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교육
콘스탄틴 블라디미로비치 로자옙스키는 1907년 8월 11일 러시아 제국 아무르주의 행정 중심지인 블라고베셴스크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비교적 드물고 취약한 시베리아 부르주아 계층에 속하는 중산층이었다. 아버지 블라디미르 이바노비치는 법학 학위를 가진 공증인이었고, 어머니 나데즈다 미하일로브나는 블라고베셴스크의 유서 깊은 가문 출신으로, 콘스탄틴과 그의 남동생 블라디미르, 그리고 두 여동생 나데즈다와 니나를 양육하는 데 헌신했다. 청소년기에 로자옙스키는 한때 콤소몰의 일원이 되기도 했다.
2. 만주 망명 및 정치적 성향 형성
로자옙스키는 가족들의 예상을 뒤엎고 1925년 소련을 탈출하여 만주로 망명했다. 그는 아무르강을 건넌 이후 한동안 행방이 묘연했으나, 1926년 하얼빈에 머물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소련 당국으로부터 출국 비자를 받아 하얼빈으로 가서 그를 설득하여 귀국시키려 했으나, 로자옙스키는 귀국을 거부했고, 결국 어머니는 홀로 귀국하며 다시는 그를 만나지 못했다. 1928년에는 그의 아버지와 남동생도 하얼빈으로 탈출했으며, 소련에 남겨진 어머니와 여동생들은 국가정치보안부(GPU)에 체포되었다.
하얼빈에서 로자옙스키는 하얼빈 중러 공업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재학 중 그는 니콜라이 니키포로프와 게오르기 긴스의 영향을 받아 민족주의와 반공주의에 깊이 경도되었고, 러시아 파시스트 조직에 참여했다. 1928년 졸업 직전, 그는 대학 내에 소련의 국기를 게양하는 것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하여 대학에서 퇴학당했으나, 이후 대학 내 소련의 영향력이 약화되면서 복학하여 1929년에 졸업했다. 같은 해 그는 리디아 마슬로바와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었으나 모두 요절했다. 1936년 리디아와 이혼한 그는 이듬해인 1937년 네올리나 알리셰바와 재혼하여 아들 블라디미르와 딸 올가를 두었으며, 이들 사이에서도 한 명의 자녀가 요절했다.
3. 러시아 파시스트당 (RFP) 지도자
콘스탄틴 로자옙스키는 만주에서 러시아 파시스트당의 창당과 성장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그의 이념은 극단적인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를 특징으로 했다.
3.1. 창당 및 이념

1931년 5월 26일, 로자옙스키는 러시아 파시스트당 창당에 참여하여 사무총장에 취임했다. 1934년에는 아나스타시 본샤츠키의 전러시아 파시스트 조직과 합병하여 사실상 당의 지도자가 되었고, 1936년에는 당수로 선출되었다. 로자옙스키는 이탈리아 파시즘의 지도자 베니토 무솔리니를 자신의 모델로 삼았으며, 당의 상징으로 나치당을 모방한 하켄크로이츠를 사용했다. 또한 러시아 제국의 상징이었던 쌍두 독수리를 당의 휘장으로 채택하며 옛 러시아 제국의 상징과 러시아 민족주의적 상징을 결합했다. 그는 이탈리아의 검은 셔츠단처럼 검은색 제복과 검은색 교차 벨트를 착용했으며, 개인적으로 선발된 호위대를 두었다.
로자옙스키의 핵심 이념은 파시즘, 민족주의, 반공주의였으며, 특히 극단적인 반유대주의를 표방했다. 그는 유대인들을 볼셰비키와 동일시하며 러시아의 모든 문제의 근원으로 지목했다.
3.2. 조직, 활동 및 일본과의 관계
러시아 파시스트당은 하얼빈에 중앙 사무소를 두고 "극동의 모스크바"라 불리며, 전 세계 26개국에 지부를 설립하는 등 국제적인 조직망을 구축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해외 거점은 뉴욕이었다. 로자옙스키의 검은 셔츠단은 일본 제국 육군으로부터 무기를 공급받았다.

만주국에서 로자옙스키는 약 1만 2천 명의 당원을 확보했다. 그는 1934년 만주국 백계 러시아인 사무국의 제2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관동군의 비호를 받으며 하얼빈을 거점으로 반공 운동을 조직했다. 당은 만저우리(만주리) 지부에 소련 국경에서 약 3 km 떨어진 곳에 네온 불빛으로 빛나는 거대한 하켄크로이츠를 설치하여 소련 정부에 대한 위세를 과시했다. 이 하켄크로이츠는 밤낮으로 켜져 있었다.
로자옙스키는 일본 제국 건국 2600주년 기념 행사 시기에 선별된 인사들과 함께 지역 공식 기념식에서 히로히토 천황에게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그는 백군의 키슬리친 장군과 일본군과 합세하여 러시아 국경에 이러한 상징들을 남겨두고 백계 반소련 세력을 이끌어 "소련의 통치로부터 러시아 인민을 해방"시킬 날을 고대했다. 러시아 파시스트당의 주요 군사 활동은 관동군 내에 조직된 순수 러시아계 특수부대인 아사노 부대를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이 부대는 일본이 시베리아를 침공할 경우 소련군에 대한 사보타주를 수행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일본은 외만주에 백계 러시아 정권을 수립하는 데 관심을 보였다.

3.3. 주요 저술
로자옙스키는 악명 높은 반유대주의자로서, 당 기관지인 『나시 푸티』와 『국민』에 수많은 반유대주의적 글을 게재했다. 그는 또한 소책자 『유다의 종말』과 저서 『세계의 현대적 유대화 또는 20세기 유대인 문제』를 저술했다. 이들 저작물은 그의 극단적인 반유대주의적 이념과 파시즘 사상을 담고 있다.
4. 제2차 세계 대전 중 활동 및 당 해산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로자옙스키는 볼셰비즘에 대한 공개적인 투쟁을 시작하려 했으나, 일본 당국은 러시아 파시스트당의 활동을 소련 내 사보타주 행위로 제한했다.
1943년 5월, 로자옙스키는 이중간첩 혐의로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심문 결과 무죄임이 밝혀져 6월에 석방되었고, 백계 러시아인 사무국 제2부장으로 복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동군은 1943년 7월 1일 러시아 파시스트당의 활동을 제한하고, 공개적인 제복 착용 및 당가 제창을 금지했으며, 결국 당은 해산되었다.
5. 종전 후 망명 및 소련 귀환
1945년 8월 13일 소련의 만주 침공으로 전황이 악화되자 로자옙스키는 가족을 남겨둔 채 하얼빈을 떠나 상하이로 망명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로자옙스키는 자신이 "영적 위기"라고 부르는 상태를 겪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정권이 민족주의적 성격으로 진화하고 있으며, 스탈린주의가 "우리 러시아 파시즘"의 이상적인 구현이자 실현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장문의 개인 서한에서 자신을 변명하고, 과거의 실수를 인정하며, 자신의 반소련 활동이 "조국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조국에 대한 행위"였다고 강변했다. 그는 나치 독일을 지지했던 것이 잘못임을 인정하면서도, 아돌프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절멸시킴으로써 러시아를 도울 수 있다고 믿었다고 말했다. 이 서한은 국민 볼셰비즘의 교리와 놀라운 유사성을 보였으며, 로자옙스키는 자신이 이제 "국민 공산주의자이자 확고한 스탈린주의자"라고 주장했다. 그는 심지어 스탈린에게 개인적으로 용서를 구하며 자신을 "당신의 보잘것없는 노예"라고 칭하기까지 했다.
이에 대해 소련 당국은 그에게 사면과 함께 자국 신문사 기자직을 제안했다. 로자옙스키는 이 제안을 믿고 레프 오호틴과 함께 베이징의 소련 대사관에 자수하여 3주간 머물렀다. 그러나 1945년 10월 25일, 소련 당국은 약속을 파기하고 그를 체포하여 모스크바로 이송했다.
6. 재판 및 처형
1946년 8월 26일, 모스크바로 이송된 로자옙스키는 그리고리 세묘노프 등과 함께 재판을 받았다. 이 재판은 소련 언론에 널리 보도되었다. 재판은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법원 의장 바실리 울리흐에 의해 개정되었다.
로자옙스키와 러시아 파시스트당의 다른 지도자들은 반소련 선동, 러시아 파시스트당 창설, 백군 망명자들 사이에서 반소련 선전물 배포, 그리고 중국, 유럽, 미국에서 유사한 반소련 조직을 창설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또한 판결문에 따르면, 그는 여러 일본 장군들과 함께 소련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고, 독일 및 일본 정보기관과의 협력 하에 소련에 대한 스파이 및 테러 집단을 직접 조직하는 데 관여했다. 모든 피고인들은 유죄를 인정했다.
로자옙스키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또한 그리고리 세묘노프, 레프 필리포비치 바실리옙스키, 알렉세이 프로클로비치 박셰옙, 레프 오호틴, 우흐톰스키 등도 다양한 형벌을 선고받았다. 로자옙스키는 1946년 8월 30일 루비얀카 감옥 지하에서 총살형에 처해졌다.
7. 사후 평가 및 유산
로자옙스키의 마지막 저서인 『자베샤니예 루스코고 파시스타』(Завещание Русского фа시ста러시아어)는 2001년 러시아에서 출판되었다. 그러나 2010년 10월 11일, 크라스노야르스크 중앙 지방법원의 결정에 따라 이 책은 러시아에서 극단주의 자료로 인정되어 극단주의 자료 연방 목록 (제861호)에 포함되었다.
그의 사상과 행적은 극단적인 파시즘, 민족주의, 그리고 특히 반유대주의와 깊이 연관되어 있으며, 역사적으로 민주주의, 인권, 사회 진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생애는 망명지에서 극단주의적 이념을 추구하다가 결국 조국으로 돌아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한 파시스트 지도자의 파멸적인 경로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