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키몬(Κίμων Μιλτιάδου Λακιάδης키몬 밀티아두 라키아데스고대 그리스어 (1453년 이전), 약 기원전 510년 ~ 기원전 450년)은 고대 아테네의 저명한 정치가이자 스트라테고스(장군 겸 제독)였다. 마라톤 전투의 영웅인 밀티아데스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제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가 강력한 해상 제국으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살라미스 해전에서의 용맹함으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델로스 동맹의 결성 및 지휘를 주도하여 에이온 공성전, 스키로스 정복, 에우리메돈 강 전투 등 여러 주요 군사 작전에서 페르시아에 대한 승리를 이끌었다.
군사적 업적과는 별개로, 키몬은 아테네 정치에서 귀족주의를 지지하고 아테네 민주주의의 확장을 추구하는 민주파에 반대하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는 스파르타와의 협력을 강조하는 라코필리아 정책을 옹호했으며, 헤일로타이 반란 당시 스파르타에 대한 군사 지원을 주도했으나, 이로 인한 굴욕적인 결과로 인해 도편 추방을 당하기도 했다. 키몬의 정치적 보수주의는 에피알테스와 페리클레스가 주도한 민주적 개혁에 대한 반대로 이어졌으며, 이는 당시 아테네 사회의 정치적 갈등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그의 생애는 아테네가 페르시아 전쟁 이후 해상 강국으로 부상하는 과정과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격동의 시기를 대변한다.
2. 생애
키몬은 기원전 510년경 아테네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군사적, 정치적 격동기를 거치며 아테네의 주요 인물로 성장했다.
2.1. 어린 시절과 가문 배경
키몬은 기원전 510년경 아테네의 명문 귀족 가문인 필라이다이 가문의 일원으로 라키아다이 데메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고대 올림픽에서 네 마리 말이 끄는 전차 경주에서 세 번 우승한 키몬 코알레모스였으며, 그는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아들들에게 암살당했다. 키몬의 아버지는 마라톤 전투의 영웅인 유명한 아테네 장군 밀티아데스였고, 어머니는 트라키아의 왕 올로로스의 딸이자 역사가 투키디데스의 친척인 헤게시필레였다.
키몬이 젊은 시절, 그의 아버지 밀티아데스는 파로스섬 공략 실패로 인해 국가에 대한 반역죄로 고발되어 50 탈렌트의 막대한 벌금을 선고받았다. 밀티아데스는 이 금액을 지불할 수 없어 투옥되었고, 기원전 489년 감옥에서 사망했다. 키몬은 이 빚을 상속받았으며, 아버지의 시신을 매장하기 위해 미결된 아버지의 징역형 일부를 대신 수행해야 했다고 디오도로스는 기록했다. 가장으로서 그는 이복 누이 또는 누이인 엘피니케를 돌봐야 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부유한 칼리아스가 엘피니케와의 결혼을 조건으로 키몬의 빚을 갚아주겠다고 제안했고, 키몬은 이에 동의했다.
2.2. 결혼 및 가족 관계
키몬은 칼리아스와 결혼하기 전 그의 누이 또는 이복 누이인 엘피니케와 결혼했거나 관계를 맺었다는 기록이 반복해서 언급되는데, 이는 단순한 정치적 비방의 유산일 수 있다. 엘피니케 자신도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평판이 있었다. 이후 키몬은 메가클레스의 손녀이자 알크메오니다이 가문의 일원인 이소디케와 재혼했다. 그들의 첫 자녀는 쌍둥이 아들인 라케다이모니오스(훗날 아테네의 지휘관이 됨)와 엘레우스였고, 세 번째 아들은 테살로스(훗날 정치가가 됨)였다.
알크메오니다이 가문, 칼리아스 가문, 그리고 키몬 가문은 모두 아테네를 대표하는 대귀족 가문이었으며, 키몬이 관여한 이 두 번의 결혼은 페르시아 전쟁에서의 활약으로 아테네의 최고 권력자가 된 테미스토클레스에 대항하기 위한 귀족 세 가문의 연합으로 해석된다. 귀족파의 아리스티데스의 도움으로 귀족 연합의 중심에 선 키몬은 테미스토클레스에 대한 대항마가 되었다. 특히 키몬이 아들들의 이름을 라케다이모니오스(라케다이몬 사람), 엘레우스(엘리스 사람), 테살로스(테살리아 사람)와 같이 외래적인 의미를 가진 이름으로 지은 것에 대해 페리클레스는 그의 외래 문화에 대한 동경을 비판하기도 했다.
젊은 시절 키몬은 방탕하고 술을 많이 마시며 무뚝뚝하고 세련되지 못하다는 평판이 있었다. 이러한 특성에서 그는 아테네인이라기보다는 스파르타인에 더 가깝다는 말이 있었다.
2.3. 군사 경력
키몬은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의 해상 패권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여러 주요 군사 작전을 지휘하며 뛰어난 군사적 역량을 보여주었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키몬은 용감함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기원전 479년 스파르타에 파견된 사절단의 일원이었다.
기원전 478년에서 기원전 476년 사이에 에게해 주변의 여러 그리스 해양 도시들은 다시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기를 원치 않아 델로스에서 아리스티데스를 통해 아테네에 충성을 맹세했다. 그곳에서 델로스 동맹이 결성되었고, 키몬이 그들의 주요 지휘관이 되기로 합의되었다. 스트라테고스(장군)로서 키몬은 기원전 463년까지 동맹의 대부분의 작전을 지휘했다. 이 기간 동안 그와 아리스티데스는 비잔티움에서 파우사니아스가 이끄는 스파르타군을 몰아냈다.
키몬은 또한 스트리몬강 유역의 에이온을 페르시아 장군 보게스로부터 점령했다. 에이온 점령 후 주변의 다른 해안 도시들도 그에게 항복했지만, 도로스쿠스는 예외였다. 그는 또한 스키로스를 정복하고 그곳을 근거지로 삼던 해적들을 축출했다. 귀국길에 그는 신화 속 영웅 테세우스의 "뼈"를 아테네로 가져왔다. 이 업적을 기념하여 아테네 주변에 세 개의 헤르마 조각상이 세워졌다.

기원전 466년경, 키몬은 소아시아로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확대하여 팜필리아의 에우리메돈강에서 벌어진 에우리메돈 강 전투에서 페르시아 함대와 육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했다. 키몬의 육해군은 페르시아 진영을 점령하고 페니키아인들이 운용하던 200척의 삼단노선으로 구성된 페르시아 함대 전체를 파괴하거나 나포했다. 그는 또한 근처에 1만 명의 정착민과 함께 암피폴리스라는 아테네 식민지를 건설했다. 이후 리키아-팜필리아 국경의 무역 도시 파셀리스와 같이 많은 새로운 도시들이 델로스 동맹에 가입했다.
일부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키몬이 에우리메돈 강 전투에서의 승리 후 소아시아에서 동맹과 페르시아 사이에 평화를 협상했다는 견해가 있다. 이는 그의 처남인 칼리아스가 기원전 450년에 협상한 칼리아스 평화 조약이 때때로 "키몬의 평화"라고 불리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데, 칼리아스의 노력이 키몬의 이전 조약을 갱신하는 데 기여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키몬은 페르시아 전쟁 동안 아테네를 위해 훌륭하게 봉사했으며,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전쟁이 요구하는 모든 자질에서 그는 테미스토클레스와 그의 아버지 밀티아데스에게 전혀 뒤지지 않았다."
소아시아에서의 성공 이후, 키몬은 트라키아의 케르소네소스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그는 현지 부족들을 진압하고 기원전 465년에서 기원전 463년 사이에 타소스인들의 반란을 종결시켰다. 타소스는 트라키아 내륙과의 무역 경쟁, 특히 금광 소유권을 둘러싸고 델로스 동맹에 반기를 들었다. 키몬이 이끄는 아테네 함대가 타소스 함대를 격파한 후, 아테네는 타소스 시를 포위했다. 타소스인들은 스파르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지진으로 인해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기원전 463년 키몬은 페리클레스에 의해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1세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로 기소되었다.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따르면, 재판에서 페리클레스는 "키몬에게 매우 온화했으며, 한 번만 기소 발언을 했다." 키몬은 자신을 변호하며, 자신이 이오니아나 테살리아의 부유한 왕국으로 사절로 간 적이 없으며, 오히려 스파르타로 사절로 가서 그들의 검소함을 사랑스럽게 모방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자신을 부유하게 한 것이 아니라 적에게서 얻은 전리품으로 아테네를 부유하게 했다고 주장했다. 결국 키몬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일본어 기록에 따르면, 엘피니케가 페리클레스에게 키몬을 변호해달라고 부탁하여 무죄를 얻는 데 기여했다고 한다.
키프로스 원정은 키몬이 사망한 마지막 군사 활동이었다. 그는 기원전 451년 아테네로 돌아온 후, 페르시아 함대가 반란을 일으킨 키프로스를 향해 움직이자, 페르시아와 싸우기 위한 원정을 제안했다. 그는 페리클레스의 지지를 얻어 200척의 델로스 동맹 삼단노선을 이끌고 키프로스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는 카리티미데스 제독 휘하의 60척의 함선을 나일강 삼각주에서 이나로스 2세의 이집트 반란을 돕기 위해 이집트로 보냈다. 키몬은 남은 함선들을 사용하여 키프로스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봉기를 지원했다.
2.4. 정치 경력 및 사상
키몬은 아테네 정치에서 귀족주의를 옹호하고 민주주의 개혁에 반대하는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민주파 인사들과 대립했다.
라코필리아 성향을 가진 키몬은 아테네에서 스파르타의 프록세노스(외국인 대표자) 역할을 했으며, 두 국가 간의 협력 정책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스파르타를 너무 좋아하여 아들 중 한 명의 이름을 라케다이모니오스라고 지었다. 기원전 462년, 키몬은 아테네 시민들에게 스파르타를 돕기 위한 지원을 제공할 것을 설득했다. 비록 에피알테스는 스파르타가 아테네의 권력 경쟁자이므로 스스로 해결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키몬의 견해가 우세했다. 키몬은 4,000명의 중장보병을 이끌고 이토메산으로 가서 스파르타 귀족들이 헤일로타이의 대규모 반란(제3차 메세니아 전쟁)에 대처하는 것을 도왔다. 그러나 이 원정은 키몬과 아테네에게 굴욕으로 끝났다. 스파르타인들은 아테네인들이 헤일로타이 편에 설 것을 두려워하여, 아테네군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이는 중대한 외교적 모욕이었다. 스파르타는 아테네군이 도리아인이 아니며 "용기와 혁신의 기풍"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그들을 필요 없다고 표면적으로는 말하며 돌려보냈다.

이러한 모욕적인 거절은 아테네에서 키몬의 인기가 급락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 결과 그는 기원전 461년부터 10년 동안 아테네에서 도편 추방되었다. 그의 이름이 적힌 많은 오스트라콘이 남아있는데, 그 중에는 "밀티아데스의 아들 키몬, 그리고 거만한 그의 누이 엘피니케도"라는 악의적인 비문이 새겨진 것도 있었다.
키몬의 추방 이후, 개혁가 에피알테스는 아테네를 이끌게 되었고, 페리클레스의 지지를 받아 전직 아르콘들로 채워져 과두정의 거점이었던 아테네의 아레오파고스 회의의 권한을 축소했다. 권력은 시민들, 즉 오백인 평의회, 민회, 그리고 민중 법정으로 이전되었다. 키몬의 친스파르타 정책과 페르시아와의 평화 시도 등 일부 정책은 뒤집혔다.
기원전 458년, 키몬은 타나그라 전투에서 스파르타와의 싸움을 돕기 위해 아테네로 돌아가려 했으나 거절당했다.
결국, 기원전 451년경 키몬은 아테네로 돌아왔다. 그는 한때 누렸던 권력의 수준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지만, 아테네를 대표하여 스파르타와 5년간의 휴전 협정을 맺을 수 있었다.
2.5. 아테네 재건
키몬은 수많은 군사적 업적과 델로스 동맹을 통해 얻은 자금으로 아테네 전역에서 많은 건설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했다. 이러한 프로젝트들은 아케메네스 제국의 아테네 파괴 이후 도시를 재건하는 데 절실히 필요했다. 그는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와 아테네 주변 성벽의 확장을 명령했으며, 공공 도로, 공공 정원, 그리고 많은 정치 건물의 건설을 감독했다.
2.6. 죽음
키몬은 기원전 450년 키프로스섬 남서부 해안에 위치한 페니키아 및 페르시아 제국의 요새인 키티온을 포위했다. 그는 이 실패한 시도 도중 또는 직후 사망했는데, 사망 원인은 기록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아테네군에게 비밀로 유지되었으며, 아테네군은 이후 그의 '지휘' 아래 키프로스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에 대한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훗날 아테네에 묻혔으며,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3. 역사적 평가 및 영향
키몬의 생애와 활동은 아테네의 군사적 성공과 정치적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보수적인 정치적 성향은 민주주의의 진전과 대립하며 다양한 평가를 받았다.
3.1. 주요 업적 및 긍정적 평가
키몬은 아테네의 군사적 성공과 외교 정책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의 외교 정책은 두 가지 원칙에 기반을 두었다. 첫째, 페르시아의 침략에 대한 지속적인 저항이었다. 이는 그리스에 대한 직접적인 페르시아 군사 침략을 사실상 종식시키는 데 기여했다. 둘째, 아테네가 그리스의 지배적인 해상 강국이 되고 스파르타가 지배적인 육상 강국이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었다. 이러한 원칙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발발을 상당히 지연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는 생전에 매우 관대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자신의 농지에 울타리를 설치하지 않아 사람들이 원하는 만큼 수확물을 가져갈 수 있게 했으며, 식사를 제공하는 등 공공 정신을 보여주었다. 코르넬리우스 네포스에 따르면, 그의 재산의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3.2. 비판과 논란
키몬은 아테네에서 상당한 인기와 영향력을 누렸던 시기에도 그의 국내 정책은 일관되게 반민주적이었으며, 이러한 정책은 궁극적으로 실패로 끝났다. 그는 귀족주의적 성향으로 인해 민주주의 진전에 반대했으며, 이는 에피알테스와 페리클레스가 주도한 개혁에 대한 대립으로 이어졌다.
스파르타의 헤일로타이 반란 지원을 위해 파견된 아테네군이 스파르타로부터 굴욕적으로 귀환 명령을 받은 사건은 키몬의 정치적 신뢰도를 크게 실추시켰다. 이 사건은 그의 친스파르타 정책이 아테네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가 되었다.
또한 키몬은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1세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으로 기소되기도 했다. 비록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이러한 혐의는 그의 정치적 청렴성에 대한 논란을 야기했다. 그의 누이 엘피니케와의 관계에 대한 소문과 그녀의 문란한 평판 또한 정치적 비방의 대상이 되었다. 아들들의 이름을 외래적인 의미를 가진 이름으로 지은 그의 외래 문화에 대한 동경은 페리클레스와 같은 민주파 인사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