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Early life
칼 오웬 허벨은 1903년 6월 22일 미주리주 카세이지에서 마거릿 델(결혼 전 성은 업)과 조지 오웬 허벨 사이에서 태어난 일곱 자녀 중 한 명이다. 그는 오클라호마주 미커에서 성장했으며, 미커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한 석유 회사에 취직하여 그 회사의 야구팀에서 활동했는데, 이 경험이 그가 프로 야구 선수로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2. Professional baseball career
칼 허벨의 프로 야구 경력은 마이너 리그에서의 힘든 시작부터 뉴욕 자이언츠의 전설적인 에이스가 되기까지 극적인 변화를 겪었다. 특히 독특한 스크루볼 투구와 끊임없는 노력으로 그는 메이저 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한 투수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다.
2.1. Minor league career
허벨은 1923년 오클라호마 주 리그에서 프로 야구 경력을 시작했다. 1925년에는 웨스턴 리그 소속의 오클라호마 시티 인디언스에서 17승 13패의 기록을 세웠는데, 이때 그의 시그니처 투구인 스크루볼을 처음으로 선보였다. 이러한 활약으로 그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 영입되어 1926년 스프링 트레이닝에 초대되었다. 그러나 타이거스의 투수 코치 조지 맥브라이드와 선수 겸 감독 타이 콥은 스크루볼이 부상 위험이 크다고 우려하여 그에게 스크루볼을 포기하도록 강요했다. 스크루볼 없이 남은 스프링 트레이닝 기간 동안 허벨은 전혀 효과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결국 그는 시즌 시작 전에 인터내셔널 리그의 토론토 메이플 리프스로 보내졌고, 그곳에서도 스크루볼을 던지는 것이 금지되었다. 시그니처 투구 없이 허벨은 우승팀임에도 불구하고 평범한 7승 7패 기록을 세웠고, 1927년 스프링 트레이닝 이후 일레노이-인디애나-아이오와 리그 소속의 디케이터 코모도어스로 강등되었다. 그곳에서 14승 7패의 기록을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타이거스는 그를 1928년 시즌에 다시 초대하지 않았고, 그는 텍사스 리그 소속의 보몬트 엑스포터스로 이적했다.
이 시점에 허벨은 야구에 크게 지쳐 보몬트의 감독 클로드 로빈슨에게 시즌이 끝나기 전에 다른 구단으로 팔리지 않으면 은퇴하여 석유 사업에 뛰어들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훗날 그는 타이거스에서 방출된 것이 자신에게 일어난 일 중 최고였다고 회상했다. 그의 기회는 그해 6월에 찾아왔는데, 자이언츠의 스카우트 딕 킨셀라가 1928년 민주당 전당 대회를 위해 텍사스주 휴스턴에 머물던 중 허벨이 속한 엑스포터스와 휴스턴 버프스의 경기를 관람하게 되었다. 그는 원래 스카우트 활동을 계획하고 있지 않았지만, 허벨의 투구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킨셀라는 자이언츠의 감독 존 맥그로에게 전화하여 디트로이트가 스크루볼에 대한 콥의 우려 때문에 허벨을 방출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이에 맥그로는 크리스티 매튜슨도 스크루볼(당시에는 '페이드어웨이'라고 불림)을 던졌지만 그의 팔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답했다. 킨셀라는 한 달 동안 허벨을 계속 관찰했고, 여전히 깊은 인상을 받았다.
2.2. Major league career (New York Giants)
허벨은 1928년 그의 첫 메이저 리그 시즌에 10승 6패를 기록하며 성공적인 시작을 알렸고, 그의 전체 선수 경력을 자이언츠에서 보냈다. 그는 느린 스크루볼을 주무기로 자이언츠에서 5년 연속(1933~1937년) 20승 이상을 기록하며 팀을 내셔널 리그 페넌트 3회와 1933년 월드 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1933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두 차례 완투승을 거두었는데, 특히 4차전에서는 11이닝 동안 2대 1점으로 승리(자책점 없음)하는 투혼을 발휘했다. 그는 통산 6번의 월드 시리즈 선발 등판에서 4승 2패를 기록했으며, 32개의 삼진과 낮은 1.79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허벨은 통산 253승 154패, 1677 탈삼진, 724 볼넷, 36개의 완봉승, 2.98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3590.1이닝을 던졌다.

타자로서 허벨은 1288타수 246안타로 .191의 타율을 기록했으며, 95 득점, 30 2루타, 4 홈런, 101 타점, 33 볼넷을 기록했다. 6번의 월드 시리즈에서는 19타수 4안타로 .211의 타율, 1득점, 1타점을 기록했다. 수비에서는 .967의 수비율을 기록했다.
2.2.1. Career Pitching Statistics
연도 | 팀 | 출장 | 선발 | 완투 | 완봉 | 세이브 | 승리 | 패배 | 평균자책점 | 이닝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탈삼진 | WHI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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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 리그 | |||||||||||||||
1928 | 뉴욕 자이언츠 | 20 | 14 | 8 | 1 | -- | 10 | 6 | 2.83 | 124.0 | 117 | 7 | 21 | 37 | 1.11 |
1929 | 39 | 35 | 19 | 1 | -- | 18 | 11 | 3.69 | 268.0 | 273 | 17 | 67 | 106 | 1.27 | |
1930 | 37 | 32 | 17 | 3 | -- | 17 | 12 | 3.87 | 241.2 | 263 | 11 | 58 | 117 | 1.33 | |
1931 | 36 | 30 | 21 | 4 | -- | 14 | 12 | 2.65 | 248.0 | 211 | 14 | 67 | 155 | 1.12 | |
1932 | 40 | 32 | 22 | 0 | -- | 18 | 11 | 2.50 | 284.0 | 260 | 20 | 40 | 137 | 1.06 | |
1933 | 45 | 33 | 22 | 10 | -- | 23 | 12 | 1.66 | 308.2 | 256 | 6 | 47 | 156 | 0.98 | |
1934 | 49 | 35 | 25 | 5 | -- | 21 | 12 | 2.30 | 313.0 | 286 | 17 | 37 | 118 | 1.03 | |
1935 | 42 | 35 | 24 | 1 | -- | 23 | 12 | 3.27 | 302.2 | 314 | 27 | 49 | 150 | 1.20 | |
1936 | 42 | 34 | 25 | 3 | -- | 26 | 6 | 2.31 | 304.0 | 265 | 7 | 57 | 123 | 1.06 | |
1937 | 39 | 32 | 18 | 4 | -- | 22 | 8 | 3.20 | 261.2 | 261 | 18 | 55 | 159 | 1.21 | |
1938 | 24 | 22 | 13 | 1 | -- | 13 | 10 | 3.07 | 179.0 | 171 | 16 | 33 | 104 | 1.14 | |
1939 | 29 | 18 | 10 | 0 | -- | 11 | 9 | 2.75 | 154.0 | 150 | 11 | 24 | 62 | 1.13 | |
1940 | 31 | 28 | 11 | 2 | -- | 11 | 12 | 3.65 | 214.1 | 220 | 22 | 59 | 86 | 1.30 | |
1941 | 26 | 22 | 11 | 1 | -- | 11 | 9 | 3.57 | 164.0 | 169 | 10 | 53 | 75 | 1.35 | |
1942 | 24 | 20 | 11 | 0 | -- | 11 | 8 | 3.95 | 157.1 | 158 | 17 | 34 | 61 | 1.22 | |
1943 | 12 | 11 | 3 | 0 | -- | 4 | 4 | 4.91 | 66.0 | 87 | 7 | 24 | 31 | 1.68 | |
통산: 16년 | 535 | 433 | 260 | 36 | -- | 253 | 154 | 2.98 | 3590.1 | 3461 | 227 | 725 | 1677 | 1.17 |
2.2.2. Pitching style and notable games
칼 허벨의 주요 투구는 스크루볼이었다. 그는 오버핸드와 사이드암을 넘나드는 변칙적인 투구폼으로 타자들을 교란했다. 또한 커브볼도 구사했다.
허벨은 1929년 5월 8일 피츠버그 파이리츠를 상대로 11대 0점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 또한 1933년 7월 2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상대로 1대 0점으로 18이닝 완봉승을 거두는 괴력을 발휘했다. 특히 1933년에는 46.1이닝 연속 무실점 기록과 함께 4번의 완봉승을 기록했다.
그는 1934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전에서 야구 역사상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중 하나를 만들었다. 폴로 그라운즈에서 열린 이 경기에서 허벨은 베이브 루스, 루 게릭, 지미 폭스, 알 시몬즈, 조 크로닌 등 훗날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는 다섯 명의 타자들을 연속으로 삼진 처리하는 경이로운 투구를 선보였다. 메이저 리그 올스타전의 유래는 내셔널 리그의 명 투수 허벨과 아메리칸 리그의 강타자 베이브 루스의 대결을 보고 싶어 한 한 소년 팬이 커미셔너에게 보낸 편지에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전설적인 활약의 50주년이 되는 1984년에는 샌프란시스코의 캔들스틱 파크에서 열린 1984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전에 참석하여 시구자로 나서 스크루볼을 던졌다.
1936년 월드 시리즈를 다룬 커버스토리에서 잡지 타임은 당시 자이언츠와 양키스 간의 경기를 "허벨과 루 게릭 사이의 개인적인 대결"로 묘사하며, 허벨을 "...현재 야구계 최고의 투수이자 게임 역사상 가장 뛰어난 여섯 명의 투수 중 한 명"이라고 평가했다. 타임은 그가 미주리주 가족 농장에서 자라면서 "수 시간 동안 헛간 문에 돌을 던지는 연습을 하여 10센트 동전 크기의 옹이구멍을 정확하게 맞힐 수 있게 되었다"고 전했다.
2.2.3. Awards and records
칼 허벨은 그의 경력 동안 수많은 상과 기록을 세우며 당대 최고의 투수로 인정받았다.
그는 1936년부터 1937년까지 24연승을 기록하며 메이저 리그 역사상 투수 최다 연속 승리 기록을 세웠다. 이는 선발 투수로서 21승, 구원 투수로서 3승을 포함한다. 또한 15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했다. 그는 내셔널 리그 최우수 선수(MVP)에 두 차례 선정되었는데, 1933년과 1936년에 수상했으며, 특히 1936년에는 만장일치 MVP로 선정된 최초의 선수였다.
리그 선두 기록은 다음과 같다.
- 다승:** 3회 (1933년 (23승), 1936년 (26승), 1937년 (22승))
- 최우수 평균자책점:** 3회 (1933년 (1.66), 1934년 (2.30), 1936년 (2.31))
- 탈삼진:** 1회 (1937년 (159개))
- 이닝:** 1회 (1933년 (308이닝))
- 9이닝당 탈삼진:** 1회 (1938년 (5.23개))
- 완봉승:** 1회 (1933년 (10개))
- 세이브:** 1회 (1934년 (8개, 소급 적용))
그는 9번의 올스타에 선정되었으며, 1933년부터 1938년까지, 그리고 1940년부터 1942년까지 출전했다. 1999년 더 스포팅 뉴스가 선정한 '가장 위대한 야구 선수 100인' 목록에서 45위에 올랐으며,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센추리 팀 후보에도 지명되었다. 1981년에는 미국 성취 아카데미에서 '골든 플레이트 상'을 수상했다.
2.3. Post-playing career
허벨은 1943년 시즌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그 해 그는 4승 4패를 기록했는데, 이는 그의 커리어에서 유일하게 두 자릿수 승수를 기록하지 못한 시즌이었다. 그러나 호레이스 스톤햄 자이언츠 구단주는 곧바로 그를 선수 육성 담당 이사로 임명했고, 그는 이 자리에서 35년 동안 봉직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뉴저지주 하워스에 거주했으며, 자이언츠가 뉴욕을 떠난 뒤에도 그곳에 계속 살았다. 그의 생애 마지막 10년은 자이언츠의 스카우트로서 활동했다. 그가 사망할 당시, 그는 여전히 어떤 형태로든 야구계에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던 마지막 존 맥그로 시대의 뉴욕 자이언츠 선수 중 한 명이자, 맥그로 시대 프랜차이즈의 마지막 생존 멤버 중 한 명이었다.
3. Personal life
허벨은 1930년부터 1967년까지 루실 "수" 해링턴(Lucille "Sue" Harrington루실 "수" 해링턴영어)과 결혼 생활을 했다. 그들은 칼 주니어(1936년생)와 제임스라는 두 아들을 두었다. 칼 주니어는 마이너 리그에서 짧은 경력을 쌓은 후 미국 해병대에서 직업 군인으로 복무했다.
4. Death
칼 허벨은 1988년 11월 19일 애리조나주 메사 자택 근처에서 운전 중 뇌졸중으로 의식을 잃고 차량이 가로등을 들이받는 사고를 당했다. 그는 스코츠데일의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틀 뒤인 1988년 11월 21일 둔기 외상으로 인해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오클라호마주 미커에 위치한 미커-뉴호프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사망은 동료였던 멜 오트가 자동차 사고로 입은 부상으로 사망한 지 정확히 30년 만이었다.
5. Legacy and honors
칼 허벨은 미국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투수 중 한 명으로 기억되며, 그의 업적과 명성은 다양한 형태로 기려지고 있다.
5.1. Baseball Hall of Fame
칼 허벨은 그의 뛰어난 경력을 인정받아 1947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이는 그가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들 중 한 명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임을 의미한다.
5.2. Retired number
칼 허벨의 등번호인 11번은 1944년 뉴욕 자이언츠에 의해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 그는 내셔널 리그에서 자신의 등번호가 영구 결번으로 지정된 최초의 선수였다. 그의 등번호는 현재 오라클 파크 좌측 외야 상단 데크 전면에 새겨져 있다.

5.3. Other honors and cultural references
허벨은 9차례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1999년에 더 스포팅 뉴스가 선정한 '가장 위대한 야구 선수 100인' 목록에서 45위에 올랐으며,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센추리 팀 후보에도 이름을 올렸다. 1981년에는 미국 성취 아카데미로부터 '골든 플레이트 상'을 받았다.
그는 영화 빅 리거에 본인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또한 오그든 내시의 시 "어제를 위한 라인업"에서도 언급되며 대중문화 속에서 그의 중요성이 인정되었다.
어제를 위한 라인업
- U would be 'Ubbell
- If Carl were a Cockney;
- We say Hubbell and baseball
- Like football and Rockne.
- 오그든 내시, 스포츠 매거진 (1949년 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