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찰스 호지(Charles Hodge찰스 호지영어, 1797년 12월 27일 ~ 1878년 6월 19일)는 미국의 장로교 신학자이자 1851년부터 1878년까지 프린스턴 신학교의 학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그는 19세기 미국에서 정통 칼뱅주의 신학의 전통을 이끌었던 '프린스턴 신학'의 주요 주창자였다. 특히 성경의 권위와 무오류성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강력히 주장했으며, 그의 많은 사상은 이후 20세기 근본주의와 복음주의 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아들인 아치볼드 알렉산더 호지 또한 프린스턴 신학교의 학장이자 조직신학 교수로 활동했다.
호지의 사상은 성경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교회의 교리 역시 성령의 영감을 받아 선택된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하나님의 무오한 소통의 일부라고 보았다. 그는 하나님이 창조물을 도구로 사용하실 때 그 본성에 따라 사용하시며, 인간은 지적이고 자발적인 주체이므로 하나님이 그들을 무의식적이거나 비합리적으로 만들지 않으셨다고 주장했다. 인간에 대한 그의 이러한 견해는 그의 조직신학 탐구의 출발점이 되었다.
2. 생애 및 초기 활동
찰스 호지의 생애는 그의 가족 배경과 초기 교육, 그리고 유럽 유학을 통한 학문적 성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단계를 거쳤다.
2.1. 가족 배경 및 어린 시절
찰스 호지의 아버지 휴 호지(Hugh Hodge영어)는 18세기 초 북아일랜드에서 이주한 스코틀랜드인 가문의 아들이었다. 휴는 1773년 프린스턴 칼리지를 졸업한 후 미국 독립 전쟁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했으며, 이후 필라델피아에서 의사로 개업했다. 1790년 그는 명문가의 고아인 메리 블랜차드(Mary Blanchard영어)와 결혼했으나, 1793년 황열병 유행과 1795년 또 다른 황열병 유행으로 첫 세 아들을 잃었다. 어린 시절을 살아남은 첫 아들인 휴 레녹스(Hugh Lenox영어)는 1796년에 태어났으며, 그는 훗날 산부인과 분야의 권위자가 되었고 찰스와 특히 가깝게 지내며 재정적으로 자주 도움을 주었다.
찰스는 1797년 12월 27일에 태어났지만, 그의 아버지는 1795년 황열병에 걸린 후유증으로 7개월 만에 사망했다. 찰스 형제는 많은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친척들의 도움을 받으며 성장했다. 어머니 메리 호지는 아들들의 학비를 대기 위해 희생하며 하숙생을 받기도 했다. 그녀는 가족의 목사였던 애쉬벨 그린의 도움을 받아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이용한 전통적인 장로교 종교 교육을 제공했다. 찰스 형제는 1810년 고전 아카데미에 다니기 위해 서머빌로 이사했으며, 1812년에는 장로교 목사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된 학교인 프린스턴 칼리지에 입학하기 위해 프린스턴으로 다시 이사했다.
찰스가 대학에 입학할 준비를 할 무렵, 미국 장로교회는 대학의 목회자 훈련이 불충분하다고 인식하고 대학이 정통주의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됨에 따라, 목회자 훈련을 위한 별도의 기관으로 프린스턴 신학교를 설립하고 있었다. 또한 1812년에는 호지 가족의 옛 목사였던 애쉬벨 그린이 프린스턴 칼리지의 총장이 되었다.
2.2. 교육 및 회심
프린스턴에서 새로운 신학교의 초대 학장이었던 아치볼드 알렉산더는 호지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며 그리스어 공부를 돕고 순회 설교 여행에 함께 다녔다. 호지는 자신의 첫 아들 이름을 알렉산더의 이름을 따서 아치볼드 알렉산더 호지로 지었다. 호지는 훗날 미국 성공회 주교가 되는 존 존스와 찰스 맥클베인, 그리고 훗날 프린스턴 칼리지 총장이 되는 존 매클린과도 친한 친구가 되었다. 1815년, 그린과 알렉산더의 권유로 학생들 사이에 종교적 열정이 고조되던 시기에 호지는 지역 장로교회에 가입하고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학부 과정을 마친 직후인 1816년 그는 신학교에 입학했다.
신학교의 교육 과정은 매우 엄격하여, 학생들은 성경을 원어로 암송하고 17세기 개혁 스콜라주의 신학자 프란시스 튜레틴이 라틴어로 쓴 교의학을 신학 교과서로 사용해야 했다. 알렉산더 교수와 새뮤엘 밀러 교수 또한 학생들에게 깊은 경건을 심어주었다. 애쉬벨 그린 총장은 학생들의 경건 생활을 강조하기 위해 주일 오후 성경 공부를 폐지하고 소요리문답 전체 암송을 의무화했다. 1815년 1월 15일, 호지는 프린스턴 장로교 회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으며, 이는 그해 부흥의 첫 번째 회심자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2.3. 초기 사역 및 유럽 유학
1819년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한 후, 호지는 필라델피아에서 히브리어 학자인 조셉 베이츠 목사로부터 사적으로 추가 교육을 받았다. 1820년 필라델피아 노회에서 설교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으며, 이후 몇 달 동안 필라델피아의 이스트 폴스, 프랭크포드 아스날 그리고 우드버리의 빈 강단에서 선교사로서 정기적으로 설교했다. 1820년 그는 프린스턴 신학교의 조교수로 임명되어 성경 언어를 가르치는 1년 계약직을 수락했다. 그해 10월, 그는 앤도버 신학교의 모세 스튜어트와 예일 신학대학원의 나다니엘 테일러를 비롯한 여러 교수 및 목회자들과 만나기 위해 뉴잉글랜드 전역을 여행했다. 1821년 그는 뉴브런즈윅 노회에 의해 목사로 안수받았고, 같은 해 첫 번째 소책자를 출판했다. 이를 통해 알렉산더는 총회가 그를 동양 및 성경 문학 정교수로 임명하도록 설득할 수 있었다. 재정적으로 안정된 호지는 같은 해 벤자민 프랭클린의 증손녀인 사라 바체(Sarah Bache영어)와 결혼했다. 1824년, 호지는 로버트 베어드와 아치볼드 알렉산더와 함께 Chi Phi Society영어를 설립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825년에는 유럽의 최신 성경 학술 문헌을 번역하기 위한 분기별 간행물인 성경 문헌 보고서(Biblical Repertory영어)를 창간했다.
유럽 학문에 대한 호지의 연구는 그의 교육이 충분했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게 했다. 신학교는 그가 교육을 "완성"하기 위해 유럽을 여행하는 동안 2년 동안 급여를 계속 지급하기로 동의했다. 그는 자신의 비용으로 존 윌리엄슨 네빈을 대리 교수로 채용했다. 1826년부터 1828년까지 그는 파리에서 프랑스어, 아랍어, 시리아어를 공부했고, 할레에서는 게오르그 뮐러와 함께 독일어를 공부하며 아우구스트 톨룩을 만났다. 베를린에서는 실베스트르 드 사시, 에른스트 빌헬름 헹스텐베르크, 아우구스트 니안더의 강의를 들었다. 그곳에서 그는 또한 당대의 주요 현대 신학자인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와도 개인적으로 알게 되었다. 그는 독일에서 목격한 깊이 있는 학문에 감탄했지만, 관념론적 철학에 대한 과도한 관심이 상식을 흐리고 사변적이고 주관적인 신학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했다. 유럽에서 시간을 보낸 다른 미국 신학자들과 달리, 호지의 경험은 그가 어린 시절부터 배운 신앙 원칙에 대한 그의 헌신에 어떤 변화도 가져오지 않았다.
3. 프린스턴 신학교에서의 활동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찰스 호지는 교수이자 학장으로서 핵심적인 역할과 학문적 기여를 수행했다.
3.1. 교수 및 학장 재직
1830년대부터 호지는 다리 통증으로 인해 거동이 불편해졌고, 1833년부터 1836년까지는 서재에서 수업을 진행해야 했다. 그는 성경 문헌 보고서에 계속해서 논문을 기고했는데, 이 간행물은 후에 프린스턴 리뷰로 이름이 바뀌었다. 1830년대에는 로마서에 대한 주요 성경 주석과 미국 장로교회의 역사를 저술했다. 그는 1837년 교단 분열을 초래한 올드 스쿨-뉴 스쿨 논쟁에서 올드 스쿨 파벌을 지지했다.
1840년 그는 교의학 교수가 되었으며, 죽을 때까지 신약 성경 주해 부서의 업무를 계속 수행했다. 1846년 그는 미국 장로교회 (올드 스쿨) 총회의 총회장을 역임했다. 1849년 호지의 아내가 사망했고, 이어서 사무엘 밀러와 아치볼드 알렉산더도 사망하면서 그는 신학교의 최고참 교수가 되었다. 그는 프린스턴 신학의 선두 주창자로 인정받았다. 1878년 그가 사망했을 때, 친구와 반대자 모두 그를 당대 최고의 논쟁가 중 한 명으로 인정했다. 그의 자녀 중 생존한 세 명은 목사가 되었으며, 이 중 두 명(C. W. 호지 시니어와 A. A. 호지)이 프린스턴 신학교의 각각 주해 신학과 교의학 교수로서 그의 뒤를 이었다. 그의 손자인 C. W. 호지 주니어 또한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수년 동안 가르쳤다.
호지의 교육 아래 약 3천 명의 목회자들이 배출되었는데, 그는 오랜 생애 동안 교사, 주석가, 설교가, 논쟁가, 성직자, 그리고 조직신학자로서 명성을 떨치는 드문 특권을 누렸다. 교사로서 그는 거의 견줄 사람이 없었다. 비록 강단에서 대중적인 설교의 재능을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안식일 오후에 열리는 "회의"에서는 그의 특유의 명료함과 논리적 정확성, 그리고 놀라운 자발성과 부드러움, 그리고 성령의 기름 부음을 드러내며 높은 수준의 설교 역량을 보여주었다.

3.2. '프린스턴 리뷰' 발간 및 학술 활동
호지의 학문적 역량은 프린스턴 리뷰에 기고한 그의 글들에서 가장 잘 드러났으며, 그 중 많은 글이 논쟁적 글쓰기의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 글들은 일반적인 기독교와 관련된 변증학적 질문부터 오직 장로교인들만이 관심을 가질 것으로 여겨지는 교회 행정 문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었다. 그러나 호지의 생애 기간 동안 미국 신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된 질문들은 대부분 인간론과 구원론 분야에 속했으며, 따라서 그의 논쟁적 역량은 주로 이 분야에 집중되었다.
호지는 당시 신비주의, 이성주의, 의식주의 등에 함몰되어 있던 장로교회를 개혁하기 위해 프린스턴 리뷰라는 정기간행물을 발간했으며, 이 잡지를 통해 140편 이상의 논문을 출간했다. 그의 논문 중 상당수는 출판 당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프린스턴 리뷰의 에세이 및 평론 선집』(1857)과 『교회 정치에 대한 논의』(W. 듀란트 편집, 1878)라는 제목으로 책으로 묶여 신학 문헌에서 영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가 저술한 모든 책은 그가 사망한 지 한 세기가 지난 후에도 계속 인쇄되고 있다.
4. 신학 사상
찰스 호지는 프린스턴 신학을 정립하고 칼뱅주의 교리, 성경관, 그리고 스코틀랜드 상식 철학의 영향 아래 독특한 신학 체계를 구축했다.
4.1. 프린스턴 신학의 정립
찰스 호지는 19세기 미국에서 정통 칼뱅주의 신학 전통인 '프린스턴 신학'의 선두 주창자였다. 그는 프린스턴 신학이 새로운 사상을 창출한 적이 없다고 자주 말하곤 했다. 이는 프린스턴 신학이 후대의 변형되고 지역적인 칼뱅주의에 반대하여 역사적 칼뱅주의를 옹호했음을 의미한다. 호지는 교회의 위대한 건설적인 사상가라기보다는 신앙의 위대한 수호자 중 한 명으로 분류된다. 그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혁명적인 인물이 되려는 야망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오랜 활동 기간 동안 교회의 신앙을 수호하고 시련의 시기에 교회의 신뢰받는 지도자가 되었으며, 반세기 이상 동안 목회자들의 가장 뛰어난 교사였다는 점에서 더 높은 명예를 얻었다. 기독교 신앙과 역사적 개신교에 대한 호지의 이해는 그의 저서 『조직신학』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사상은 이후 세대가 프린스턴 신학교를 선도적인 보수 신학 연구의 중심지로 만들도록 영향을 주었다.
4.2. 성경관 및 주요 교리
호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의 권위와 무오류성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성경의 무오류성에 대해 성경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교회의 교리 또한 성령의 영감을 받아 선택된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하나님의 무오한 소통의 일부라고 설명했다. 즉, "누군가가 하나님의 몸의 일부로서 말할 때, 그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물을 도구로 사용하실 때, 그 본성에 따라 사용하신다고 덧붙였다. 인간은 지능적이고 자발적인 주체이며, 하나님은 그들을 의식이나 이성이 없는 존재로 만들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교리를 따랐지만, 그의 신학교 교과서로는 프란시스 튜레틴의 『변증신학 강요』를 사용했다. 1870년 이후에는 그가 저술한 『조직신학』을 교과서로 사용했다. 본성적으로 보수적이었던 그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명시된 개혁주의 신학을 옹호했다. 그의 신학은 코튼 매더와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유기된 자의 지옥 선포와 같은 칼뱅주의 교리에 존 위더스푼의 스코틀랜드 상식 학파의 도덕철학을 더하여, 타락한 인간에게도 도덕적 감각이 있다고 주장했다.
4.3. 하나님의 본성론
찰스 호지는 하나님의 단순성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자주 표명했으며, 보다 온건한 형태의 단순성을 가르쳤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 둔스 스코투스 등이 가르친 단순성에 대한 견해가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지식을 파괴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무고통성이라는 전통적인 개념을 부정하며, 하나님의 사랑이 감정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전통적 관념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는 니케아 공의회에서 가르친 성자의 영원한 출생 교리는 지지했다.
4.4. 스코틀랜드 상식 철학의 영향
찰스 호지의 신학은 존 위더스푼의 영향을 받아 스코틀랜드 상식 학파의 철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는 코튼 매더와 조나단 에드워즈의 칼뱅주의 교리, 특히 유기된 자의 지옥 선포와 같은 내용을 계승하면서도, 스코틀랜드 상식 철학의 영향을 받아 타락한 인간에게도 도덕적 감각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관점은 그의 도덕 철학과 신학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5. 주요 논쟁 및 사회적 견해
찰스 호지는 당시 사회의 주요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그의 견해는 노예제, 남북 전쟁, 그리고 다윈주의 비판 등 다양한 사회적 측면에 걸쳐 있었다.
5.1. 노예제에 대한 견해
호지는 성경의 특정 구절에 근거하여 노예 제도를 그 자체로는 지지했다. 그 자신도 노예를 소유했으나, 노예에 대한 학대를 강력히 비난했다. 그는 추상적인 노예제와 노예에게 교육권, 결혼권, 부모권을 박탈하고 "백인의 모욕과 억압에 종속시키는" 불공정한 남부 노예법 사이를 구분했다. 그는 이러한 법률의 인도주의적 개혁이 미국에서 노예제 폐지의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1818년 장로교 총회 또한 유사한 입장을 취했는데, 미국 내 노예제는 반드시 죄악은 아니지만 유감스러운 제도이며 궁극적으로는 바뀌어야 한다고 인정했다. 교회와 마찬가지로 호지 자신도 북부의 폐지론자들과 남부의 노예제 옹호자들 양쪽에 공감했으며, 그는 자신의 상당한 영향력을 동원하여 양 파벌 간의 질서를 회복하고 공통점을 찾으려 노력했으며, 궁극적으로는 노예제를 완전히 폐지하고자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호지의 노예제 지지는 성경의 무오류성과 문자적 해석에 대한 그의 믿음의 불가피한 결과는 아니었다. 호지의 다른 19세기 기독교 동시대인들 중 성경의 무오류성과 무오성을 믿었던 이들도 노예 제도를 "거대한 도덕적 악"으로 비난했다. 보수적이고 복음주의적인 개혁주의 학자이자 신학교 교수였던 존 윌리엄슨 네빈이 대표적이다. 호지와 네빈은 또한 성찬에 대한 극과 극의 견해로 유명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5.2. 교단 분열 및 남북 전쟁
호지는 1837년 미국 장로교회의 분열 당시 올드 스쿨 파벌의 지도자였다. 이 분열은 교리, 종교적 관행, 그리고 노예제에 대한 갈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1861년 이전까지 올드 스쿨은 노예제를 비난하는 것을 삼갔지만, 이 문제는 교단 내 북부와 남부 구성원들 사이의 논쟁거리였다.
호지는 노예제를 용인할 수 있었지만, 1861년 미국을 분열시키려는 형태의 반역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강력한 국민주의자였으며, 장로교인들 사이에서 연합을 지지하는 싸움을 이끌었다. 1861년 1월 프린스턴 리뷰에서 호지는 탈퇴에 반대하는 자신의 주장을 펼쳤으며, 궁극적으로 이를 위헌으로 규정했다. 이에 대해 제임스 헨리 손웰은 1861년 1월 남부 장로교 리뷰에서 1860년 선거로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남부가 이에 동의하지 않았으므로 탈퇴는 합법적이라고 반박했다.
정치적으로는 강력한 연합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호지는 교회가 정치적 문제에 개입하는 것은 교회의 역할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1861년 올드 스쿨 장로교 총회의 "스프링 결의안" 지지에 반대 투표했다. 이 결의안 때문에 교단은 남북으로 분열되었다. 남북 전쟁이 시작된 지 한 달 후인 1861년 5월 필라델피아에서 총회가 소집되었을 때, 이 결의안은 교회의 관할권 범위와 헌법 해석에 대한 이견을 바탕으로 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연방 정부에 대한 지지를 서약하도록 규정했다. 1861년 12월, 남부 올드 스쿨 장로교회들은 교단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호지는 미국 장로교회의 역사를 저술했으며, 특히 1729년 채택안에 대한 내용을 상세히 기술했다.
5.3. 다윈주의 비판
1874년, 호지는 『다윈주의란 무엇인가?』(What is Darwinism?영어)를 출판하며 다윈주의가 본질적으로 무신론이라고 주장했다. 호지에게 다윈주의는 설계론적 개념에 위배되므로 명백히 무신론적이었다. 그는 프린스턴 리뷰와 『다윈주의란 무엇인가?』(1874)에서 다윈주의를 공격했다. 그의 견해는 1878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프린스턴 신학교의 입장을 결정했다. 그는 모든 진화론적 사상이 자신의 종교와 충돌한다고 보지는 않았지만, 대학에서 진화론이 가르쳐지는 것에 대해서는 우려했다.
한편, 완전히 별개의 기관인 프린스턴 대학교의 총장 존 매클린 주니어 또한 다윈의 진화론을 거부했다. 그러나 1868년, 매클린이 은퇴하자 스코틀랜드 철학자 제임스 맥코시가 총장이 되었다. 맥코시는 다윈주의의 상당 부분이 옳다고 증명될 수 있고 또 증명될 것이라고 믿었으며, 따라서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사건에 대비하도록 노력했다. 과학과 종교의 갈등 대신 화해를 추구했던 맥코시는 자연의 설계 원칙을 주장하며, 다윈의 발견을 우주의 예정, 기술, 목적에 대한 더 많은 증거로 해석했다. 그리하여 그는 다윈주의가 무신론적이거나 성경과 화해할 수 없는 적대 관계에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미국 장로교인들은 모두 프린스턴에 기반을 둔 두 가지 진화론적 사상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프린스턴 신학교는 1929년 호지 지지자들이 축출될 때까지 호지의 입장을 고수했으며, 프린스턴 대학교는 진화 생물학의 새로운 과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중심지가 되었다.
호지와 맥코시 간의 논쟁은 다윈의 진화론을 둘러싼 과학과 종교 사이의 새로운 갈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대중적으로 인식되는 것보다 과학과 종교 문제에 관해 더 큰 유사점을 보였다. 둘 다 자연사에서 과학적 탐구의 증가하는 역할을 지지했지만, 철학과 종교에 대한 그 침해는 저항했다.
6. 저술 활동
찰스 호지는 방대한 학문적 저술 활동을 통해 신학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6.1. 주요 저서
호지는 그의 신학 경력 초기에 저술을 시작하여 사망할 때까지 출판 활동을 계속했다. 1835년 그는 『로마서 주석』(A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Romans영어)을 출판했는데, 이는 그의 가장 위대한 주해적 저작으로 평가된다. 이 주석은 미국 남북 전쟁 중인 1864년, 제임스 헨리 손웰과의 주 정부 탈퇴 논쟁 이후에 개정되었다.
그 외의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 『미국 장로교회의 헌법사』(Constitutional History of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영어) (1840)
- 『생명의 길』(The Way of Life영어) (1841): 영국에서 재출판되고 다른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미국에서 35,000부가 유통되었다.
- 『에베소서 주석』(Commentary on Ephesians영어) (1856)
- 『고린도전서 주석』(on First Corinthians영어) (1857)
- 『고린도후서 주석』(on Second Corinthians영어) (1859)
그의 대표작은 3권으로 구성되고 총 2,260쪽에 달하는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영어) (1871-1873)이다. 그의 마지막 저서인 『다윈주의란 무엇인가?』(What is Darwinism?영어)는 1874년에 출간되었다. 이 외에도 그는 프린스턴 리뷰에 130편 이상의 논문을 기고했는데, 이 중 다수는 출판 당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프린스턴 리뷰의 에세이 및 평론 선집』(Selection of Essays and Reviews from the Princeton Review영어) (1857)과 『교회 정치에 대한 논의』(Discussions in Church Polity영어) (W. 듀란트 편집, 1878)라는 제목으로 책으로 묶여 신학 문헌에서 영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6.2. 주요 논문
찰스 호지는 프린스턴 리뷰에 여러 학술 논문을 기고하며 광범위한 학문적 글쓰기 활동을 펼쳤다. 그의 논문들은 종종 논쟁적 글쓰기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이 논문들은 일반적인 기독교와 관련된 변증학적 문제부터 장로교의 교회 행정 문제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주제를 다루었다. 그의 주요 논쟁적 역량은 주로 인간론과 구원론 분야에 집중되었다.
대표적인 논문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파함』(Preaching the Gospel to the Poor영어) (1871년 1월, 프린스턴 리뷰 43권 1호, 83쪽-95쪽)
-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Christianity without Christ영어) (1876년 4월, 프린스턴 리뷰 5권 18호, 352쪽-362쪽)
- 『장로교는 무엇인가?』(What is Presbyterianism?영어) (1855)
7. 영향 및 평가
찰스 호지는 근본주의와 복음주의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생애와 사상은 긍정적 평가와 함께 비판적 논란을 동시에 받았다.
7.1. 신학적 유산
찰스 호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이었으며, 이는 그가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판단하는 기준이기도 했다. 따라서 비록 그가 장로교인이자 칼뱅주의자였지만, 그의 공감은 교단의 경계를 훨씬 넘어섰다. 그는 일부 동료들이 주장하는 편협한 교회 정치관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세례 유효성을 부정한 비역사적인 입장을 반박했다. 그는 본성적으로 보수적이었으며, 그의 삶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및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 명시된 개혁주의 신학을 옹호하는 데 바쳐졌다. 그는 프린스턴이 새로운 사상을 창출한 적이 없다고 자주 말하곤 했는데, 이는 프린스턴이 후대의 변형되고 지방적인 칼뱅주의에 반대하여 역사적 칼뱅주의를 옹호했음을 의미했다. 그의 많은 사상들은 20세기 근본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에게 받아들여졌다. 특히 그의 인간에 대한 이해는 그의 조직신학 탐구의 출발점이 되었다.
7.2. 긍정적 평가
호지의 문학적 역량은 프린스턴 리뷰에 기고한 그의 글들에서 가장 잘 발휘되었으며, 그 중 다수는 논쟁적 글쓰기의 걸작으로 인정받는다. 그는 교사, 주석가, 설교가, 논쟁가, 성직자, 그리고 조직신학자로서 명성을 얻는 드문 특권을 누렸다. 특히 교사로서 그는 거의 견줄 사람이 없었다. 비록 강단에서 대중적인 설교의 재능을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안식일 오후에 열리는 "회의"에서는 그의 특유의 명료함과 논리적 정확성, 그리고 놀라운 자발성과 부드러움, 그리고 성령의 기름 부음을 드러내며 높은 수준의 설교 역량을 보여주었다. 그는 교회의 신앙을 수호하는 챔피언이었고, 시련의 시기에 교회의 신뢰받는 지도자였으며, 반세기 이상 동안 목회자들의 가장 뛰어난 교사였다. 기독교 신앙과 역사적 개신교에 대한 호지의 이해는 그의 저서 『조직신학』에 잘 나타나 있다.
7.3. 비판 및 논란
찰스 호지에 대한 비판은 주로 노예제에 대한 그의 복합적인 입장과 관련이 있다. 그는 노예에 대한 학대를 비난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근거하여 노예 제도를 추상적인 의미에서는 지지했다. 또한 그 자신도 노예를 소유한 적이 있었다. 비록 그는 불공정한 노예법의 개혁이 노예제 폐지로 이어질 것이라고 믿었지만, 그의 노예제 지지는 당시 성경의 무오류성을 믿으면서도 노예 제도를 강력히 비난했던 다른 기독교 동시대인들과 대조되었다.
남북 전쟁 당시 올드 스쿨 총회에서 교회가 정치적 문제에 개입하는 것에 반대하며 "스프링 결의안" 지지에 반대 투표한 그의 입장 또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비록 그가 강력한 연합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입장은 교단의 남북 분열을 가속화하는 요인이 되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1874년 『다윈주의란 무엇인가?』를 출판하며 다윈주의를 본질적으로 무신론으로 간주하고 비판했던 그의 시각은 당시 과학과 종교의 갈등 속에서 프린스턴 신학교의 보수적인 입장을 형성했지만, 이는 이후 진화론이 학계에서 주류가 되면서 논쟁의 소지가 되었다.
8. 사망
찰스 호지는 1878년 6월 19일 사망했다.
9. 저서 목록
찰스 호지는 다양한 신학 저서와 논문을 남겼다.
- 『로마서 주석』(A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Romans영어), 1837년 (1864년 개정)
- 『미국 장로교회의 헌법사』(The constitutional history of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영어), 1839년-1840년
- 『생명의 길』(The way of life영어), 1841년
- 『에베소서 주석』(A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Ephesians영어), 1856년
- 『고린도전서 주해』(An exposition of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영어), 1857년
- 『고린도후서 주해』(An exposition of the Second epistle to the Corinthians영어), 1860년
-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영어), 3권, 1872년-1873년
- 『영적 왕국: 요한계시록 처음 11장 주해』(The spiritual kingdom: an exposition of the first eleven chapters of the book of the Revelation영어), 제임스 베버린 램지 편집, 1873년
- 『신학 강의록』(Lectures (on Theology)영어), 미상
- 『다윈주의란 무엇인가?』(What is Darwinism?영어), 187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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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