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카이세이 이치로(魁聖 一郎일본어), 본명 히카르도 스가노(Ricardo Sugano히카르도 스가노포르투갈어), 1986년 12월 18일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태어난 전직 프로 스모 선수이자 오시마 스모베야 소속이었다. 그는 일본계 브라질인 3세이며, 2006년 9월에 첫 무대에 올랐고 2011년 5월에는 최고 등급인 마쿠우치에 진입했다. 최고 순위는 세키와케였다. 그는 2013년 7월 대회와 2018년 3월 대회에서 두 차례 준우승을 차지했으며, 세 차례의 감투상을 수상했다. 은퇴 후에는 일본 국적을 취득하여 오야카타 자격을 얻었고, 현재는 도모즈나 오야카타로 오시마 스모베야와 아사카야마 스모베야에서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
2. 스모 입문 전 생활 및 초기 스모 경력
카이세이 이치로는 브라질에서 유도를 수련하며 스모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일본으로 건너와 2006년 프로 스모에 입문하여 초기 등급을 빠르게 통과했다.
2.1. 어린 시절과 스모 입문 계기
히카르도 스가노는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일본계 브라질인 아버지와 독일계 이탈리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일본계 브라질인 3세이다. 어린 시절, 그는 친구들과 달리 축구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TV로 경기를 시청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유도와 같은 그래플링 스포츠에 더 흥미를 보였고, 한동안 유도를 수련했다. 16세 때 아버지의 친구가 그의 큰 체구가 스모에 매우 적합할 것이라고 제안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스가노는 상파울루의 여러 스모 클럽에서 훈련했으며, 그곳에서 같은 브라질 출신의 은퇴한 스모 선수인 와카아즈마 요시노부를 만났다. 와카아즈마는 스가노가 프로 스모 선수가 되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고 엄격하게 훈련시켰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는 훈련을 계속했으며, 브라질에서는 다른 진로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스모 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이야기했다. 그는 스모에 매진하여 전 브라질 아마추어 스모 선수권 대회 자유 체급에서 우승했다. 이 시기에 그는 브라질 아마추어 스모에서는 몸집과 힘만 있으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고, 스모를 시험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기로 결정했다.
2.2. 프로 스모 입문
스가노는 와카아즈마 요시노부의 소개로 2006년 7월 일본에 입국하여 도모즈나 스모베야에 합류했다. 당시 이 스모베야에는 또 다른 브라질 선수인 카이신이 있었다. 그는 새로운 스모 이름인 '카이세이 이치로'를 받았다. 카이세이는 도모즈나 스모베야의 전통적인 이름인 '카이'와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세이(聖)'를 결합한 것이며, '이치로'는 그의 일본인 외할아버지의 이름에서 따왔다.
2006년 9월 마에즈모에 출전하여 2승 2패로 첫 무대에 올랐다. 신장 194 cm의 큰 체구를 무기로 조노쿠치와 조니단에서 각각 6승 1패의 좋은 성적을 거두며 각 등급을 한 번에 통과했다. 2007년 3월 산단메로 승진했으나, 초기 두 장소에서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이후 세 장소 연속으로 마케코시(負け越し)를 기록하며 정체기를 겪었다. 그러나 2008년 1월 장소에서 6승 1패, 이듬해 3월 장소에서 5승 2패를 기록하며 연이어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같은 해 5월 장소에서 마쿠시타로 승진했다.
3. 프로 스모 경력
카이세이 이치로는 하위 등급에서 빠르게 진전하여 마쿠우치에 데뷔했으며, 이후 산야쿠에 승진하고 부상을 겪는 등 활발한 프로 스모 경력을 이어갔다.
3.1. 하위 등급에서의 진전
마쿠시타 승진 후 두 장소 연속 가치코시(勝ち越し)를 기록했지만, 2008년 9월 장소부터 세 장소 연속으로 마케코시를 기록하며 2009년 3월 장소에서는 다시 산단메로 강등되었다. 한 장소 만에 마쿠시타로 복귀한 후, 서쪽 마쿠시타 46위에서 맞이한 같은 해 9월 장소에서는 7전 전승을 기록하며 우승 결정전에 진출했다(결승전에서 가가마루에게 패해 우승은 놓쳤다). 다음 11월 장소 이후에도 마쿠시타 상위 등급에서 꾸준히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며, 2010년 5월 장소에서 동쪽 마쿠시타 2위로 5승 2패를 기록하며 가치코시했고, 이듬해 7월 장소에서 새로운 주료 등급으로 승진했다. 그는 류코 고, 구니아즈마, 와카아즈마에 이어 네 번째로 주료 등급에 진입한 브라질 선수였으며, 이를 통해 세키토리 자격을 획득했다.
3.2. 마쿠우치 데뷔와 초기 상위 등급 경력
2010년 11월 장소에서 11승 4패의 성적을 거두며 우승 결정전에 진출했고, 네 명이 겨룬 우승 결정전에서 승리하여 첫 주료 우승을 차지했다. 이어서 2011년 1월 장소에서도 동쪽 주료 1위에서 8승 7패를 기록하며 가치코시를 확정했고, 이듬해 5월 기술심사 장소에서 새로운 마쿠우치 등급에 진입했다.
그는 마쿠우치 데뷔전에서 첫 6번의 경기를 승리했는데, 이는 1991년 다카노나미 이후 마쿠우치 데뷔 선수 중 처음이었다. 이후 8승 0패, 9승 0패를 기록하며 요코즈나 하쿠호와 나란히 달렸으나, 10일째에 도치노신에게 첫 패배를 당했다. 비록 1960년의 위대한 다이호처럼 11승 0패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최종 10승 5패의 성적으로 감투상을 수상했다. 그는 또한 하쿠호의 링 입장식에서 쓰유하라이를 맡는 영광을 얻었다.
그는 7월 장소에 마에가시라 5위로 승진했으나, 1승 4패에서 6승 4패로 회복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5경기를 연속으로 패하며 6승 9패로 마무리했다。같은 대회에서 오제키 카이오가 은퇴하면서 카이세이는 도모즈나 스모베야의 헤야가시라 (최고 등급의 선수)가 되었다. 2011년 9월과 11월 장소에서 4승 11패와 6승 9패의 실망스러운 성적을 기록하며 마쿠우치 등급 최하위로 떨어졌다. 2012년 1월 장소에서 5승 10패를 기록하며 3월 장소에서 주료로 강등되었지만, 오사카에서 10승 5패를 기록하며 마쿠우치 복귀를 확정했다. 2012년 7월에는 11승을 거두며 두 번째 감투상을 수상했고, 마에가시라 1위로 승진했다. 9월에는 최종일 호마쇼에게 패하며 7승 8패를 기록하며 아쉽게 목표에 미치지 못했다. 그 이후 그는 주로 가치코시와 마케코시를 반복했다. 그는 상위 등급에서의 끈기를 증명했지만, 더 꾸준한 성적을 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그는 37번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요코즈나를 단 한 번도 꺾지 못했다.
3.3. 산야쿠 승진과 부상
카이세이는 2016년 5월 장소에서 산야쿠 데뷔를 했다. 마에가시라 7위에서 11승 4패의 성적을 바탕으로 고무스비로 승진했다. 이는 현재의 스모베야 오야카타가 1989년에 스모베야를 인계받은 이래 도모즈나 스모베야 출신 선수로는 1994년 카이오 이후 두 번째로 고무스비에 도달한 것이며, 브라질 출신 선수로는 처음으로 산야쿠에 올랐다. 스모베야 사범은 그가 입문했을 때 기대했던 것보다 산야쿠에 오르는 속도가 느렸다고 지적했으나, 동시에 "아직도 더 위를 노릴 수 있다"며 격려했다.
고무스비로서의 5월 장소에서 오제키 이상 급 선수들에게는 1승 6패를 기록했지만, 세키와케 이하 선수들에게는 이치노조 외에는 모두 승리하며 강함을 보여주었고, 센슈라쿠(千秋楽) 도치오잔 전에서 승리하여 가치코시를 확정했다. 8승 7패의 기록으로 그는 다음 7월 장소에서 즉시 세키와케로 승진했다. 2016년 마지막 세 장소에서는 마케코시를 기록하며 마에가시라 9위로 떨어졌으나, 2017년 1월 장소에서 8승 7패를 기록했다.
2017년 3월 장소 직전 하쿠호와 훈련 중 무릎 부상을 입어 경력 처음으로 혼바쇼에서 기권해야 했으며, 데뷔 이래 739번의 연속 출장 기록이 중단되었다. 이는 당시 현역 최고 등급 선수 중 가장 긴 기록이었다. 2017년 5월 장소 이후 2012년 이래 처음으로 주료 등급으로 강등되었으나, 7월 장소에서 주료 1위에서 10승 5패를 기록하며 즉시 마쿠우치로 복귀했다. 2017년 9월 장소에서는 서쪽 마에가시라 13위에서 9승 6패를 기록하며 부활을 알렸다.

2018년 3월 장소에서는 동쪽 마에가시라 6위로 승진하여 첫 9경기를 모두 승리했으나, 10일째 이치노조에게 패했다. 13일째에는 요코즈나 가쿠류와 맞붙어 패했다. 카이세이는 12승 3패의 성적으로 대회를 마쳤으며, 가쿠류와 다카야스에 이어 공동 준우승을 차지했다. 이는 카이세이의 두 번째 준우승 기록이었다. 그는 또한 세 번째 감투상을 수상했다.
2018년 11월, 카이세이는 13개 대회 만에 다시 산야쿠 등급인 고무스비로 복귀했다. 그러나 대회 직전 훈련 중 왼쪽 종아리 부상을 입어 첫 이틀간 결장했고, 부상이 악화되면서 14일째에 3승만 기록한 채 기권했다. 2019년 5월 장소에서도 7일째 류덴과의 경기 중 오른쪽 이두박근 힘줄 부상을 입어 기권할 수밖에 없었다. 7월 장소에서 마에가시라 15위로 출전했으나, 오른쪽 팔 부상을 입어 결국 11일째에 1승만 기록한 채 기권하여 주료로 강등되었다. 2019년 11월 장소에서 11승 4패를 기록하며 다시 마쿠우치로 복귀했다. 그는 2021년 1월 장소에서 도모즈나 스모베야 소속 선수 중 한 명이 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으면서 출전하지 못했다.
3.4. 말년 경력과 난관
2021년 7월 장소부터 4장소 연속으로 마케코시를 기록했고, 2022년 3월 장소에서는 주료로 강등되었다. 그 후에도 계속해서 마케코시를 기록했으며, 동쪽 주료 11위에서 맞이한 같은 해 7월 장소에서도 5승 10패로 끝나 9월 장소에서 마쿠시타로 강등되었다.
4. 은퇴 및 은퇴 후 활동
카이세이 이치로는 마쿠시타 강등 후 현역에서 은퇴하고 일본 국적을 취득하여 도시오야카타가 되었으며, 지도자로서 새로운 활동을 시작했다.
4.1. 은퇴 결정
2022년 7월, 주료 최하위 등급에 속해 있던 카이세이는 5승 10패의 성적으로 대회를 마쳤고, 이로 인해 12년 이상 급여를 받는 상위 두 등급에 머물렀던 그가 다시 급여를 받지 않는 마쿠시타 등급으로 강등되었다. 카이세이는 결국 2022년 8월 말에 현역에서 은퇴했다. 은퇴 당시 기자들이 마쿠시타로 강등된 후 곧바로 복귀를 노리지 않고 은퇴한 이유를 묻자, 그는 "십몇 년 동안 세키토리를 해왔는데, (하위 등급에서는) 좀... (가을 장소에서는) 마쿠시타 필두(筆頭)였으니 많은 사람들이 '아깝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부상으로 떨어진 것과는 달리, 약해져서 떨어진 것이니까요"라고 답하며 자신의 결정을 설명했다. 은퇴 기자회견에서 그는 2018년 7월 장소 10일째에 당시 오제키였던 다카야스와의 경기를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로 꼽으며, "스모뿐만 아니라 생활도 가르치고 싶다. 강해지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팬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포부를 밝혔다.
4.2. 도시오야카타로서의 은퇴 후 경력
카이세이는 2014년 11월에 일본 국적을 취득하여 은퇴 시 오야카타 주식을 취득할 수 있었다. 그는 현재 도모즈나 오야카타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그는 원래 자신의 스모베야인 (현재는 오시마 스모베야로 이름이 변경됨)에서 코치로 일하다가, 2023년 5월에 아사카야마 스모베야로 이적했다. 오야카타가 은퇴 스모(단파쓰시키)를 앞두고 스모베야를 이적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로 알려져 있다.
4.3. 은퇴식
카이세이의 단파쓰시키 (은퇴식)는 2023년 10월 1일 료고쿠 고쿠기칸에서 초대 손님들을 모시고 진행되었다. 약 340명이 카이세이의 오이초마게를 자르는 의식에 참여했다. 마지막 가위질은 카이세이가 은퇴 후 이적한 스모베야의 사범이자 전 오제키 카이오가 했다. 카이세이의 어머니 로사나, 남동생 레나토, 여동생 나탈리아는 약 30시간의 비행을 감수하고 브라질에서 일본으로 와서 이 식에 참석했다. 정발 후 어머니로부터 격려를 받은 그는 "이전에 TV 프로그램 기획으로 일본에 와서 나의 스모를 보여준 적이 있었다. 마지막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서 효도할 수 있었다"고 감회에 젖었다. 스모베야 부사범으로서의 포부를 묻자 "엄격함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의) 마음의 의지처가 되고 싶다. 고민이 있다면 무엇이든 상담해 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5. 스모 스타일 및 평가
카이세이 이치로는 큰 체구를 활용한 요츠즈모를 주 전법으로 삼았으며, 전문가들은 그의 힘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움직임의 느림과 변화에 대한 약점을 지적했다.
5.1. 경기 스타일
카이세이의 선호 기술은 스모 협회에 '미기요츠' (상대방의 마와시를 왼쪽 손으로 바깥쪽, 오른쪽 손으로 안쪽으로 잡는 자세), '요리' (밀어내기), '오시' (밀치기)로 등재되어 있다. 그의 가장 흔한 승리 기술은 '요리키리' (강제로 밀어내기)와 '오시다시' (밀어내기)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큰 체구를 활용한 요츠즈모(四つ相撲)를 주 전법으로 삼았고, 자신보다 힘이 강한 아오이야마나 도치노신 같은 선수, 또는 던지기나 꺾기 기술에 능한 모로자시(両差し) 선수들(예: 쇼호잔, 도치오잔)에게는 약점을 보였다. 반면, 밀치기 일변도의 선수들(예: 타마와시, 도요히비키)이나 정면으로 받아치는 아이요츠(相四つ) 선수들(예: 이키오이)에게는 강했다. 마와시를 잡지 못할 때는 잡지 않고 밀어내는 스모를 구사하기도 했다. 지병인 요통이 악화된 장소에서는 끈기 없이 쉽게 패하는 경기도 많았다.
2019년의 한 주간지 인터뷰에서 그는 던지기 기술은 오히려 무릎에 너무 많은 부담을 주므로, 스모에서는 앞으로 나가는 것 외에 불필요한 동작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지도를 받았다고 밝혔다. 그는 작은 체구의 선수들에게 약했고, 작은 선수들과의 대결에서는 마와시를 잡으려다가 태클을 당하는 경우가 많아, 이를 방지하기 위해 밀치기나 츠바리(突っ張り)를 활용하여 거리를 두고 스모를 하는 경향이 있었다. 2019년 3월의 인터뷰에서는 "타치아이(立合い) 때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려 합니다. 지금은 익숙해졌지만, 주료에 막 올라갔을 때는 많은 관객 앞에서 긴장했으니까요. 그러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5.2. 전문가 평가
전 TV 아사히 아나운서 도야 시로는 2014년 11월 장소 전 좌담회에서 "오른쪽 요츠즈모(右四つ)에 왼손을 위로 잡았을 때의 압력은 대단하다"고 평가했다. 반면 전 분카방송 아나운서 사카 신이치로는 "더 투지를 앞세운 스모를 해야 한다"며 정신적인 약점을 지적했다. 전 닛폰 TV 아나운서 하라 카즈오는 "허리가 내려가지 않아서 앞으로 나가도 결국 덮어씌우는 자세가 되어 역전 기술을 당하기 쉽다"며 허리 높이를 지적했다.
전 세키와케 마스라오의 12대 아부마쓰는 그가 새 세키와케에 올랐을 때의 스모에 대해 "이전에는 품이 깊어도 발이 흔들렸는데, 조금 안정되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전 오제키 코토오슈의 15대 나루토는 2016년 11월 장소 전 좌담회에서 "허리의 무게는 묵직해서 오제키급이다. 다만, 움직임이 느려서 상위권 선수들의 좌우 움직임에 따라가지 못한다"고 말했으며, 동석했던 전 세키와케 와카노사토의 12대 니시이와도 "상위권 선수들을 이길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다. 스모도 정직해서 요코즈나, 오제키 입장에서는 상대하기 쉬울 것"이라고 평했다. 움직임이 느려 저돌맹진형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변화에 약했으며, 2016년에는 한 해 동안 5번의 변화로 패배하여 그 해 마쿠우치 선수 중 세 번째로 변화로 많이 패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5.3. 특이 기록
그는 요코즈나와의 대결에서 총 37번 모두 패배하여, 요코즈나전 미승리 기록에서 토우가의 29연패를 넘어 단독 최다 연패 기록을 세웠다.
또한, 불전승 기록이 매우 많았다. 총 12회 (주료 3회 포함)로 역대 타마와시 (2023년 5월 기준 14회)에 이어 2위 기록이다. 2016년 7월 장소에서는 첫째 날 오스나아라시가, 7일째 코토쇼기쿠가 각각 휴장하여 2014년 1월 장소(코토쇼기쿠) 이후 21번째로 한 장소에서 두 번의 불전승을 기록했다. 이 불전승에 대해 그는 "항상 착하게 행동하니 운이 좋다. 내일부터 열심히 해야겠다"고 언급했다. 2016년 7월 장소에서 2번의 불전승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케코시를 기록한 센슈라쿠 후에는 "불전승이 두 번이나 있었는데 아깝다. 경기보다 코레요리산야쿠에서 긴장했다"고 말했다. 2017년 11월 장소부터 2018년 3월 장소까지 3장소 연속 불전승을 기록하기도 했다. 2018년 3월 장소에서 다카케이쇼의 휴장으로 불전승을 얻었을 때 그는 "어제 모든 힘을 써서 근육통이 있었는데", "모두 나 때문에 휴장해 줘서 고마워요", "항상 착하게 행동하니 스모의 신에게 사랑받는다"고 웃으며 말했다.
2020년 1월 장소에서 그는 최종적으로 8승 7패로 가치코시했지만, 이 장소에서 14승 1패로 마쿠우치 우승을 차지한 도쿠쇼류에게 유일하게 패배를 안겼다. 이에 대해 그는 "나만 이겼는데 (삼상으로 수여되는 방패 제스처를 하며) 뭐 없었나?"라고 농담 삼아 삼상을 요구하기도 했다.
2020년 3월 장소에서는 코로나19 대책으로 리카리미즈를 표면에만 대고 마시는 시늉만 하게 되어 있었으나, 12일째에 실수로 리카리미즈를 입에 넣었다. 그는 이날 8승째를 거두고 가치코시를 확정한 직후 이 사실을 밝혔다.
6. 개인 생활 및 성격
카이세이 이치로는 콜라와 게임을 즐기고 브라질 출신으로서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을 지녔으며, 이러한 개인적 특성들이 그의 경력과 대외적인 모습에 반영되었다.
6.1. 가족 및 개인 배경
2020년 7월, 카이세이는 지난 6월에 5년 간 교제한 20대 일본인 일반인 여성과 결혼했다고 발표했다. 코로나19 유행으로 같은 도쿄에 살면서도 만나기 어려워지자 "함께 살면 만날 수 있다"는 마음으로 결혼을 결정했다고 한다.
6.2. 취미와 습관
그는 콜라를 매우 좋아하여 매일 세 병을 마신다고 한다. 2013년 12월 11일 체지방 측정에서는 마쿠우치 선수 중 1위인 38.9%를 기록했다. 기자들이 "콜라 끊을 수 있겠냐"고 묻자, 그는 웃으며 "음... 못 해"라고 답했다.
취미는 게임이며, 마쿠우치 재임 중에는 "마쿠우치 제일의 게임광"이라고 공언했을 정도였다. 2014년 4월 27일 니코니코 초회의 3 행사에서 마리오와 교류한 것에 대해 "정말 즐거운 순회공연이었다. 다스 베이더나 여러 캐릭터를 만나 꿈같은 세상이었다. 스모를 하길 잘했다"고 기뻐했다.
전 선대 사범의 영향으로 흡연자가 되었다. 그는 추위를 싫어하고 따뜻한 계절을 좋아한다. 2020년 11월 장소 3일째 아베마TV의 스모 중계에서는 그가 애니메이션 오타쿠임이 밝혀졌다. 현역 시절에는 종종 밤늦게까지 게임을 했지만, 2021년 1월 장소 휴장 중에는 밤 10시에 게임을 그만두고 충분한 수면을 취했다고 한다.
6.3. 성격과 견해
앞서 언급했듯이 그는 축구에 무관심을 보였으며, 자신의 고향 브라질에서 열린 2014년 FIFA 월드컵 기간 중 브라질이 준결승에 진출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 정도는 신경 쓰이지만, 그다지 관심 없다"고 발언하여 화제가 되었다.
그는 이른바 영감을 믿는 경향이 있으며, 극심한 부진을 겪었던 2016년 11월 장소에서 10연패를 당했을 때 "마음은 건강한데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몸에... 아마 뭔가 씌었나 봐요"라고 말하며 기도 자세를 취했다. 이 기도를 시도한 이후 그는 회복하여 11일째에 미타케우미에게 첫 승리를 거두고, 14일째 니시키기에게 승리하여 2승째를 올렸으며, 센슈라쿠에서도 도치오잔에게 승리하여 3승까지 쌓아 올렸다.
현역 시절 사용했던 케쇼마와시 중 하나에는 코르코바두의 그리스도상이 그려져 있다.
2018년 4월 17일 방송된 『다카다 후미오의 라디오 비버리 힐즈』에서 그는 평소 식사량에 대해 처음에는 "세븐일레븐의 코페빵은 3개", "항상 얻어먹는 초밥은 10접시"라고 답하여 출연자 히가시 아즈마를 의아하게 만들었지만, 히가시가 고기에 대한 질문을 하자 "스테이크를 먹을 때는 1 kg부터. 야키니쿠는 30인분을 먹습니다"라고 답하여 히가시를 "그런 걸 기다렸어~"라며 흥분시켰다.
취재 등의 자리에서 질문에 대한 답변이 재치 있으며, 그 이면에는 겸손함이 묻어나고 상대에 대한 배려도 자연스럽다. 자학적인 유머도 많다. 2017년 여름 순회공연 취재에서는 이키나리 스테이크를 즐긴다고 답했다. "스모베야 근처 가게는 적지만 앉을 곳이 있다. 거기는 고기를 숯불에 굽는다. 숯불 맛이 고기에 배는 것이 최고다. 신이다. 슈하스코와 같다"고 그 맛을 칭찬했다. 마블링이 많은 고기보다 붉은 살 스테이크를 선호했으며, "브라질에서는 원래 지방이 없는 고기를 먹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같은 시기 닛칸스포츠의 스모 선수 그림일기 기획에서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콜라를 한 손에 들고 고기를 뜯어먹는 손오공을 그렸다. 카이세이는 브라질에 살던 어린 시절부터 드래곤볼 애니메이션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2018년 3월 장소 6일째 인터뷰에서는 "순위가 오르면 아침에 늦게 일어날 수 있다. 다시 산야쿠로 돌아가고 싶다"며, 시차가 있는 고향에서 아침 일찍 TV 생방송을 보며 응원하던 아버지에 대한 배려의 의미를 담아 부활을 꿈꾸는 발언을 했다.
7. 주목할 만한 일화
카이세이 이치로의 스모 입문 전 일화와 신인 시절의 고충, 동료들과의 깊은 유대, 그리고 재치 있는 언론 인터뷰 및 경기 관련 기록들은 그의 특별한 경력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7.1. 스모 입문 전 및 신인 시절 일화
카이세이의 은퇴 당시, 그의 입문을 도왔던 와카아즈마가 밝힌 바에 따르면, 와카아즈마는 카이세이를 처음 만난 것이 그가 17세 때였다고 한다. 아마추어 스모 세계 대회에 도전하는 젊은이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상파울루 시내의 도장을 방문했을 때, 와카아즈마는 190 cm에 160 kg이 넘는 거구에 놀랐다고 한다. 와카아즈마는 이 자리에서 원래 스모를 할 생각은 없었지만, 실력의 차이를 가르치기 위해 스모를 했고, 몇 번을 패배해도 "마이존", "마이존" (포르투갈어로 '한 판 더'라는 의미)이라고 외치며 달려드는 카이세이에게 강한 정신력을 느꼈다. 와카아즈마가 단 한 번 카이세이의 진심을 들었을 때, 카이세이는 "브라질에 있어도 미래가 없다. 오즈모에서 활약하여 효도하고 싶다"고 말했고, 와카아즈마는 중학교 졸업 후 부모님을 떠나 브라질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자신의 모습과 카이세이의 모습을 겹쳐 보았다. 와카아즈마는 부딪히기 훈련을 할 때 "일본에서는 매일 해야 한다. 그래도 가고 싶으냐"며 엄하게 대했고, 카이세이의 젊은 시절에는 "형님 격인 카이오 세키가 있을 때, 세키토리, 마쿠우치로 올라가야 한다"고 기합을 넣고 "자신의 형태를 갖추지 않으면 상위 등급에는 올라갈 수 없다"고 조언했다.
브라질에 살던 시절부터 할머니가 일본 음식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입문 당시에는 낫토를 제외하고는 스모베야의 모든 찬코나베를 문제없이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반면, 경어나 형님 격 선수들에게 대하는 예절 등 예절에 대해서는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방문 전에 불안했던 차별 등은 없었으며, "실제로는 모두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일본인은 차갑고 말을 잘 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그것은 다르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고 훗날 회고했다. 신인 시절에는 향수병에 걸린 적도 있었지만, 당시 도모즈나 스모베야에서는 신인 선수가 휴대 전화나 스마트폰을 소지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아, 적은 용돈으로 전화카드를 사서 남은 시간을 걱정하며 브라질에 연락했다고 한다. 반즈케효나 일본 기념품을 친가로 보내는 데만도 1.00 만 KRW 가량이 들었고, 보낸 짐이 현지에서 도난당해 친가에 도착하지 않는 등, 효도하고 싶은 마음과는 달리 어려움을 겪었다. 2006년 9월 장소 첫 무대에 오른 동기생은 카이세이 외에 2명이 더 있었지만, 모두 마에즈모에 불참하거나 첫 무대 직후 장기 휴장을 한 채 은퇴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그 혼자였다.
7.2. 동료 리키시들과의 교류
그는 일본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부터 교쿠텐호를 존경했으며, 도리키 시절 "아름다운 스모 선수다"라고 생각하여 함께 사진을 찍어달라고 한 이후 교류를 시작했다. 교쿠텐호가 오시마 스모베야에 소속되어 있던 시기에 두 번 대결하여, 2011년 7월 장소 추니치(中日)에는 오시다시(押し出し)로 승리했고, 2011년 9월 장소 7일째에는 요리키리(寄り切り)로 패배했다. 2012년 4월 25일 오시마 토모야마 (2대 오시마)가 정년을 맞이하여 오시마 스모베야 선수들이 도모즈나 스모베야로 이적하면서 같은 스모베야 형제 선수가 되었다. 2017년 5월 장소 후에는 사범 10대 도모즈나의 정년에 따라 당시 은퇴하여 4대 오시마를 습명하고 있던 교쿠텐호가 11대 도모즈나가 되어 도모즈나 스모베야를 계승하면서 교쿠텐호와 사제 관계가 되었다.
7.3. 언론 인터뷰 및 코멘트
2016년 여름 순회공연 중 닛칸스포츠의 그림일기에 사용할 그림으로 도쿄 타워를 슥삭 그렸다. 그 의도를 묻자 "빨리 도쿄로 돌아가고 싶다. 향수병이다"라고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기자가 "소속된 도모즈나 스모베야는 스미다구 오시나리에 있고, 바로 옆에는 새로운 상징인 도쿄 스카이트리가 우뚝 솟아 있다. 그릴 거라면 스카이트리였어야 하지 않느냐?"고 묻자 "아니, 스카이트리는 매일 보니까요. 도쿄 타워는 올라가 본 적이 없어요. 한 번 가보고 싶은 마음을 담아 그렸습니다"라고 답했다.
세키와케 승진 기자회견에서는 "입문했을 때는 브라질인의 최고는 주료였다. 나도 일단 주료가 되는 것이 목표였다. 그것이 마쿠우치, 산야쿠에 오를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또한 오제키를 기대하는 목소리가 있다는 질문에 대해 회견에 동석한 사범은 이미 순위가 여기까지 올라 만족하는 듯 "이 이상은... 이제 됐다. 사범과 (최고위에서) 어깨를 나란히 한 정도로, 그 이상이 되면 텐구가 된다. 본인을 위해서도 그 편이 낫다"고 말해 현장에 있던 보도진의 웃음을 자아냈다.
고향 브라질에서 열린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흥미를 보이지 않던 카이세이였지만, 게임을 좋아했기 때문에 "폐회식 때, 아베 총리의 마리오를 직접 보고 싶었다... 마리오 좋았네요"라고 말했다.
하쿠호에게 통산 1000승을 헌납한 2016년 11월 장소에서 개인 최초로 중일(中日) 마케코시를 기록했을 때, 그는 "전혀 안 됩니다. 다음 장소에서 열심히 할게요. 이제 동면하겠습니다"라고 약한 코멘트를 남겼다.
2018년 3월 장소 6일째 인터뷰에서는 "순위가 오르면 아침에 늦게 일어날 수 있다. 다시 산야쿠로 돌아가고 싶다"며, 시차가 있는 고향에서 아침 일찍 TV 생방송을 보며 응원하던 아버지에 대한 배려의 의미도 담아 부활을 꿈꾸는 코멘트를 했다.
7.4. 경기 관련 일화
앞서 언급했듯이 부진에 시달렸던 2016년 11월 장소에서 3일째 하쿠호와 대결하여 패배했고, 이로 인해 오즈모 역사상 세 번째로 통산 1000승을 헌납한 선수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은퇴 시점에 요코즈나전은 37전 전패를 기록하여, 요코즈나전 미승리 기록에서 토우가의 29전 전패를 넘어 단독 최다 연패 기록을 세웠다.
두 장소 동안 주료 생활을 거쳐 서쪽 마에가시라 16위로 재입막한 2020년 1월 장소에서는, 성적 자체는 센슈라쿠에 8승 7패로 가치코시에 그쳤지만, 이 장소에서 14승 1패로 마쿠우치 최고 우승을 달성한 도쿠쇼류에게 유일하게 패배를 안겼기 때문에, "나만 이겼는데 (삼상으로 수여되는 방패 제스처를 하며) 뭐 없었나?"라고 삼상을 요구하기도 했다。
2020년 3월 장소에서는 코로나19 대책으로 리카리미즈는 국자에 입을 대지 않고 형식적으로만 행하게 되어 있었지만, 12일째에는 실수로 리카리미즈를 입에 넣어버렸고, 이 사실은 같은 날 8승을 거두어 가치코시를 확정한 직후에 밝혀졌다.
8. 미디어 출연
카이세이 이치로는 여러 다큐멘터리 및 TV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그의 삶과 스모 경력을 대중에게 알렸다.
- 2011년 7월 3일에는 후지 TV 계열에서 『더 논픽션 - 카이세이의 초심~오즈모에 보내는 메시지~』라는 제목으로, 카이세이를 일본 입국 후 5년간 취재하여 제작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다.
- 2014년 6월 8일에는 TV 도쿄 계열 『일요 빅 버라이어티 - 닛폰이야 엄마』라는 프로그램에서,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브라질에서 일본으로 와서 카이세이와 재회하고, 도쿄 디즈니랜드를 안내하거나, 혼바쇼를 관전하는 장면이 방영되었다.
9. 주요 성과 및 기록
카이세이 이치로의 스모 경력은 통산 성적, 주료 우승, 감투상 수상 등의 주요 성과와 함께 요코즈나전 전패, 불전승 최다 기록 등 특이한 기록들을 남겼다.
9.1. 통산 성적
- 총 통산 성적: 590승 592패 37휴 (94개 대회)
- 마쿠우치 등급 성적: 406승 457패 37휴 (60개 대회)
9.2. 대회 우승 및 수상
- 주료 우승: 1회 (2010년 11월 대회)
- 감투상: 3회 (2011년 5월, 2012년 7월, 2018년 3월)
9.3. 맞대결 기록
리키시 이름 | 승수 | 패수 | 리키시 이름 | 승수 | 패수 | 리키시 이름 | 승수 | 패수 | 리키시 이름 | 승수 | 패수 | |
---|---|---|---|---|---|---|---|---|---|---|---|---|
아오이야마 | 8(1) | 15 | 아키세야마 | 2 | 1 | 아마쿠카이 | 1 | 3 | 아사세키류 | 1 | 3 | |
아사노야마 | 3 | 2 | 아즈마류 | 2 | 1 | 아비 | 2 | 5 | 아미니시키 | 7(1) | 9 | |
아무루 | 2 | 1 | 아라와시 | 5 | 2 | 아란 | 2 | 4 | 이키오이 | 16 | 10 | |
이시우라 | 4 | 4 | 이치노조 | 4 | 10 | 이치야마모토 | 1 | 1 | 우라 | 1 | 2 | |
엔도 | 7(1) | 12 | 엔호 | 1 | 1 | 오노쇼 | 2 | 3(1) | 오호 | 0 | 1 | |
오스나아라시 | 4(1) | 0 | 오키노우미 | 9 | 8 | 가가마루 | 6 | 6 | 가가미자쿠라 | 1 | 1 | |
가카야키 | 6 | 5 | 가쿠류 | 0 | 15 | 기세노사토 | 0 | 12 | 기타다이주 | 3 | 3 | |
고후 | 1 | 0 | 기무라야마 | 2 | 0 | 교쿠슈호 | 1 | 0 | 교쿠텐호 | 1 | 1 | |
기리시마 | 0 | 2 | 고에이도 | 5 | 15 | 코토에코 | 3 | 3 | 코토오슈 | 1(1) | 2 | |
코토쇼기쿠 | 2(1) | 13 | 코토쇼호 | 1 | 1 | 코토노와카 | 3 | 3 | 코토유키 | 4(1) | 5 | |
사가쓰카사 | 1 | 2 | 사다노우미 | 6 | 9 | 사다노후지 | 8 | 4 | 조코류 | 0 | 2 | |
쇼다이 | 9 | 1(1) | 쇼텐로 | 5 | 3 | 쇼호잔 | 9 | 9 | 소코쿠라이 | 2 | 2 | |
다이아미 | 3 | 1 | 다이에이쇼 | 5 | 2 | 다이키호 | 1 | 0 | 다이쇼마루 | 5 | 2 | |
다이도 | 5 | 1 | 다카케이쇼 | 2(1) | 3 | 다카노이와 | 3 | 2 | 다카노쇼 | 0 | 1 | |
다카노야마 | 1 | 2 | 다카미사카리 | 1 | 0 | 다카야스 | 5 | 12 | 타카라후지 | 10 | 12 | |
고후 | 7 | 7 | 타마히바카 | 1 | 0 | 타마와시 | 10 | 12 | 치요호 | 1 | 3 | |
치요쇼마 | 4 | 3 | 치요타이류 | 17 | 4 | 치요노오 | 1 | 1 | 치요노쿠니 | 7 | 5 | |
치요마루 | 5 | 6 | 츠루기쇼 | 3 | 1 | 츠루기부 | 1 | 0 | 데루츠요시 | 5 | 4 | |
테루노후지 | 3 | 8 | 텐카이호 | 2 | 0 | 토키텐쿠 | 7 | 4 | 도쿠쇼류 | 9 | 5 | |
토사유타카 | 0 | 1 | 도치오잔 | 6 | 13 | 도치노신 | 12 | 14 | 도치노나다 | 1 | 0 | |
도치노와카 | 6 | 3 | 쇼엔자루 | 1 | 2 | 토모카제 | 1 | 0 | 토요노시마 | 2 | 6 | |
도요히비키 | 9 | 5 | 니시키기 | 3 | 7 | 하쿠호 | 0 | 13 | 하루토 | 1 | 1 | |
하루마후지 | 0 | 16 | 히데노우미 | 2 | 1 | 후지아즈마 | 5 | 3 | 호쇼류 | 1 | 2 | |
호마쇼 | 3 | 2 | 호쿠토후지 | 2 | 4 | 마스노야마 | 5(1) | 2 | 미타케우미 | 7 | 1 | |
미도리후지 | 1 | 0 | 미야비야마 | 2 | 3 | 묘기류 | 7 | 12(1) | 메이세이 | 2 | 0 | |
야고 | 2 | 0 | 유타카야마 | 4 | 5 | 요시토 | 1 | 0 | 요시카제 | 13 | 4 | |
류덴 | 1 | 4 | 와카아라시오 | 0 | 3 | 와카노사토 | 4 | 1 |
※괄호 안의 숫자는 승수, 패수 안에 포함된 불전승, 불전패의 수를 나타냅니다.
10. 이름 변경
카이세이 이치로는 선수 시절과 은퇴 후 오야카타로서 사용했던 이름에 변화를 겪었다.
- 스모 선수
- 카이세이 이치로(魁聖 一郎일본어): 2006년 9월 대회 ~ 2022년 9월 대회
- 오야카타
- 도모즈나 이치로(友綱 一郎일본어): 2022년 8월 29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