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Kurt Georg Kiesinger, 1904년 4월 6일 ~ 1988년 3월 9일)는 서독의 정치인으로, 1966년 12월 1일부터 1969년 10월 21일까지 독일연방공화국 총리를 지냈다. 총리가 되기 전에는 1958년부터 1966년까지 바덴뷔르템베르크주의 주총리를 역임했으며, 1962년부터 1963년까지 독일 연방상원 의장을 맡았다. 또한 1967년부터 1971년까지 독일 기독교민주연합의 당수였다.
키징거는 법학을 전공한 변호사로, 1933년 나치당에 가입했으나 스스로는 비활동적인 당원이었다고 주장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독일 외무부에서 방송 및 선전 관련 업무를 담당하며 나치 정권에 연루되었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이러한 나치 과거는 그의 총리 재임 기간 내내, 특히 베아테 클라르스펠트와의 대립 사건을 통해 격렬한 비판을 받았으며, 독일 사회의 과거사 청산 문제에 대한 논쟁을 촉발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징거는 뛰어난 연설가이자 중재자로 평가받았으며, "은빛 혀의 수장"(Häuptling Silberzunge하우프트링 질버충게독일어)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총리 재임 중에는 콘스탄츠 대학교와 울름 대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 발전에 기여했다. 총리로서 그는 기독교민주연합과 사회민주당 간의 대연정을 이끌며 경제 안정화, 연금 및 교육 개혁, 동구권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 개선 등 중요한 국내외 정책을 추진했다. 그의 총리직은 비록 짧았지만, 전후 독일의 정치적 안정과 사회적 발전에 기여한 동시에, 나치 과거사 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성찰의 계기를 제공했다는 복합적인 평가를 받는다.
2. 어린 시절과 배경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는 독일 제국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에빙겐(현재 바덴뷔르템베르크주 알프슈타트)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냈다.
2.1. 출생과 가족
키징거는 1904년 4월 6일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크리스티안은 지역 섬유 산업에 종사하는 상업 사무원이자 개신교 신자였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 도미니카는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키징거는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 그는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어머니를 여의었으며, 이후 외할머니의 강한 영향을 받으며 격려 속에서 성장했다. 반면 그의 아버지는 그의 성장에 무관심했다. 1년 후 아버지는 카롤리네 빅토리아 프파프와 재혼했고, 그녀 또한 가톨릭 신자였다. 키징거는 이로 인해 양쪽 종파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고, 훗날 자신을 "개신교적 가톨릭 신자"라고 칭하기도 했다. 그의 이복 여동생 마리아는 태어난 지 1년 만에 사망했다. 정치적으로 키징거는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2.2. 교육 및 초기 경력
키징거는 학창 시절 시에 심취하여 시인이 되기를 꿈꾸었다. 1919년 9월, 그는 왕립 뷔르템베르크 사범학교에 입학했으며, 재학 중에는 아버지의 소개로 공장에서도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이후 에버하르트 카를 대학교 튀빙겐과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1930년에 제1차 법률 국가 시험을, 1933년에는 제2차 법률 국가 시험에 합격하여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1935년부터 1940년까지 베를린의 캄머게리히트 법원에서 변호사로 활동했으며, 대학에서 법학 강사도 겸임했다. 학생 시절에는 가톨릭 학생 단체인 KStV Alamannia TübingenKStV 알라만니아 튀빙겐독일어과 Askania-Burgundia Berlin아스카니아-부르군디아 베를린독일어에 가입하기도 했다. 1932년에는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었다.
3. 나치당 가입 및 전시 활동
키징거의 나치 정권과의 연루는 그의 정치 경력 내내 논란의 중심이 되었다.
3.1. 나치당 입당
키징거는 아돌프 히틀러가 총리로 임명된 지 몇 주 후인 1933년 2월 나치당(NSDAP)에 가입했으며, 당원 번호는 2633930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거의 활동하지 않은 당원"이라고 주장했으며, 나치당에 가입한 동기에 대해 당 내의 기독교 온건파와 접촉하여 나치의 급진 노선을 저지하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해명에도 불구하고 그의 나치당 입당은 훗날 기회주의적 행동이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는 종종 자신이 기회주의자가 아니었음을 명시적으로 부인했다.
3.2. 외무부 및 선전 활동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1940년 키징거는 징병제를 피하기 위해 독일 외무부의 방송국에 취직했다. 그는 빠르게 승진하여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방송국의 부국장을 맡았고, 대중계몽선전국가부와의 연락 담당관 역할도 수행했다. 이 시기 그는 훗날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외무장관 휘하에서 일했다.
외무부 재직 중이던 1944년 11월 7일, 두 명의 동료는 키징거가 방송국 내에서 반유대주의 활동을 방해했다고 주장하며 그를 하인리히 힘러 친위대 대장에게 고발하는 각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치 사냥꾼 베아테 클라르스펠트는 키징거가 리벤트로프와 요제프 괴벨스 선전장관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주장하며, 그가 반유대주의 및 전쟁 선전을 포함한 독일 국제 방송의 내용을 주로 책임졌고, 슈츠슈타펠의 간부였던 게르하르트 륄레와 프란츠 식스와 긴밀히 협력했다고 비판했다. 특히 프란츠 식스는 나치 점령하 동유럽에서 대량 학살을 자행했으며, 뉘른베르크 아인자츠그루펜 재판에서 전범으로 기소된 인물이다. 클라르스펠트는 키징거가 홀로코스트의 존재를 인지한 이후에도 반유대주의 선전을 계속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알베르트 노르덴이 발표한 전쟁 및 나치 범죄자 관련 문서에 부분적으로 근거를 두었다.
3.3. 전후 구금 및 비나치화
1945년 4월 말, 전쟁이 끝난 후 키징거는 미국군에 의해 정치범으로 구금되었다. 그는 루트비히스부르크 수용소에서 18개월을 보냈으며, "잘못된 신원"으로 석방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1947년 비나치화 재판에서는 나치당의 "소극적 동조자"로 판단되어 무죄를 선고받았다. 풀려난 후 그는 뷔르츠부르크 대학교 법학부에서 잠시 강사로 재직하기도 했다.
4. 초기 정치 경력
키징거는 전후 독일 정치에서 기독교민주연합의 주요 인물로 부상했다.
4.1. 기독교민주연합(CDU) 입당
1946년, 키징거는 독일 기독교민주연합(CDU)에 입당하며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같은 해부터 그는 법학 학생들에게 개인 교습을 제공했으며, 1948년에는 변호사 활동을 재개했다. 1947년에는 뷔르템베르크-호헨촐레른 지역 기독교민주연합의 무급 사무총장으로도 활동했다.
4.2. 연방의회 활동

1949년 서독의 첫 독일 연방의회 선거에서 그는 라벤스부르크 선거구에서 70% 이상의 기록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어 연방의회 의원이 되었다. 그는 1958년까지 연방의회에서 활동했으며, 이후 주총리직을 수행한 뒤 1969년부터 1980년까지 다시 연방의회 의원으로 재임했다. 1969년부터는 발트슈트 선거구를 대표했으며, 1976년 연방 선거에서는 자신의 지역구를 포기하고 당의 바덴뷔르템베르크주 주 목록을 통해 의회에 입성했다.
그는 첫 두 입법 기간(1949~1957년) 동안 연방의회와 독일 연방상원의 중재 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1950년 10월 19일, 그는 연방의회 의장 선거에서 당우인 헤르만 엘러스의 201표에 비해 55표를 얻었으나, 이는 그가 후보로 제안되지 않았음에도 얻은 표였다. 1951년에는 기독교민주연합 집행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54년 12월 17일부터 1959년 1월 29일까지 그는 1949년부터 위원으로 활동했던 연방의회 외교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수사학적 탁월함과 외교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기독교민주연합 의회 파벌 내에서 인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내각 개편에서 장관직에 임명되지 못했다. 이에 그는 연방 정치에서 주 정치로 전환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그는 1956년부터 1958년까지 유럽 의회 의원을 겸임했으며, 1955년부터 1959년까지 유럽 평의회 부의장을 지내기도 했다.
5.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총리
키징거는 주 차원에서의 리더십을 통해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5.1. 재임 기간 및 주요 업적
1958년 12월 17일, 키징거는 바덴뷔르템베르크주의 주총리로 취임하여 1966년 12월 1일까지 재임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회 의원이기도 했다. 주총리로서 그는 1962년 11월 1일부터 1963년 10월 31일까지 독일 연방상원 의장을 지냈다.
그의 재임 기간 중 바덴뷔르템베르크주는 콘스탄츠 대학교(1966년)와 울름 대학교(1967년)라는 두 개의 새로운 대학을 설립하는 중요한 업적을 이루었다. 또한 그는 주 내의 완전 고용을 달성하고, 생활 수준 향상 및 요양 시설 확충에 힘썼다. 보덴호의 수질 문제 해결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5.2. 연립 정부
독일연방공화국 초기에는 주 차원에서 대규모 연정이 흔했기 때문에, 키징거는 1960년까지 기독교민주연합, 독일 사회민주당, 자유민주당/민주인민당 및 전독일 블록/피추방자 및 권리박탈자 연맹의 연립 정부를 이끌었다. 이후 1960년부터 1966년까지는 기독교민주연합과 자유민주당의 연립 정부를 이끌었으며, 1961년 4월 15일에는 전독일 블록/피추방자 및 권리박탈자 연맹이 해산되었다.
6. 총리 재임 (1966-1969)
키징거의 총리 재임 기간은 서독의 정치적 안정과 중요한 개혁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6.1. 대연정 구성

1966년, 당시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총리가 이끌던 기독교민주연합/기독교사회연합-자유민주당 연립 정부가 붕괴되면서 서독은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다. 이 시기 서독 경제는 침체되어 1967년 국민총생산(GNP)은 전년 대비 0.3% 감소했으며, 실업자 수는 1966년 말 50만 명을 넘어 1967년 2월에는 67만 명으로 급증하는 등 국가 재정 적자가 심화되었다. 또한 극우 성향의 독일 국가민주당이 1966년 11월 헤센주 의회 선거에서 7.9%, 바이에른주 의회 선거에서 7.4%의 의석을 얻는 등 사회 불안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키징거는 라이너 바르첼 간사장과 게르하르트 슈뢰더 외무장관과의 당내 경선에서 승리하며 기독교민주연합/기독교사회연합의 새로운 총리 후보로 지명되었다. 그는 빌리 브란트가 이끄는 독일 사회민주당과 협상하여 새로운 대연정을 구성하는 데 성공했다. 키징거는 지명 투표에서 사회민주당 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연방의회 전체 의석의 3분의 2 이상 지지를 얻어 전후 총리 지명 투표에서 최고 기록을 세웠다. 이 대연정 정부는 거의 3년 동안 권력을 유지했다. 사회민주당의 대연정 참여는 이 당이 현실적인 정권 운영이 가능한 정당으로 탈바꿈하는 계기가 되었다.
6.2. 국내 정책
키징거 정부는 총리 재임 중 여러 주요 국내 정책과 사회 개혁을 추진했다. 경제 정책에서는 1967년 6월, 연방 정부가 경기 침체나 과열 시 개입할 수 있도록 하는 경제 안정 성장법을 제정했다. 경제부 장관 카를 실러는 정부 주도의 공공 투자 확대를 통해 경기 회복을 이끌어냈다.
사회 개혁으로는 1967년 의무 가입을 위한 소득 상한을 폐지하여 연금 적용 범위를 확대했다. 교육 분야에서는 학생 보조금 제도를 도입하고 대학 건설 프로그램을 추진했으며, 1969년 헌법 개혁을 통해 연방 정부가 주 정부와 공동 기획 위원회를 통해 교육 계획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직업 훈련 관련 법률도 도입되었고, 실업 보험 재편을 통해 재훈련 프로그램, 상담 및 자문 서비스, 일자리 창출 등이 장려되었다. 또한 1969년의 Lohnfortzahlunggesetz론포르트찰룽게제츠독일어에 따라 고용주는 질병으로 인한 첫 6주 동안 직원에게 전액 임금을 지급해야 했다. 1969년 8월에는 특정 기준에 따라 수익성이 없는 농장을 양도할 의향이 있는 농민들을 위한 특별 연금인 Landabgaberente란트압가베렌테독일어가 도입되었다.
사법 개혁도 이루어져 이혼 권리의 남녀 평등, 비혼 출생 자녀의 법적 권리를 혼인 중 출생 자녀와 동등하게 인정하는 조치, 그리고 동성애 합법화가 추진되었다.
6.3. 외교 정책
키징거 정부는 빌리 브란트 부총리 겸 외무장관과 함께 동방 정책을 펼치며 소련 블록 국가들과의 긴장을 완화하는 데 노력했다. 이 시기에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그러나 그는 주요 화해 조치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으며, 프라하의 봄 사태 이후에는 동구권 국가들과의 외교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6.4. 재임 중 논란
역사가 토니 주트는 키징거의 총리직이 하인리히 뤼프케의 대통령직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이전 나치 충성도를 고려할 때 "본 공화국(서독)의 자화상에 대한 노골적인 모순"을 보여주었다고 지적했다. 총리로서 그의 가장 굴욕적인 순간 중 하나는 1968년 베를린에서 열린 기독교민주연합 전당대회에서 발생했다. 나치 사냥꾼 베아테 클라르스펠트는 남편 세르주 클라르스펠트와 함께 나치 전범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이던 중, 공개적으로 키징거의 뺨을 때리며 그를 "이 나치"라고 불렀다. 그녀는 프랑스어로 그렇게 말한 뒤, 두 명의 안내원에게 끌려나가면서도 독일어로 "키징거! 나치! 물러나라!"라고 외쳤다. 키징거는 왼쪽 뺨을 감싸 쥐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사망할 때까지 이 사건에 대해 언급을 거부했으며, 다른 기회에는 1933년 나치당에 가입한 것이 기회주의적 행동이었다는 주장을 명확히 부인했다. 다만 1940년 국방군 징집을 피하기 위해 독일 외무부에 합류한 것은 인정했다.
그의 나치 과거에 대한 비판은 작가 하인리히 뵐과 귄터 그라스를 포함한 저명한 인사들로부터도 제기되었다. 귄터 그라스는 1966년 키징거에게 총리직을 수락하지 말 것을 촉구하는 공개 서한을 쓰기도 했다. (훗날 2006년 그라스는 자신이 무장친위대 소속이었음을 고백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특히 서독 학생 운동과 다른 사회 계층은 키징거를 독일인들이 과거사와 제대로 화해하지 못했음을 상징하는 정치인으로 보았다.
6.5. 총리직 종료

1969년 서독 연방의회 선거 이후, 독일 사회민주당은 자유민주당과 연정을 구성하는 것을 선호하여, 전후 지속되었던 기독교민주연합 총리들의 집권이 막을 내렸다. 키징거는 그의 전 부총리였던 빌리 브란트에게 총리직을 넘겨주었다. 이로써 기독교민주연합/기독교사회연합이 다시 여당으로 복귀하기까지는 13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키징거는 현재까지 독일 기독교민주연합 소속 총리 중 가장 짧은 재임 기간을 기록했다.
7. 말년 및 정치 활동
총리직 퇴임 후에도 키징거는 독일 정치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7.1. 야당 지도부 활동
키징거는 1971년 7월까지 야당인 기독교민주연합/기독교사회연합 연방의회 원내 교섭단체를 이끌었으며, 이후 라이너 바르첼이 기독교민주연합 당수직을 계승했다. 그는 1980년까지 연방의회 의원으로 남아 총 8선 의원 경력을 쌓았다. 1972년에는 연방의회에서 빌리 브란트 총리에 대한 기독교민주연합/기독교사회연합 의원단의 건설적 불신임 투표를 정당화하는 주요 연설을 했다. 당시 기독교민주연합 당수였던 라이너 바르첼의 총리 취임을 목표로 한 이 투표는 율리우스 슈타이너와 아마도 레오 바그너가 동독의 슈타지로부터 뇌물을 받고 기권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7.2. 회고록 집필
1980년, 키징거는 정치 경력을 마무리하고 회고록 집필에 전념했다. 그는 1958년까지의 삶을 다룬 회고록의 첫 부분인 "어둡고 밝은 세월들"(Dunkle und helle Jahre둥클레 운트 헬레 야레독일어)만을 완성했다. 이 책은 그의 사망 후인 1989년에 출간되었다.
8. 사망 및 평가
키징거의 서거는 그의 나치 과거에 대한 논란을 다시금 상기시켰다.
8.1. 사망 및 장례
키징거는 1988년 3월 9일, 84세 생일을 28일 앞두고 튀빙겐에서 사망했다. 슈투트가르트의 성 에버하르트 교회에서 진혼 미사가 거행된 후, 그의 장례 행렬은 나치당 당원이었던 그의 과거를 기억해야 한다고 외치는 시위대(주로 학생들)의 뒤를 따랐다.
8.2. 역사적 평가 및 논란
키징거의 나치 과거는 현재까지도 좌파 인사들(예: 그레고어 기지)로부터 서독이 제3제국의 과거를 청산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의 총리 재임은 독일 민주주의 발전과 과거사 기억 정치에 대한 지속적인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8.3. 영향력
키징거는 뛰어난 웅변가이자 중재자로 평가받았으며, "은빛 혀의 수장"(Häuptling Silberzunge하우프트링 질버충게독일어)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는 정치적 라이벌들을 효과적으로 통합하고 대연정을 이끌어 혼란스러운 시기에 독일의 안정과 개혁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그의 나치 과거는 그가 이룩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논란을 야기하며 독일 사회의 역사적 성찰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9. 개인 생활
9.1. 결혼 및 가족
키징거는 1932년 12월 24일 마리-루이제 슈나이더와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었다.
10. 저서
- Schwäbische Kindheit슈베비셰 킨트하이트독일어 (《슈바벤의 어린 시절》), 로볼트 출판사, 튀빙겐, 1964년.
- Ideen vom Ganzen. Reden und Betrachtungen이데엔 폼 간첸. 레덴 운트 베트라흐퉁엔독일어 (《전체에 대한 생각. 연설과 성찰》), 로볼트 출판사, 튀빙겐, 1964년.
- Stationen 1949-1969슈타치오넨 1949-1969독일어 (《정거장 1949-1969》), 로볼트 출판사, 튀빙겐, 1969년.
- Die Stellung des Parlamentariers in unserer Zeit디 슈텔룽 데스 팔라멘타리어스 인 운저러 차이트독일어 (《우리 시대 의원의 위치》), 슈투트가르트, 1981년.
- Dunkle und helle Jahre: Erinnerungen 1904-1958둥클레 운트 헬레 야레: 에리너룽엔 1904-1958독일어 (《어둡고 밝은 세월: 회고록 1904-1958》), 도이체 페어락스-안슈탈트, 슈투트가르트, 198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