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카를 프리드리히(Karl Friedrich, Herzog von Schleswig-Holstein-Gottorp카를 프리드리히, 헤르초크 폰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고토르프독일어, 1700년 4월 30일 ~ 1739년 6월 18일)는 스웨덴 왕자이자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으로서 유럽 왕실의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는 고대 올덴부르크 왕가의 분가인 홀슈타인고토르프 왕가의 일원이었으며, 이 가문은 당시 덴마크-노르웨이를 통치하고 있었다. 스웨덴 국왕 칼 12세의 외조카이자 표트르 대제의 딸과 결혼하여 표트르 3세의 아버지가 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 왕가의 시조이자 예카테리나 2세를 제외한 모든 러시아 황제들의 부계 조상이 되었다. 그의 생애는 스웨덴 왕위 계승 시도, 영토 상실, 그리고 러시아 황실과의 깊은 연관성으로 특징지어진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카를 프리드리히는 스웨덴 왕실과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가문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정치적 격변을 겪었다.
2.1. 출생과 가계
카를 프리드리히는 1700년 4월 30일 스웨덴에서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프레데리크 4세와 스웨덴 국왕 칼 11세의 딸인 헤드비그 소피아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헤드비그 소피아는 당시 스웨덴 국왕 칼 12세의 누이였으므로, 카를 프리드리히는 칼 12세의 외조카이자 형식적인 후계자였다. 그의 가문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가문은 당시 덴마크-노르웨이를 통치하던 고대 올덴부르크 왕가의 분가였다.
2.2. 어린 시절과 교육
카를 프리드리히의 부모는 대북방 전쟁 발발 당시 외삼촌인 스웨덴 국왕 칼 12세로부터 피난처를 제공받아 스톡홀름에 거주했다. 그는 1702년 아버지 프레데리크 4세가 크리슈프 전투에서 전사하자 두 살의 나이로 공작위를 계승했다. 그의 어머니가 섭정을 맡아 스톡홀름에서 계속 거주했으며,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공국의 실제 통치는 행정관들에게 맡겨졌다. 어머니는 그를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키웠다고 전해지지만, 카를 프리드리히는 8세가 되던 1708년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이후 그는 증조모인 헤드비그 엘레오노라의 보살핌을 받게 되었는데, 그녀는 카를 프리드리히를 심하게 응석받이로 키워 그를 수동적이고 나태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와 헤드비그 엘레오노라 모두 자녀가 없던 칼 12세의 후계자로서 그의 권리를 지지하고 노력했다.
2.3. 공작위 계승
카를 프리드리히는 1702년 크리슈프 전투에서 아버지 프레데리크 4세가 전사하자 두 살의 어린 나이에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위를 계승했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의 봉토인 홀슈타인 공국과 덴마크의 봉토인 슐레스비히 공국에서 아버지의 사촌인 덴마크-노르웨이 국왕 프레데리크 4세와 공동 통치했으나, 1717년까지는 후견인의 보호를 받았다.
3.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으로서의 통치
카를 프리드리히가 공작으로서 통치했던 시기는 대북방 전쟁의 여파로 영토적 상실을 겪는 등 혼란스러웠다.
3.1. 영지 상황과 영토 상실
카를 프리드리히의 후견인들이 대북방 전쟁에서 덴마크-노르웨이에 대항하여 스웨덴 편에 섰기 때문에, 덴마크군은 전쟁 중 공작령의 고토르프 영지를 황폐화시키고 1713년에는 동명의 공국에 있는 조상 대대의 공작 거주지인 고토르프 성을 포함한 북부 지역을 점령했다. 1721년 덴마크-노르웨이의 프레데리크 4세는 덴마크 슐레스비히의 봉건 영주로서 1702년 카를 프리드리히에게 슐레스비히 공작위를 봉토로 주었던 것을 공식적으로 철회했다.
1720년 스웨덴과 덴마크-노르웨이는 프레데릭스보르 조약을 체결했는데, 이 조약에서 스웨덴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약속했다. 카를 프리드리히는 이 조약에 반대했는데, 그는 스웨덴 정부가 자신의 스웨덴 왕위 계승권에 반역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 조약은 또한 그가 슐레스비히 북부 공국에서 잃어버린 공작령을 되찾는 것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는 훗날 그의 아들 표트르 3세가 1762년 러시아 황제로 즉위했을 때, 덴마크-노르웨이로부터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해 러시아 군대를 동원할 준비를 시작하는 동기가 되었다.
4. 스웨덴 왕위 계승권
카를 프리드리히는 스웨덴 왕위 계승자로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나, 정치적 역학 관계와 자신의 친러시아 정책으로 인해 최종적으로 왕위 계승에서 배제되었다.
4.1. 스웨덴 왕위 계승 시도

카를 프리드리히는 1716년 외삼촌인 칼 12세와 처음 만났다. 그는 1717년에 성년으로 선포되었고, 이후 일부 군사적 책임을 부여받았다. 그는 이모인 울리카 엘레오노라와 긴장 관계에 있었는데, 그녀의 추종자들은 그가 너무 무례하고 오만하며 왕위에 적합한 책임감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1718년 외삼촌 칼 12세가 사망하자, 카를 프리드리히 공작은 스웨덴 왕위 계승자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그의 이모 울리카 엘레오노라(1688년~1741년)는 노르셰핑 상속 협정에 명시된 계승법에 따라 자신의 언니(카를 프리드리히의 어머니)가 아버지와의 결혼에 대해 "의회의 동의를 얻지 못했다"고 주장하며 왕위를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공작의 지지자들은 그의 할아버지 칼 11세가 확립한 스웨덴의 절대군주제가 그 결혼 조항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외삼촌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너무 비통하여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와 함께 티스테달렌에 있던 울리카 엘레오노라의 남편 프레드리크 1세는 서둘러 그녀가 왕위를 주장하는 것을 도왔다. 카를 프리드리히가 울리카 엘레오노라와 대면했을 때, 그는 아르비드 호른에 의해 그녀를 여왕으로 맞이하도록 강요받았다. 그는 왕실 전하(Royal Highness) 칭호를 받고 그녀의 후계자로 인정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대신 그녀의 남편이 그 칭호를 받자 1719년 스웨덴을 떠났다. 1723년, 그는 부재 중에 왕실 전하 칭호를 부여받았지만, 그의 친러시아 정책으로 인해 스웨덴 왕위 계승자로서의 가능성은 사라졌다.
4.2. 왕위 계승 배제
카를 프리드리히는 스웨덴에서 물러나 결국 러시아에 정착하여 1725년 5월 안나 페트로브나 대공녀와 결혼했다. 안나 페트로브나는 표트르 대제의 큰딸이었다. 한편, 스웨덴의 이른바 홀슈타인당은 카를 프리드리히의 왕위 주장을 계속해서 지지했다. 이 당은 자녀가 없던 울리카 엘레오노라의 사망을 기다리며 준비를 했으나, 카를 프리드리히가 이모보다 먼저 사망하면서 그의 왕위 주장은 어린 아들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이때 스웨덴은 러시아와의 관계가 긴장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카를 프리드리히와 그의 후계자들을 러시아 정책을 이유로 스웨덴 왕위 계승에서 명시적으로 배제하는 새로운 계승법을 제정했다. 카를 프리드리히와 그의 자손이 스웨덴 계승에서 제외됨으로써 스웨덴과 러시아의 동군연합은 피할 수 있었다. 카를 프리드리히의 유일한 아들이 훗날 러시아의 표트르 3세가 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자녀가 없던 울리카 엘레오노라 사후 스웨덴의 다음 국왕이 누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발생했고, 스웨덴의 이른바 '모자당'은 카를 프리드리히의 사촌인 아돌프 프레드리크를 스웨덴의 왕세자로 선출했다. 아돌프 프레드리크는 카를 프리드리히 아버지의 남동생의 아들이었으므로 같은 올덴부르크 왕가에 속했다.
5. 러시아 황실과의 관계
카를 프리드리히는 러시아 황실과의 결혼을 통해 자신의 가문의 운명을 러시아 제국의 역사와 엮었다.
5.1. 안나 페트로브나와의 결혼
카를 프리드리히는 1725년 5월 러시아 황제 표트르 1세와 마르타 스카브론스카야(훗날 예카테리나 1세 황후)의 큰딸인 안나 페트로브나 대공녀와 결혼했다. 당시 스웨덴의 왕위 계승자였던 카를 프리드리히와 표트르 대제는 이 결혼을 정치적으로 유용하다고 보았다. 표트르 대제는 카를 프리드리히와 안나의 약혼을 공식적으로 주선했다. 1725년 표트르 대제가 사망한 후, 예카테리나 1세는 그에게 궁정 내 자리, 개인 궁전, 수입을 제공하고 안나와 결혼시켰다. 안나는 카를 프리드리히가 매춘부들과 어울린다는 평판 때문에 결혼에 열정적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5.2. 아들 표트르 3세와 러시아 왕위 계승
카를 프리드리히와 안나 페트로브나 사이에서는 1728년 아들 카를 페터 울리히가 태어났다. 카를 프리드리히는 1727년 장모인 예카테리나 1세 황후가 사망하자, 상트페테르부르크 궁정 근위대장이었던 그는 아내의 러시아 황위 계승을 확보하려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카를 페터 울리히는 1739년 홀슈타인 공작위를 계승한 후, 1762년 표트르 3세로서 러시아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표트르 3세의 폐위에는 그의 아버지 카를 프리드리히의 행동과 정책, 특히 덴마크와의 영토 분쟁에 대한 미련이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가 있다.
6. 말년과 사망
카를 프리드리히는 말년을 홀슈타인고토르프에서 보내며 아들의 러시아 황위 계승에 집중했다.
6.1. 홀슈타인고토르프에서의 삶
카를 프리드리히와 안나는 1727년 홀슈타인 공작령으로 돌아와 킬 성에 거주했다. 안나는 1728년 아들을 낳은 후 사망했다. 카를 프리드리히는 남은 생애를 홀슈타인고토르프의 킬에서 보냈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아들의 러시아 황위 계승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는 스웨덴의 지지자들을 지원하기도 했지만, 홀슈타인고토르프 자체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6.2. 사망

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의 일원이 스웨덴이나 러시아의 왕좌에 앉기 전에, 카를 프리드리히 공작은 1739년 6월 18일 오늘날 륌펠 마을의 일부인 롤프스하겐에서 사망했다. 그의 무덤은 보르데스홀름의 수도원 교회에 있다.
7. 유산과 영향

카를 프리드리히의 삶과 활동은 특히 그의 가문이 러시아 역사에 미친 영향으로 인해 중요한 유산을 남겼다.
7.1. 로마노프 왕조의 조상
카를 프리드리히의 아들 표트르 3세를 통해 홀슈타인고토르프 왕가는 러시아 황실과 통합되어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 왕가를 형성했다. 이로써 카를 프리드리히는 표트르 3세 이후 예카테리나 2세를 제외한 모든 러시아 황제들의 부계 조상이 되었다. 이는 러시아 제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그의 가계는 러시아의 왕조적 연속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7.2. 역사적 평가
카를 프리드리히의 생애는 유럽 왕실의 복잡한 혈연관계와 정치적 역학 관계 속에서 전개되었다. 그는 스웨덴 왕위 계승자로서의 지위를 잃었지만, 러시아 황실과의 결혼을 통해 자신의 가문을 유럽의 주요 강대국 왕실과 연결시키는 데 성공했다. 특히 그의 아들이 러시아 황제가 됨으로써, 그는 러시아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다. 그의 정치적 결정과 행동은 훗날 아들 표트르 3세의 운명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유럽 왕실 간의 동맹과 갈등이 한 개인의 삶과 후대의 역사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