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다카미네 히데코는 아역 배우로 시작하여 일본 영화의 황금기를 이끌었으며, 결혼 후에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며 배우이자 작가로서 다채로운 삶을 살았다.
1.1. 출생과 어린 시절
다카미네 히데코는 1924년 3월 27일 목요일, 홋카이도 하코다테시에서 히라야마 킨지(平山錦司일본어)와 이소(イソ일본어)의 장녀로 태어났다. 그녀의 집안은 할아버지 리키마츠(力松일본어)가 운영하던 소바 요리점 '마루히라 스나바'를 비롯해 '마루히라 극장', '마루히라 카페' 등을 소유한 지역 유지였다. 위로 세 명의 오빠와 한 명의 남동생이 있었다.
네 살 때 어머니가 결핵으로 사망하자, 평소 히데코를 양녀로 삼고 싶어 했던 아버지의 여동생이자 그녀의 대모인 시게(志げ일본어)의 양녀가 되어 도쿄로 이주했다. 시게는 17세 때 하코다테에 온 활동 변사 오기노 이치지(荻野市治일본어)와 결혼하여 '다카미네 히데코'라는 이름으로 여성 활동 변사로 활동했으나, 이후 부부가 모두 활동 변사를 그만두고 이치지는 순회 극단의 흥행 브로커로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아 시게는 바느질 부업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1.2. 아역 배우 시절

1929년 9월, 집주인인 아래층 주민의 친구이자 쇼치쿠 가마타 촬영소의 배우였던 노데라 쇼이치(野寺正一일본어)의 안내로 양아버지와 함께 가마타 촬영소를 견학하게 되었다. 그날은 노무라 호테이 감독의 영화 《어머니》의 아역 오디션이 열리던 날이었고, 히데코는 양아버지의 권유로 오디션에 참가하여 노무라 감독의 눈에 띄어 여주인공 가와다 요시코(川田芳子일본어)가 연기하는 어머니의 딸 역할로 출연하게 되었다.
같은 해 10월 1일부로 쇼치쿠 가마타 촬영소에 입사하며 시게의 활동 변사 시절 예명을 그대로 사용하여 '다카미네 히데코'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12월 1일 개봉한 《어머니》는 쓰루미 유스케 원작의 모성애 영화로, 아사쿠사에서 45일간의 장기 상영을 기록하며 이듬해 앙코르 상영될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첫 월급은 35 JPY였고, 곧바로 우구이스다니(鶯谷일본어)에서 촬영소 근처인 에바라군 가마타정(荏原郡蒲田町일본어) 기타가마타(北蒲田일본어)로 이사했다.
그녀는 곧바로 고쇼 헤이노스케 감독의 《대도쿄의 한구석》, 시마즈 야스지로 감독의 《사랑이여 인류와 함께하라》,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도쿄의 합창》 등 여러 작품에 출연하며 인기 아역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때로는 남자아이 역할도 소화하며 스태프들로부터 '히데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고쇼 감독은 한때 히데코를 입양하려 했으나 시게의 반대로 포기했다는 일화도 있다. 1931년, 가마타의 보통 소학교에 입학했지만 밤샘 촬영이 잦아 거의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1932년 4월, 메이지좌의 신파 공연 《마쓰카제 무라사메》에 출연하여 하나야기 쇼타로, 오카다 요시코와 함께 연기했다. 이 공연의 《만주국》에서는 푸이의 어린 시절을 연기하며 이미 천재 아역으로 불리던 명성을 더욱 높였다.

1934년, 작사가 후지타 마사토의 총애를 받은 히데코는 쇼지 타로가 《아카기의 자장가》의 대히트를 기념하여 히비야 공회당에서 개최한 무대 공연에 칸타로(勘太郎일본어) 역으로 출연했다. 이 공연으로 히데코를 마음에 들어 한 쇼지는 그녀를 양녀로 삼기를 열망하며 "노래와 피아노를 철저히 가르치겠다"고 설득했고, 히데코는 시게와 함께 쇼지 일가로 이주했다. 쇼지의 히데코에 대한 애정은 지나칠 정도여서 그녀를 잠시도 곁에 두지 않고 지방 공연에도 데리고 다녔으며, 쇼지 집으로 들어갈 때 조건이었던 피아노와 노래 레슨은 미뤄졌다. 반면 시게는 무급으로 하녀처럼 일하는 대우를 받았고, 이를 견디지 못한 히데코는 시게를 설득하여 쇼지 집을 나와 오모리의 한 아파트로 이사했다. 이에 격분한 후지타는 쇼지를 위해 썼던 '쓰마코이 도추', '오시도리 도추'를 신인 우에하라 도시(上原敏일본어)에게 부르게 했고, 이후로는 쇼지에게 거의 곡을 써주지 않았다.
1936년, 쇼치쿠는 촬영소를 가마타에서 오후나로 이전했다. 12세의 히데코는 아역에서 소녀 역으로 전환하는 시기였으나, 같은 해 고쇼 감독의 멜로드라마 《신도》에서 다나카 키누요가 연기하는 여주인공의 여동생 역이라는 큰 역할에 발탁되었다. 다나카는 그녀를 친동생처럼 아껴주었으며, 가마쿠라 산에 있던 '키누요 저택'에서 숙박하며 촬영소에 다니게 되었다. 실제 생활에서는 하코다테 대화재로 파산한 할아버지 리키마츠 일가가 히데코에게 의지하여 상경했고, 센다가야에 집을 빌려 살게 되면서 히데코의 어깨에 9명의 생계가 걸리게 되었다.
1.3. 경력 전환기와 주요 감독과의 협업

이 무렵, 영화계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에 다카라즈카 가극단 입단을 고려했고, 하나야기 쇼타로와 미즈타니 야에코에게 상담한 결과, 미즈타니가 다카라즈카 음악학교 교장 고바야시 이치조에게 문의하여 무시험 입학을 허가받았다는 답변을 들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37년 초, P.C.L. 기획과에 근무하던 후지모토 마스미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스카우트 조건은 월급 100 JPY와 촬영소 근처 집 제공, 그리고 여학교 진학 허용이었고, 이에 동의한 히데코는 같은 해 1월 쇼치쿠를 퇴사하고 P.C.L.로 이적했다. 4월에는 약속대로 오차노미즈의 분카 학원에 입학했다.
P.C.L. 이적 후 첫 작품은 요시야 노부코 원작, 야마모토 가지로 감독의 《양인의 정조》로, 치바 사치코가 연기하는 쿠니코의 여동생 무쓰코를 연기했다. 이어서 요코야마 류이치의 연재 만화를 원작으로 한 《에도코 켄짱》에서 에노모토 켄이치와 공연했다. 같은 해 9월 P.C.L.은 도호 영화가 되었고, 이후로도 수많은 작품에 출연하며 키시이 아키라가 지어준 '데코'라는 애칭으로 촬영소의 마스코트 같은 존재가 되었다. 1938년에는 야마모토 감독의 《쓰즈리카타 교시쓰》에서 주연을 맡았다. 이 작품은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도요다 마사코의 작문집을 영화화한 것으로, 가난 속에서도 밝고 강하게 살아가는 소녀를 연기하며 초기 대표작이 되었다. 한편, 바쁜 스케줄로 인해 분카 학원 등교는 한 달에 2~3일 정도에 불과했고, 담임 교사 가와사키 나쓰(河崎なつ일본어)로부터 "이 기회에 학교를 택할지, 일을 택할지 명확히 결정해 달라"는 말을 듣고 입학 1년 반 만에 퇴학을 강요당했다.

도호에서는 더욱 인기 있는 배우가 되어, 1939년에는 9편의 작품에 출연했다. 아이돌로서의 인기도 높아져 히데코의 이름을 딴 영화도 제작되었다. 《히데코의 응원단장》에서는 주제가 '청춘 그라운드'를 불렀고 음반도 발매되었으나, B면에 하이다 가쓰히코가 부른 삽입곡 '찬란한 별자리'가 더 큰 인기를 얻어 40만 장의 대히트를 기록했다. 《히데코의 차장님》은 훗날 콤비를 이루게 될 나루세 미키오 감독과의 첫 만남 작품이다. 1940년, 도요다 시로 감독의 《작은 섬의 봄》에서 한센병 환자를 연기한 스기무라 하루코의 연기에 충격을 받고, 지금까지 어쩔 수 없이 해왔던 배우 일을 진지하게 임하기로 결심했다. 또한 성악가 오쿠다 료조와 나가토 미호(長門美保일본어)에게 사사하여 발성을 배웠고, 전쟁 중에는 음향 시설이 없는 전선에서의 위문 공연이나 가수 활동 등을 펼쳤다.
1941년, 야마모토 감독의 《말》에 주연했다. 도호쿠 지방의 사계절 풍경 속에서 농가 소녀와 그녀가 키우는 망아지의 교감을 세미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그린 작품으로, 촬영에 3년이 소요되었다. 촬영 중 제작 주임이자 B반 감독이었던 구로사와 아키라와 사랑에 빠졌으나, 시게의 반대로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 에피소드는 자서전 《나의 생애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1945년 7월, 야마모토 감독의 《아메리카 요소로》 촬영을 위해 지바현 다테야마에 머물렀으며, 스자키 항공대에서의 위문 공연을 마친 후 종전을 맞이했다. 특공대원을 다룬 《아메리카 요소로》의 제작은 중단되었다.
1.4. 신토호 시대
1946년, 점령군에 접수된 어니 파일 극장(옛 도쿄 다카라즈카 극장)에서 점령군을 위한 위문 공연에 출연했으나, 의상이 없어 곤란을 겪던 중 이리에 다카코가 자신이 가진 코트를 풀어 의상을 만들어 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같은 해 사에키 키요시 감독의 《유쾌한 여자》가 전후 첫 작품이 되었다. 8월, 일본극장의 《하와이의 밤》에서 하이다와 함께 출연하여 훌라 댄스를 선보여 큰 인기를 얻었으나, 도호에서는 10월에 제2차 도호 쟁의가 발생했다. 파업에 반대하는 오코치 덴지로에 동조하여 하세가와 카즈오, 이리에 다카코, 야마다 이스즈, 후지타 스스무, 구로카와 야타로, 하라 세츠코, 야마네 도시코, 하나이 란코와 함께 열 사람의 깃발회를 결성하고 일본 영화 연극 노동조합 산하의 도호 종업원 조합을 탈퇴했다. 이듬해인 1947년 3월 다른 탈퇴자들과 함께 신토호 영화 제작소가 발족하면서 히데코는 신토호 전속 배우가 되었다. 신토호에서의 첫 작품은 하기와라 료 감독의 《오에도의 귀신》이었고, 이어서 아베 유타카 감독의 《사랑이여 별과 함께》에서 16세부터 35세까지 여성의 반생을 연기했으며, 다음 치바 야스키 감독의 《행복으로의 초대》에서도 불행한 여인을 연기하며 성인 여배우로서의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이 무렵 '다카미네 히데코 후원회'가 발족하여 긴자 가네보 빌딩 내에 사무실이 개설되고 기관지 《DECO》가 발행되었다. 신토호가 창립 1주년을 맞이하기도 전에 열 사람의 깃발회 멤버였던 하라 세츠코, 야마다 이스즈, 이리에 다카코 등이 차례로 탈퇴했다. 이로 인해 히데코는 신토호 여배우진의 중심이 되었고, 1949년 개봉한 《긴자 칸칸 아가씨》에서는 주제가도 불렀으며, 개봉 전에 발매된 음반은 50만 장(1957년 기준)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대히트했다. 1950년에는 아베 감독의 《세설》에서 하나이 란코, 도도로키 유키코, 야마네 도시코에 이어 막내딸 역을 연기했으며, 원작자 다니자키 준이치로와는 가족을 포함한 형태로 다니자키가 사망할 때까지 교류를 이어갔다. 같은 해에는 오즈 감독의 《무네카타 자매》에 다나카 키누요의 여동생 역으로 출연했다. 같은 해 11월, 당시 결혼을 전제로 교제하던 회사 중역이 후원회비를 횡령하고 다른 여성과 교제한 사실이 발각되면서 신토호를 퇴사했다.
1.5. 프리랜서 배우 시대

1951년, 일본 최초의 천연색 영화 《카르멘 고향에 돌아오다》에 주연했다. 이 작품에서 처음으로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과 콤비를 이루었다. 같은 해 6월, 칸 영화제 참석 이야기에서 유학생 신분으로 프랑스로 건너가 6개월간 파리에 체류했다. 악화되었던 시게와의 관계와 프리랜서가 된 후의 불안감에서 벗어나 영화를 잊고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파리 체류 중에는 와타나베 카즈오가 학생 시절 하숙했던 아파트의 한 방을 거처로 삼았다. 당시의 에피소드는 《쓰즈리카타 파리》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952년 1월 귀국했다.
당시 영화 배우가 영화 회사에 소속되지 않는 경우는 드물었으나, 어떤 회사에도 속하지 않고 프리랜서 배우로 활동을 시작한 히데코는 1953년 영화 회사들이 체결한 오사 협정에 구속되지 않고 각 사의 작품에 출연할 수 있었다(다만, 도에이와 닛카쓰에는 결국 한 번도 출연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명장들의 작품에도 다수 출연할 수 있었다. 특히 나루세 미키오와 키노시타 케이스케 두 감독의 거의 모든 작품에 출연했다. 나루세 작품에는 총 17편 출연했으며, 《번개》에서는 어머니는 같지만 아버지가 다른 네 남매 중 막내딸을 호연하며 연기파 배우로서의 역량을 높였다. 나루세의 대표작이자 히데코의 대표작이기도 한 《부운》에서는 모리 마사유키가 연기하는 불성실한 남자에게 휘둘리면서도 헤어지지 못하는 여자,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에서는 생활을 위해 긴자 바에서 고용 마담으로 일하는 여자, 《방랑기》에서는 젊은 시절의 하야시 후미코를 연기하며 나루세 작품에서 연달아 주역을 맡았다.
키노시타 작품에는 총 12편 출연했다. 《스물네 개의 눈》은 《부운》과 함께 히데코의 대표작으로, 쇼도시마의 분교에 부임하는 신임 교사를 연기하여 당시의 여우주연상을 휩쓸었다. 《기쁨도 슬픔도 여러 해월》에서는 사다 케이지와 등대지기 부부를 연기하며 주제가와 함께 대히트를 기록했다. 《풍전등》에서는 기존 이미지와는 정반대인 실패한 부부를 사다와 함께 연기했다. 전란에 휘말려 가혹한 운명에 처한 농부 여인을 연기한 《피리부는 강》에서는 18세부터 85세의 노인 역할까지 소화했으며, 《영원한 사람》에서도 20세부터 49세까지를 연기했다. 《두 사람이 걸었던 몇 년》에서도 사다와 함께 도로 공사 부부의 반생을 연기하며 키노시타 작품의 히로인으로 계속 활약했다.
나루세, 키노시타 감독 외의 작품으로는 고쇼 헤이노스케 감독의 《굴뚝이 보이는 곳》, 도요다 시로 감독의 《기러기》, 노무라 요시타로 감독의 《잠복》, 이나가키 히로시 감독의 《무호마쓰의 일생》, 고바야시 마사키 감독의 《인간의 조건 제5·6부》 등에 출연했다.
1955년 2월 25일, 당시 키노시타의 조감독이었고 《스물네 개의 눈》 촬영에서 만난 마쓰야마 젠조와의 약혼을 발표했다. 중매는 가와구치 마쓰타로·미마스 아이코 부부와 키노시타 케이스케 세 명이었다. 길한 소식이 새어나가 가십으로 다뤄지는 것을 꺼린 키노시타가 직접 각 언론사에 "쇼치쿠의 키노시타입니다만, 우리 마쓰야마 군과 다카미네 히데코를 결혼시키니 취재하러 와주세요"라고 전화하여 관계자 일동의 기자회견을 가졌는데, 이것이 연예인 결혼 기자회견의 시초라고 전해진다. 3월 26일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1961년, 마쓰야마의 감독 데뷔작 《이름도 없이 가난하고 아름답게》에 주연했다. 고바야시 케이주와 함께 농아 부부를 연기하며 전편을 수화로 소화하는 난역을 뛰어난 연기력으로 해냈다. 이후로도 마쓰야마가 감독한 《나는 한 알의 밀이 되리라》, 《로쿠조 유키야마 쓰무기》 등에 주연했다.
1965년 이후 영화 출연이 줄었지만, 마스무라 야스조 감독의 《하나오카 세이슈의 아내》에서는 이치카와 라이조가 연기하는 하나오카 세이슈의 어머니 역을, 도요다 감독의 《황홀한 사람》에서는 모리 시게히사가 연기하는 치매 노인을 헌신적으로 돌보는 며느리 역으로 출연하여 관록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텔레비전 드라마에도 1968년부터 출연하기 시작하여 남편 마쓰야마가 각본을 쓴 《낙일불타》나 TBS의 도호 시바 일요극장에서 방영된 《일필계상합니다》, 《봄의 이별》 등에 출연했다. 이 외에 후지 TV의 '오가와 히로시 쇼' 내 '다카미네 히데코 대담' 코너의 진행을 맡기도 했다. 무대에서는 1972년 10월 키노쿠니야 홀에서 상연된 반전극 《케이톤즈빌 사건의 아홉 사람》에 출연했다.
1.6. 은퇴와 말년
1979년, 키노시타 감독의 《충동 살인 아들아》에 출연 예정이던 야치구사 카오루가 하차하면서 대역을 의뢰받아 출연했다. 오랜만의 영화 출연에 제작 발표 기자회견에서 은퇴 여부를 묻는 질문에 "이미 은퇴한 줄 알았는데요"라고 답했다. 제작 도중 여배우 은퇴를 발표했고, 이 작품이 그녀의 마지막 영화 출연작이 되었다.
은퇴 후에는 주로 에세이스트로 활동했지만, 마쓰야마 감독의 영화 《노리코는 지금》에 조감독으로 참여하기도 했고, 1994년 방영된 텔레비전 드라마 《시노바즈의 여자》의 각본을 쓰기도 했다. 2003년에는 영화 《프레디의 나뭇잎》에서 낭독을 담당했다.
2010년 12월 28일 오전 5시 28분, 폐암으로 도쿄도 시부야구의 병원에서 사망했다. 향년 86세였다.
2. 주요 활동 및 업적
다카미네 히데코는 아역 배우 시절부터 성인 배우로서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주며 일본 영화 황금기를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작가 및 에세이스트로서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2.1. 영화 배우로서의 활동

다카미네 히데코는 "아역 출신 중 대배우는 없다"는 징크스(이 징크스는 일본뿐만 아니라 셜리 템플 등 해외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사례다)를 깨고, 5세부터 아역(현존하는 필름으로는 첫 출연작인 《어머니》나 《일곱 개의 바다》에서 그 아역의 모습을 볼 수 있다)으로 시작하여 소녀 역을 거쳐 '여인'을 연기하는 대배우로 성장했다.
그녀의 역할은 매우 폭넓었다. 소녀 시절에는 가련한 역할이 많았으나(《부계도》, 《그 전날 밤》 등), 전후에는 시대를 앞서가는 직업 여성(《아침의 파문》), 국민적 인기를 얻은 여교사(《스물네 개의 눈》), 남자와의 파멸적인 연애 관계에 빠지는 여자(《부운》), 뜻에 맞지 않는 상대와의 결혼 생활을 하는 아내(《영원한 사람》), 농아로서 사회의 밑바닥에 있으면서도 강하게 살아가는 여성(《이름도 없이 가난하고 아름답게》), 생활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긴자의 바에서 일하는 마담(《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 첩(《아내로서 여자로서》) 등, 한 명의 여배우가 연기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다양한 역할을 소화했으며, 그 모든 역할에서 훌륭한 연기를 선보였다.
어떤 배우들은 개인의 개성이 전면에 드러나 "무엇을 연기해도 그 배우 자신"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예를 들어, 가사 치슈는 연기라기보다는 자신의 개성 자체가 매력이었던 배우라고 야마다 요지 감독도 NHK의 '야마다 요지 감독이 선정한 일본 명작 100선'에서 지적한 바 있다), 다카미네 히데코는 그 정반대에 있었다. 그녀는 말 그대로 백변(百變)이라 할 만한 다양한 역할을, 그 역할의 본질을 파악하여 완벽하게 연기해낸 일본 영화사상 보기 드문 명배우였다. 만년에 이르러서도 무대 출연은 극히 적었으며, "영화로 데뷔하고 영화로 은퇴한" 일본 영화사상 최고의 대배우이자 명배우로 평가받는 존재이다.
2.2. 작가 및 에세이스트로서의 활동


다카미네 히데코는 여배우 전성기 시절부터 많은 책을 출판했다. 첫 저서는 1953년에 출간된 파리 체류 에세이 《파리 혼자 걷기》였으며, 이후 《달팽이》, 《나의 인터뷰》, 《병 속》, 《한 마리 벌레》 등의 에세이를 썼다. 또한 마쓰야마 젠조와의 공저로 《여행은 동반자 간다라》, 《여행은 동반자 투탕카멘》 등의 여행기, 《부엌의 오케스트라》 등의 요리책도 저술했다.
아역 생활 때문에 초등학교에도 충분히 다니지 못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시나리오 읽기와 독서를 통한 독학으로 열정적으로 교양을 쌓았다. 또한 마쓰야마와의 결혼 후에는 자택에서 마쓰야마의 시나리오 집필을 구술 필기하는 등의 기회를 얻어 필력을 키웠다.
1975년, 《주간 아사히》 지상에 《나의 생애 일기》를 연재했다. 이 책에서는 관계자들을 실명으로 등장시키며 국민적 여배우이자 한 여성으로서의 반생을 솔직하게 회고했다. 그 내용에 "정말로 본인이 쓴 것이 맞느냐"는 문의가 쇄도했지만, 당시 주간 아사히 편집부에서는 "고스트라이터를 썼다면 저런 개성적인 문장은 나올 수 없다"고 답했다고 한다. 이듬해 아사히 신문사에서 상하권으로 간행되어 당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에세이로 제24회 일본 에세이스트 클럽상을 수상했다.
2013년에는 양녀 사이토 아케미에 의해 미발표 에세이가 발견되어, 3월에 신초샤에서 《여행 일기 유럽 두 사람 삼각》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은 1958년 남편과 유럽을 여행할 당시의 여행기로, 자택 서가에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사이토 아케미에 의한 많은 관련 출판물이 있다.
2.3. 기타 활동
다카미네 히데코는 배우와 작가 외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을 보였다. 그녀는 가수로서도 활동하며 여러 음반을 발매했고, 특히 영화 《긴자 칸칸 아가씨》의 주제가는 큰 인기를 얻었다.
신토호 시절인 1949년, 긴자에서 열린 그림 애호회 '처칠회'에 참여했으며, 이듬해 1950년 니혼바시 미쓰코시에서 열린 명사 여가 그림 전람회에 10호 크기의 《녹의》를 출품하여 4700 JPY에 팔렸고, 회의 고문을 맡고 있던 화단의 거장 우메하라 류자부로와 인연을 맺었다. 그 이후 40년에 걸친 친분이 이어졌고, 우메하라에 의해 다카미네를 모델로 한 많은 초상화가 그려졌다. 처음 히데코를 그린 초상화는 《카르멘 고향에 돌아오다》 로케이션 중 가루이자와 별장에서 그려졌는데, 눈이 너무 커져 닮지 않아 여러 번 다시 그렸다. 시행착오 끝에 눈이 큰 것이 아니라 눈빛이 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1974년 3월, 히데코는 남편의 제안으로 첫 초상화를 도쿄 국립 근대 미술관의 우메하라 류자부로 코너에 기증했고, 이듬해 1975년 곤주포장과 목배를 받았다. 1987년에는 우메하라와의 추억을 담은 에세이 《나의 우메하라 류자부로》를 간행했다. 2005년 11월, 우메하라의 회화 작품 7점, 미야모토 사부로 작 1점, 모리타 모토코 작 1점, 도모토 인쇼 작 2점, 총 11점의 초상화를 히데코 본인이 세타가야구에 기증했으며, 현재 세타가야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또한 그녀는 후지 TV의 '오가와 히로시 쇼' 내 '다카미네 히데코 대담' 코너의 진행을 맡는 등 방송 활동도 활발히 했다.
3. 사상 및 활동
다카미네 히데코는 연기에 대한 깊은 철학을 가지고 있었으며, 사회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발언과 참여를 통해 자신의 가치관을 드러냈다.
3.1. 연기에 대한 관점
다카미네 히데코는 나루세 미키오 감독과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에 대해 "스타일은 달랐지만, 부자연스러운 것을 싫어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하려고 했던 것은 뉴스에서 보는 여성들처럼 자연스럽게 연기하되, 드라마적인 터치를 더해 더욱 현실적으로 만드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이는 그녀가 연기에 있어 자연스러움과 진실성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보여준다. 그녀는 단순히 역할을 연기하는 것을 넘어, 캐릭터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것을 자신의 연기로 재창조하여 관객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3.2. 정치적 활동
다카미네 히데코는 사회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발언과 참여로도 잘 알려져 있다. 1960년 6월 4일, 나가노현청 광장에서 열린 나가노현 안보 투쟁 저지 중앙 총궐기 대회에 참여했다. 당시 다카미네 주연 영화 《피리부는 강》의 로케이션 촬영이 나가노시에서 진행되고 있었는데, 다카미네를 비롯한 출연 배우 다무라 다카히로, 아라키 미치코(荒木道子일본어),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은 안보 비판회의 멤버들과 함께 대회에 참가했다. 다카미네 등 4명은 단상에 올라 "전쟁은 싫습니다. 여러분 힘내세요"라고 호소했다. 다카미네는 대회 종료 후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시내를 행진하기도 했다.
1965년, 이치카와 곤 감독에게 촬영이 의뢰된 영화 《도쿄 올림픽》이 완성 전 시사회에서 고노 이치로 (올림픽 담당 국무대신)가 내용에 의문을 제기하는 발언을 하면서 큰 논란이 일었을 때, 다카미네는 "매우 아름답고 즐거운 영화였다. (불평을 한 고노는) 의뢰해 놓고 나서 너무한 이야기 아닌가", "이치카와 작품은 올림픽의 오점이라고 난폭한 말을 하는 것은 적어도 국무상이라는 직함을 가진 인물이 할 일이 아니다"라고 옹호하는 코멘트를 잡지와 신문에 기고했다. 다카미네는 직접 고노를 만나 영화의 훌륭함을 역설하고, 고노가 이치카와와 면담하도록 요청했다. 고노는 웃으며 "실은 영화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다카미네에게 답했다. 이후 고노는 다카미네의 중재로 이치카와와 여러 차례 면담한 결과, 제작진의 노력을 인정하고 최종적으로 "완성작에 100퍼센트 만족한 것은 아니지만, 자유롭게 하도록 해라"라고 영화 프로듀서 다구치 스케타로에게 전화하여 논란을 수습했다. 해외판 편집권 등은 이치카와에게 돌아갔다. 이치카와는 훗날 대담에서도 이 일에 대해 깊이 감사했다.
1967년 4월에 열린 도쿄도지사 선거에서는 미노베 료키치의 추천인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1971년 2월 10일, 일본 중의원 체신위원회 '방송에 관한 소위원회'에 (본명인 마쓰야마 히데코로서) 참고인으로 초청되어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저속화 문제와 당시 문제가 되었던 시청자 참여 프로그램의 상품 고액화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전년에 후지 TV의 《퀴즈 킹에게 맡겨라!》의 상품으로 제공된 1000.00 만 JPY 상당의 맨션 소유권이 독점금지법에 위반된다는 고발이 있었던 문제 등을 언급하며, 다카미네는 "폭력이라든지 에로라든지, 그런 것이 저속하게 될 수도 있겠지만 (중략) 퀴즈 프로그램을 하면서 여러 가지 물건을 받거나 외국에 가는 것. 그것이 저속함 중에서도 가장 비열한 부류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공정거래위원회와 일본 민간방송 연맹은 같은 해 9월 모든 퀴즈 프로그램의 상금·상품 상한액을 100.00 만 JPY까지로 합의하는 규제 규칙을 마련했다.
1972년 이전, 당시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교가 없던 시절, 중국 영화 사절단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일본 외무성의 의뢰로 부부가 호스트 역할을 맡았다. 전전 중국의 대스타였던 자오단이 장칭의 배우 시절을 알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장칭에게 투옥되었을 때, 다카미네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지인을 통해 "자오단은 잘 지내고 있는가"라고 계속해서 안부를 물어 문화대혁명에 의한 처형을 막았다. 이 경위는 그녀의 저서 《나의 생애 일기》, 《한 마리 벌레》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4. 수상 경력 및 평가
다카미네 히데코는 반세기 동안의 연기 활동과 문학 활동을 통해 수많은 상을 수상하며 일본 영화계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겼다.
4.1. 주요 수상 내역
-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 1954년: 여우주연상 (《스물네 개의 눈》, 《여인의 정원》, 《이 넓은 하늘 어딘가에》, 《악의 즐거움》)
- 1955년: 여우주연상 (《부운》)
- 1957년: 여우주연상 (《기쁨도 슬픔도 여러 해월》, 《거친 여자》)
- 1961년: 여우주연상 (《영원한 사람》, 《이름도 없이 가난하고 아름답게》)
- 2010년: 특별상 (사후)
- 1954년: 블루리본상 여우주연상 (《스물네 개의 눈》, 《여인의 정원》, 《이 넓은 하늘 어딘가에》)
- 1955년: 키네마 준보 제29회 키네마 준보 베스트 텐 여우주연상 (《부운》)
- 1956년: 제3회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 최우수 여우주연상 (《부운》)
- 1961년: 제5회 샌프란시스코 국제 영화제 여우주연상 (《이름도 없이 가난하고 아름답게》)
- 1962년: 제12회 예술선장 (《이름도 없이 가난하고 아름답게》, 《영원한 사람》)
- 1965년: 제17회 로카르노 국제 영화제 최우수 여우주연상 (《흐트러지다》)
- 1975년: 제21회 에이단렌 영년근속공로상
- 1975년: 곤주포장
- 1976년: 제24회 일본 에세이스트 클럽상 (《나의 생애 일기》)
- 일본 아카데미상
- 1979년: 우수 여우주연상 (《충동 살인 아들아》)
- 1996년: 회장 공로상
- 2011년: 회장 특별상 (사후)
- 1994년: 제4회 일본 영화 비평가 대상 골든 글로리상
- 2011년: 제56회 '영화의 날' 특별 공로장 (사후)
- 2011년: 오사카 시네마 페스티벌 2011 특별상 (사후)
- 2011년: 제29회 골든 그로스상 특별 공로상 (사후)
4.2. 예술적 평가
다카미네 히데코는 "아역 출신 중 대배우는 없다"는 징크스를 깨고 5세부터 아역으로 시작하여 성인 배우로 성공적으로 성장한 독보적인 존재로 평가받는다. 그녀는 아역 시절의 귀여운 이미지에서 벗어나 전후 시대의 다양한 여성상을 폭넓게 연기하며 깊이 있는 연기력을 선보였다. 가련한 소녀부터 강인한 직업 여성, 파멸적인 사랑에 빠진 여인, 헌신적인 아내, 사회의 부조리에 맞서는 인물까지, 그녀가 연기한 역할들은 한 배우가 소화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다양했다.
비평가들은 그녀를 "백변(百變)의 여배우"라 칭하며, 단순히 역할을 연기하는 것을 넘어 캐릭터의 본질과 영혼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표현해냈다고 찬사를 보냈다. 자신의 개성을 강하게 드러내기보다는 역할에 완전히 몰입하여 '그 인물 자체'가 되는 연기 스타일은 일본 영화사에서 매우 드문 사례로 꼽힌다. 그녀는 "영화로 데뷔하고 영화로 은퇴한" 배우로서, 일본 영화사상 최고의 대배우이자 명배우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이러한 평가는 각종 영화상 수상으로도 입증되었으며, 특히 2000년 키네마 준보가 선정한 '20세기 영화 스타' 독자 투표에서 일본 여배우 부문 1위를 차지했고, 2014년 같은 잡지가 발표한 '올타임 베스트 일본 영화 남우·여우'에서도 여배우 부문 1위에 선정되며 그녀의 예술적 위상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
5. 영향
다카미네 히데코는 일본 영화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아역 배우가 성인 배우로 성공적으로 전환하는 데 있어 선례를 남겼다.
5.1. 후대에 미친 영향
다카미네 히데코는 "아역 출신 중 대배우는 없다"는 징크스를 깨고 성인 배우로서 성공한 선례를 남겼다. 이는 후대 아역 출신 배우들에게 큰 희망과 영감을 주었으며, 그녀의 연기 방식과 작품 선택은 많은 후배 배우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그녀는 단순히 연기 기술을 넘어, 캐릭터의 본질을 파악하고 진실성을 담아내는 연기 철학을 통해 일본 영화계에 깊은 족적을 남겼다. 또한, 영화계의 뒷방 스태프들을 기리는 '한 자루의 못을 칭찬하는 모임'의 발족에 그녀의 유지가 계승되는 등, 영화 산업 전반에 대한 그녀의 애정과 영향력은 사후에도 이어지고 있다.
6. 기념 및 추모
다카미네 히데코의 사망 이후에도 그녀의 업적을 기리고 추모하는 다양한 행사와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2012년 3월 27일, 도호 스튜디오에서 다카미네 히데코 추모회가 열려 야치구사 카오루, 카가와 쿄코, 다카라다 아키라, 츠카사 요코, 나카무라 메이코, 토다 나호, 시노다 마사히로, 노가미 테루요, 나가야마 아이코 등 약 400명의 관계자가 참석했다. 또한, 생전의 히데코의 유지를 이어받아 영화계에 공헌한 뒷방 스태프들을 표창하는 '한 자루의 못을 칭찬하는 모임'의 발족도 발표되었다.
2014년에는 《키네마 준보》가 발표한 '올타임 베스트 일본 영화 남우·여우' 여배우 부문에서 1위에 올랐다. (남우 부문 1위는 미후네 토시로) 이는 2000년 같은 잡지가 발표한 '20세기 영화 스타' 독자 선정 일본 여배우 부문에서도 1위를 차지한 바 있다.
2024년에는 다카미네 히데코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다카미네 히데코 탄생 100년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도쿄 타워에서는 대규모 특별전 '역경을 극복한 대여배우 다카미네 히데코의 미학'이 개최되어, 그녀의 자필 원고와 일러스트, 애장품, 출연작 포스터 등이 전시되었다. 또한 국립 영화 아카이브에서는 '탄생 100년 다카미네 히데코'라는 제목으로 22편의 작품이 특별 상영되었다. 이 외에도 다양한 전시회, 토크쇼, 상영회 등이 열리며 그녀의 업적을 기리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7. 사망
다카미네 히데코는 2010년 12월 28일 오전 5시 28분, 폐암으로 도쿄도 시부야구의 병원에서 사망했다. 향년 86세였다. 그녀의 죽음은 일본 영화계에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
8. 작품 목록 및 저서
8.1. 영화



다음은 다카미네 히데코가 출연한 주요 영화 목록이다. 굵은 글씨는 키네마 준보 베스트 텐에 랭크인한 작품이다.
{| class="wikitable"
|-
! 연도 !! 제목 !! 역할 !! 감독 !! 비고
|-
| 1929 || 《어머니》 || 하루코 || 노무라 호테이 || 영화 데뷔
|-
| 1930 || 《레뷰의 자매》 || 하지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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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 || 《대도쿄의 한구석》 || 이치로 || 고쇼 헤이노스케 ||
|-
| 1930 || 《미인》 || 소년 이와오 || ||
|-
| 1930 || 《아버지》 || 오쓰나 || ||
|-
| 1930 || 《자매편 어머니》 || 유키코 || ||
|-
| 1931 || 《나의 아빠 엄마를 좋아해》 || 미쓰코 || ||
|-
| 1931 || 《아름다운 사랑》 || 오이토의 친딸 || ||
|-
| 1931 || 《사랑이여 인류와 함께하라》 || 아들 야스오 || 시마즈 야스지로 ||
|-
| 1931 || 《폭풍우의 장미》 || 코이치 || ||
|-
| 1931 || 《여자는 언제나》 || 타로 || ||
|-
| 1931 || 《자매 전후편》 || 루이코 || ||
|-
| 1931 || 《이치타로야 아이》 || 키누 || ||
|-
| 1931 || 《도쿄의 합창》 || 장녀 || 오즈 야스지로 ||
|-
| 1931 || 《미인의 미소》 || 요이치 || ||
|-
| 1932 || 《정열》 || 미츠코의 딸 || ||
|-
| 1932 || 《일곱 개의 바다 전후편》 || 소네 모모요 || ||
|-
| 1932 || 《유쾌한 아가씨》 || 미치코 || ||
|-
| 1932 || 《불여귀》 || 미치코 || ||
|-
| 1932 || 《쥐 도둑 지로키치 해결편》 || 타로키치 || ||
|-
| 1933 || 《뺨을 맞대면》 || 미야코 || ||
|-
| 1933 || 《건달과 해수욕》 || 도시유키 || ||
|-
| 1934 || 《동양의 어머니》 || 시즈코의 어린 시절 || ||
|-
| 1934 || 《살금살금》 || 도시보 || ||
|-
| 1934 || 《그날 밤의 여자》 || 시게코 || 고쇼 헤이노스케 ||
|-
| 1935 || 《어머니의 사랑》 || 하루에 || ||
|-
| 1935 || 《영구의 사랑》 || 히데코 || ||
|-
| 1936 || 《신도 전편 아케미의 권》, 《신도 후편 료타의 권》 || 쿄코 || 고쇼 헤이노스케 ||
|-
| 1937 || 《신부 화투》 || 키쿠에 || ||
|-
| 1937 || 《꽃바구니의 노래》 || 하마코 || ||
|-
| 1937 || 《양인의 정조》 || 무쓰코 || 야마모토 가지로 ||
|-
| 1937 || 《에도코 켄짱》 || 미짱 || ||
|-
| 1937 || 《구경거리 왕국》 || 히데짱 || ||
|-
| 1937 || 《백장미는 피어도》 || 꽃집 딸 || ||
|-
| 1937 || 《아가씨》 || 실업한 선생님의 딸 || ||
|-
| 1938 || 《쓰즈리카타 교시쓰》 || 마사코 || 야마모토 가지로 ||
|-
| 1938 || 《도주로의 사랑》 || 가미무라 다케노스케 || ||
|-
| 1938 || 《무지개 뜨는 언덕》 || 이쓰코 || 오타니 도시유키 || 유리
|-
| 1938 || 《초콜릿과 병사》 || 시게코 || ||
|-
| 1939 || 《아름다운 출발》 || 나쓰코 || ||
|-
| 1939 || 《딸의 소원은 단 하나》 || 히데코 || ||
|-
| 1939 || 《롯파의 뺨 하얀 선생님》 || 히데요 || ||
|-
| 1939 || 《충신장》 || 이치리키 나카이 아구리 || ||
|-
| 1939 || 《히구치 이치요》 || 오구로야 미도리 || ||
|-
| 1939 || 《우리들의 교관》 || 히데코 || ||
|-
| 1939 || 《그 전날 밤》 || 오쓰우 || ||
|-
| 1939 || 《꽃 따는 일기》 || 시노하라 에이코 || ||
|-
| 1939 || 《신편 단게 사젠 외눈의 권》 || 오하루 || ||
|-
| 1940 || 《히데코의 응원단장》 || || ||
|-
| 1940 || 《산들바람 아버지와 함께》 || 히데코 || ||
|-
| 1940 || 《초롱꽃》 || 유미코 || ||
|-
| 1940 || 《에노켄의 손오공》 || 공주님 || ||
|-
| 1941 || 《어제 사라진 남자》 || 오쿄 || ||
|-
| 1941 || 《말》 || 오노다 이네 || 야마모토 가지로 ||
|-
| 1941 || 《아와의 춤추는 아이》 || 오미쓰 || ||
|-
| 1941 || 《여학생기》 || 가마타 사치코 || ||
|-
| 1941 || 《히데코의 차장님》 || 오코마상 || 나루세 미키오 || 나루세 감독과의 첫 작품
|-
| 1942 || 《무사시보 벤케이》 || 우시와카마루 || ||
|-
| 1942 || 《희망의 푸른 하늘》 || 히데코 || ||
|-
| 1942 || 《기다리던 남자》 || 오유키 || ||
|-
| 1942 || 《부계도》 || 다에코 || ||
|-
| 1943 || 《아편 전쟁》 || 레이란 || 마키노 마사히로 ||
|-
| 1943 || 《사랑의 세계 야마네코와 토미 이야기》 || 오다기리 토미 || ||
|-
| 1943 || 《하나코상》 || 치요코상 || ||
|-
| 1943 || 《헤이로쿠 유메모노가타리》 || 괴동녀 || ||
|-
| 1943 || 《젊은 날의 기쁨》 || 다카무라 유코 || ||
|-
| 1944 || 《할머니》 || 마루코 || ||
|-
| 1944 || 《산자쿠 사고요헤이》 || 오타에 || ||
|-
| 1945 || 《승리의 날까지》 || || ||
|-
| 1945 || 《북쪽의 세 사람》 || 마츠모토 요시에 || ||
|-
| 1946 || 《유쾌한 여자》 || 아라이 요코 || 사에키 키요시 ||
|-
| 1946 || 《우라시마 타로의 후예》 || 타츠타 아카코 || ||
|-
| 1946 || 《내일을 만드는 사람들》 || 다카미네 || 구로사와 아키라, 세키가와 히데오, 야마모토 가지로 ||
|-
| 1946 || 《어느 날 밤의 영주》 || 다에코 || 키누가사 테이노스케 ||
|-
| 1946 || 《도호 쇼보트》 || 구두닦이 소년 || ||
|-
| 1947 || 《도호 천일야》 || 다카야마 히데코 || ||
|-
| 1947 || 《오에도의 귀신》 || 하기와라 료 || 하기와라 료 ||
|-
| 1947 || 《사랑이여 별과 함께》 || 시라카와 하루에 || 아베 유타카 ||
|-
| 1947 || 《행복으로의 초대》 || 시이나 히사 || 치바 야스키 ||
|-
| 1948 || 《애정 진단서》 || 아키에 || ||
|-
| 1948 || 《꽃 피는 마치코에서》 || 소네 마치코 || ||
|-
| 1948 || 《365야》 || 고마키 란코 || ||
|-
| 1948 || 《무지개를 안은 처녀》 || 호조 아키코 || ||
|-
| 1949 || 《봄의 장난》 || 오하나 || ||
|-
| 1949 || 《굿 바이》 || 나가이 키누코 || ||
|-
| 1949 || 《긴자 칸칸 아가씨》 || 오아키 || 시마 고지 ||
|-
| 1950 || 《처녀 보물》 || 마키 || ||
|-
| 1950 || 《세설》 || 다에코 || 아베 유타카 ||
|-
| 1950 || 《무네카타 자매》 || 마리코 || 오즈 야스지로 ||
|-
| 1950 || 《전화를 넘어》 || 주옌 || ||
|-
| 1950 || 《사사키 코지로》 || 류큐 아가씨 나미 || ||
|-
| 1951 || 《여인의 수경》 || 나에코 || ||
|-
| 1951 || 《카르멘 고향에 돌아오다》 || 오킨 || 키노시타 케이스케 || 키노시타 감독과의 첫 작품
|-
| 1951 || 《우리 집은 즐거워》 || 장녀 토모코 || 나카무라 노보루 ||
|-
| 1952 || 《아침의 파문》 || 타키모토 아츠코 || ||
|-
| 1952 || 《도쿄의 보조개》 || 미네 쿄코 || ||
|-
| 1952 || 《번개》 || 코모리 키요코 || 나루세 미키오 ||
|-
| 1952 || 《카르멘 순정하다》 || 카르멘 || 키노시타 케이스케 ||
|-
| 1953 || 《여자라는 성 마리의 권·유코의 권》 || 츠키지 마리 || ||
|-
| 1953 || 《굴뚝이 보이는 곳》 || 히가시 센코 || 고쇼 헤이노스케 ||
|-
| 1953 || 《내일은 어느 쪽》 || 미츠요 || ||
|-
| 1953 || 《기러기》 || 오타마 || 도요다 시로 ||
|-
| 1954 || 《두 번째 키스》 || 야마우치 시즈코 || ||
|-
| 1954 || 《여인의 정원》 || 이즈시 요시에 || 키노시타 케이스케 ||
|-
| 1954 || 《스물네 개의 눈》 || 오이시 히사코 || 키노시타 케이스케 ||
|-
| 1954 || 《이 넓은 하늘 어딘가에》 || || 고바야시 마사키 ||
|-
| 1955 || 《부운》 || 코다 유키코 || 나루세 미키오 ||
|-
| 1955 || 《철새는 언제 돌아오나》 || 마치코 || ||
|-
| 1955 || 《먼 구름》 || 테라다 후유코 || ||
|-
| 1955 || 《키스 제3화 '여자들끼리']]》 || 카네다 토모코 || ||
|-
| 1956 || 《신 헤이케 이야기 요시나카를 둘러싼 세 여인》 || 후유히메 || ||
|-
| 1956 || 《아이의 눈》 || 키요코 || ||
|-
| 1956 || 《아내의 마음》 || 토미타 키요코 || 나루세 미키오 ||
|-
| 1956 || 《흐르다》 || 카츠요 || 나루세 미키오 ||
|-
| 1957 || 《구름의 묘비에서 하늘로 가면》 || 사치 || ||
|-
| 1957 || 《거친 여자》 || 오시마 || 나루세 미키오 ||
|-
| 1957 || 《기쁨도 슬픔도 여러 해월》 || 아리사와 키요코 || 키노시타 케이스케 ||
|-
| 1957 || 《풍전등》 || 사토 유리코 || ||
|-
| 1958 || 《잠복》 || 요코카와 사다코 || 노무라 요시타로 ||
|-
| 1958 || 《무호마쓰의 일생》 || 요시오카 요시코 || 이나가키 히로시 ||
|-
| 1960 ||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 || 야시로 케이코 || 나루세 미키오 ||
|-
| 1960 || 《딸·아내·어머니》 || 사카니시 카즈코 || 나루세 미키오 ||
|-
| 1960 || 《피리부는 강》 || 오케이 || 키노시타 케이스케 ||
|-
| 1961 || 《이름도 없이 가난하고 아름답게》 || 카타야마 아키코 || 마쓰야마 젠조 ||
|-
| 1961 || 《인간의 조건 제5·6부》 || 피난민 여성 || 고바야시 마사키 ||
|-
| 1961 || 《아내로서 여자로서》 || 니시가키 미호 || 나루세 미키오 ||
|-
| 1961 || 《영원한 사람》 || 사다코 || 키노시타 케이스케 ||
|-
| 1962 || 《여인의 자리》 || 이시카와 요시코 || 나루세 미키오 ||
|-
| 1962 || 《산하가 있다》 || 이노우에 키시노 || ||
|-
| 1962 || 《두 사람이 걸었던 몇 년》 || 노나카 토라에 || 키노시타 케이스케 ||
|-
| 1962 || 《방랑기》 || 하야시 후미코 || 나루세 미키오 ||
|-
| 1962 || 《어슬렁어슬렁 이야기》 || 쿠와타 코마코 || 마쓰야마 젠조 ||
|-
| 1963 || 《여자의 역사》 || 시미즈 노부코 || 나루세 미키오 ||
|-
| 1964 || 《흐트러지다》 || 모리타 레이코 || 나루세 미키오 ||
|-
| 1964 || 《나는 한 알의 밀이 되리라》 || 네모토 린코 || 마쓰야마 젠조 ||
|-
| 1965 || 《로쿠조 유키야마 쓰무기》 || 로쿠조 이네 || 마쓰야마 젠조 ||
|-
| 1966 || 《뺑소니》 || 반나이 쿠니코 || ||
|-
| 1967 || 《이름도 없이 가난하고 아름답게 속편 아버지와 아들》 || 카타야마 아키코 || 마쓰야마 젠조 ||
|-
| 1967 || 《하나오카 세이슈의 아내》 || 오쓰기 || 마스무라 야스조 ||
|-
| 1969 || 《귀신이 사는 저택》 || 카에데 || ||
|-
| 1973 || 《황홀한 사람》 || 다치바나 아키코 || 도요다 시로 ||
|-
| 1976 || 《스리랑카의 사랑과 이별》 || 자카란타 부인 || ||
|-
| 1976 || 《두 사람의 이다》 || 스가와 키쿠에 || ||
|-
| 1976 || 《울면서 웃는 날》 || 나카이 유키코 || ||
|-
| 1979 || 《충동 살인 아들아》 || 카와세 유키에 || 키노시타 케이스케 || 마지막 영화 출연작
|}
8.2. 텔레비전 드라마
- 도호 시바 일요극장 (TBS)
- 제578회 '들뜬 고양이' (1968년)
- 제583회 '비녀 마치코' (1968년)
- 제605회 '너는 지금 어디에 있니' (1968년)
- 제632회 '아사키 유메미시' (1969년)
- 제674회 '아버지와 어머니의 아이' (1969년)
- 제686회 '바다는 푸른가' (1970년)
- 제735회 '일필계상합니다' (1971년)
- 제786회 '속삭인다면 사랑을' (1972년)
- 제863회 '비 오는 날의 사랑' (1973년)
- 제891회 '봄의 이별' (1974년)
- 제948회 '부엌의 소리' (1975년)
- 제999회 '어머니의 기다림' (1976년)
- 제1099회 '흘러가는 나날' (1978년)
- 《오시쿠라만쥬》 (1968년, 후지 TV)
- 폴라 명작극장 / 《싸라기눈》 (1969년, TV 아사히)
- 화요극장 / 《미소》 (1975년, 니혼 TV) - 콘노 유미
- 《낙일불타》 (1976년, TV 아사히) - 히로타 시즈코
- 목요 골든 드라마 / 《살아가다》 (1980년, 요미우리 TV)
8.3. 기타 방송 활동
- 오가와 히로시 쇼 (후지 TV) - '다카미네 히데코 대담' 진행
- 제173회 NHK 빅쇼 (NHK 종합)
- 인생에 역사가 있다 (TV 도쿄) - 689회 '다카미네 히데코 여배우 생활 50년 그 긴 여정'
8.4. 광고
- 타파웨어 (1963년)
- 다나베 제약
- 아지노모토 '하이미' (1980년)
- 깃코만 '사시미 간장'
8.5. 저서
- 《파리 혼자 걷기》, 영화세계사, 1953년 / 신초샤, 2011년 11월
- 《달팽이》, 영화세계사, 1955년 / 신초샤, 2011년 11월
- 《나의 인터뷰》, 주오코론샤, 1958년 / 신초샤, 2012년 6월
- 《병 속》, 분카 출판국, 1972년 / 가와데 쇼보 신샤, 2014년 4월
- 《나의 생애 일기 상하》, 아사히 신문사, 1976년 / 분슌 문고, 1998년 3월 / 신초 문고, 2012년 1월
- 《한 마리 벌레》, 시오 출판사, 1978년 10월 / 분슌 문고, 2011년 10월
- 《쓰즈리카타 파리》, 시오 출판사, 1979년 7월 / 주코 문고, 2014년 10월
- 《좋은 것을 찾았다》, 시오 출판사, 1980년 10월 / 슈에이샤 문고, 1986년 2월
- 《부엌의 오케스트라》, 시오 출판사, 1982년 6월 / 신초샤, 2012년 7월
- 《코튼이 좋아》, 시오 출판사, 1983년 10월 / 분슌 문고, 2003년 1월
- 《인정 이야기 마쓰타로》, 시오 출판사, 1985년 2월 / 분슌 문고, 2004년 1월
- 《나의 우메하라 류자부로》, 시오 출판사, 1987년 2월 / 분슌 문고, 1997년 10월
- 《길을 여는 여성들 마루타 요시로 대담집》(저자: 마루타 요시로, 나카네 치에, 마에바시 데이코, 이마이 미치코, 오타 토모코, 다카미네 히데코, 편집: 카오) (1987년 12월 1일, 소치샤)
- 《맛있는 인간》, 시오 출판사, 1992년 5월 / 분슌 문고, 2004년 7월
- 《시노바즈의 여자》, 시오 출판사, 1994년 10월 / 주코 문고, 2012년 5월
- 《인간 벼룩시장》, 분게이슌주, 1997년 1월 / 신초샤, 2013년 1월
- 《인간의 배꼽》, 분게이슌주, 1998년 5월 / 신초샤, 2012년 1월
- 《인간 주소록》, 분게이슌주, 2002년 7월 / 분슌 문고, 2005년 7월
- 《여행 일기 유럽 두 사람 삼각》, 신초샤, 2013년 3월 / 치쿠마 문고, 2016년 6월
;마쓰야마 젠조와의 공저
- 《여행은 동반자 간다라》, 시오 출판사, 1979년 5월 / 주코 문고, 2012년 1월
- 《여행은 동반자 투탕카멘》, 시오 출판사, 1980년 6월 / 주코 문고, 2012년 3월
- 《여행은 동반자 아로하 오에》, 시오 출판사, 1982년 12월 / 주코 문고 (개제: 《여행은 동반자 아로하 하와이》), 2011년 11월
- 《여행은 동반자 설월화》, 분카 출판국, 1986년 6월 / 허스트 부인화보사, 2012년 3월
8.6. 음반
- '담배 가게 아가씨' (1941년) 작사: 시미즈 미노루, 작곡: 요네야마 마사오 폴리도르 레코드
- '숲의 물레방아' (1942년) 작사: 시미즈 미노루, 작곡: 요네야마 마사오 다이토아 레코드
- '노래하라 야마비코' (1943년) 작사: 소노 히사시, 작곡: 스즈키 세이이치 다이토아 레코드
- '긴자 칸칸 아가씨' (1949년) 작사: 사에키 다카오, 작곡: 핫토리 료이치 빅터 레코드
- '카르멘 고향에 돌아오다' (1951년) 작사: 키노시타 츄지, 작곡: 마유즈미 토시로 빅터 레코드
8.7. 관련 인물 및 단체
- 마쓰야마 젠조
- 키노시타 케이스케
- 나루세 미키오
- 오즈 야스지로
- 도요다 시로
- 고쇼 헤이노스케
- 이치카와 곤
- 구로사와 아키라
- 사다 케이지
- 다나카 키누요
- 하라 세츠코
- 스기무라 하루코
- 나카무라 메이코
- 사이토 아케미
- 쇼치쿠 키네마
- 쇼치쿠 오프나 촬영소
- 피 시 엘 영화 제작소
- 도호 영화
- 신토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