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미래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클라우디우스는 214년 5월 10일에 태어났다. 일부 연구자들은 219년 또는 220년이라는 더 늦은 날짜를 제안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214년 설을 지지한다. 6세기 비잔티움 역사가 요안니스 말랄라스에 따르면, 클라우디우스는 사망 당시 56세였다. 그의 출생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다뉴브강 근처 어딘가에서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도네시아어 자료에서는 그가 판노니아의 시르미움에서 태어났다고 언급하며, 일본어 자료에서는 달마티아 출신일 가능성도 제기한다. 한국어 자료에서는 그의 기원이 일리리아라고 명시한다.
클라우디우스 2세의 초기 생애에 대한 가장 중요한 유일한 출처는 황제들의 전기 모음집인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이다. 그러나 이 책의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클라우디우스의 이야기도 날조와 아첨으로 가득 차 있다. 4세기에는 클라우디우스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아버지인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와, 결과적으로 당시의 지배 왕조와 친척 관계라고 선언되었다. 따라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는 극도로 주의해서 사용해야 하며,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프세우도-아우렐리우스 빅토르, 에우트로피우스, 오로시우스, 요안니스 조나라스, 조시무스의 작품, 그리고 동전과 비문 등 다른 출처의 정보로 보완되어야 한다.
4세기 '카이사르 전기'에 따르면, 그는 고르디아누스 2세의 사생아로 여겨지기도 했으나, 일부 역사가들은 이를 의심한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는 그를 플라비우스 씨족의 일원으로 언급하는데, 이는 그를 미래의 황제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와 더욱 연결시키려는 시도로 보인다.
2. 군 경력 및 권력 장악
클라우디우스는 황제가 되기 전 로마 군대에서 뛰어난 경력을 쌓으며 고위직에 올랐으며, 이후 갈리에누스 황제의 몰락과 함께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2.1. 군 경력
황제가 되기 전 클라우디우스는 로마 군대에서 복무하며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고, 최고위 군사 직책에 임명되었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는 그가 데키우스 황제(249~251년) 통치기에 군사 호민관이었다고 기록하지만, 이는 갈리에누스 살해 당시의 군사 호민관 직책이 그가 이전에 차지했던 기병대 총사령관 대리 등의 고위직에서 강등된 것을 의미하므로 의심스럽다. 이는 클라우디우스와 갈리에누스 사이에 심각한 균열이 있었음을 시사하는데, 고대 기록에서는 이를 뒷받침할 증거가 없다.
같은 자료에서는 그가 테르모필레를 방어하기 위해 파견되었고, 이와 관련하여 아카이아 속주 총독은 그에게 병력을 공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묘사한다. 그러나 당시 침략한 고트족이 중부 발칸 반도 이상으로 활동을 확장하지 않았으므로 이 지역을 위협했다는 증거는 없다. 이는 254년에 테르모필레에 수비대가 나타난 것으로 보아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의 기록이 시대착오적일 가능성이 높다. 역사가 프랑수아 파쇼는 이 구절이 성공적인 이교도 사령관 클라우디우스를 396년 고트족 지도자 알라리크 1세가 그리스를 파괴하도록 허용한 불운한 기독교 장군들과 대비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또한 트레벨리우스 폴리오는 데키우스가 마르스 경기에서 다른 병사와 싸우는 동안 클라우디우스가 자신의 힘을 보여주자 그에게 보상했다고 밝힌다.

클라우디우스는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이전의 황제들과 마찬가지로 비로마인 출신이었다. 막시미누스 사망 이후 실패한 귀족 로마 황제들의 시대가 끝나고, 클라우디우스는 3세기의 위기 이후 제국을 결국 재건하게 될 강인한 "군인 황제"들의 첫 번째 인물이었다. 그는 육체적으로 강인하고 특히 잔혹한 면모를 보여 병사들의 존경을 얻고 지위를 확보했을 가능성이 있다. 한 전설에 따르면 클라우디우스는 한 방으로 말의 이빨을 부러뜨렸다고 한다. 250년대에 레슬링 선수로 활동했을 때, 그는 경기 중 상대방의 성기를 잡히자 상대방의 이빨을 부러뜨렸다고 전해진다.
2.2. 갈리에누스의 몰락
260년대 동안 로마 제국이 세 개의 독립적인 통치 실체(중앙 로마 제국, 갈리아 제국, 팔미라 제국)로 분열되면서 로마 제국 전체는 위태로운 상황에 놓였다. 갈리에누스는 서방에서 포스투무스를 격파하는 데 실패하고, 동방에서 오데나투스가 로마 제국 내에서 사실상 독립적인 왕국을 통치하는 것을 수용하면서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268년경에는 상황이 바뀌어 오데나투스가 궁정 음모로 추정되는 사건으로 암살되었고, 갈리에누스는 자신의 부대 내에서 일어난 반란의 희생자가 되었다. 오데나투스 사망 후 권력은 그의 어린 아들에게 넘어갔는데, 그는 어머니 제노비아의 지배를 받았다.

발칸 반도에 대한 여러 게르만족 부족의 침략 위협 속에서, 갈리에누스의 주된 문제는 포스투무스에게 있었다. 그는 마크리아누스 마요르가 이끄는 반란과 침략하는 스키타이족의 위협을 처리해야 했기 때문에 포스투무스를 공격할 수 없었다. 4년의 지연 끝에 포스투무스는 제국에 대한 어느 정도의 통제권을 확립했다. 265년, 갈리에누스와 그의 병사들이 알프스산맥을 넘어갔을 때, 그들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갈리아 제국 도시에서 포스투무스를 격파하고 포위했다. 승리가 임박한 것처럼 보였을 때, 갈리에누스는 성벽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는 실수를 저질러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이로 인해 포스투무스에 대한 작전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3년 동안 갈리에누스의 문제는 더욱 악화되었다. 스키타이족은 268년 초 발칸 반도를 성공적으로 침략했고, 밀라노에 주둔한 로마 기병대 사령관 아우레올루스는 스스로 포스투무스의 동맹임을 선언하고 황제 자리를 주장하기까지 했다.
이 시기에 또 다른 침략이 진행 중이었다. 268년, 헤룰리족이라고 불리는 부족 또는 집단이 소아시아를 거쳐 해상 원정을 통해 그리스로 진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은 갈리에누스의 노력이 주로 자신을 배신한 장교 아우레올루스에게 집중되었고, 헤룰리족의 격퇴는 그의 후계자인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에게 맡겨졌다고 추정한다.
갈리에누스의 죽음은 많은 황제들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음모와 배신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사건에 대한 여러 기록이 존재하지만, 고위 관리들이 갈리에누스의 죽음을 원했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두 가지 기록에 따르면, 주요 음모자는 프라이토리아누스 친위대 사령관인 아우렐리우스 헤라클리아누스였다. 한 버전의 이야기는 헤라클리아누스가 클라우디우스를 음모에 끌어들였다고 말하는 반면,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의 기록은 곧 황제가 될 클라우디우스를 면책하고 저명한 장군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마르키아누스를 음모에 추가한다. 클라우디우스가 음모에서 제외된 것은 훗날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시조로서의 역할 때문일 수 있으며, 이는 이 두 기록의 원본이 콘스탄티누스 통치 이전에 유포되었음을 시사한다. 기록에 따르면, 갈리에누스가 저녁 식사를 하던 중 아우레올루스와 그의 병사들이 진영에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갈리에누스는 명령을 내릴 준비를 하며 전선으로 달려갔으나, 그의 기병대 사령관에게 살해당했다。또 다른 논란이 많은 기록에서는 아우레올루스가 갈리에누스가 자신의 장군들을 상대로 음모를 꾸미는 것처럼 보이는 문서를 위조하여 황제의 고위 참모들의 손에 들어가게 했다고 한다. 이 음모에는 아우렐리아누스도 가능한 공모자로 추가된다. 아우렐리아누스의 음모 가담 이야기는 그 자신이 이 이야기와 놀랍도록 유사한 상황에서 살해당한 것에 대한 적어도 부분적인 정당화로 볼 수 있다.
어떤 이야기가 사실이든, 갈리에누스는 268년 여름, 아마도 7월에서 10월 사이에 살해당했으며, 클라우디우스는 밀라노 외곽의 군대에 의해 그의 후계자로 선택되었다. 새 황제에 대한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갈리에누스의 가족들을 살해하기 시작했고, 클라우디우스가 전임자의 기억을 존중하겠다고 선언한 후에야 멈췄다고 전해진다. 클라우디우스는 사망한 황제를 신격화하고 아피아 가도의 가족 묘지에 안장했다. 배신자 아우레올루스는 같은 존경을 받지 못했고, 항복 시도가 실패한 후 포위자들에게 살해당했다.
3. 통치
클라우디우스의 통치는 군사적 승리와 제국 안정화를 위한 행정적 노력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즉위 직후 로마 제국을 위협하던 외부 침략자들을 격퇴하고, 제국의 행정 체계를 재정비하는 데 주력했다.
3.1. 군사 작전 및 승리
클라우디우스가 즉위할 당시, 로마 제국은 국경 안팎에서 여러 차례의 침입으로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었다. 이 중 가장 시급한 위협은 일리리아와 판노니아에 대한 고트족의 침략이었다. 갈리에누스가 이미 네스투스 전투에서 고트족에게 어느 정도 피해를 입혔지만, 클라우디우스는 황제로 지명된 직후 그의 가장 큰 승리이자 로마 군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 중 하나를 거두었다.
나이소스 전투에서 클라우디우스와 그의 군단은 거대한 고트족 군대를 격파했다. 미래의 황제인 기병대 사령관 아우렐리아누스와 함께 로마군은 수천 명의 포로를 잡았고 고트족 기병대를 완전히 궤멸시켰다. 이 승리로 클라우디우스는 "고티쿠스"(Gothicus, 고트족의 정복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고트족은 곧 아우렐리아누스에 의해 다뉴브강 너머로 쫓겨났고, 거의 한 세기 동안 제국에 심각한 위협을 가하지 못했다. 인도네시아어 자료는 이 승리로 그가 고티쿠스 막시무스(Gothicus Maximus)라는 명예 칭호를 얻었다고 명시한다.
거의 동시에 알레만니족이 알프스산맥을 넘어 제국을 공격했다. 클라우디우스는 신속하게 대응하여, 나이소스 전투 몇 달 후인 268년 늦가을 베나쿠스 호수 전투에서 알레만니족을 격파했다. 이로 인해 그는 "게르마니쿠스 막시무스"(Germanicus Maximus) 칭호를 받았다. 그 후 그는 지난 8년 동안 찬탈자가 통치하고 브리타니아, 갈리아, 이베리아반도를 포함했던 갈리아 제국으로 눈을 돌렸다. 그는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고 히스파니아와 갈리아의 론강 계곡에 대한 통제권을 빠르게 되찾았다. 이는 아우렐리아누스 치하에서 갈리아 제국이 멸망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3.2. 행정 및 통치
클라우디우스는 갈리에누스 사망 후 고위직을 차지한 유일한 인물이 아니었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통치 이전에는 발칸반도 출신 황제가 두 명뿐이었지만, 이후 378년 히스파니아 출신 테오도시우스 1세가 즉위할 때까지 판노니아, 모이시아, 일리리아 속주 출신이 아닌 황제는 단 한 명뿐이었다. 네 개의 비문은 당시 정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첫 번째는 갈리에누스에 대한 음모에 연루된 프라이토리아누스 친위대 사령관 아우렐리우스 헤라클리아누스에 대한 헌정문이며, 이는 267~268년에 트라키아 속주의 기사 계급 총독이었던 헤라클리아누스의 형제 아우렐리우스 아폴리나리스에게도 헌정되었다. 이들은 안토니누스 칙령에 의해 시민이 된 자들에게 부여된 성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라는 성을 공유했기 때문에, 이들은 제국 엘리트 출신이 아니었다. 세 번째 비문은 갈리에누스 사망 당시 또 다른 주요 장군이었던 마르키아누스의 경력을 보여준다. 네 번째는 비질레스 사령관 율리우스 플라키디아누스를 기린다. 헤라클리아누스, 아폴리나리스, 플라키디아누스, 마르키아누스는 다뉴브강 유역 출신이 아닐 수도 있지만, 그들 중 누구도 세베루스 왕조 귀족 출신이 아니었으며, 모두 군사적 역할 덕분에 두각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차기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로부스 역시 발칸 반도 출신으로, 카라칼라 시대에 시민권을 얻은 가문 출신이었다.

그들의 영향력이 약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구 귀족 출신 중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있었다. 클라우디우스는 269년에 저명한 원로원 가문인 파테르니 가문의 일원인 파테르누스와 함께 집정관직을 맡았는데, 파테르니 가문은 갈리에누스 통치 내내 집정관과 도시 장관을 배출하여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270년의 집정관 중 한 명이자 전년도 도시 장관이었던 플라비우스 안티오키아누스는 다음 해에도 그 직책을 유지했다. 안티오키아누스의 동료인 비리우스 오르피투스 역시 강력한 가문의 후손으로, 그의 아버지가 장관으로 재직하는 동안에도 계속 영향력을 행사했다. 아우렐리아누스의 집정관 동료인 폼포니우스 바수스도 가장 오래된 원로원 가문 중 하나였으며, 272년의 집정관 중 한 명인 유니우스 벨둠니아누스도 마찬가지였다.
권력을 잡은 첫 해에 클라우디우스는 갈리아 제국의 갑작스러운 붕괴로 큰 도움을 받았다. 269년 봄, 포스투무스 휘하의 고위 관리였던 울피우스 코르넬리우스 라일리아누스가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에서 황제를 자칭하자, 포스투무스는 그를 물리쳤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라일리아누스의 본부였던 마인츠의 약탈을 허용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의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 분노한 포스투무스의 군대는 반란을 일으켜 그를 살해했다. 병사들에게 선택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리우스가 포스투무스를 대신하여 통치자가 되었다. 그러나 마리우스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는데, 포스투무스의 친위대 사령관 빅토리누스가 그를 물리쳤기 때문이다. 이제 갈리아의 황제가 된 빅토리누스는 곧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다. 스페인 속주들이 갈리아 제국을 버리고 클라우디우스에게 충성을 선언했으며, 갈리아 남부에서는 플라키디아누스가 그르노블을 점령했다. 다행히 플라키디아누스는 그곳에서 멈췄고 빅토리누스의 위치는 안정되었다. 다음 해에 오툉이 반란을 일으켜 클라우디우스에게 충성을 선언했지만, 중앙 정부는 이를 지원하기 위한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 결과, 도시는 여러 주 동안 포위되었고, 결국 빅토리누스에게 함락되어 약탈당했다.

클라우디우스가 오툉 시를 돕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이유는 여전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자료에 따르면 269년 동안 팔미라 제국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있었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의 갈리에누스 전기에는 그가 아우렐리우스 헤라클리아누스 휘하의 군대를 파견했지만, 그 군대가 제노비아에게 전멸당했다고 기록된 모호한 구절이 있다. 그러나 헤라클리아누스가 268년에 실제로 동방에 있지 않았고(이 시기에는 갈리에누스 죽음의 음모에 연루되어 있었다), 이는 정확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드러나는 혼란은 269년의 스키타이족 활동 대부분을 1년 전 갈리에누스 통치기로 배치하려는 후대의 노력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이는 클라우디우스가 콘스탄티누스의 조상이라는 기록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만약 이 자료 해석이 정확하다면, 헤라클리아누스의 동방 원정은 클라우디우스 시대의 사건으로 보는 것이 옳을 수도 있다.
클라우디우스의 고트족에 대한 승리는 라틴어 전통에서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269년 클라우디우스의 승리 장소인 니시에서 태어난 콘스탄티누스 1세의 존경할 만한 조상으로 평가받게 했다. 클라우디우스는 요안니스 조나라스에게도 높이 평가받는데, 그의 그리스어 전통은 라틴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조시무스에게는 보다 합리적인 동시대의 관점에서 클라우디우스는 덜 위대한 인물로 비춰진다. 269년 클라우디우스의 성공은 다음 해 황제로서 이어지지 않았다. 스키타이족이 산에서 굶주리거나 항복하는 동안, 그들을 추격하던 군단들 사이에서는 역병이 퍼지기 시작했다. 또한 클라우디우스가 오툉 포위전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한 것은 제노비아와의 불화를 야기했을 가능성이 있다.
갈리아 침략이 클라우디우스와 제노비아 사이의 단절점이었다는 것이 증명되지는 않았지만, 일련의 사건들은 오툉 포위전이 중요한 요인임을 시사한다. 핵심 쟁점은 오데나투스가 보유했던 corrector totius orientis(지정된 지역의 로마군 총사령관이자 로마 속주 총독에 대한 권한)의 지위였다. 제노비아가 자신의 아들 바발라투스를 위해 이 칭호를 주장하면서 두 제국 간의 긴장은 더욱 악화되었다. 아우렐리우스 헤라클리아누스의 전설적인 도착은 오데나투스 사망 후 중앙 통제권을 재확립하려는 노력일 수도 있었지만, 만약 그렇다면 실패했다. 오데나투스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은 주조되지 않았지만, 그의 사망 직후에는 그의 아들의 이미지가 새겨진 동전이 만들어졌다. 이는 황제 휘하의 권한을 넘어선 것이었다.
자브다스 휘하의 팔미라군은 늦여름에 아라비아를 침략하고 이집트로 진격했다. 이 시기 이집트의 총독은 테나기노 프로부스였는데, 그는 269년에 남쪽의 유목 부족에 의한 키레나이카 침략을 격퇴했을 뿐만 아니라 지중해에서 스키타이족 선박을 추격하는 데도 성공한 유능한 군인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그는 이집트에서는 같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는데, 팔미라 제국과 동맹을 맺은 티마게네스가 이끄는 집단이 프로부스를 약화시키고 그의 군대를 격파했으며, 270년 늦여름 현대 도시 카이로 근처 전투에서 그를 살해했다.

일반적으로 로마 사령관이 살해되면 전쟁 상태가 존재한다는 신호로 간주되며, 270년 헤라클리아누스의 죽음과 팔미라군에 의해 파괴된 신전의 재건을 기록한 보스트라의 비문을 연관시킬 수 있다면, 이러한 폭력 행위들도 같은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히 그렇게 해석되지 않았다. 데이비드 포터가 썼듯이, "바발라투스의 동전들은 황제 권력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vir consularis, rex, imperator, dux Romanorum이라는 칭호를 유지하는데, 이는 중앙 정부의 칭호를 모방하지 않는 범위의 칭호이다. vir consularis 지위는 우리가 보았듯이 오데나투스에게 부여되었고, rex 또는 왕이라는 칭호는 단순히 mlk 또는 왕의 라틴어 번역이며, 이 맥락에서 imperator는 단순히 '승리한 장군'을 의미하고, dux Romanorum은 corrector totius orientis의 또 다른 버전처럼 보인다." 이러한 칭호들은 오데나투스의 지위가 상속 가능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로마 문화에서는 직책을 얻음으로써 얻은 지위는 상속될 수 있었지만, 직책 자체는 상속될 수 없었다. 팔미라 궁정에서는 직책과 그에 수반되는 지위 사이의 미묘한 경계가 무시되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특히 여러 로마 황제들이 실패했던 페르시아를 물리칠 수 있었던 정권의 이익에 반하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바발라투스는 칭호의 의미를 강조했는데, 팔미라의 맥락에서는 오데나투스의 칭호가 큰 의미를 가졌기 때문이다. 270년 여름이 끝날 무렵, 제국의 상황은 1년 전과는 매우 달랐다. 성공을 거둔 후 갈리아는 비활동 상태였고 제국은 동방에서 실패하고 있었다. 많은 양의 은이 다시 희석된 안토니니아누스 주화에 사용되면서 불충분한 자원이 국가를 괴롭혔다.
4. 사망 및 계승
클라우디우스는 제국의 잃어버린 모든 영토를 재통일하려는 목표를 달성할 만큼 오래 살지 못했다. 269년 말 그는 시르미움으로 여행하여 판노니아를 약탈하던 반달족에 대항하여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키프리안 역병(아마도 천연두)의 희생자가 되어 270년 초에 사망했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그는 사망 전에 아우렐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클라우디우스의 형제인 퀸틸루스가 잠시 권력을 장악했다. 로마 원로원은 즉시 클라우디우스를 "디부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Divus Claudius Gothicus, 신성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로 신격화했다.
역사가들은 클라우디우스의 사망 시기를 1월, 4월, 8월, 또는 9월로 다양하게 추정한다. 이러한 불일치는 서로 상충되는 여러 자료 때문이다. '354년 연대기'는 클라우디우스의 통치 기간을 "1년 4개월"로 기록하고, 히에로니무스와 아우렐리우스 빅토르는 모두 "1년 9개월"로 기록한다. 일부 알렉산드리아 주화는 그의 3년차로 날짜가 매겨져 있는데, 이는 그가 270년 9월에 사망했음을 시사한다(콥트력은 8월 29일에 시작되었다). 아르투어 슈타인은 270년 5월 25일자 아우렐리아누스 문서를 인용하여 클라우디우스의 사망 시기를 4월로 추정했으나, 현대 학자들은 이 문서가 271년으로 날짜가 매겨진 것으로 본다. 마지막으로 확인된 문서는 270년 9월 20일자로 되어 있지만, 날짜가 없는 다른 파피루스는 잠정적으로 10월로 추정될 수 있다.
5. 유산 및 평가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3세기의 위기라는 혼란스러운 시기에 로마 제국의 안정을 도모하고 군사적 승리를 통해 제국의 위상을 회복하는 데 기여한 중요한 인물로 평가되며, 그의 통치는 후대의 역사적 평가, 콘스탄티누스 왕조와의 연관성, 그리고 성 발렌티노 전설 등 다양한 측면에서 논의된다. 또한 그의 통치 과정에는 여러 비판적 관점과 논란이 존재한다.
5.1. 역사적 평가
361년에 아우렐리우스 빅토르가 쓴 로마 제국의 짧은 역사서인 '카이사르 전기'는 클라우디우스가 고트족과의 전쟁 전에 시빌라 신탁집을 참고했다고 기록한다. 빅토르는 클라우디우스가 "데키우스의 전통을 부활시켰다"고 암시하며, 갈리에누스를 종교 정책에 너무 관대하다고 여겼던 원로원의 시각을 보여준다. 클라우디우스는 라틴어 전통에서 영웅으로, 그리고 콘스탄티누스 1세의 조상으로서 존경받는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5.2. 콘스탄티누스 왕조와의 연관성
신뢰할 수 없는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는 클라우디우스와 퀸틸루스에게 크리스푸스라는 또 다른 형제가 있었고, 그를 통해 클라우디아라는 조카가 있었다고 기록한다. 클라우디아는 에우트로피우스와 결혼하여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의 어머니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같은 자료는 클라우디우스에게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라는 노멘을 부여하여 콘스탄티우스와의 연결을 강화하려 했다. 반면 요안니스 조나라스와 에우트로피우스는 클로루스가 클라우디아의 딸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 역사가들은 이러한 기록들이 콘스탄티누스 1세의 가족을 존경받는 황제의 가문과 연결시키기 위한 계보상의 날조라고 의심한다.
5.3. 성 발렌티노와의 전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중세 시대부터 성 발렌티노와 연결되어 왔다. 그의 행적에 대한 동시대 기록들은 아마도 4세기 초 디오클레티아누스 기독교 박해 중에 파괴되었을 것이며, 순교 이야기는 5세기 또는 6세기에 출판된 '파시오 마리이 에트 마르타이'(Passio Marii et Marthae)에 기록되었다. 20세기 역사가들은 이 시기의 기록들이 검증될 수 없다는 데 동의한다. 전설은 "클라우디우스 황제"를 언급하지만, 클라우디우스 1세는 기독교인들을 박해하지 않았으므로(수에토니우스가 "크레스투스"의 유대인 추종자들이 로마에서 추방되었다고 언급한 것을 제외하면), 사람들은 이 황제가 영토 밖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전쟁하며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클라우디우스 2세로 믿는다.
이 전설은 후대의 문헌에서 다시 이야기되었고, 1493년의 '뉘른베르크 연대기'에서는 로마인 사제가 기독교인들에 대한 일반적인 박해 중에 순교했다고 묘사한다. 이 책은 성 발렌티노가 로마에서 기독교인들을 도운 죄로 곤봉으로 맞고 결국 참수당했다고 기록한다. 1260년의 '황금 전설'은 성 발렌티노가 270년에 "클라우디우스 황제" 앞에서 그리스도를 부인하기를 거부했고, 그 결과 참수당했다고 전한다. 그 이후로 2월 14일은 로마인 사제이자 의사를 기리는 기독교 교회에서 정한 발렌타인 데이가 되었다.
5.4. 비판 및 논란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의 통치 기간이나 권력 장악 과정에서 발생했을 수 있는 비판적 관점이나 논쟁적인 사안들이 존재한다. 특히 갈리에누스 황제의 죽음에 그가 어느 정도 연루되었는지에 대한 의혹은 역사적 논란으로 남아 있다. 비록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당시의 음모와 배신 상황 속에서 그의 즉위가 이루어졌다는 점은 비판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또한, 오툉 포위전에서 도시를 돕지 않은 그의 결정은 제노비아와의 관계 악화에 기여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그의 통치에 대한 비판적 시각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그의 콘스탄티누스 왕조와의 혈연 관계는 후대에 조작된 것으로 밝혀져, 역사적 진실성 측면에서 논란의 대상이 된다.
6. 관련 항목
- 로마 황제 목록
- 3세기의 위기
- 군인 황제 시대
- 아우렐리아누스
- 퀸틸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