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킬페리쿠스 1세는 561년부터 584년까지 네우스트리아의 왕으로 재위했던 메로베우스 왕조의 군주입니다. 프랑크 왕국의 왕 클로타르 1세와 왕비 아레군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아버지 사후 형제들과의 치열한 영토 분쟁 속에서 자신의 왕국을 확립했습니다. 특히 이복형 시게베르트 1세와의 갈등은 그의 통치 기간 내내 지속되었으며, 이는 왕국 전반에 걸쳐 피비린내 나는 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킬페리쿠스 1세는 폭력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통치자로 비판받았으며, 특히 투르의 그레고리우스는 그를 "당대의 네로와 헤로데 대왕"이라 칭하며 그의 잔혹성과 교회 재산 몰수, 비성직자 주교 임명 등을 강하게 비난했습니다. 그는 갈스빈타 왕비의 살해와 유대인 강제 개종 정책으로 인해 소수자 인권 문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킬페리쿠스는 문화와 지식에 대한 관심을 보였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는 시를 창작하고 음악적 재능을 가졌으며, 프랑크 문자를 개혁하려 시도했습니다. 또한 살리카 법이 여성에게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완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여 사회 정의와 여성 보호에 대한 진보적인 시각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킬페리쿠스 1세는 584년 사냥에서 돌아오던 중 암살당하며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했습니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2.1. 출생과 부모
킬페리쿠스 1세는 539년경에 태어났습니다. 그는 프랑크 왕국의 왕 클로타르 1세와 왕비 아레군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입니다.
2.2. 왕위 계승과 영토 분할

561년 아버지 클로타르 1세가 사망하자, 킬페리쿠스는 곧바로 왕국 전체를 차지하려 시도했습니다. 그는 왕실 도시 베르니에 축적된 보물을 압수하고 파리에 입성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형제들인 카리베르트 1세, 군트람, 시게베르트 1세는 그에게 왕국을 분할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이 분할로 킬페리쿠스는 수아송을 중심으로 아미앵, 아라스, 캉브레, 테루안, 투르네, 불로뉴쉬르메르 지역을 할당받았습니다. 카리베르트 1세는 파리를, 군트람은 수도 오를레앙을 포함한 부르군트를, 시게베르트 1세는 아우스트라시아를 받았습니다.

567년 카리베르트 1세가 사망하자, 형제들은 그의 왕국을 다시 분할하며 킬페리쿠스의 영토는 더욱 확장되었습니다. 이들은 파리와 그 주변 영토를 공유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일본어 자료에 따르면, 킬페리쿠스는 파리 영토의 3분의 1과 함께 리모주, 카오르, 보르도, 베아른, 비고르 등의 도시와 피레네 지방을 상속받았습니다.
3. 통치와 정치 활동
3.1. 형제들과의 분쟁

킬페리쿠스는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시게베르트와 전쟁을 벌였으며, 이들은 오랫동안 적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이 갈등은 시게베르트가 판노니아 아바르족에 대항하여 원정을 떠났을 때 시작되었습니다. 시게베르트가 자신의 영토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틈을 타 킬페리쿠스는 랭스를 공격하여 점령했습니다. 그러나 시게베르트는 곧 돌아와 랭스를 되찾고 수아송으로 진격하여 킬페리쿠스를 격파하고 그의 장남 테우데베르트를 투옥했습니다.


567년 카리베르트의 사망과 함께 전쟁은 다시 격화되었습니다. 킬페리쿠스는 즉시 시게베르트의 새로운 영토를 침공했지만, 시게베르트에게 다시 패배했습니다. 573년, 킬페리쿠스는 군트람과 동맹을 맺어 시게베르트와 맞섰으나, 군트람은 라인강 너머에서 시게베르트가 모은 대규모 군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입장을 바꾸었습니다. 시게베르트는 킬페리쿠스의 강력한 방어선을 우회하기 위해 부르군트를 통과했고, 킬페리쿠스는 다시 전쟁에서 패했습니다.



575년 12월 초, 시게베르트는 프레데군트의 사주를 받은 두 명의 암살자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당시 시게베르트는 투르네와 루앙에서 킬페리쿠스를 포위하여 궁지에 몰아넣고 있었으며, 킬페리쿠스의 아들 테우데베르트는 파리 근처에서 사망했습니다. 시게베르트가 불법적으로 파리에 입성하여 도시를 장악한 직후였습니다. 시게베르트의 죽음 이후, 킬페리쿠스는 시게베르트의 아내와 아들의 보호자였던 군트람과 전쟁을 벌였습니다. 킬페리쿠스는 시게베르트 편에 섰던 귀족들의 충성을 얻어냈고, 아우스트라시아로부터 투르와 푸아티에, 그리고 생트를 포함한 아키텐의 일부 지역과 오베르뉴 영토를 빼앗았습니다. 오베르뉴에서는 군트람을 섬기던 뭄몰에 대항하여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킬페리쿠스는 또한 힐데베르트 2세의 미성년 기간 동안 동부 왕국에 불화를 조장했습니다.
3.2. 브르타뉴 원정

578년, 킬페리쿠스는 빌렌강을 따라 브로베네드의 브르타뉴 통치자 바로흐 2세에 대항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습니다. 프랑크 군대는 푸아투, 투렌, 앙주, 멘, 바유 출신 부대로 구성되었습니다. 특히 바유 출신인 바이오카센세스(Baiocassenses)는 색슨족이었는데, 그들은 브르타뉴인들에게 패배했습니다. 양측 군대는 바로흐가 항복하고 반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며 아들을 인질로 보내고 연간 조공을 바치기로 동의할 때까지 3일간 싸웠습니다. 바로흐는 나중에 맹세를 어겼지만, 브르타뉴에 대한 킬페리쿠스의 지배력은 베난티우스 포르투나투스가 그의 시에서 이를 기념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비교적 안정적이었습니다.
4. 결혼과 가족
4.1. 첫 번째 결혼과 자녀
킬페리쿠스 1세의 첫 번째 결혼은 오도베라와 이루어졌으며, 그들 사이에는 다섯 명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 테우데베르트 (573년 전사)
- 메로베크 (577년 하인에게 부탁하여 살해당함) - 숙모이자 시누이인 브룬힐다와 결혼하여 아버지의 적이 되었습니다.
- 클로비스 (580년 프레데군트에 의해 암살당함)
- 바시나 (590년 이후 사망) - 수녀였으며 푸아티에 수도원에서 반란을 주도했습니다.
- 힐데신다 (이질로 요절)
4.2. 두 번째 결혼과 갈스빈타의 죽음
시게베르트가 서고트족 왕 아타나길드의 딸인 브룬힐다와 결혼하자, 킬페리쿠스 또한 화려한 결혼을 원했습니다. 그는 이미 첫 부인 오도베라를 버리고 하녀 프레데군트를 첩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이에 그는 프레데군트를 잠시 내치고 브룬힐다의 언니인 갈스빈타와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 새 배우자에게 싫증을 느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갈스빈타는 침대에서 목이 졸려 살해된 채 발견되었습니다. 며칠 후 킬페리쿠스는 프레데군트와 결혼했습니다.
이 살인은 킬페리쿠스와 시게베르트 사이에 길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원인이 되었으며, 이 전쟁은 종종 휴전으로 중단되기도 했습니다. 일본어 자료에 따르면, 갈스빈타의 살해는 프랑크인의 관습에 따라 시게베르트가 "피의 복수"를 요구하게 만들었으며, 군트람이 중재에 나섰습니다. 대규모 민회가 열려 살리카 법에 따라 리모주, 카오르, 보르도, 베아른, 비고르 등의 도시가 아우스트라시아 왕비인 브룬힐다의 소유가 되도록 결정되었습니다. 이 짧은 두 번째 결혼에서 자녀는 없었습니다.
4.3. 프레데군트와의 관계와 자녀

킬페리쿠스는 568년경 첩이었던 프레데군트와 재혼하여 여섯 명의 적법한 자녀를 두었습니다.
- 리가운트 (569년경 출생 - 589년 이후 사망) - 레카레드와 약혼했으나 결혼하지 못했습니다.
- 클로데베르트 (570/72년경 출생 - 580년 사망) - 요절했습니다.
- 삼손 (573년경 출생 - 577년 말 사망) - 요절했습니다.
- 다고베르트 (579/80년경 출생 - 580년 사망) - 요절했습니다.
- 테우데리크 (582년경 출생 - 584년 사망) - 요절했습니다.
- 클로타르 2세 (584년 9월 이전 출생 - 629년 10월 18일 사망) - 킬페리쿠스의 뒤를 이어 네우스트리아의 왕이 되었으며, 후일 프랑크족의 유일한 왕이 되었습니다.
5. 문화 및 지적 활동
5.1. 문학, 음악 및 언어 개혁

킬페리쿠스는 문화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상당한 재능을 가진 음악가였으며, 코엘리우스 세둘리우스의 시를 본떠 시를 썼습니다. 또한 프랑크 문자를 개혁하려는 시도도 했습니다.
5.2. 법률 개혁 시도
그는 살리카 법이 여성에게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완화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는 당시 사회에서 여성의 권리를 개선하려는 중요한 시도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6. 종교적 견해와 논란
6.1. 삼위일체 교리 논쟁
킬페리쿠스는 삼위일체에 대한 새로운 교리를 가르치려 시도했으며, 이는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의 반대를 샀습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그레고리우스가 킬페리쿠스를 싫어한 정도에 대해 이견을 보입니다.
6.2. 유대인 강제 개종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킬페리쿠스는 유대인에 대한 강제 개종 정책을 시행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소수자 인권 문제와 관련하여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7. 사망
7.1. 암살

584년 9월, 킬페리쿠스는 셸의 왕실 별장에서 사냥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미상의 암살자에 의해 칼에 찔려 살해당했습니다. 그는 파리의 생뱅상 대성당(후에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에 통합됨)에 묻혔습니다. 일본어 자료에 따르면, 암살자는 시종 에베룰프로 선언되었고, 그의 영지는 몰수되었다고 합니다.
8. 평가와 유산
8.1. 동시대의 평가 (투르의 그레고리우스)
킬페리쿠스에 대한 대부분의 정보는 투르의 그레고리우스가 쓴 《프랑크인의 역사》에서 비롯됩니다. 그레고리우스는 킬페리쿠스를 몹시 싫어했으며, 그를 "당대의 네로와 헤로데 대왕" (VI.46)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킬페리쿠스가 투르를 아우스트라시아에서 빼앗고,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며, 성직자가 아닌 궁정 백작들을 주교로 임명하는 등의 행동으로 그레고리우스의 분노를 샀기 때문입니다.
8.2. 역사적 비판
킬페리쿠스는 장 폴 로랑의 그림에서 폭군으로 묘사되는 등 그의 통치 방식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존재합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비잔티움 제국의 형벌인 눈알 파내기가 도입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갈스빈타의 살해, 유대인 강제 개종 정책 등은 그의 통치에 대한 주요 비판점입니다.
8.3. 긍정적 평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킬페리쿠스는 문화적인 기여를 한 인물로 평가됩니다. 그는 재능 있는 음악가이자 시인이었으며, 프랑크 문자를 개혁하려 시도했습니다. 특히 살리카 법이 여성에게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완화하려 노력한 점은 사회 정의 및 소수자(여성) 보호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또한 브르타뉴에 대한 그의 지배력은 비교적 안정적이었습니다.
9. 영향
킬페리쿠스 1세의 통치는 그의 아들 클로타르 2세가 네우스트리아의 왕위를 계승하고, 이후 프랑크족의 유일한 왕이 되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비잔티움 제국의 형벌인 눈알 파내기가 도입되는 등 일부 정책은 후대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습니다.
10. 어원
킬페리쿠스(Chilperic영어)라는 이름은 프랑크어로 "강력한 지지자"를 의미합니다. 이는 독일어의 "도움이 되는"이라는 뜻의 hilfreich독일어와 유사하며, "도움"을 뜻하는 Hilfe독일어와 "부유한" 또는 "강력한"을 뜻하는 reich독일어에서 유래했습니다.
11. 문화적 참조
킬페리쿠스를 주제로 한 오페레타 《킬페리크》는 에르베가 작곡했으며, 1864년에 초연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