아들. | |
김거득 (김차득) | 영창부인 보희의 아들. | |
김마득 | 영창부인 보희의 아들. | |
후궁 (첫 부인) | 보라궁주 설씨 | 제16대 풍월주 보종과 양명공주의 딸. |
보라궁주 소생 자녀 | 고타소공주 | 보라궁주의 딸. |
김문주 | 보라궁주의 아들. |
11. 대중문화 속 묘사
태종 무열왕의 생애와 업적은 여러 영화와 드라마에서 묘사되었다.
- 《원효대사》(KBS1, 1986년, 배우: 박인환)
- 《삼국기》(KBS1, 1992년~1993년, 배우: 송영창)
- 《황산벌》(2003년, 배우: 이호성)
- 《연개소문》(SBS, 2006년~2007년, 배우: 김병세)
- 《선덕여왕》(MBC, 2009년, 배우: 유승호, 아역: 정윤석)
- 《계백》(MBC, 2011년, 배우: 이동규)
- 《대왕의 꿈》(KBS1, 2012년~2013년, 배우: 최수종, 아역: 채상우)
- 《한국사기》(KBS1, 2017년, 배우: 박준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