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와타나베 고조(渡邉 衡三Watanabe Kōzō일본어)는 1942년 9월 24일 일본 오사카부에서 태어난 일본의 저명한 자동차 엔지니어이다. 그는 도쿄대학 공학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 석사 과정에서 자동차 공학을 전공한 후 1967년 닛산에 입사했다. 닛산의 프린스 사업부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는 주로 섀시 설계와 차량 실험 분야에서 경력을 쌓았다. 특히 9세대 스카이라인 R33과 10세대 스카이라인 R34의 개발 책임자(주관)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스카이라인 시리즈의 성능 향상과 진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말년에는 니스모 전무 이사를 역임하며 닛산 모터스포츠 프로젝트를 총괄했고, 은퇴 후에도 프린스 & 스카이라인 뮤지엄의 고문으로서 자동차 산업에 대한 지속적인 기여를 이어오고 있다.
2. 유년 시절과 교육
와타나베 고조는 1942년 9월 24일 일본 오사카부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자동차에 대한 깊은 애정과 모터스포츠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1963년 스즈카 서킷에서 열린 제1회 일본 그랑프리를 직접 관전하며 프린스 자동차가 참패하는 모습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는 원래 브라밤과 같은 F1 자동차 제조 회사에 취업하여 레이싱카를 설계하는 것을 꿈꿨다. 일본에서는 R380 레이싱카를 제작한 프린스 자동차에 입사하기를 희망했다.
1967년 3월, 닛산 입사 한 달 전에는 직접 유럽을 방문하여 F1 경주를 관전하는 등 자동차에 대한 열의를 보였다. 그는 도쿄대학 공학부 기계공학과에서 선박 기계 공학을 공부하고, 대학원 석사 과정에서 자동차 공학을 전공하며 전문성을 키웠다.
3. 닛산에서의 경력
와타나베 고조는 1967년 4월, 그가 희망했던 오기쿠보의 닛산 프린스 사업부에 배정받으며 닛산에서의 전문 경력을 시작했다. 닛산은 1966년 8월 프린스 자동차 공업을 흡수 합병했으며, 그의 주 활동 무대가 된 본관은 이전에 나카지마 비행기 도쿄 공장 시설이었다.
3.1. 닛산 입사와 초기 임무
그는 닛산 프린스 사업부 내의 제1차량설계부 제2차량설계과에 배치되었다. 이 부서에는 사쿠라이 신이치로와 후유키 우시오 두 명의 과장이 있었으며, 사쿠라이의 부하인 이토 나가노리가 와타나베를 직접 지도했다. 이토는 훗날 사쿠라이의 뒤를 이어 스카이라인 개발을 책임지게 되는 인물이었다.
와타나베는 레이싱카 설계를 희망했지만, 사쿠라이는 그에게 "생산차를 먼저 배워야만 레이싱카를 만들 수 있다"고 조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의 지도 아래 와타나베는 3세대 스카이라인 C10 GT-R의 레이싱카용 서스펜션 설계에 참여하게 되었다. 점차적으로 그는 R381과 R382와 같은 레이싱카의 서스펜션 일부도 설계하는 기회를 얻었다.
3.2. 안전 차량 연구
자동차 산업에서 배기가스 규제와 안전에 대한 중요성이 커지면서, 닛산도 R38 시리즈의 레이싱 활동을 중단하게 되었다. 1970년 초, 와타나베는 요코하마의 쓰루미구에 위치한 ESV(Experimental Safety Vehicle, 실험 안전차) 부서로 전근하여 충돌 안전 연구에 3년여간 종사했다.
3.3. 섀시 설계 및 엔지니어링
1973년, 와타나베는 다시 오기쿠보로 돌아와 이토가 과장으로 승진한 제3섀시설계부 제3섀시설계과에 배치되었다. 당시 많은 엔지니어들이 배기가스 규제 프로젝트에 투입되어 이토와 와타나베는 소수의 인원만으로 구 프린스 자동차 계열 차량의 섀시를 설계하고 개선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이 시기 그는 4세대 스카이라인 C110의 후기형 모델, 닛산 펄서, 닛산 프린스 호머 트럭의 섀시 설계를 담당했다. 이 과정에서 켄메리(C110)의 마이너 체인지 버전의 하체 및 파워 스티어링 설계도 맡았다.
특히, 그는 이 시기 천황의 어료차인 닛산 프린스 로열 리무진의 부품 교환 및 수리 작업을 맡아 인상 깊은 경험을 했다. 수리를 마치고 궁내청에 차량을 돌려보낸 후, 그는 국화 문양이 새겨진 온시노타바코 한 팩을 하사받았다고 전해진다. 당시 배기가스 규제 대응으로 인력이 부족하여 단 2~3명으로 업무를 처리했으며, 그는 1975년까지 해당 부서에 재직했다.
3.4. 전략 기획 및 차량 테스트
1985년, 와타나베는 닛산 본사의 전략부에 배치되었다. 이 부서에서 그는 각 닛산 자동차의 기본적인 콘셉트와 이미지, 즉 "스크린 플레이"를 작성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어떤 차량을 수출용으로, 어떤 차량을 내수용으로 판매할지에 대한 전략을 수립하는 데 참여했다. 이 기획 업무에는 6세대 스카이라인 (뉴먼 스카이라인), 7세대 스카이라인 (7th 스카이라인), 블루버드 및 서니의 FF화 등의 개발 콘셉트가 포함되었다.
같은 해, 그는 차량 실험 부서로 옮겨 N13 펄서와 그 파생 모델인 엑사, 랭글리, 리베르타 빌라 등의 실험을 진행했다. 1987년부터는 도치기현 가미노카와정에 위치한 닛산 도치기 공장으로 파견되어 이토 수석 엔지니어의 지휘 아래 8세대 스카이라인 R32의 실험 주담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레퍼드 및 수출 사양인 인피니티 M의 실험도 담당했으며, R32의 아테사 E-TS의 기초 연구를 위해 7세대 스카이라인과 로렐을 4륜구동으로 개조하여 반복 실험하는 등 철저하고 끈질기게 테스트를 수행했다. 그는 수집된 데이터를 이토에게 제공했으며, 그의 노력은 R32형 이후의 스카이라인 사륜구동 차량에 아낌없이 반영되었다. 와타나베는 자신의 테스트 팀과 함께 R32를 뉘르부르크링에 가져가 테스트를 완료했고, 이는 R32의 성공적인 출시를 위한 발판이 되었다.
1990년부터는 닛산의 실험 주관으로 임명되어 닛산 승용차의 마이너 체인지 시 실험 책임자를 맡았다. 이때 북미에서의 품질 향상 운동과, 장거리 주행이 필요한 초대 Q45의 플릿 테스트 등을 수행했다.
3.5. 스카이라인 R33 수석 엔지니어
1992년 1월, 와타나베는 상품 개발 본부 주관으로서 9세대 스카이라인 R33의 개발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R33 프로젝트는 이미 시작된 상태였다. 닛산 본사는 R33을 R32보다 더 넓고 길게 만들어 승객 편의성을 개선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그 결과 R33은 R32보다 무거워졌지만, 와타나베는 "R33 GT-R은 R32 GT-R보다 빨라야 한다"고 선언하며 더 빠른 차를 목표로 했다.
특히 그는 서스펜션 설계에 많은 공을 들였다. BCNR33 GT-R이 뉘르부르크링에서 테스트되었을 때, 랩 타임은 마침내 BCNR32 GT-R보다 21초 단축되었다. 이 성과를 바탕으로 "마이너스 21초 로망"이라는 슬로건이 텔레비전 광고에 사용되었다.
3.6. 스카이라인 R34 수석 엔지니어
와타나베는 이어서 10세대 스카이라인 R34의 수석 엔지니어로 다시 임명되었다. 스카이라인의 오랜 과제 중 하나는 전후방 중량 배분과 패키징 개선이었다. 와타나베는 한때 무거운 RB 엔진을 포기하고 더 가벼운 V6 엔진을 사용하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 실제로 V6 엔진과 V35의 패키징 사용을 검토했으나, 레이아웃 변경 및 ATTESA E-TS와 V형 엔진의 조합이 당시 시마용 VH41DE 외에는 존재하지 않아 개발 기간이 길어질 우려가 있었다. 또한 당시 월 2만 대 생산으로 풀가동 중이던 닛산 자동차 이와키 공장의 VQ 엔진 생산 라인에 제2라인 신설 등 막대한 설비 투자가 필요했으나, 스카이라인 단일 차종으로는 이러한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되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직렬 6기통 RB 엔진을 계속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더욱 완성도를 높이는 데 집중했다.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일본에서 GT카와 스포츠카가 인기를 잃어가던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와타나베와 그의 팀은 R34를 궁극의 스카이라인으로 완성시켰다. 또한, BNR34 GT-R은 현재까지 마지막 "스카이라인 GT-R"로 남아있다 (닛산은 이후 GT-R을 스카이라인 라인업에서 분리했다). 그의 지휘 아래 개발된 BNR34 GT-R은 초기 하코스카 이후 스카이라인 GT-R의 유종의 미를 거두게 되었다.
3.7. NISMO에서의 리더십
R34 스카이라인을 출시한 후, 1999년 와타나베는 니스모의 전무 이사로 승진하여 닛산의 전체 모터스포츠 프로젝트를 총괄하게 되었다. 니스모 본사에서 Z-튠 R34 스카이라인을 고객에게 판매할 때마다 와타나베는 직접 참석하여 새로운 오너들을 축하하기도 했다. 그는 2006년 니스모에서 은퇴했다.
4. 은퇴 후 활동
니스모에서 은퇴한 후에도 와타나베 고조는 자동차 산업과 관련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현재 나가노현 오카야시에 위치한 프린스 & 스카이라인 뮤지엄의 고문으로 재직 중이다. 또한 그는 이토와 함께 스카이라인 관련 축제나 토크쇼에 자주 출연하며 대중과 소통하고 있다. 덧붙여, 와타나베가 닛산에 입사한 이후 (2세대 스카이라인 S50계의 말기 이후) 설계에 관여하지 않은 유일한 스카이라인은 5세대 스카이라인 C210 (스카이라인 재팬)뿐이다.
5. 개인 생활
와타나베 고조의 아내는 오카야 고키의 전 사장인 오카야 마사오의 둘째 딸이다. 오카야 고키의 현 사장인 오카야 아쓰이치는 오카야 마사오의 장남으로, 와타나베의 처남이다. 와타나베의 장모는 사업가 마쓰모토 겐지로의 손녀딸이며, 와타나베의 처이모는 물리학자 사가네 료키치에게 시집갔다.
6. 유산과 영향
와타나베 고조는 닛산 자동차 개발, 특히 스카이라인 시리즈에 지대한 공헌을 한 핵심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닛산의 상징적인 스포츠 세단인 스카이라인의 9세대와 10세대를 개발하며 차량의 성능과 기술적 완성도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 특히 뉘르부르크링에서 랩 타임을 21초 단축시킨 R33 GT-R의 개발과 직렬 6기통 RB 엔진을 고수하며 스카이라인 GT-R의 정체성을 지켜낸 R34 개발은 그의 엔지니어링 철학과 헌신을 잘 보여준다.
그의 노력은 단순히 차량의 성능을 향상시키는 것을 넘어, 당시 침체기에 접어들었던 일본의 스포츠카 시장에서 스카이라인의 명성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니스모에서의 리더십은 닛산 모터스포츠의 발전을 이끌었으며, 은퇴 후에도 프린스 & 스카이라인 뮤지엄의 고문으로서 미래 세대에게 자동차에 대한 열정과 지식을 전파하는 데 힘쓰고 있다. 와타나베 고조의 업적은 닛산 스카이라인의 역사뿐만 아니라 일본 자동차 산업 전반에 걸쳐 중요한 유산으로 남아있다.
7. 함께 보기
- 닛산 자동차
- NISMO
- 닛산 스카이라인
- 닛산 스카이라인 GT-R
- 사쿠라이 신이치로
- 이토 나가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