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1.1. 출생 및 배경
카리베르투스 1세는 서기 517년경에 태어나 567년 12월에 사망했다. 그는 클로타르 1세와 그의 첫 번째 아내 인군트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이었다. 그의 형인 군타르는 아버지 클로타르 1세가 사망하기 전에 이미 사망했다.
카리베르투스 1세에게는 여러 형제자매가 있었다. 인군트 소생의 친동생으로는 군트람과 지게베르트 1세가 있었다. 또한, 그의 아버지 클로타르 1세가 인군트의 여동생인 아레군트와의 사이에서 낳은 이복동생 힐페리히 1세가 있었고, 쿤시아와의 사이에서 낳은 이복동생 군도발트도 있었다.
1.2. 가족 관계
카리베르투스 1세는 잉고베르가와 결혼하여 최소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 쾰른의 블리티데 (538년 ~ 603년): 갈로로마 시대의 원로원 의원인 안스베르투스와 결혼했을 가능성이 있다.
- 베르타: 켄트의 애설버트 왕과 결혼했다.
- 클리토리케 (541년 ~ 569년)
- 헤스바예의 카리베르투스 (636년 사망): 사생아였으며, 아버지 사망 후 아무것도 물려받지 못했다.
- 클로타르 (542년 출생):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그는 잉고베르가 외에도 여러 첩을 두었다. 양모 직공의 딸인 메로플레다와 그녀의 자매 마르코베파와의 사이에서 두 딸을 두었다.
- 베르테펠드: 투르의 수녀였다.
- 클로틸데: 푸아티에의 생트크루아 수녀였다.
또한, 소치기 소녀 테오도길다(또는 테우데힐드)와의 사이에서 아들 한 명을 두었으나, 이 아들은 유아기에 사망했다.
2. 통치 및 영토
2.1. 프랑크 왕국 분할
561년 아버지 클로타르 1세가 사망한 후, 프랑크 왕국은 새로운 방식으로 그의 아들들 사이에 분할되었다. 각 아들은 지리적으로 반드시 연결되지 않은 별개의 영역을 통치했으며, 그들의 왕국은 통치 중심 도시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카리베르투스 1세는 솜강과 루아르강 사이의 지역인 네우스트리아, 아키텐, 노벰포풀라나를 포함하여 파리를 수도로 하는 영토를 받았다. 그의 주요 도시로는 루앙, 투르, 푸아티에, 리모주, 보르도, 툴루즈, 카오르, 알비 등이 있었다. 그의 동생 군트람은 부르군트를, 지게베르트 1세는 랭스를 포함한 아우스트라시아를 받았으며 수도는 메츠였다. 막내 동생 힐페리히 1세는 수아송을 수도로 하는 작은 왕국을 받았다.
3. 주요 활동
3.1. 군사 활동
556년, 클로타르 1세는 반란을 일으킨 그의 계모 "훈나"와 이복동생 "크람"에 대항하여 아들 카리베르투스와 군트람을 보냈다.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크람은 리무쟁의 검은 산에 숨어 있었다. 협상이 결렬되자 두 군대는 전투를 준비했다. 그러나 폭풍우로 인해 교전이 불가능해졌고, 크람은 아버지 클로타르 1세의 사망을 거짓으로 보고하는 위조 편지를 형제들(카리베르투스와 군트람)에게 보냈다. 이에 카리베르투스와 군트람은 즉시 부르군트로 돌아가 자신들의 지위를 확보하려 했다.
3.2. 딸 베르타의 영향력
카리베르투스 1세의 딸 베르타는 이교도인 켄트의 애설버트 왕과 결혼했다. 그녀는 개인 고해성사 신부로 리우하르트 주교를 동반했다. 597년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선교 활동에 있어 켄트 궁정 내 베르타의 영향력은 매우 중요했으며, 이는 최초의 앵글로색슨족 통치자가 기독교로 개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4. 개인 생활 및 성격
4.1. 결혼 및 자녀
카리베르투스 1세는 복잡한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 그는 동시에 네 명의 아내를 두었으며, 그중 두 명은 자매 관계였다. 그의 아내로는 잉고베르가, 메로플레다, 마르코베파, 그리고 소치기 소녀 테우데길드 등이 있었다. 이러한 다혼 관계는 당시 교회의 규범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4.2. 성격 및 종교적 문제
투르의 그레고리우스는 그의 저서 『프랑크인의 역사』에서 카리베르투스 1세가 웅변에 능하고 법률에 박식했지만, 초기 메로베우스 왕조 군주들 중 가장 방탕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고 묘사했다. 그는 동시에 네 명의 아내를 두었으며, 이 중 두 명은 자매였다. 이러한 문란한 사생활로 인해 그는 파리의 제르마누스 주교로부터 파문당했다. 이는 메로베우스 왕조의 군주가 파문당한 최초의 사례였다.
5. 사망
5.1. 사망 및 매장
카리베르투스 1세는 567년 12월에 사망했다. 그는 보르도 근처 아르모리카누스 트락투스의 요새인 블라비아 카스텔룸에 불명예스럽게 매장되었다. 그의 방탕한 행동과 파문으로 인해 그의 장례는 명예롭지 못했다.
6. 사후 평가
6.1. 영토 분할
카리베르투스 1세가 사망한 후, 그의 영토는 그의 형제들인 지게베르트 1세와 힐페리히 1세 사이에 분할되었다. 처음에는 파리를 공동으로 소유하기로 합의했다. 그의 네 명의 아내 중 살아남은 테우데길드는 군트람과의 결혼을 제안했으나, 557년 파리에서 열린 공의회는 그러한 근친상간적 혼인을 금지했다. 이에 군트람은 그녀를 아를의 수녀원에 안전하게 수용하기로 결정했으나, 이는 그의 의지에 따른 것은 아니었다. 그의 사생아인 헤스바예의 카리베르투스는 아버지의 영토를 전혀 물려받지 못했다.
6.2. 역사적 평가
카리베르투스 1세의 삶과 통치에 대한 주요 사료는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의 『프랑크인의 역사』(제4권 3, 16, 22, 26장 및 제9권 26장)와 베다의 『잉글랜드 교회사』이다. 투르의 그레고리우스는 그를 방탕한 인물로 평가하며 그의 파문 사건을 기록했다. 반면 베다는 그의 딸 베르타가 켄트 왕국의 기독교화에 기여한 긍정적인 영향을 강조했다.
7. 외부 링크
[http://www.fordham.edu/halsall/source/585Polltax1.html Historia Francorum Books I-I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