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찰스 램의 생애는 런던에서의 어린 시절과 교육, 그리고 동인도 회사에서의 오랜 근무 기간으로 나뉜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찰스 램은 1775년 2월 10일 런던에서 존 램(1725년경~1799년)과 엘리자베스 필드(1796년 사망)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에게는 형 존과 누나 메리가 있었고, 다른 네 명의 형제자매는 유아기에 사망했다. 찰스의 아버지 존 램은 변호사 사무실의 서기였으며, 런던 법률가 지구인 이너 템플에 살던 변호사 새뮤얼 솔트의 비서로 대부분의 직장 생활을 보냈다. 찰스 램은 바로 그곳, 크라운 오피스 로우(Crown Office Row)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램은 자신의 에세이 "엘리아의 옛 벤치들(Elia on the Old Benchers)"에서 아버지를 '러블(Lovel)'이라는 이름으로 묘사했다. 찰스의 형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어린 시절의 동반자가 되기 어려웠지만, 11살 위인 누나 메리는 가장 가까운 놀이 친구였다. 찰스는 또한 친고모 헤티의 보살핌을 받았는데, 그녀는 찰스를 특별히 아꼈던 것으로 보인다. 찰스와 메리의 여러 글은 고모 헤티와 시누이 사이의 갈등이 램 가족에게 어느 정도의 긴장을 유발했음을 시사하지만, 찰스는 고모를 다정하게 언급하며 그녀의 존재가 그에게 큰 위안을 주었다고 회상했다.
램의 가장 소중한 어린 시절 추억 중 일부는 외할머니 필드 부인과 보낸 시간이었다. 필드 부인은 하트퍼드셔주 위드포드 근처의 블레이크스웨어(Blakesware)라는 대저택을 소유한 플루머(Plumer) 가문의 하인으로 오랫동안 일했다. 플루머 부인 사망 후, 램의 외할머니는 대저택을 전적으로 관리하게 되었고, 윌리엄 플루머가 자주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찰스는 방문 기간 동안 자유롭게 저택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이 방문에 대한 묘사는 엘리아 수필 중 《블레이크스무어 인 H-셔(Blakesmoor in H-shire)》에서 엿볼 수 있다.
: Why, every plank and panel of that house for me had magic in it. The tapestried bed-rooms - tapestry so much better than painting - not adorning merely, but peopling the wainscots - at which childhood ever and anon would steal a look, shifting its coverlid (replaced as quickly) to exercise its tender courage in a momentary eye-encounter with those stern bright visages, staring reciprocally - all Ovid on the walls, in colours vivider than his descriptions.
일곱 살 이전의 찰스에 대해서는 메리가 아주 어린 나이에 그에게 글을 가르쳤고, 그가 탐독했다는 것 외에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그는 어린 시절 천연두를 앓아 오랜 회복 기간을 가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회복 기간 이후 램은 템플에 살던 변호사의 전 부인으로 알려진 레이놀즈 부인에게서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레이놀즈 부인은 동정심 많은 교사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램은 평생 그녀와 관계를 유지했으며 1820년대 메리와 찰스가 주최한 만찬에 그녀가 참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 V. 루카스는 1781년경 찰스가 레이놀즈 부인에게서 벗어나 윌리엄 버드 아카데미에서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윌리엄 버드와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1782년 10월까지 램은 에드워드 6세가 1553년에 설립한 자선 기숙학교인 크라이스트 병원에 등록되었다. 크라이스트 병원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램의 여러 에세이뿐만 아니라 제임스 헨리 리 헌트의 《자서전》과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의 《문학 전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찰스는 콜리지와 평생 지속될 우정을 쌓았다. 학교의 잔혹함에도 불구하고 램은 그곳에서 잘 지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그의 집이 멀지 않아 다른 많은 소년들과 달리 안전한 집으로 자주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몇 년 후, 그의 에세이 "35년 전의 크라이스트 병원(Christ's Hospital Five and Thirty Years Ago)"에서 램은 이 사건들을 묘사하며 자신을 3인칭 "L"로 지칭했다.
: "I remember L. at school; and can well recollect that he had some peculiar advantages, which I and other of his schoolfellows had not. His friends lived in town, and were near at hand; and he had the privilege of going to see them, almost as often as he wished, through some invidious distinction, which was denied to us."

크라이스트 병원은 전형적인 영국 기숙학교였으며, 많은 학생들이 나중에 그곳에서 겪었던 끔찍한 폭력에 대해 글을 썼다. 1778년부터 1799년까지 학교의 상급 교장(즉, 교장 또는 교장)은 예측 불가능하고 변덕스러운 성질로 유명한 제임스 보이어 목사였다. 한 유명한 이야기에서 보이어는 호메로스의 책을 방 건너편에서 던져 리 헌트의 이빨 하나를 부러뜨렸다고 한다. 램은 이러한 잔혹함의 대부분을 피한 것으로 보이는데, 부분적으로는 그의 온화한 성격 때문이었고, 부분적으로는 그의 아버지의 고용주이자 램의 학교 후원자였던 새뮤얼 솔트가 학교의 이사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었다.
찰스 램은 말더듬이였으며, 이 "극복할 수 없는 장애" 때문에 크라이스트 병원에서 그리스 학자 지위를 얻지 못했고, 따라서 성직자 경력을 가질 자격이 박탈되었다. 콜리지와 다른 학구적인 소년들이 케임브리지로 진학할 수 있었던 반면, 램은 14세에 학교를 떠나 더 평범한 직업을 찾아야 했다. 잠시 런던 상인 조지프 페이스의 사무실에서 일했고, 그 후 1792년 2월 8일까지 23주 동안 남해회사의 조사관 사무실에서 작은 직책을 맡았다. 램이 떠난 후 남해회사가 피라미드 사기로 몰락한 것은 첫 엘리아 수필에서 회사의 번영과 대조될 것이다. 1792년 4월 5일, 그는 영국 동인도 회사의 회계 사무실에서 일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아버지의 고용주 사망으로 가족의 재산이 파탄났기 때문이었다. 찰스는 그곳에서 25년간 계속 일하다가 연금을 받고 은퇴했다.
1.2. 동인도 회사 근무
찰스 램은 1792년 4월 5일 영국 동인도 회사의 회계 사무실에서 근무를 시작하여 25년간(일본어 출처에 따르면 30년 이상) 재직했다. 그는 이 회사에서 은퇴할 때까지 근무하며 생계를 유지했으며, "엘리아" 수필 중 하나에서 언급하는 "연금(superannuation)"을 받으며 퇴직했다. 그의 직장 생활은 그의 문학 작품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그는 이전에 잠시 근무했던 남해회사의 몰락을 자신의 첫 엘리아 수필에서 언급하며 동인도 회사의 번영과 대조시키기도 했다. 동인도 회사에서의 안정적인 직업은 그가 누나 메리를 돌보고 문학 활동을 병행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2. 가족사와 개인적 삶
찰스 램의 삶은 가족, 특히 누나 메리 램과의 깊은 유대와 그녀의 정신 질환으로 인한 고통, 그리고 그의 독신 생활과 개인적인 관계로 크게 영향을 받았다.
2.1. 누나 메리 램과의 관계
찰스 램과 그의 누나 메리 모두 정신 질환을 앓았던 시기가 있었다. 찰스 자신도 편지에서 고백했듯이, 1795년에 6주 동안 정신 시설에 입원했었다.
: Coleridge, I know not what suffering scenes you have gone through at Bristol. My life has been somewhat diversified of late. The six weeks that finished last year and began this your very humble servant spent very agreeably in a mad house at Hoxton-I am got somewhat rational now, and don't bite any one. But mad I was-and many a vagary my imagination played with me, enough to make a volume if all told. My Sonnets I have extended to the number of nine since I saw you, and will some day communicate to you.
메리 램의 질병은 오빠보다 더 심각했으며, 이는 치명적인 사건으로 이어졌다. 1796년 9월 22일, 저녁 식사를 준비하던 메리는 견습생에게 화를 내며 어린 소녀를 거칠게 밀쳐 다른 방으로 보냈다. 어머니 엘리자베스가 이를 꾸짖기 시작하자 메리는 정신 붕괴를 일으켰다. 그녀는 들고 있던 부엌칼을 뽑아 앉아 있던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낮에는 바느질에, 밤에는 어머니를 돌보느라 극심한 신경쇠약 상태에 지쳐 있던" 메리는 급성 조증에 사로잡혀 식탁용 칼로 어머니의 심장을 찔렀다. 찰스는 살인 직후 집으로 달려와 메리의 손에서 칼을 빼앗았다.
그날 저녁 늦게 찰스는 의사 친구의 도움으로 이즐링턴의 피셔 하우스(Fisher House)라는 개인 정신 시설에 메리의 자리를 마련했다. 언론에서 보도가 나왔지만, 찰스는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에게 모친 살해와 관련하여 편지를 썼다.
: MY dearest friend - White or some of my friends or the public papers by this time may have informed you of the terrible calamities that have fallen on our family. I will only give you the outlines. My poor dear dearest sister in a fit of insanity has been the death of her own mother. I was at hand only time enough to snatch the knife out of her grasp. She is at present in a mad house, from whence I fear she must be moved to an hospital. God has preserved to me my senses, - I eat and drink and sleep, and have my judgment I believe very sound. My poor father was slightly wounded, and I am left to take care of him and my aunt. Mr Norris of the Bluecoat school has been very very kind to us, and we have no other friend, but thank God I am very calm and composed, and able to do the best that remains to do. Write, -as religious a letter as possible- but no mention of what is gone and done with. -With me "the former things are passed away," and I have something more to do that [than] to feel. God almighty have us all in his keeping.
찰스는 형 존 램이 메리를 공립 정신병원에 보내야 한다고 제안했음에도 불구하고, 메리에 대한 책임을 자신이 떠맡았다. 램은 비교적 적은 수입의 대부분을 사랑하는 누나를 이즐링턴의 개인 "정신병원"에 머물게 하는 데 사용했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램은 누나가 평생 감금될 수도 있었던 곳에서 풀려날 수 있도록 성공했다. 당시에는 법적으로 "정신 이상"이라는 지위가 없었지만, 배심원단은 "정신 이상"이라는 평결을 내렸고, 이는 찰스가 메리의 안전을 개인적으로 책임지는 조건으로 그녀가 고의적 살인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했다.
1799년 아버지 존 램의 사망은 찰스에게는 어느 정도 안도감을 주었다. 아버지는 뇌졸중을 앓은 후 몇 년 동안 정신적으로 무능력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죽음은 또한 메리가 다시 펜턴빌에 있는 찰스와 함께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1800년에 그들은 미트르 코트 빌딩에 공동 주택을 마련하여 1809년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1800년, 메리의 병이 재발했고 찰스는 그녀를 다시 정신병원으로 데려가야 했다. 당시 찰스는 콜리지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우울하고 외롭다고 인정하며 "메리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이후 메리는 돌아왔고, 찰스와 그의 누나는 활발하고 풍요로운 사회생활을 즐겼다. 그들의 런던 숙소는 당대의 가장 뛰어난 연극 및 문학계 인사들을 위한 주간 살롱이 되었다. 1869년, 그들의 살롱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런던에 더 램스 클럽이 결성되었다. 배우 헨리 제임스 몬태규는 1874년에 이 클럽의 뉴욕 지부를 설립했다.
찰스 램은 새뮤얼 콜리지와 함께 학교를 다녔고, 콜리지를 아마도 가장 가깝고 확실히 가장 오래된 친구로 여겼다. 콜리지는 임종 시 램과 그의 누나에게 애도 반지를 보냈다. 운 좋게도 램의 첫 출판물은 1796년 콜리지의 《다양한 주제에 관한 시(Poems on Various Subjects)》에 "인도 회사의 찰스 램 씨"의 소네트 네 편이 실리면서 이루어졌다. 1797년에는 두 번째 판에 추가적인 무운시를 기고했으며, 네더 스토위에서 콜리지와 함께 짧은 여름휴가를 보내던 중 윌리엄 워즈워스와 도로시 워즈워스를 만나 평생의 우정을 쌓았다. 런던에서 램은 퍼시 비시 셸리, 윌리엄 헤즐릿, 제임스 헨리 리 헌트, 윌리엄 혼을 포함한 정치 개혁을 지지하는 젊은 작가 그룹과 친분을 쌓았다.
2.2. 연애와 결혼
1792년 하트퍼드셔에서 외할머니 메리 필드를 돌보던 중, 찰스 램은 앤 시몬스(Ann Simmons)라는 젊은 여성과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서신 기록은 없지만, 램은 몇 년 동안 그녀에게 구애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랑의 기록은 램의 여러 글에 남아 있다. 《로자먼드 그레이(Rosamund Gray)》는 로자먼드 그레이를 사랑하지만 그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관계가 무산되는 앨런 클레어라는 젊은 남자의 이야기이다. 시몬스 양은 또한 여러 엘리아 수필에 "앨리스 M(Alice M)"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꿈의 아이들(Dream Children)》, 《섣달 그믐날(New Year's Eve)》 등의 에세이에서 램은 결국 실패로 끝난 사랑을 쫓아 보낸 여러 해에 대해 이야기한다. 시몬스 양은 결국 은세공인과 결혼했고, 램은 이 연애의 실패를 자신의 "큰 실망(great disappointment)"이라고 불렀다.

램은 동인도 회사에서 서기로 계속 일하면서 다양한 장르의 작가로도 활동했으며, 그의 비극인 《존 우드빌(John Woodvil)》은 1802년에 출판되었다. 그의 소극인 《미스터 H(Mr H)》는 1807년 드루리 레인 극장에서 공연되었으나, 심한 야유를 받았다. 같은 해, 《셰익스피어 이야기》(찰스는 비극을, 누나 메리는 희극을 담당)가 출판되었고, 윌리엄 고드윈의 "어린이 도서관"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819년 7월 20일, 44세의 램은 가족의 의무 때문에 결혼하지 못했지만, 코벤트 가든의 여배우 패니 켈리와 사랑에 빠졌다. 그녀에게 소네트를 썼을 뿐만 아니라 결혼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거절했고, 그는 독신으로 생을 마감했다.
3. 문학 활동 및 주요 작품
찰스 램은 수필, 시, 희곡, 문학 비평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독자적인 문학 세계를 구축했다.
3.1. 수필
램의 첫 엘리아 수필은 1820년에 쓰였지만, 그가 결국 유명해진 수필 형식의 점진적인 완성은 일찍이 1811년 리 헌트의 《리플렉터(Reflector)》에 실린 일련의 공개 편지에서 시작되었다. 이 초기 수필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런던 사람(The Londoner)"으로, 램이 자연과 시골에 대한 당시의 매혹을 유명하게 비웃는 내용이다. 1811년의 또 다른 잘 알려진 《리플렉터》 수필에서 그는 윌리엄 호가스의 그림을 "단어의 풍부하고, 열매 맺고, 암시적인 의미"로 가득 찬 책으로 여겼다. 그는 다음 25년 동안 다양한 수필적 목소리와 페르소나를 실험하며 자신의 글쓰기 기술을 계속 다듬었다.
그의 수필집은 "엘리아(Elia)"라는 필명으로 《런던 매거진》에 기고한 글들을 모아 1823년에 《엘리아 수필집》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엘리아 수필집》은 1823년 1월 《쿼털리 리뷰(Quarterly Review)》에서 로버트 사우디에 의해 비종교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찰스는 "불신의 진보(The Progress of Infidelity)"라는 제목의 비평을 읽고 분개하여 친구 버나드 바턴에게 편지를 썼는데, 램은 그 비평을 싫어하며 자신의 말이 "종교에 해를 끼칠 의도가 없었다"고 강조했다. 처음에는 사우디를 존경했기 때문에 반박하고 싶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엘리아가 사우디에게(Elia to Southey)"라는 편지를 써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 편지에서 그는 불평하며 자신이 교회의 비국교도라고 해서 비종교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표현했다. 이 편지는 1823년 10월 《런던 매거진》에 실렸다.
: Rightly taken, Sir, that Paper was not against Graces, but Want of Grace; not against the ceremony, but the carelessness and slovenliness so often observed in the performance of it. . . You have never ridiculed, I believe, what you thought to be religion, but you are always girding at what some pious, but perhaps mistaken folks, think to be so.
《마지막 엘리아 수필집(The Last Essays of Elia)》이라는 또 다른 수필집은 램이 사망하기 직전인 1833년에 출판되었다. 엘리아 수필은 유머와 파토스로 가득 차 있으며, 옛 친구들, 어린 시절, 노년기를 이야기한다. 이 글들은 램의 농담을 좋아하고 환상적인 성격을 반영한다. 그의 가벼운 글쓰기 스타일 뒤에는 콜리지와 워즈워스의 작품처럼 낭만주의 정신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도시적 주제에 대한 엘리아의 관심은 찰스 디킨스의 작품과 유사점을 공유한다.
3.2. 시와 희곡
램의 첫 출판물은 1796년 조지프 코틀이 출판한 콜리지의 《다양한 주제에 관한 시(Poems on Various Subjects)》에 네 편의 소네트가 실린 것이었다。 이 소네트들은 로버트 번스의 시와 18세기 후반의 거의 잊혀진 시인 윌리엄 보울스의 소네트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램의 시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으며 오늘날에도 거의 읽히지 않는다. 그 자신도 깨달았듯이, 그는 시인보다는 훨씬 더 재능 있는 산문 작가였다. 실제로 당대 가장 유명한 시인 중 한 명인 윌리엄 워즈워스는 1815년 일찍이 존 스콧에게 램이 "산문을 절묘하게 쓴다"고 썼는데, 이는 램이 지금 가장 유명한 《엘리아 수필집》을 시작하기 5년 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램이 콜리지의 《다양한 주제에 관한 시》 두 번째 판에 기고한 시들은 시인으로서 상당한 성장을 보여주었다. 이 시들에는 《더글러스의 무덤(The Tomb of Douglas)》과 《회개의 환상(A Vision of Repentance)》이 포함되었다. 콜리지와의 일시적인 불화 때문에 램의 시는 《시집》의 세 번째 판에서 제외될 예정이었지만, 결국 세 번째 판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콜리지의 다음 출판물은 워즈워스와 공동 출판한 기념비적으로 영향력 있는 《서정 담시집》이었다. 반면 램은 로이즈 은행 설립자의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아들인 찰스 로이드와 함께 《무운시(Blank Verse)》라는 책을 출판했다. 램의 가장 유명한 시는 이때 쓰여진 "오래된 친숙한 얼굴들(The Old Familiar Faces)"이었다. 램의 대부분의 시처럼, 이 시는 노골적으로 감상적이며, 아마도 이러한 이유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기억되고 널리 읽히며 영국 및 낭만주의 시대 시 선집에 자주 포함된다. 램 연구자들에게 특히 흥미로운 것은 "오래된 친숙한 얼굴들"의 원본 첫 구절인데, 이는 메리 램이 죽인 램의 어머니에 관한 것이다. 이 구절은 램이 1818년에 출판된 그의 《전집》에서 삭제하기로 결정한 구절이었다.
: I had a mother, but she died, and left me,
: Died prematurely in a day of horrors -
: All, all are gone, the old familiar faces.
18세기 말, 램은 산문 작업을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초기 연애 대상이었던 앤 시몬스를 바탕으로 한 젊은 소녀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 《로자먼드 그레이(Rosamund Gray)》를 썼다. 램의 서사 구성 능력이 부족하여 이야기 자체는 특별히 성공적이지 못했지만, 동시대 사람들에게는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퍼시 비시 셸리는 "《로자먼드 그레이》는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우리 본성의 가장 달콤한 부분에 대한 얼마나 많은 지식이 담겨 있는가!"라고 평했다.
19세기 초, 램은 누나 메리와 함께 생산적인 문학적 협력을 시작했다. 그들은 함께 윌리엄 고드윈의 아동 도서관을 위해 적어도 세 권의 책을 썼다. 이 중 가장 성공적인 것은 《셰익스피어 이야기(Tales From Shakespeare)》로, 고드윈을 위해 두 판이 발행되었으며 그 이후로 수많은 판본으로 수십 번 출판되었다. 이 책은 셰익스피어의 가장 사랑받는 작품들 중 일부를 예술적인 산문 요약으로 담고 있다. 램에 따르면, 그는 주로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다루었고, 메리는 주로 희극에 집중했다.
3.3. 문학 비평
램의 에세이 "무대 공연에 대한 적합성을 고려한 셰익스피어 비극론(On the Tragedies of Shakespeare Considered with Reference to their Fitness for Stage Representation)"은 원래 1811년 《리플렉터》에 "개릭과 연기, 그리고 무대 공연에 대한 적합성을 고려한 셰익스피어 희곡(On Garrick, and Acting; and the Plays of Shakspeare, considered with reference to their fitness for Stage Representation)"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 에세이는 웨스트민스터 사원 시인 코너 서쪽 벽에 있는 데이비드 개릭 기념비를 본 것에 대한 반응으로 작성되었으며, 종종 연극에 대한 궁극적인 낭만주의적 거부로 받아들여졌다. 이 에세이에서 램은 셰익스피어의 희곡이 상업적 공연과 유명인 문화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공연되기보다는 읽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에세이는 셰익스피어 드라마의 상상적 재현에 대한 더 복잡한 성찰을 발전시키면서도 동시대의 무대 관행을 비판한다.
: Shakespeare's dramas are for Lamb the object of a complex cognitive process that does not require sensible data, but only imaginative elements that are suggestively elicited by words. In the altered state of consciousness that the dreamlike experience of reading stands for, Lamb can see Shakespeare's own conceptions mentally materialized.
램은 누나와 함께 쓴 《셰익스피어 이야기》로 셰익스피어의 수용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셰익스피어 동시대 작가들에 대한 지식 회복에도 기여했다. 당시 고대 작가들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는 것을 가속화하고 자신을 골동품 수집가로서의 명성을 쌓으며, 1808년 램은 《셰익스피어 시대에 살았던 영국 극작가들의 표본(Specimens of the English Dramatic Poets Who Lived About the Time of Shakespeare)》이라는 옛 극작가들의 발췌집을 편찬했다. 이 책에는 옛 작가들에 대한 비판적인 "인물(characters)"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는 램의 글에서 주로 셰익스피어와 그의 동시대 작가들에 대한 중요한 문학 비평의 흐름을 더했다. 로버트 버튼과 토머스 브라운 경과 같은 17세기 작가들에 대한 몰입은 램의 글쓰기 방식도 바꾸어 그의 문체에 독특한 풍미를 더했다.
1811년의 또 다른 잘 알려진 《리플렉터》 수필에서 그는 윌리엄 호가스의 그림을 "단어의 풍부하고, 열매 맺고, 암시적인 의미"로 가득 찬 책으로 여겼다. 그는 "다른 그림들은 우리가 보지만, 그의 그림들은 우리가 읽는다"고 평했다.
4. 사상과 문학관
찰스 램의 사상과 문학관은 그의 종교적 신념, 문학에 대한 독자적인 견해, 그리고 헤즐릿이 묘사한 그의 취향과 지적 특성을 통해 엿볼 수 있다.
4.1. 종교적 견해
기독교는 램의 개인적인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교인은 아니었지만 "종교에서 위안을 찾았다"고 한다. 이는 그가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와 버나드 바턴에게 보낸 편지에서 신약성경을 자신의 삶의 "최고의 지침"으로 묘사하고, 시편을 한두 시간 동안 지치지 않고 읽곤 했다고 회상하는 데서 드러난다. 다른 글들에서도 그의 기독교적 신념을 다루고 있다. 친구 콜리지처럼 램은 조지프 프리스틀리의 유니테리언주의에 공감했으며 영국 비국교도였다. 콜리지 자신도 램을 가족 비극 이후에도 "예수에 대한 믿음이 보존된" 사람으로 묘사했다. 워즈워스 또한 "찰스 램의 죽음 이후에 쓰여진(Written After the Death of Charles Lamb)"이라는 시에서 그를 확고한 기독교인으로 묘사했다. 앨프레드 에인저는 그의 저서 《찰스 램(Charles Lamb)》에서 램의 종교가 "습관"이 되었다고 썼다.
램 자신의 시 "주기도문에 대하여(On The Lord's Prayer)", "회개의 환상(A Vision of Repentance)", "어린 교리 문답자(The Young Catechist)", "자정에 지은 시(Composed at Midnight)", "어린 아이들을 내게 오게 하라, 막지 말라(Suffer Little Children, and Forbid Them Not to Come Unto Me)", "사건 발생 12개월 후(Written a Twelvemonth After the Events)", "자선(Charity)", "친구에게 바치는 소네트(Sonnet to a Friend)", "다윗(David)"은 그의 종교적 신앙을 표현한다. 반면 그의 시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살기(Living Without God in the World)"는 불신에 대한 "시적 공격"으로 불리며, 램이 무신론에 대한 혐오감을 표현하고 이를 교만에 귀속시키는 내용이다.
4.2. 문학적 취향과 지적 특성
램의 친구이자 수필가인 윌리엄 헤즐릿은 그를 다음과 같이 특징지었다. "램 씨는 ... 군중과 함께 당당히 나아가지 않는다... 그는 '큰 길'보다 '샛길'을 선호한다. 인간 삶의 만조가 어떤 축제나 하루의 화려한 행렬로 쏟아져 들어올 때, 엘리아는 한쪽으로 비켜서서 낡은 책 노점을 들여다보거나, 무너져가는 문간의 우울한 묘사나 초기 예술과 고대 풍습을 보여주는 기이한 건축 장치를 찾아 쓸쓸한 길을 거닐곤 했다. 램 씨는 진정한 골동품 수집가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
헤즐릿은 또한 램의 서적 취향에 대해 언급하며, 그가 토비아스 스몰렛이나 헨리 필딩의 작품을 잘 알고 있었지만, 유니우스의 편지나 에드워드 기번의 작품은 많이 읽지 않았다고 평했다. 대신 그는 로버트 버튼의 《우울의 해부(The Anatomy of Melancholy)》, 토머스 브라운 경의 작품, 토머스 풀러의 《위인전(Worthies)》, 존 버니언의 《성전(Holy War)》과 같은 "특이한 고전"을 즐겨 읽었으며,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존 밀턴을 숭배했다고 한다. 헤즐릿은 램이 독일이나 프랑스 문학, 경제학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논쟁적인 신학에 대해서는 책에서 주워들은 지식으로만 이야기했다고 덧붙였다.
램은 그림과 판화의 훌륭한 감상자였으며, 특히 윌리엄 호가스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에 감탄했다.
5. 죽음
1834년,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가 사망했다. 장례식은 작가의 가족에게만 한정되었기 때문에 램은 참석하지 못했고, 콜리지의 주치의이자 친한 친구인 제임스 길먼 목사에게 애도를 표하는 편지만 썼다.
1834년 12월 27일, 램은 거리에서 미끄러져 얼굴에 약간의 찰과상을 입은 후 단독이라는 연쇄상구균 감염으로 사망했다. 향년 59세였다. 1833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찰스와 메리는 런던 북부 에드먼턴의 처치 스트리트(Church Street)에 있는 베이 코티지(Bay Cottage)에서 살았다. 램은 에드먼턴의 올 세인츠 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보다 10살 위였던 누나 메리는 그보다 10년 이상 더 살았으며, 그 옆에 묻혔다.
6. 유산과 평가
찰스 램의 작품은 후대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문학적 위상에 대한 다양한 비평적 평가가 존재한다.
6.1. 문학적 영향
램의 작품은 항상 작지만 꾸준한 추종자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오랫동안 발행되고 여전히 활발한 《찰스 램 불레틴(Charles Lamb Bulletin)》을 통해 입증된다. 그의 기이하고 심지어 기이한 스타일 때문에 그는 대중적 또는 학술적 인기를 얻기보다는 "컬트적 인기"를 얻은 작가였다. 앤 파디먼은 현대에 램이 널리 읽히지 않는다는 점을 아쉬워하며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왜 그렇게 적은 독자들이 그의 동반을 갈망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는] 주로 대학 영어과에서 미약하게 소생시키는 것을 통해 살아남고 있다."
크라이스트 병원의 두 기숙사(램 A와 램 B)는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그가 한동안 살았던 런던 교외 에드먼턴의 래티머 학교에서도 그를 기리고 있는데, 이 학교의 여섯 기숙사 중 하나가 램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크라이스트 병원 학교의 스피치 데이에서 매년 수여되는 주요 학술상은 "독립 연구를 위한 램 상(The Lamb Prize for Independent Study)"이다.
에드워드 엘가 경은 램의 동명의 에세이에서 영감을 받아 관현악곡 《꿈의 아이들》을 작곡했다. 하퍼 리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의 발문에는 램의 "변호사들도 한때는 아이들이었겠지(Lawyers, I suppose, were children once)"라는 인용문이 사용되었다. 이즐링턴의 찰스 램 펍(Charles Lamb pub)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더 램스 클럽의 설립자 헨리 제임스 몬태규는 찰스와 그의 누나 메리 램의 살롱의 이름을 따서 클럽 이름을 지었다. 찰스 램은 메리 앤 섀퍼와 애니 배로스의 소설 《건지 감자껍질 파이 북클럽》의 줄거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일본에서는 후쿠하라 린타로의 《찰스 램 전(チャールズ・ラム伝)》이 요미우리 문학상을 수상하며 전후 일본 독서계에 램의 가치를 널리 알렸다.
6.2. 비평적 수용
윌리엄 워즈워스는 1815년 존 스콧에게 "램은 산문을 절묘하게 쓴다"고 언급하며 그의 문학적 재능을 인정했다. 그러나 로버트 사우디는 1823년 《쿼털리 리뷰》에서 《엘리아 수필집》을 비종교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램은 이에 대해 "종교에 해를 끼칠 의도가 없었다"고 반박하며 자신의 비국교도 신앙을 옹호했다. 윌리엄 헤즐릿은 램의 작품이 "시대의 정신"에 순응하지 않고, 허영이나 자기주장과는 거리가 멀며, 숨겨진 것, 먼 것, 내재적이고 조용한 가치를 지닌 것을 선호한다고 평했다. 그는 또한 램이 새로운 얼굴, 책, 건물, 관습을 싫어했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비평적 시각들은 램이 독특하고 개성적인 문학 세계를 구축한 작가임을 보여준다.
7. 작품 목록
- 《무운시》(Blank Verse), 시, 1798년
- 《로자먼드 그레이와 늙은 맹인 마거릿 이야기》(A Tale of Rosamund Gray, and Old Blind Margaret), 1798년
- 《존 우드빌》(John Woodvil), 운문극, 1802년
- 《셰익스피어 이야기》(Tales from Shakespeare), 1807년
- 《율리시스의 모험》(The Adventures of Ulysses), 1808년
- 《셰익스피어 시대에 살았던 영국 극작가들의 표본》(Specimens of English Dramatic Poets who Lived About the Time of Shakespeare), 1808년
- 《셰익스피어 비극론》(On the Tragedies of Shakespeare), 1811년
- 《마녀와 다른 밤의 공포》(Witches and Other Night Fears), 1821년
- 《엘리아 수필집》(Essays of Elia), 1823년
- 《전당포 주인의 딸》(The Pawnbroker's Daughter), 1825년
- 《마지막 엘리아 수필집》(The Last Essays of Elia), 1833년
- 《엘리아나》(Eliana), 1867년
- 《어린이 책》(Childrens 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