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성 클로틸드는 474년 또는 475년에 태어나 544년 또는 545년에 사망한 프랑크 왕국의 왕비이자 가톨릭 성인이다. 그녀는 부르군트 왕국의 공주로 태어나 클로비스 1세와 결혼하였으며, 프랑크 왕국을 이교에서 가톨릭 신앙으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클로틸드는 남편 클로비스 1세의 개종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으며, 이는 톨비악 전투 후 클로비스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프랑크 왕국의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클로비스 1세 사후, 클로틸드는 정치적 분쟁에서 벗어나 투르로 은퇴하여 경건한 삶을 살았으며, 기도와 자선 활동, 교회 및 수도원 설립에 헌신했다. 그녀는 성 사도 교회(훗날 생 제네비에브 수도원으로 알려짐)를 공동 설립하고 자녀들을 기독교 신앙으로 양육하는 데 힘썼다. 비록 자녀들 간의 비극적인 분쟁과 손자들의 죽음을 막지 못했으나, 그녀는 성인으로서 공경받으며 노르망디의 절름발이와 레장들리의 수호성인이자 급사와 사악한 남편으로부터 보호하는 성인으로 추앙받는다. 그녀의 축일은 6월 3일이며, 프랑스에서는 6월 4일로 기념된다.
2. 초기 생애와 배경
클로틸드는 부르군트 왕실의 일원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가톨릭 신앙을 접하며 성장했다. 그녀의 초기 생애는 부르군트 왕국의 복잡한 정치적, 종교적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2.1. 출생과 가족
클로틸드는 474년경 또는 475년경 부르군트 왕국의 리옹에서 부르군트 왕 힐페리히 2세와 크레테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부르군트의 왕 군디오크였다. 군디오크 사후, 부르군트 왕국은 그의 네 아들인 군도바트, 힐페리히 2세, 군데마르, 고데기셀 사이에 분할 통치되었다. 힐페리히 2세는 리옹을, 군도바트는 비엔을, 고데기셀은 제네바를 통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힐페리히 2세는 493년에 자신의 형제인 군도바트에 의해 살해당했고, 클로틸드의 어머니 크레테나는 목에 돌이 매달려 물에 익사했다고 전해진다. 두 딸 중 언니인 크로나는 수녀가 되었고, 클로틸드는 유배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사실이 왜곡되거나 과장된 서사일 수 있다는 논란이 있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를 클로틸드를 비방하기 위한 이야기로 보기도 하며, 클로틸드가 오히려 클로비스와 군도바트 사이의 휴전을 중재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클로틸드의 어머니 크레테나는 당시 "놀라운 여성"으로 불렸으며, 남편을 기독교로 개종시켰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클로틸드와 그녀의 언니 세델레우바(크로나)는 군도바트의 궁정에서 양육되었다.
2.2. 성장 과정과 교육
클로틸드는 군도바트의 궁정에서 성장했으며, 당시 부르군트 왕실 대부분이 아리우스주의 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신앙 교육을 받았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깊은 신앙심과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연민을 지닌 인물로 묘사된다. 이러한 가톨릭적 배경은 훗날 그녀가 남편 클로비스 1세의 개종에 큰 영향을 미치는 기반이 되었다.
3. 클로비스 1세와의 결혼 및 기독교 개종
클로틸드는 프랑크 왕 클로비스 1세와 결혼하여 프랑크 왕국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클로비스의 기독교 개종을 이끌어내며 프랑크 왕국이 가톨릭 국가로 전환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3.1. 클로비스 1세와의 결혼
크레테나의 사망 직후인 492년 또는 493년, 클로틸드는 프랑크족의 초대 왕인 클로비스 1세와 결혼했다. 클로비스는 클로틸드의 아름다움과 지혜에 깊은 인상을 받아 청혼했다고 전해진다. 6세기 이후부터 이들의 결혼은 서사시의 주제가 되었으며, 원본 사실이 크게 변경되어 다양한 버전으로 프랑크 연대기 작가들의 작품에 등장하기도 했다. 클로틸드의 이야기는 후대 사람들에게 "오래된 가톨릭 로마 인구와 게르만 부족의 아리우스주의 사이의 투쟁의 핵심"으로 인식되어 매력적인 주제가 되었다. 그러나 클로비스가 결혼 및 개종 이전에 아리우스주의에 동조했다는 증거는 없다.
3.2. 클로비스 1세의 기독교 개종에 미친 영향
클로틸드는 클로비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도록 적극적으로 독려했다. 클로비스는 그들의 첫째 아들인 잉고메르의 세례를 허락했으나, 잉고메르가 유아기에 사망하자 이를 클로틸드의 신앙 탓으로 돌리며 개종 시도에 저항했다. 다음 아들인 클로도미르 역시 병에 걸렸으나 회복되었고, 이후에도 건강한 자녀들이 태어났다.
클로비스의 개종은 496년 톨비악 전투 이후에 이루어졌다. 알레마니족과의 전투에서 그의 군대가 패배하고 있을 때, 클로비스는 아내의 하느님에게 도움을 간청하며 만약 승리한다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겠다고 맹세했다. 전투에서 승리한 후, 클로비스는 랭스에서 성 레미기우스에 의해 세례를 받았고, 이때 3,000명의 프랑크족도 함께 세례를 받았다. 전설에 따르면, 클로비스가 전투에서 승리하기 시작하자 클로틸드가 기도하는 동안 천사가 그녀에게 세 송이의 백합을 가져다주었다고 한다. 클로비스는 훗날 자신의 방패 문양에 있던 세 마리의 개구리를 백합으로 바꾸었다고 전해진다.
클로비스의 개종은 정치적 고려보다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에 대한 역사적 논의도 존재한다. 클로틸드의 영향으로 프랑크족은 수세기 동안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게 되었다.
3.3. 자녀
클로틸드와 클로비스 1세 사이에서는 다섯 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 잉고메르** (494년경 출생, 유아기 사망): 첫째 아들로, 유아기에 사망했다.
- 클로도미르** (495년경 - 524년): 511년부터 오를레앙의 프랑크 왕으로 통치했다.
- 힐데베르트 1세** (496년경 - 558년): 511년부터 파리의 프랑크 왕으로 통치했다.
- 클로타르 1세** (497년경 - 561년): 511년부터 수아송의 프랑크 왕으로 통치했으며, 558년부터는 모든 프랑크족의 왕이 되었다.
- 클로틸드** (500년경 - 531년): 서고트 왕국의 왕 아말라리크와 결혼했으나, 남편으로부터 잔인한 학대를 받았고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는 시도도 실패했다. 그녀는 파리로 돌아오는 길에 사망했다.
이 외에도 클로비스에게는 결혼 전에 테우데리히 1세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일부 설에서는 그가 이교도인 에보힐다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테우데리히는 511년 클로비스의 유산 분배 시 클로틸드의 아들들보다 먼저 성인이었기 때문에 상당한 영토를 물려받았다.
4. 후반 생애와 활동
클로비스 1세 사후, 클로틸드는 개인적인 신앙 생활에 몰두하고 자선 활동을 펼쳤으나, 자녀들 간의 격렬한 분쟁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녀의 삶은 신앙심과 더불어 메로빙거 왕조의 복잡한 정치적 사건들로 점철되었다.
4.1. 미망인으로서의 삶과 신앙
클로비스 1세가 511년에 사망하자, 클로틸드는 그를 성 사도 교회(훗날 생 제네비에브 수도원으로 불리게 된 교회)에 안장했다. 이 교회는 클로비스와 클로틸드가 함께 파리의 수호성인인 제네비에브를 기리기 위한 영묘로 지어진 것이었다. 클로비스가 사망한 후 클로틸드는 교회를 완성시켰다.
클로비스 사망과 손자들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 클로틸드는 파리를 떠나 투르로 이주하여 여생의 대부분을 투르의 성 마르티노의 묘지 근처에서 보냈다. 그녀는 정치와 권력 다툼에서 완전히 벗어나 오직 기도와 자선에만 집중하며 경건한 삶을 살았다. 그녀는 가진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며, 34년 동안 미망인으로 살다가 사망했다.
4.2. 자선 활동 및 설립
클로틸드는 많은 교회, 수도원, 수녀원을 설립하는 등 광범위한 자선 활동과 건축 사업을 펼쳤다.
- 성 사도 교회:** 클로비스와 함께 파리에 세운 교회로, 훗날 생 제네비에브 수도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 생 메리 드 레조델리아 수도원:** 투렌에 설립된 수도원이다.
- 셸 수도원**: 성 제오르지오를 기리는 수녀원으로, 젊은 귀족 소녀들을 위한 시설이었다. 이 수도원은 100년 후 셸의 바틸드에 의해 재건되었으며, 근대에 이르기까지 부유했고 오랜 기간 영국 공주들의 중요한 휴양 및 교육 장소였다.
- 기타 교회:** 루앙, 리옹, 레장들리에도 교회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 레장들리 수녀원:** 511년 레장들리에 젊은 귀족 소녀들을 위한 수녀원을 설립했다. 현재 그 자리에는 참사회 교회가 들어서 있다.
레장들리의 관광청 웹사이트에 따르면, 이 수녀원 건설 중에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어느 날 일꾼들이 더위와 갈증을 호소하자, 클로틸드가 기도했고 근처 샘물에서 나온 물이 일꾼들을 위해 "와인의 힘과 맛"을 가지게 되었다. 이 샘물은 피부병 치료에 효험이 있다고 알려지며, 사람들의 신앙심을 강화시켰다.
4.3. 가족 분쟁 및 정치적 사건에서의 역할
클로틸드의 삶은 가족 간의 복잡하고 때로는 비극적인 분쟁과 얽혀 있었다. 523년, 클로틸드의 아들들은 그녀의 사촌인 부르군트의 왕 시지스문드 (군도바트의 아들)와 전쟁을 벌였다. 다음 해 시지스문드는 살해되었고 그의 시신은 클로틸드의 부모님 죽음에 대한 상징적 복수로 우물에 던져졌다.
일부 기록(예: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은 클로틸드가 자신의 부모님 살해에 대한 복수를 위해 아들들에게 전쟁을 부추겼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역사가들(예: 고드프루아 퀴르트)은 이러한 이야기가 클로틸드를 비방하는 허구이거나 설득력이 없다고 보며, 그녀의 성인다운 성격과는 거리가 멀다고 반박한다.
결과적으로, 클로틸드의 장남 클로도미르는 시지스문드의 후계자인 고도마르의 지휘 아래 이어진 부르군트 원정에서 524년 베제롱스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녀의 딸 클로틸드 또한 이 시기에 사망했다. 클로틸드는 클로도미르의 어린 세 아들인 손자들의 권리를 보호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생존한 아들들인 힐데베르트와 클로타르가 영토 욕심으로 클로도미르의 두 아들을 살해했으며, 막내 클로도알드만이 탈출하여 훗날 수도사가 되었다. 클로틸드는 자녀들 간의 내분을 막으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패했으며, 이는 그녀에게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투르의 그레고리우스는 그녀의 기도가 생존한 두 아들 사이의 전쟁을 지연시켰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5. 사망
클로틸드는 544년 또는 545년 6월 3일 투르에서 사망했다. 그녀는 남편 클로비스와 그녀의 어린 자녀들이 묻힌 성 사도 교회(현 생 제네비에브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녀는 클로비스 1세 사후 34년 동안 미망인으로 살았다. 그녀의 딸 클로틸드도 거의 같은 시기에 사망했다.
6. 유산과 시성
클로틸드는 프랑크 왕국의 역사와 기독교 전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성인으로서 후대에 크게 숭배되었다. 그녀의 삶은 여러 예술 작품에서 묘사되었으며, 역사적으로 다양한 평가를 받는다.
6.1. 수호성인 및 신앙
클로틸드는 가톨릭 성인으로 널리 공경받는다. 그녀는 노르망디의 절름발이들과 레장들리의 수호성인이자 급사와 부도덕한 남편으로부터 보호하는 성인으로 기원된다. 그녀의 축일은 6월 3일로 지정되어 있으며, 프랑스에서는 6월 4일로 기념된다.
6.2. 예술 작품에서의 묘사
클로틸드는 수세기에 걸쳐 다양한 예술 작품에서 여러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주로 기도하는 왕비나 수녀의 모습으로, 머리에 왕관을 쓰거나 옆에 왕관을 둔 채로 그려진다. 또한 클로비스의 세례식을 주관하거나 투르의 성 마르티노의 성지에서 간청하는 모습으로도 자주 나타난다.
레장들리에 그녀에게 헌정된 교회에는 그녀의 삶을 묘사한 16세기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남아 있다. 베드포드 미살에 있는 클로틸드의 그림은 얀 판 에이크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클로비스에게 백합이 부여되는 아름다운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그녀의 유해는 프랑스 혁명을 견뎌냈으며, 1997년 현재 파리의 성 루이 데 프랑세 성당 (또는 생뢰-생질 교회)에 안치되어 있다. 1857년에는 파리에 그녀를 기리는 웅장한 새 교회가 세워지기도 했다.

6.3. 역사적 평가와 논란
클로틸드의 삶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상반되는 기록과 해석으로 인해 논란의 여지가 있다. 특히 가족 간의 분쟁에서의 그녀의 역할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존재한다. 그녀가 아들들을 부르군트 왕 시지스문드와의 전쟁으로 부추겼다는 기록과, 자녀들 간의 내분을 막지 못했다는 점 등이 논란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들이 클로틸드의 성인적 인격과는 맞지 않는 비방이라는 반론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로틸드는 프랑크족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여 서양 세계에 기독교를 전파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녀는 메로빙거 왕조를 세우는 데 일조했으며, 이교도 및 아리우스주의 왕국과 결혼하여 가톨릭 신앙을 전파하는 여성 선교사들의 선례를 확립했다는 점에서도 그 유산이 높이 평가된다.

7. 관련 항목
- 클로비스 1세
- 클로도미르
- 클로타르 1세
- 힐데베르트 1세
- 클로도알드
- 메로빙거 왕조
- 부르군트 왕국
- 프랑크 왕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