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Early Life and Background
켄 노턴은 일리노이주 잭슨빌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운동 재능을 보였고, 미국 해병대 복무 중 권투를 시작하여 아마추어 경력을 쌓았다.
1.1. Childhood and Education
노턴은 잭슨빌 고등학교에서 발군의 운동선수였다. 1960년 고등학교 4학년 때 미식축구에서 수비 포지션으로 올스테이트 팀에 선정되었다. 육상 코치는 그를 여덟 종목에 출전시켰고, 노턴은 그중 일곱 종목에서 1위를 차지했다. 이로 인해 일리노이주 고등학교 스포츠에서는 선수의 육상 경기 출전 종목을 최대 네 개로 제한하는 '켄 노턴 규칙'이 제정되기도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노턴은 트루먼 주립대학교의 전신인 노스이스트 미주리 주립대학교에 미식축구 장학금을 받고 입학하여 초등 교육학을 공부했다. 1985년 'ESPN 피트니스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노턴은 권투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교사나 경찰관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1.2. Military Service and Amateur Career
대학교를 떠난 후 노턴은 미국 해병대에 입대하여 1963년부터 1967년까지 복무했다. 그는 펜서콜라 코리 스테이션의 NCTC를 졸업한 수동 모스 부호 요격병(MOS 2621)이었다. 해병대에서 복무하는 동안 권투를 시작했으며, 24승 2패의 아마추어 전적을 기록하며 세 차례 올마린 헤비급 타이틀을 획득했다. 그는 해병대 역사상 최고의 권투 선수로 평가받았고, 노스캐롤라이나 AAU 골든 글러브, 국제 AAU, 팬아메리칸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1967년 전국 AAU 결승전 이후 프로로 전향했다.
2. Professional Boxing Career
노턴의 프로 권투 경력은 1967년 프로 데뷔 이후 꾸준한 성장을 거쳐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하고 여러 역사적인 시합을 치르며 절정에 달했다.
2.1. Early Bouts and Rise to Prominence
프로 데뷔 후 노턴은 거구의 잭 오핼러런과 같은 선수들을 상대로 꾸준히 승리를 쌓아 나갔다. 1970년, '더 링' 매거진이 그를 유망주로 소개한 직후 당시 무명이었던 베네수엘라의 강타자 호세 루이스 가르시아에게 불의의 패배를 당했다. 가르시아는 노턴을 다섯 차례 다운시켰고, 결국 노턴은 노카웃되었다. 5년 뒤 두 선수가 모두 랭커가 된 재대결에서는 노턴이 가르시아를 압도하며 설욕에 성공했다.
노턴은 나폴레온 힐의 동기 부여 서적인 Think and Grow Rich성공의 법칙영어을 선물 받았는데, 그는 이 책이 "내 인생을 극적으로 변화시켰다. 나는 무하마드 알리와 싸울 예정이었다. 나는 미숙한 권투 선수였지만, 이 책을 읽음으로써 승리했다"고 말했다. 이 책을 읽은 후 그는 14연승을 기록했으며, 여기에는 1973년 무하마드 알리를 상대로 충격적인 승리를 거두며 북미 복싱 연맹(NABF) 헤비급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한 것이 포함된다. 노턴은 나폴레온 힐의 Think and Grow Rich성공의 법칙영어의 문구가 알리를 이기는 데 최종적인 영감을 주었다고 말했다. 그는 "인생의 싸움은 항상 더 강하거나 더 빠른 사람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하지만 결국 승리하는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라고 언급했다. 노턴은 또한 부와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한 힐의 완벽한 강좌를 수강했다. 그는 "이것은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다. 직업에서 최고가 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더 사우스이스트 미주리언'에 실린 기사에서 노턴은 "내가 하는 한 가지는 내가 잘했거나 상대방이 못했던 시합 영상만 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권투에서, 그리고 인생의 모든 면에서, 아무도 배우는 것을 멈춰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2.2. Trilogy with Muhammad Ali
노턴의 경력 초반 상대들은 그를 쉽게 피했다. 그의 첫 번째 큰 기회는 존경받는 컨텐더 헨리 클라크를 상대로 분명한 승리를 거두면서 찾아왔고, 이는 그가 세계적인 인정을 받는 데 기여했다. 그에게 큰 기회는 알리가 시합에 동의하면서 찾아왔다. 노턴과 스파링을 하고 알리를 이겼던 조 프레이저는 알리에 대해 "그는 분명히 고생할 것이다!"라고 예언적으로 말했다. 비록 두 사람 모두 1970년대 중반 최고의 권투 선수였지만, 노턴과 프레이저는 같은 트레이너인 에디 푸치를 공유했고 좋은 친구였기 때문에 서로 싸우지 않았다.

1973년 3월 31일, 첫 대결을 위해 무하마드 알리는 샌디에고 스포츠 아레나 링에 엘비스 프레슬리가 선물한 가운을 입고 등장했다. 알리는 당시 세계 6위 랭커였던 노턴을 상대로 5대 1의 우위를 점했으며, ABC의 '와이드 월드 오브 스포츠'를 통해 경기가 중계되었다. 노턴은 자신의 고향인 샌디에고에서 알리를 상대로 12라운드 스플릿 디시전으로 승리하며 NABF 헤비급 타이틀을 획득했다. 이 경기에서 노턴은 2라운드에 알리의 턱을 부러뜨렸고, 이로 인해 알리는 남은 10라운드 동안 방어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이는 '위대한 자' 알리 경력의 두 번째 패배로 기록되었다. (알리의 이전 패배는 프레이저에게 당한 것이었고, 알리는 1974년 조지 포먼을 물리치고 헤비급 타이틀을 되찾았다.)
거의 6개월 후인 1973년 9월 10일 캘리포니아주 잉글우드의 더 포럼에서 알리는 근소한 스플릿 디시전으로 승리했다. 노턴은 첫 알리전보다 2.3 kg (5 lb) 가벼운 93 kg (206 lb)로 계체량을 통과했는데, 일부 권투 작가들은 그의 훈련이 너무 강렬해서 과훈련을 했을 수도 있다고 제안했다. 이 치열한 싸움에서는 격렬한 공방이 오고갔다. 알리 입장에서는 여기서 패배한다면 '위대한 자'라는 그의 주장에 심각한 타격이 될 수 있었다. ABC의 경기 중계 동안, 중계자이자 알리의 절친한 친구였던 하워드 코젤은 노턴의 끊임없는 공세와 알리가 노턴의 어색한 크랩 형태의 교차 팔 방어 스타일을 뚫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춤추고 잽을 날리는 알리가 경기를 지배하고 있다고 시청자들에게 반복해서 말했다. 알리에게 유리한 근소한 채점과 판정은 모두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2.3. World Championship Challenge and WBC Title Reign
1974년, 노턴은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의 폴리에드로 데 카라카스에서 조지 포먼과 세계 헤비급 복싱 챔피언십을 놓고 싸웠으나, 2라운드 노카웃 패배를 당했다. 호각이었던 1라운드 후, 2라운드 시작 1분 만에 포먼은 어퍼컷으로 노턴을 휘청거리게 하며 로프 쪽으로 밀어붙였다. 노턴은 캔버스에 쓰러지지는 않았지만, 휘청거리는 다리로 분명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로 계속 싸웠다. 그는 곧이어 두 번 더 연속으로 다운되었고, 심판이 개입하여 경기를 중단시켰다.
1975년, 노턴은 제리 쿼리를 5라운드 기술 노카웃으로 인상적으로 꺾으며 NABF 헤비급 타이틀을 되찾았다. 2라운드에 바디 레프트 훅을 맞아 잠시 충격을 입었지만, 노턴은 남은 경기 내내 쿼리를 압도했고, 심판이 5라운드에 경기를 중단시켰다. 이후 노턴은 1970년에 자신에게 패배를 안겼던 호세 루이스 가르시아와의 재대결에서 5라운드 노카웃으로 가르시아를 압도하며 설욕에 성공했다. 그는 가르시아를 미드섹션 공격으로 다섯 번 다운시켰고, 가르시아는 카운트 아웃되었다.
1976년 9월 28일, 노턴은 뉴욕시 양키 스타디움에서 알리와 세 번째이자 마지막 대결을 펼쳤다. 마지막 만남 이후 알리는 1974년 조지 포먼을 8라운드 노카웃으로 꺾고 세계 헤비급 챔피언 타이틀을 되찾은 상태였다. 많은 관측통들은 이 싸움이 알리의 복싱 경력 하락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고 느꼈다. 노턴과의 경기는 알리에게 힘든 싸움이었다. 역사상 가장 논란이 많았던 경기 중 하나로, 최종 라운드에 돌입하기 전까지 심판들의 스코어카드는 동점이었고, 알리가 심판과 판정단의 스코어카드 모두에서 마지막 라운드를 이겨 챔피언십을 유지했다. 두 명의 판정단인 해럴드 레더맨과 바니 스미스는 알리에게 8-7로 점수를 주었고, 심판 아서 머칸테는 알리에게 8-6-1로 점수를 주었다. 마지막 라운드 종료 시 해설자는 노턴이 경기를 이기지 않았다면 "매우 놀랄 것"이라고 발표했다.
당시 헤비급 챔피언이 판정으로 타이틀을 잃은 마지막 사례는 41년 전 맥스 베어가 지미 브래독에게 패배한 것이었다. 1998년 1월 '복싱 먼슬리'는 알리-노턴 경기를 복싱 역사상 가장 논란이 많았던 타이틀전 판정 중 다섯 번째로 꼽았다. 비공식 유나이티드 프레스 인터내셔널 스코어카드는 노턴에게 8-7이었고, 비공식 AP 통신 스코어카드는 알리에게 9-6(에드 스카일러)과 노턴에게 8-7(윅 템플)이었다.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알리는 큰 타격을 입었다. 그가 노턴을 뒤로 밀어내려는 전술은 실패했다. 그는 9라운드까지 '춤'을 추는 것을 거부했다. 노턴은 알리와의 세 번째 경기가 자신이 분명히 이겼다고 믿었던 시합에서 패배했다는 실망감 때문에 온전히 동기 부여를 받은 마지막 권투 시합이었다고 말했다.
1977년 노턴은 이전에 무패였던 유망주 듀안 보빅을 1라운드 노카웃으로 꺾었다. 이 경기에는 노턴의 이전 트레이너였던 에디 푸치가 노턴 대신 보빅을 훈련시키기로 선택했다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었다. 노턴은 이어서 유럽 타이틀 보유자인 로렌조 자논을 상대로 '워밍업' 경기를 치렀다. 라이트 펀치를 날리지만 빠른 자논은 쏟아지는 라이트 오버핸드와 루핑 바디샷에 쓰러져 카운트 아웃되기 전까지 스코어카드에서 앞서고 있었다.
노턴은 그 다음 노련한 2위 컨텐더 지미 영 (전 챔피언 포먼에게 두 번째 패배를 안겼고, 두 차례 탑 헤비급 컨텐더였던 론 라일도 이겼던 선수)을 15라운드 스플릿 디시전으로 이기고 WBC 타이틀 도전권을 획득했다. 승자는 WBC 챔피언 알리와 대결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알리 진영은 '더 링'에 노턴과 네 번째 싸우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두 권투 선수는 노턴이 강력한 바디 공격을 사용하는 동안 영은 잘 움직이며 카운터를 날리는 영리한 경기를 펼쳤다. 판정은 논란의 여지가 있었고, 많은 관측통들은 영이 승리하기에 충분했다고 생각했다.
노턴은 WBC 헤비급 챔피언십을 놓고 알리와 네 번째 대결을 펼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1978년 2월 15일 알리가 레온 스핑크스에게 타이틀을 잃으면서 계획이 변경되었다. WBC는 새로운 챔피언과 1위 컨텐더인 노턴 간의 경기를 지시했다. 그러나 스핑크스는 노턴과 대결하는 대신 알리와 첫 타이틀 방어전을 치르기로 결정했다. WBC는 이에 1978년 3월 18일, 노턴의 전년도 영과의 승리를 소급하여 타이틀전으로 인정하고 노턴에게 WBC 챔피언십을 수여했다. 이로써 1970년대 초 지미 엘리스와 조 프레이저가 모두 챔피언으로 인정받은 이후 처음으로 헤비급 챔피언십이 분열되었다. 이로써 노턴은 세계 타이틀 매치에서 한 번도 승리하지 않고 세계 챔피언이 된 유일한 선수가 되었다.
1978년 6월 9일, WBC 타이틀 첫 방어전에서 노턴은 새로운 1위 컨텐더 래리 홈즈와 잔혹한 15라운드 경기를 치렀다. 홈즈는 극도로 근소한 스플릿 디시전으로 타이틀을 획득했다. 세 명의 심판 중 두 명은 홈즈에게 143-142로 점수를 주었고, 나머지 한 명은 노턴에게 143-142로 점수를 주었다. AP 통신은 노턴에게 143-142로 점수를 주었다. 2001년 3월 '더 링'지는 홈즈-노턴 경기의 마지막 라운드를 복싱 역사상 일곱 번째로 가장 흥미로운 라운드로 선정했으며, 국제 복싱 연구 기구(IBRO) 회원인 몬테 D. 콕스는 이 경기를 역대 헤비급 경기 중 열 번째로 위대한 경기로 평가했다. 홈즈는 이후 조 루이스와 블라디미르 클리치코에 이어 복싱 역사상 세 번째로 오래 헤비급 세계 챔피언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몇 년 후 홈즈는 이 경기가 자신의 75번의 시합 중 가장 힘든 싸움이었다고 썼다.
2.4. Post-Championship Fights and Retirement
홈즈에게 패배한 후, 노턴은 1978년 6위 랭커인 랜디 스티븐스를 노카웃으로 이겼다. 이어서 1979년 3월 23일 라스베이거스에서 또 다른 필수적인 WBC 타이틀 도전전에서 전설적인 펀처 어니 셰이버스와 맞붙았다. 셰이버스는 1라운드에 전 챔피언을 노카웃시켰고, 이는 포먼, 셰이버스, 그리고 나중에 쿠니와 같은 강타자들과의 노턴의 어려움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노턴 자신은 이에 대해 항상 부인하며, 셰이버스와 쿠니에게 졌을 때는 전성기가 지났다고 말했다.
다음 경기에서는 무명이었지만 끈기 있는 하위 랭커 스콧 르두와 미네소타주 메트 센터에서 스플릿 무승부를 기록했다. 노턴은 8라운드에 눈에 엄지손가락을 찔리는 부상을 입을 때까지 경기를 지배했지만, 이 부상으로 인해 경기는 즉시 바뀌었다. 르두는 그 시점부터 반격했고 노턴은 현저히 지쳐갔다. 노턴은 마지막 라운드에서 두 번 다운되었고, 그 결과 무승부가 되었다. 노턴은 한 스코어카드에서 뒤처졌고, 두 번째에서는 리드를 유지했으며, 세 번째에서는 동점이 되었다. (비공식 AP 스코어카드는 노턴에게 5-3-2였다.)
그 경기 이후 노턴은 37세의 나이로 권투에서 은퇴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은퇴 방식에 만족하지 못한 노턴은 1980년 11월 7일 코브의 고향인 텍사스주에서 무패의 랜들 "텍스" 코브와 맞붙기 위해 링으로 돌아왔다. 모든 공방이 오가는 경기에서 노턴은 스플릿 디시전으로 승리했다. 심판 토니 페레즈와 심사위원 척 해셋이 노턴의 손을 들어주었고, 심사위원 알렌 바인엄은 코브의 승리를 판정했다. 1981년 3월 '더 링' 매거진에서 노턴은 여전히 세계 톱 10 헤비급 선수 중 한 명이었다.
코브와의 승리는 노턴에게 또 다른 타이틀전 기회를 주었다. 1981년 5월 11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그는 코브처럼 무패였던 최고 컨텐더 제리 쿠니와 링에 올랐다. 경기 초반 노턴은 쿠니의 펀치에 휘청거렸다. 노턴은 코너에서 쿠니에게 일련의 강력한 펀치를 맞았고, 토니 페레즈는 1라운드 54초 만에 경기를 중단시켰다. 노턴은 로프에 기대어 쓰러졌고, 쿠니가 1라운드 기술 노카웃으로 승리했다. 노턴은 이 경기 후 은퇴하여 자선 활동에 전념했다.
3. Boxing Style
노턴은 독특한 크랩처럼 팔을 교차하는 방어 자세로 유명한 전진 압박형 권투 선수였다. 이 스타일을 사용하는 권투 선수들은 종종 권투 팬들 사이에서 인사이드 파이터, 스워머, 크라우더로 불린다. 이 자세에서 그의 왼팔은 몸통을 가로질러 낮게 위치했고, 오른손은 오른쪽 또는 왼쪽 귀 옆에 있었다. 강한 압박을 받을 때 두 팔은 얼굴 높이까지 높이 올라와 앞으로 몸을 기울이며 머리를 가렸고, 상대방이 팔을 뻗을 공간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이 가드는 아치 무어와 팀 위더스푼 같은 권투 선수들도 사용했으며, 프레이저는 무하마드 알리와의 세 번째 경기 일부에서, 포먼은 그의 유명한 재기 시절에 사용했다.
노턴은 웅크린 자세에서 상하로 움직이며 정확하고 강력한 펀치를 날렸다. 그는 전진할 때 가장 좋았으며, 그의 뒤로 오른발을 비정상적으로 끌거나 미끄러뜨리면서 엄청난 상체 힘에 의존하여 강력한 펀치를 날렸다. 비교하자면, 대부분의 전통적인 권투 선수들은 팔꿈치를 몸통에 붙이고 팔뚝을 서로 수직으로 평행하게 유지하며, 글러브를 얼굴 양쪽에 가깝게 두고 뒷발을 이용해 파워 펀치를 날린다.
안젤로 던디는 노턴의 가장 강력한 펀치는 레프트 훅이었다고 썼다. 다른 많은 사람들은 그의 오버핸드 라이트를 칭찬했다. '더 링 매거진' 기사에서 노턴 자신은 제리 쿼리에게 날린 라이트 어퍼컷이 자신이 기억하는 가장 강력한 펀치였다고 말했다.
4. Post-Boxing Life
권투 은퇴 후 켄 노턴은 배우와 미디어 활동에 참여하며 대중적인 인기를 이어갔으나, 예기치 못한 사고로 건강상의 어려움을 겪었다.
4.1. Acting and Media Activities
1975년 권투 경력의 정점에 있을 때, 노턴은 디노 데 로렌티스의 블랙스플로이테이션 영화 Mandingo만딩고영어에 출연하며 배우로 데뷔했다. 이 영화는 남북 전쟁 이전 노예가 주인의 오락을 위해 다른 노예들과 싸우도록 구매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1976년 속편 Drum드럼영어에 주연으로 출연한 후, 노턴은 십여 편의 다른 작품에서 단역을 맡았다.
노턴은 권투 은퇴 후 배우와 TV 권투 해설가로 활동했다. 그는 또한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스피커스 뷰로의 회원이자 선수들의 계약 협상을 대리하는 켄 노턴 매니지먼트 컴퍼니를 설립했다. 영화 Rocky록키영어에서 아폴로 크리드 역할은 원래 노턴이 맡을 예정이었으나, 사정상 칼 위더스로 변경되었다.
알리, 포먼, 프레이저, 홈즈와 함께 그들의 전성기를 논하는 비디오 Champions Forever챔피언 포에버영어에 출연했으며, 2000년에는 자서전 Going the Distance고잉 더 디스턴스영어를 출간했다.
4.2. Accident and Health Impact
노턴은 1986년 거의 치명적인 자동차 사고로 부상을 당해 느리고 어눌한 언어 장애를 겪기 전까지 TV, 라디오, 공개 강연 활동을 계속했다. 그는 이 사고로 두개골 골절을 포함한 중상을 입었고, 사고 전후 몇 년간의 기억을 잃었으며, 보행과 발성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재활 과정을 통해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려 노력했다.
5. Awards and Recognitions
켄 노턴은 그의 뛰어난 권투 경력을 통해 수많은 상과 영예를 얻었으며, 여러 권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노턴은 1989년 세계 복싱 명예의 전당, 1992년 국제 복싱 명예의 전당, 2004년 미국 해병대 스포츠 명예의 전당, 그리고 2008년 세계 복싱 평의회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998년 '더 링'지의 연말 특집호에서는 노턴을 "역대 위대한 헤비급 선수 50인" 중 22위로 평가했다. 노턴은 1977년 미국 권투 작가 협회(BWAA)의 J. 닐 트로피 "올해의 선수" 상을 수상했다。노턴은 또한 1973년 긍정적 사고에 대한 "나폴레온 힐 상"을 수상했다.
2001년, 노턴은 샌디에고 홀 오브 챔피언스에 의해 샌디에고 최고의 운동선수들을 기리는 브라이트바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노턴은 또한 2011년 캘리포니아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6. Personal Life

노턴은 세 번 결혼했으며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첫 결혼 전에는 키스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는 해병대에 복무 중이던 1966년 지네트 헨더슨과 결혼했다. 이 결혼은 1968년까지 지속되었고, 미식축구 선수이자 코치인 켄 노턴 주니어를 낳았다. 1977년에는 이전 결혼에서 브랜든이라는 아들을 둔 재클린 '재키' 핼턴과 결혼했다. 재키는 딸 케니샤(1976년생)와 아들 케네 존(1981년생)을 낳았다. 이들은 2000년경 이혼하기 전까지 24년 이상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 2012년경에는 로즈 마리 코넌트와 결혼했다.
노턴은 1977년 '로스앤젤레스 센티넬'과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에 의해 두 차례 "올해의 아버지"로 선정되었다. 그의 자서전 Believe: Journey From Jacksonville잭슨빌에서 온 믿음의 여정영어에서 노턴은 "내가 가질 수 있었던 모든 타이틀 중에서 '아빠'라는 타이틀이 항상 최고였다"고 말했다.
둘째 아들 켄 노턴 주니어는 UCLA에서 미식축구를 했으며 NFL에서 길고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다. 아버지의 권투 경력에 대한 헌정으로, 켄 노턴 주니어는 수비 터치다운을 기록할 때마다 엔드존에서 권투 자세를 취하고 골대 패드를 향해 펀치 콤비네이션을 날리곤 했다. 켄 노턴의 아들 키스 노턴은 한때 텍사스주 휴스턴의 KPRC-TV에서 주말 스포츠 앵커로 일했다.
7. Death
노턴은 2013년 9월 18일 라스베이거스의 한 요양원에서 사망했다. 향년 70세였으며, 사망 원인은 심부전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만년에 여러 차례 뇌졸중을 겪었다. 그의 시신은 일리노이주 잭슨빌의 잭슨빌 이스트 묘지에 안장되었다.
8. Legacy and Tributes
켄 노턴은 권투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사망 후 많은 이들로부터 추모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포먼은 그를 "모든 선수 중 가장 공정한 선수"라고 불렀고, 홈즈는 그가 "권투계와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나게 그리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삶과 경력은 '챔피언 포에버'와 같은 비디오와 자서전 '고잉 더 디스턴스'를 통해 계속해서 기억되고 있다.
9. Professional Boxing Record
번호 | 결과 | 전적 | 상대 | 유형 | 라운드, 시간 | 날짜 | 장소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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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 패 | 42-7-1 | 제리 쿠니 | TKO | 1 (10), 0:54 | 1981년 5월 11일 | 뉴욕시 매디슨 스퀘어 가든 | |
49 | 승 | 42-6-1 | 랜들 "텍스" 코브 | SD | 10 | 1980년 11월 7일 | 텍사스주 샌안토니오 헤미스페어 아레나 | |
48 | 무 | 41-6-1 | 스콧 르두 | 스플릿 무승부 | 10 | 1979년 8월 19일 | 미네소타주 블루밍턴 메트로폴리탄 스포츠 센터 | |
47 | 패 | 41-6 | 어니 셰이버스 | KO | 1 (12), 1:58 | 1979년 3월 23일 | 네바다주 윈체스터 라스베이거스 힐튼 | |
46 | 승 | 41-5 | 랜디 스티븐스 | KO | 3 (10), 2:42 | 1978년 11월 10일 | 네바다주 패러다이스 시저스 팰리스 | |
45 | 패 | 40-5 | 래리 홈즈 | SD | 15 | 1978년 6월 9일 | 네바다주 패러다이스 시저스 팰리스 | WBC 헤비급 타이틀 상실 |
44 | 승 | 40-4 | 지미 영 | SD | 15 | 1977년 11월 5일 | 네바다주 패러다이스 시저스 팰리스 | WBC 헤비급 타이틀 도전권 결정전; 4개월 후 WBC 타이틀 획득 |
43 | 승 | 39-4 | 로렌조 자논 | KO | 5 (10), 3:08 | 1977년 9월 14일 | 네바다주 패러다이스 시저스 팰리스 | |
42 | 승 | 38-4 | 듀안 보빅 | TKO | 1 (12), 0:58 | 1977년 5월 11일 | 뉴욕시 매디슨 스퀘어 가든 | |
41 | 패 | 37-4 | 무하마드 알리 | UD | 15 | 1976년 9월 26일 | 뉴욕시 양키 스타디움 | WBA, WBC, '더 링' 헤비급 타이틀전 |
40 | 승 | 37-3 | 래리 미들턴 | TKO | 10 (10), 2:17 | 1976년 7월 10일 | 캘리포니아주 샌디에고 스포츠 아레나 | |
39 | 승 | 36-3 | 론 스탠더 | TKO | 5 (12), 1:19 | 1976년 4월 30일 | 메릴랜드주 랜드오버 캐피탈 센터 | |
38 | 승 | 35-3 | 페드로 러벨 | TKO | 5 (12), 1:40 | 1976년 1월 10일 | 네바다주 패러다이스 라스베이거스 컨벤션 센터 | |
37 | 승 | 34-3 | 호세 루이스 가르시아 | KO | 5 (10), 1:50 | 1975년 8월 14일 | 미네소타주 세인트폴 시빅 센터 | |
36 | 승 | 33-3 | 제리 쿼리 | TKO | 5 (12), 2:29 | 1975년 3월 24일 | 뉴욕시 매디슨 스퀘어 가든 | 공석인 NABF 헤비급 타이틀 획득 |
35 | 승 | 32-3 | 리코 브룩스 | KO | 1 (10), 1:34 | 1975년 3월 4일 | 오클라호마주 오클라호마시티 레드 카펫 인 | |
34 | 승 | 31-3 | 분 커크맨 | RTD | 7 (10) | 1974년 6월 25일 | 워싱턴주 시애틀 시애틀 센터 콜로세움 | |
33 | 패 | 30-3 | 조지 포먼 | TKO | 2 (15), 2:00 | 1974년 3월 26일 | 베네수엘라 카라카스 폴리에드로 | WBA, WBC, '더 링' 헤비급 타이틀전 |
32 | 패 | 30-2 | 무하마드 알리 | SD | 12 | 1973년 9월 10일 | 캘리포니아주 잉글우드 더 포럼 | NABF 헤비급 타이틀 상실 |
31 | 승 | 30-1 | 무하마드 알리 | 스플릿 디시전 | 12 | 1973년 3월 31일 | 캘리포니아주 샌디에고 스포츠 아레나 | NABF 헤비급 타이틀 획득 |
30 | 승 | 29-1 | 찰리 레노 | UD | 10 | 1972년 12월 13일 | 캘리포니아주 샌디에고 | |
29 | 승 | 28-1 | 헨리 클라크 | TKO | 9 (10) | 1972년 11월 21일 | 네바다주 스테이트라인 사하라 타호 | |
28 | 승 | 27-1 | 제임스 J. 우디 | RTD | 8 (10) | 1972년 6월 30일 | 캘리포니아주 샌디에고 | |
27 | 승 | 26-1 | 허셸 제이콥스 | UD | 10 | 1972년 6월 5일 | 캘리포니아주 샌디에고 | |
26 | 승 | 25-1 | 잭 오핼러런 | UD | 10 | 1972년 3월 17일 | 캘리포니아주 샌디에고 콜로세움 | |
25 | 승 | 24-1 | 찰리 해리스 | TKO | 3 (10) | 1972년 2월 17일 | 캘리포니아주 샌디에고 콜로세움 | |
24 | 승 | 23-1 | 제임스 J. 우디 | UD | 10 | 1971년 9월 29일 | 캘리포니아주 샌디에고 콜로세움 | |
23 | 승 | 22-1 | 척 헤인스 | KO | 7 (10), 1:08 | 1971년 8월 7일 | 캘리포니아주 산타모니카 시빅 오디토리움 | |
22 | 승 | 21-1 | 빅 브라운 | KO | 5 (10) | 1971년 6월 12일 | 캘리포니아주 산타모니카 시빅 오디토리움 | |
21 | 승 | 20-1 | 스티브 카터 | TKO | 3 (10) | 1971년 6월 12일 | 캘리포니아주 우드랜드힐스 밸리 뮤직 시어터 | |
20 | 승 | 19-1 | 로비 해리스 | KO | 2 (10), 1:35 | 1970년 10월 16일 | 캘리포니아주 샌디에고 콜로세움 | |
19 | 승 | 18-1 | 척 레슬리 | UD | 10 | 1970년 9월 26일 | 캘리포니아주 우드랜드힐스 밸리 뮤직 시어터 | |
18 | 승 | 17-1 | 로이 월리스 | KO | 4 (10) | 1970년 8월 29일 | 캘리포니아주 샌디에고 콜로세움 | |
17 | 패 | 16-1 | 호세 루이스 가르시아 | KO | 8 (10) | 1970년 7월 2일 |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그랜드 올림픽 오디토리움 | |
16 | 승 | 16-0 | 레이 주니어 엘리스 | KO | 2 (10), 0:53 | 1970년 5월 8일 | 캘리포니아주 샌디에고 콜로세움 | |
15 | 승 | 15-0 | 밥 매쉬번 | KO | 4 (10), 1:40 | 1970년 4월 7일 |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클리블랜드 아레나 | |
14 | 승 | 14-0 | 스탬포드 해리스 | TKO | 3 (10), 1:59 | 1970년 3월 13일 | 캘리포니아주 샌디에고 콜로세움 | |
13 | 승 | 13-0 | 에런 이스트링 | KO | 2 (10), 3:06 | 1970년 2월 4일 | 네바다주 패러다이스 실버 슬리퍼 | |
12 | 승 | 12-0 | 줄리어스 가르시아 | TKO | 3 (10) | 1969년 10월 21일 | 캘리포니아주 샌디에고 콜로세움 | |
11 | 승 | 11-0 | 게리 베이츠 | TKO | 8 (10) | 1969년 7월 25일 | 캘리포니아주 샌디에고 콜로세움 | |
10 | 승 | 10-0 | 빌 맥머리 | TKO | 7 (10) | 1969년 7월 25일 |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그랜드 올림픽 오디토리움 | |
9 | 승 | 9-0 | 페드로 산체스 | TKO | 2 (10) | 1969년 3월 31일 | 캘리포니아주 샌디에고 국제 스포츠 센터 | |
8 | 승 | 8-0 | 웨인 킨드레드 | TKO | 9 (10) | 1969년 2월 20일 |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그랜드 올림픽 오디토리움 | |
7 | 승 | 7-0 | 조 헴필 | TKO | 3 (10), 1:52 | 1969년 2월 11일 | 캘리포니아주 우드랜드힐스 밸리 뮤직 시어터 | |
6 | 승 | 6-0 | 코넬 놀란 | KO | 6 (10) | 1968년 12월 8일 |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그랜드 올림픽 오디토리움 | |
5 | 승 | 5-0 | 웨인 킨드레드 | TKO | 6 (10) | 1968년 7월 23일 | 캘리포니아주 샌디에고 서클 아트 시어터 | |
4 | 승 | 4-0 | 지미 길모어 | KO | 7 (8), 1:20 | 1968년 3월 26일 | 캘리포니아주 샌디에고 커뮤니티 콘코스 | |
3 | 승 | 3-0 | 해럴드 두트라 | KO | 3 (6) | 1968년 2월 6일 |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 메모리얼 오디토리움 | |
2 | 승 | 2-0 | 샘 와이어트 | 판정승 | 6 | 1968년 1월 16일 | 캘리포니아주 샌디에고 커뮤니티 콘코스 | |
1 | 승 | 1-0 | 그래디 브라젤 | TKO | 5 (6) | 1967년 11월 14일 | 캘리포니아주 샌디에고 커뮤니티 콘코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