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조지 그랜빌 레버슨-고어, 초대 서덜랜드 공작(George Granville Leveson-Gower, 1st Duke of Sutherland영어, 1758년 1월 9일 ~ 1833년 7월 19일)은 영국의 정치인, 외교관, 대지주이자 예술 후원자였다. 그는 1758년부터 1786년까지 트렌섬 자작(Viscount Trentham영어), 1786년부터 1803년까지 고어 백작(Earl Gower영어), 그리고 1803년부터 1833년까지 스태퍼드 후작(Marquess of Stafford영어)으로 불렸다. 그는 생애 후반부 영국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로 기록되었으며, 찰스 그레빌은 그를 "부의 레비아탄"이자 "사망한 개인 중 가장 부유한 자"라고 묘사했다. 그러나 그는 하일랜드 이주 정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여 수많은 소작농들을 강제 이주시킨 것으로 인해 오늘날까지도 매우 논란이 많은 인물로 남아있다. 그의 활동은 사회적 약자에게 막대한 고통을 안겨주었으며, 이로 인해 게일어 노래에서 비판과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2. 배경
조지 그랜빌 레버슨-고어는 제1대 스태퍼드 후작 그랜빌 레버슨-고어와 그의 두 번째 부인 레이디 루이자 에저턴(제1대 브리지워터 공작 스크루프 에저턴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다. 제1대 그랜빌 백작 그랜빌 레버슨-고어는 그의 이복형제였다.
2.1. 어린 시절과 교육
그는 1758년 1월 9일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잉글랜드 런던의 앨링턴 스트리트에서 태어났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스쿨에서 교육을 받았고, 이후 옥스퍼드 대학교의 크라이스트 처치에서 공부하여 1777년에 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그랜드 투어를 떠나 견문을 넓혔다.
3. 정치 경력
조지 그랜빌 레버슨-고어는 영국 의회에서 의원으로서 활동했으며, 외교관으로서 프랑스 대사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의 정치적 입장은 시대에 따라 변화했으며, 귀족 작위의 승계는 그의 정치적 위상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3.1. 초기 의회 활동
그는 1779년부터 1784년까지 뉴캐슬언더라임 선거구에서 영국 하원 의원으로 활동했다. 1784년 총선에서 낙선하여 일시적으로 의석을 잃었으나, 1787년에는 스태퍼드셔 선거구에서 재선되었다. 1799년에는 부친이 생존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환영장에 의해 부친의 하위 작위인 고어 남작위를 조기에 승계하여 하원 의원에서 영국 상원 의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3.2. 프랑스 대사 시절
프랑스 혁명이 한창이던 1790년부터 1792년까지 그는 프랑스 주재 대사로 재직했다. 32세의 나이에 파리 대사로 임명되었지만, 그는 이전의 외교 경험이 전무했다. 당시 루이 16세가 튈르리 궁전에 가택 연금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왕실과 긴밀하게 협력하기 어려웠다. 그는 전임자인 존 새크빌, 제3대 도싯 공작보다 복잡한 프랑스 혁명 상황에 대처하는 데 능숙하지 못했다. 그의 주요 임무는 프랑스 궁정의 소식을 영국에 전달하는 것이었으나, 사소한 정보 전달에 그쳤고 광범위한 정치적 분위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1792년 8월 10일, 새로 설립된 파리 혁명 코뮌의 봉기로 왕실이 튈르리 궁전에서 쫓겨나고 사흘 뒤 루이 16세가 탕플 감옥에 투옥되자, 영국은 이에 항의하여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영국 대사관이 폐쇄되면서 정보 작전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게 되었고, 영국은 그를 해임하고 조지 먼로 대위로 교체하여 프랑스 외교에서 물러나게 했다.

3.3. 후기 정치 활동 및 작위 승계
영국으로 돌아온 후 그는 왕실 집사와 아일랜드 총독 직책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나 1799년에는 영국 우정국장 직책을 수락하여 1801년까지 유지했다. 그는 1804년 헨리 애딩턴 행정부의 몰락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후 토리당에서 휘그당으로 정치적 충성심을 바꿨다. 1807년 이후에는 정치 활동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으나, 만년에는 가톨릭 해방령과 1832년 개혁법을 지지했다.
그는 1794년 9월 20일 신설된 스태퍼드셔 요먼리 연대의 연대장으로 임명되어, 뉴캐슬언더라임 부대를 직접 지휘했다. 그는 1800년 1월에 지휘관직에서 물러났다. 또한 1799년부터 1801년까지 스태퍼드셔 주지사, 1794년부터 1830년까지 서덜랜드 주지사의 명예직을 역임했다. 그는 1790년에 추밀원 의원으로, 1806년에 가터 훈장 기사로 임명되었으며, 1833년 1월 28일에는 서덜랜드 공작으로 서임되었다. 1831년에는 당시 스태퍼드 후작으로서 슈루즈버리의 살롭 요양원의 연간 회계 담당 직책을 수행했다.
4. 재산과 영지
레버슨-고어 가문은 스태퍼드셔, 슈롭셔, 요크셔에 걸쳐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1803년에는 외삼촌인 제3대 브리지워터 공작 프랜시스 에저턴의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았는데, 여기에는 브리지워터 운하와 오를레앙 컬렉션의 상당 부분을 포함한 주요 미술품 컬렉션이 포함되어 있었다. 레버슨-고어와 그의 외삼촌은 모두 오를레앙 컬렉션을 런던으로 가져와 분산 판매하는 컨소시엄의 일원이었다. 브리지워터 공작의 유언에 따라 이 재산은 초대 서덜랜드 공작 사망 후 그의 셋째 아들 프랜시스 레버슨-고어에게 상속되었다. 이 상속은 그에게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었다.

그는 19세기 가장 부유한 인물로 추정되며, 심지어 네이선 메이어 로스차일드를 능가했다. 그의 사망 시 정확한 재산 가치는 '최고 가치'로만 분류되어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찰스 그레빌에 의해 "부의 레비아탄"이자 "사망한 개인 중 가장 부유한 자"로 묘사되었다. 1827년 프레더릭 왕자, 요크와 올버니 공작이 사망한 후, 그는 스태퍼드 하우스(현재 랭커스터 하우스)의 임차권을 매입했으며, 이 저택은 1912년까지 서덜랜드 공작들의 런던 저택이 되었다. 프랑스 혁명과 전쟁으로 영국 농업이 크게 발전함에 따라, 그의 지대 수입은 1802년부터 13년간 5.50 만 GBP 미만에서 20.00 만 GBP로 급증했다.
5. 서덜랜드 개발 및 하일랜드 이주
서덜랜드 공작과 그의 아내는 하일랜드 이주 정책을 실행하는 데 있어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이 정책으로 수천 명의 소작농들이 강제 이주되어 해안 지역의 소규모 농지에 재정착해야 했다. 서덜랜드 지역에서 대규모 이주는 1811년부터 1820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5.1. 이주 정책 및 실행
1811년 영국 의회는 스코틀랜드 북부 지역의 도로 건설 비용 절반을 지원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는데, 이는 토지 소유주들이 나머지 절반을 부담한다는 조건이었다. 이듬해인 1812년, 서덜랜드 공작은 당시 거의 존재하지 않던 서덜랜드 지역에 도로와 다리 건설을 시작했다. 그는 소작농들의 열악한 생활 환경에 경악했으며, 당시의 사회경제적 이론에 영향을 받고 광범위한 자문을 구한 후, 자신과 아내 엘리자베스 레버슨-고어, 서덜랜드 공작부인은 서덜랜드 내륙에서의 자급자족 농업이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없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들은 광범위한 양 목축 농장을 임대하여 훨씬 더 높은 지대 수입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서덜랜드 영지 관리자들은 이미 수년 전부터 이주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며, 1772년 레이디 서덜랜드가 아직 어린 시절에도 일부 이주 활동이 있었다. 그러나 자금 부족으로 이러한 계획이 더 이상 진행되지 못했고, 이는 그녀가 레버슨-고어와 결혼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가 브리지워터 공작의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으면서 계획은 진행될 수 있었고, 레버슨-고어는 자신의 막대한 재산을 서덜랜드 영지의 변화에 기꺼이 사용했다.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영지 관리의 많은 부분이 서덜랜드 공작부인에게 위임되었으며, 그녀는 영지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매년 여름 던로빈 성을 방문하고 영지 관리인 및 스태퍼드 영지 위원 제임스 로크와 지속적으로 서신을 교환했다.
새로운 이주 물결의 첫 단계는 애신트 지역 주민들을 해안 마을로 재배치하여 농부들이 어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는 계획이었다. 1813년 킬도넌 스트라스에서 발생한 다음 이주 시도에는 반대가 부딪혔고, 6주간의 대치 끝에 군대가 동원되고 영지 측이 이주민들에게 일부 양보하면서 해결되었다. 1814년, 영지의 관리인 중 한 명인 패트릭 셀러는 스트라스네이버에서 이주를 감독하던 중, 집이 재점유되는 것을 막기 위해 지붕 목재에 불을 질렀는데, 이때 거동이 불편한 노파가 아직 집 안에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 노파는 구조되었으나 6일 후에 사망했다. 지역 법률 담당관인 로버트 매키드는 셀러의 적이었고, 셀러를 기소하기 위해 증언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1816년 재판에 회부되었고, 셀러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 재판으로 인한 언론의 관심은 서덜랜드 가문에게 반갑지 않았다. 셀러는 관리인 자리에서 교체되었고, 1818년부터 1820년까지 더 크고 광범위한 이주가 계속되었다. 언론의 논평을 피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1819년 디 옵저버 신문은 "서덜랜드의 황폐화"라는 헤드라인으로 동시에 철거된 수많은 가옥의 지붕 목재가 불타는 상황을 보도했다.
5.2. 사회적 영향 및 비판
하일랜드 이주 정책은 서덜랜드 지역 사회와 주민들에게 막대한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강제 이주는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파괴하고, 수천 명의 사람들이 살던 땅에서 쫓겨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고통을 겪게 했다. 이는 많은 이들에게 생계의 어려움과 사회적 유대감의 상실을 가져왔다. 당시에도 이러한 정책에 대한 비판과 논란이 끊이지 않았으며, 특히 셀러 사건과 같은 잔혹한 이주 방식은 큰 공분을 샀다. '서덜랜드의 황폐화'라는 언론 보도는 이러한 비판적 시각을 대변하며, 서덜랜드 공작 부부의 책임에 대한 논의를 촉발한다. 이러한 이주 정책은 단순히 경제적 효율성을 추구하는 것을 넘어, 인간의 존엄성과 공동체의 가치를 훼손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비판받고 있다.
6. 개인사
조지 그랜빌 레버슨-고어는 1785년에 결혼하여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는 75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그의 유산은 자녀들에게 계승되었다.
6.1. 결혼과 자녀
그는 1785년 9월 4일 제18대 서덜랜드 백작 윌리엄 서덜랜드와 메리 맥스웰의 딸인 제19대 서덜랜드 여백작 엘리자베스 레버슨-고어, 서덜랜드 공작부인과 결혼했다. 그들은 네 명의 생존 자녀를 두었다.
- 조지 서덜랜드-레버슨-고어, 제2대 서덜랜드 공작 (1786년 8월 11일 ~ 1861년 2월 27일): 그의 뒤를 이어 제2대 서덜랜드 공작이 되었다.
- 레이디 샬럿 소피아 레버슨-고어 (약 1788년 ~ 1870년 7월 7일): 제13대 노퍽 공작 헨리 피츠앨런-하워드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 레이디 엘리자베스 메리 레버슨-고어 (1797년 ~ 1891년): 제2대 웨스트민스터 후작 리처드 그로스베너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 프랜시스 에저턴, 제1대 엘즈미어 백작 (1800년 1월 1일 ~ 1857년 2월 18일): 토리당 정권의 각료를 지냈으며, 엘즈미어 백작으로 서임되었다. 브리지워터 영지는 브리지워터 공작의 유언에 따라 공작의 셋째 아들 프랜시스에게 신탁으로 넘어갔다.
그는 뇌졸중으로 쇠약해진 지 11년 만인 1833년 7월, 75세의 나이로 던로빈 성에서 사망했으며, 도녹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의 장남 조지가 작위를 계승했다. 서덜랜드 공작부인은 1839년 1월, 73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그녀의 장남 조지 또한 작위를 계승했다.
7. 기념물과 추모
조지 그랜빌 레버슨-고어를 기리기 위해 여러 기념물이 세워졌으나, 특히 하일랜드 이주와 관련된 논란으로 인해 일부 기념물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슈롭셔에는 레버슨-고어를 기리는 기념물이 있다. 1833년에 세워진 릴레셜 기념비는 높이 21 m (70 ft)의 오벨리스크로, 릴레셜 수도원 해체 시 획득한 레버슨 가문의 원래 영지 내 릴레셜 언덕 꼭대기에 서 있어 멀리서도 보이는 지역 랜드마크이다. 기념비 북쪽 면의 명판에는 "조지 그랜빌 레버슨-고어, KG, 초대 서덜랜드 공작을 기리며. 가장 정의롭고 관대한 지주. 이 기념비는 그의 은총을 입은 슈롭셔 농장 거주자들이 그가 세입자들의 축복을 받으며 무덤에 들었고, 아들에게 영국 신사가 물려줄 수 있는 최고의 유산, 즉 그의 가문을 마음과 손으로 지지할 준비가 된 사람들을 남겼다는 공개적인 증거로 세워졌다"고 새겨져 있다.
스태퍼드셔의 트렌섬 가든스 영지에도 기념물이 세워져 있다. 이 거대한 동상은 윙크스(Winks)가 설계하고 프랜시스 레가트 챈트리 경이 조각했으며, 여러 단으로 된 받침대 위의 평범한 돌기둥 위에 세워져 있다. 이 기념비는 초대 공작이 사망한 지 1년 후인 1834년에 제2대 공작의 주도로 건립되었다.
1837년에는 골스피 근처 벤 브래기 언덕에 '매니(Mannie영어)'라고 불리는 거대한 기념물이 세워져 공작의 생애를 기리고 있다. 이 동상의 존재는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1994년, 전 스코틀랜드 국민당 의원인 샌디 린제이는 이 동상의 철거를 제안했다. 그는 나중에 계획을 변경하여, 동상을 옮기고 그 자리에 하일랜드 이주의 역사를 설명하는 명판을 설치할 것을 지역 의회에 요청했다. 린제이는 J. 폴 게티 미술관이 동상 수령 제안을 거절하자, 동상을 던로빈 성 부지로 옮길 것을 제안했다. 2011년 11월에는 반달리즘으로 동상을 넘어뜨리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했다. 이 사건에 대한 BBC 뉴스 보도에서는 지역 주민들이 동상 철거를 원치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역사의 중요한 상기물로 여긴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2024년 9월 현재까지도 이 동상은 여전히 서 있다.
8. 유산과 평가
조지 그랜빌 레버슨-고어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역사적, 사회적 평가는 그의 업적과 함께 하일랜드 이주 정책으로 인한 부정적 영향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공존한다.
8.1. 긍정적 평가
그의 토지 경영에 대해 '공정하고 관대한 지주'로 칭송받았던 기록이 있다. 특히 슈롭셔의 릴레셜 기념비 명판에는 그가 "가장 정의롭고 관대한 지주"였으며, "세입자들의 축복을 받으며 무덤에 들었다"고 새겨져 있다. 이는 그의 영지 관리 방식이 일부 지역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그는 도로와 다리 건설 등 지역 인프라 개선에 기여한 바도 있다.
8.2. 비판과 논란
그의 가장 큰 논란은 서덜랜드 이주를 포함한 하일랜드 이주 정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이다. 이 정책은 수천 명의 소작농을 강제로 이주시켰고, 그들의 삶과 공동체를 파괴했다는 점에서 강력한 비판을 받는다. 이로 인해 그는 오늘날까지도 논란의 인물로 남아있으며, 벤 브래기 언덕에 세워진 그의 기념비는 반복적인 반달리즘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를 개인적으로 조롱하는 여러 유명한 게일어 노래들도 존재한다. 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이주의 음유시인'으로 알려진 이웬 로버트슨이 작곡한 'Dùthaich Mhic Aoidh게일어'(매케이 컨트리 또는 북부 서덜랜드)이다. 이 노래의 가사에는 "속임수를 쓰는 서덜랜드의 초대 공작이여, 저지대 사람들과의 우정으로, 너는 지옥에나 어울린다, 차라리 유다를 내 옆에 두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어, 그에 대한 지역 주민들의 깊은 증오와 배신감을 여실히 드러낸다. 이는 그의 행동이 민주주의와 인권, 사회적 진보에 미친 부정적인 영향을 명확히 보여주는 증거이다.
9. 가계
조지 그랜빌 레버슨-고어, 초대 서덜랜드 공작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 1. 조지 그랜빌 레버슨-고어, 초대 서덜랜드 공작
- 2. 그랜빌 레버슨-고어, 초대 스태퍼드 후작
- 3. 레이디 루이자 에저턴
- 4. 존 레버슨-고어, 초대 고어 백작
- 5. 레이디 이블린 피어포인트
- 8. 존 레버슨-고어, 초대 고어 남작
- 9. 레이디 캐서린 매너스
- 10. 이블린 피어포인트, 초대 킹스턴어폰헐 공작
- 11. 레이디 메리 필딩
- 6. 스크루프 에저턴, 초대 브리지워터 공작
- 7. 레이디 레이철 러셀
- 12. 존 에저턴, 제3대 브리지워터 백작
- 13. 레이디 제인 폴릿
- 14. 리오슬리 러셀, 제2대 베드퍼드 공작
- 15. 엘리자베스 하울랜드
- 16. 윌리엄 레버슨-고어 경, 제4대 준남작
- 17. 레이디 제인 그랜빌
- 18. 존 매너스, 초대 러틀랜드 공작
- 19. 캐서린 리오슬리 노엘
- 20. 로버트 피어포인트 (노팅엄셔의 소어스비 출신)
- 21. 엘리자베스 이블린
- 22. 윌리엄 필딩, 제3대 덴비 백작
- 23. 메리 킹
- 24. 존 에저턴, 제2대 브리지워터 백작
- 25. 레이디 엘리자베스 캐번디시
- 26. 찰스 폴릿, 초대 볼턴 공작
- 27. 메리 스크루프
- 28. 윌리엄 러셀, 러셀 경
- 29. 레이디 레이철 리오슬리
- 30. 존 하울랜드 (스트리섬 출신)
- 31. 엘리자베스 차일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