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찰스 1세는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허약한 건강을 극복하고 왕위 계승자로서 정치적 격변기를 경험하며 성장했다.
1.1. 출생과 가족
찰스 1세는 1600년 11월 19일 스코틀랜드 파이프의 던펌린궁에서 스튜어트 왕조의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와 덴마크의 앤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600년 12월 23일 에든버러의 홀리루드 궁전 왕실 예배당에서 스코틀랜드 교회의 개신교 의례에 따라 세례를 받았으며, 이때 올버니 공작, 오먼드 후작, 로스 백작, 아드마녹 영주 등의 작위를 받았다.
1603년 3월, 엘리자베스 1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그의 아버지 제임스 6세는 제임스 1세로서 잉글랜드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해 4월에는 제임스 1세가, 6월에는 그의 가족들이 잉글랜드로 이주했으나, 찰스 1세는 허약한 건강 때문에 여행 중 건강이 상할 수 있다는 우려로 제임스 1세의 총신인 던펌린 백작 알렉산더 세튼을 후견인으로 삼아 스코틀랜드에 남겨졌다.
1.2. 유년기와 교육
1604년 세 살 반이 된 찰스 1세가 홀로 던펌린궁의 대연회장을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자, 그가 잉글랜드로 떠날 만큼 충분히 강해졌다고 판단되었다. 1604년 7월 중순, 그는 던펌린을 떠나 잉글랜드로 향했고, 그곳에서 남은 생애의 대부분을 보냈다. 잉글랜드에서는 몬머스 백작 로버트 캐리의 아내인 엘리자베스 트레버니언의 보살핌을 받았다. 그녀는 찰스 1세의 연약한 발목을 강화하기 위해 스페인산 쇠가죽에 황동을 덧댄 부츠를 신겼다. 찰스 1세는 언어 발달이 느렸고, 평생 말을 더듬었다.
1605년 1월, 찰스 1세는 잉글랜드 국왕의 차남에게 주어지는 관례적인 작위인 요크 공작에 봉해졌고, 바스 기사로 수훈되었다. 그의 훈육은 스코틀랜드 교회의 토머스 머레이가 맡았다. 머레이는 찰스 1세에게 당시 인문주의 교육의 일반적인 과정이었던 고전, 언어, 수학, 종교 등의 과목을 가르쳤다. 1611년에는 가터 기사의 수훈이 더해졌다.
1.3. 건강과 초기 발전
찰스 1세는 성장하면서 어린 시절의 신체적 허약함을 극복했다. 그의 허약함은 구루병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그는 능숙한 기마술과 총격술, 그리고 검술을 익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중적 이미지는 신체적으로 더 강하고 키가 컸던 형 웨일스 공 헨리 프레더릭에 비해 여전히 낮았으며, 찰스 1세는 형을 존경하고 모방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1612년 11월 초, 헨리 프레더릭은 18세의 나이에 장티푸스로 의심되는 질병(일부에서는 포르피린증을 추측하기도 한다)으로 사망했다. 2주 뒤 12세가 된 찰스 1세는 왕위 계승권자가 되었다. 국왕의 장남으로서 그는 자동으로 콘월 공작과 로스시 공작 등의 여러 작위를 얻었다. 1616년 11월에는 웨일스 공과 체스터 백작 작위를 받았다.
2. 왕세자 시절
찰스 1세는 왕위 계승권을 얻은 후, 왕세자로서 당시 유럽의 복잡한 외교 문제에 깊이 관여하며 정치적 경험을 쌓았다.
2.1. 왕위 계승권자
1612년 11월 형 헨리 프레더릭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찰스 1세는 12세의 나이에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그는 이로 인해 콘월 공작, 로스시 공작 등 여러 작위를 자동으로 물려받았고, 1616년 11월에는 공식적으로 웨일스 공과 체스터 백작으로 책봉되며 명실상부한 왕위 계승권자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2.2. 스페인과의 혼담
1613년, 찰스 1세의 누이 엘리자베스 스튜어트는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와 결혼하여 하이델베르크로 떠났다. 1617년 로마가톨릭 신봉자인 합스부르크가의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하자 이듬해 보헤미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1619년 개신교 제후동맹이 주도하던 보헤미아 의회는 페르디난트 2세를 축출하고 프리드리히 5세를 새 국왕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페르디난트 2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었고, 이로 인한 종교적 갈등은 결국 30년 전쟁으로 비화했다. 잉글랜드 의회와 대중은 이 전쟁을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전면전으로 인식했다. 1620년 백산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5세가 패배하고 팔츠 선제후국이 스페인령 네덜란드군의 침공을 받자, 제임스 1세는 왕세자 찰스 1세와 페르디난트 2세의 조카인 스페인 왕녀 마리아 아나의 혼사를 추진하며 이를 유럽 평화를 위한 외교적 수단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제임스 1세의 이러한 계획은 궁정과 잉글랜드 대중 모두에게 인기가 없었다. 잉글랜드 의회는 스페인과 가톨릭에 적대적이었고, 1621년 소집된 의회는 스페인에 대한 해상 작전과 왕세자의 개신교도 결혼을 요구했다. 의회는 국왕의 동의 없이 대법관 프랜시스 베이컨을 부패 혐의로 탄핵했는데, 이는 훗날 찰스 1세와 그의 지지자들을 탄핵하는 선례가 되었다. 제임스 1세는 왕세자의 결혼 논의를 왕실 특권 침해로 보았고, 찰스 1세 역시 아버지와 같은 입장이었다. 결국 제임스 1세는 1622년 의회를 해산했다.
1623년 2월, 찰스 1세는 아버지의 총신이자 자신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버킹엄 공작과 함께 변장한 채 스페인으로 건너가 오랜 혼담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그러나 이 여정은 굴욕적인 실패로 끝났다. 마리아 아나 왕녀는 찰스 1세를 이교도 취급했고, 스페인 측은 찰스 1세의 가톨릭 개종을 요구했다. 또한 잉글랜드 내 가톨릭교도에 대한 관용과 잉글랜드 형법의 가톨릭 박해 조항 철폐를 주장했으며, 왕녀는 결혼 후에도 잉글랜드가 조약을 준수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1년간 스페인에 머물 것이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버킹엄 공작과 스페인 수석 대신 올리바레스 백작공작 가스파르 데 구스만 사이에 개인적인 다툼까지 발생하면서 찰스 1세가 직접 협상을 이끌었으나 소용없었다. 10월, 신부를 얻지 못한 채 런던으로 돌아온 그와 버킹엄 공작은 대중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이를 등에 업고 마지못해 하는 제임스 1세에게 스페인과의 전쟁을 선포할 것을 압박했다. 1624년, 제임스 1세는 전쟁 자금 확보를 위해 의회를 소집했고, 찰스 1세와 버킹엄 공작은 재정 악화를 이유로 전쟁에 반대하던 재무장관 제1대 미들섹스 백작 라이오넬 크랜필드를 탄핵하는 데 앞장섰다. 제임스 1세는 버킹엄 공작에게 의회가 국왕을 탄핵하는 선례를 만드는 어리석은 짓이라고 경고했지만, 그의 경고는 현실이 되었다. 팔츠 선제후국을 되찾기 위해 파견된 에른스트 폰 만스펠트 휘하의 군대는 보급 부족으로 네덜란드 해안을 넘지 못하고 고립되었다.
1624년 말, 제임스 1세의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면서 찰스 1세와 버킹엄 공작이 사실상 잉글랜드 왕국의 실권을 쥐게 되었고, 1625년 3월 제임스 1세가 사망하자 찰스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2.3. 프랑스와의 혼담
스페인과의 혼담이 실패로 돌아가자 찰스 1세와 버킹엄 공작은 프랑스로 시선을 돌렸다. 1625년 5월 1일, 찰스 1세는 15세의 프랑스 공주 앙리에트 마리 드 프랑스와 대리 결혼식을 올렸다. 그는 스페인으로 가는 길에 파리에서 그녀를 본 적이 있었다. 1625년 6월 13일, 두 사람은 캔터베리에서 직접 만났다. 찰스 1세는 의회의 반대를 막기 위해 결혼식이 끝난 후에야 첫 의회를 소집했다. 의회 의원들은 그가 가톨릭교도인 왕비와 결혼함으로써 가톨릭교도에 대한 제한을 완화하고 잉글랜드 국교회의 개혁적 기반을 훼손할 것을 우려하여 반대했다. 찰스 1세는 의회에 종교적 제한을 완화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그의 처남인 루이 13세와 맺은 비밀 결혼 조약에서는 정반대로 약속했다. 더욱이 이 조약에 따라 잉글랜드 해군 함선 7척이 1625년 9월 라로셸에서 위그노를 진압하는 데 프랑스에 대여되었다. 찰스 1세는 1626년 2월 2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치렀으나, 왕비는 개신교 의식에 참여하기를 거부하여 참석하지 않았다.
3. 초기 통치와 개인 통치
찰스 1세는 즉위 초반부터 왕권신수설에 기반한 전제적인 통치 방식을 고수하며 의회와 끊임없이 대립했다. 의회와의 갈등이 심화되자 그는 11년 동안 의회 없이 통치하는 '개인 통치'를 강행하며 재정 및 종교 정책을 추진했으나, 이는 결국 더 큰 반발과 내전의 씨앗이 되었다.
3.1. 즉위와 결혼
찰스 1세는 1625년 3월 27일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스페인과의 혼담이 실패한 후, 그는 프랑스 공주 앙리에트 마리와의 결혼을 추진했다. 1625년 5월 1일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 앞에서 대리 결혼식을 올렸고, 6월 13일 캔터베리에서 앙리에트 마리를 직접 만났다. 찰스 1세는 의회의 반대를 피하기 위해 결혼식이 끝난 후에야 첫 의회를 소집했다. 많은 의원들은 가톨릭교도인 왕비와의 결혼이 가톨릭교도에 대한 제한을 완화하고 개혁된 잉글랜드 국교회의 기반을 훼손할 것을 우려하며 반대했다. 찰스 1세는 의회에는 종교적 제한을 완화하지 않겠다고 밝혔으나, 루이 13세와의 비밀 결혼 조약에서는 가톨릭교도에 대한 관용을 약속했다. 이 조약에 따라 잉글랜드 함선 7척이 1625년 9월 라로셸의 위그노 진압에 사용되기도 했다. 1626년 2월 2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이 열렸으나, 앙리에트 마리는 개신교 의식에 참여하기를 거부하여 참석하지 않았다.
3.2. 의회와의 갈등
찰스 1세의 종교 정책에 대한 불신은 그가 논란이 많았던 칼뱅주의 반대론자인 리처드 몬터그를 지지하면서 더욱 커졌다. 몬터그는 1624년 자신의 소책자 『늙은 거위를 위한 새 재갈』에서 칼뱅주의의 예정론에 반대하며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한 구원 가능성을 주장했다. 몬터그와 같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찰스 1세가 스페인과의 결혼을 추진할 때 몇 안 되는 지지 세력이었다. 제임스 1세의 지지 아래 몬터그는 1625년 제임스 1세 사망 직후 『카이사르에게 호소한다』는 또 다른 소책자를 출간했다. 찰스 1세는 몬터그를 청교도 의원들의 비난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그를 왕실 채플린으로 임명했으나, 이는 오히려 많은 청교도들의 의심을 증폭시켰다. 그들은 찰스 1세가 가톨릭의 부활을 돕기 위해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옹호한다고 생각했다.
유럽 대륙에서 30년 전쟁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1625년 소집된 의회는 찰스 1세의 전쟁 계획에 턱없이 부족한 14.00 만 GBP의 보조금만을 승인했다. 더욱이 하원은 톤세와 파운드세 (두 종류의 관세) 징수 권한을 1년으로 제한했는데, 이는 헨리 6세 이래 역대 군주들이 평생 동안 부여받았던 권한이었다. 이로써 의회는 관세 수입에 대한 전면적인 검토가 끝날 때까지 세율 승인을 지연시킬 수 있었다. 의회의 법적 승인 없이도 찰스 1세는 관세를 계속 징수했다.
버킹엄 공작의 지휘 아래 스페인에 대한 해상 원정은 실패로 돌아갔고, 하원은 버킹엄 공작에 대한 탄핵 절차를 시작했다. 1626년 5월, 찰스 1세는 버킹엄 공작을 케임브리지 대학교 총장으로 임명하며 지지를 표명했고, 버킹엄 공작을 비난했던 두 의원 더들리 딕스와 존 엘리엇을 의회 문 앞에서 체포하게 했다. 하원은 의원 두 명의 투옥에 격분했고, 약 일주일간의 구금 후 두 의원은 석방되었다. 1626년 6월 12일, 하원은 버킹엄 공작을 직접적으로 비난하는 항의문을 발표하며, "이 위대한 인물이 국가의 중대사에 간섭하는 것이 제거될 때까지는 어떠한 좋은 성공도 기대할 수 없으며, 우리가 줄 수 있는 어떠한 돈도 그의 오용으로 인해 왕국에 해를 끼칠까 두렵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찰스 1세는 친구를 해임하는 대신 의회를 해산했다.
한편, 찰스 1세와 앙리에트 마리 사이의 부부 싸움은 결혼 초기에 관계를 악화시켰다. 그녀의 과부급여, 가신 임명, 종교적 관행을 둘러싼 분쟁은 1626년 8월 찰스 1세가 그녀의 프랑스인 수행원 대부분을 추방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앙리에트 마리와의 결혼 조건으로 프랑스에 잉글랜드 함선을 제공하기로 합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찰스 1세는 1627년 라로셸의 위그노를 옹호하기 위해 프랑스 해안을 공격했다. 버킹엄 공작이 이끈 이 작전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위그노를 보호하지 못한 버킹엄 공작의 실패와 생마르탱드레에서의 퇴각은 루이 13세의 라로셸 공방전을 촉발시켰고, 잉글랜드 의회와 국민의 버킹엄 공작에 대한 증오를 더욱 심화시켰다.
찰스 1세는 의회 동의 없이 징수하는 "강제 대출"을 통해 전쟁 자금을 모으려 하여 더 큰 불만을 야기했다. 1627년 11월, 왕실 법원의 시범 재판인 "다섯 기사 사건"에서 강제 대출 납부를 거부하는 자를 재판 없이 투옥할 수 있는 국왕의 특권이 인정되었다. 1628년 3월 다시 소집된 의회는 5월 26일 권리청원을 채택하여 찰스 1세에게 의회 동의 없이 세금을 징수할 수 없고, 민간인에게 계엄령을 부과할 수 없으며, 정당한 절차 없이 투옥하거나 군대를 사택에 주둔시킬 수 없음을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찰스 1세는 6월 7일 마지못해 청원에 동의했지만, 그달 말에는 의회를 정회하고 의회의 승인 없이 관세를 징수할 권리를 재차 주장했다.
1628년 8월 23일, 찰스 1세의 총신이었던 버킹엄 공작이 암살되었다. 찰스 1세는 깊은 슬픔에 잠겼다. 제1대 클래런던 백작 에드워드 하이드에 따르면, 그는 "많은 열정과 풍부한 눈물로 탄식하며 침대에 몸을 던졌다"고 한다. 그는 이틀 동안 방에 틀어박혀 슬퍼했다. 대조적으로, 대중은 버킹엄 공작의 죽음을 기뻐했는데, 이는 궁정과 국가, 그리고 왕권과 하원 사이의 간극을 더욱 심화시켰다. 버킹엄 공작의 죽음은 사실상 스페인과의 전쟁을 종식시키고 그의 리더십 문제를 해결했지만, 찰스 1세와 의회 간의 갈등을 끝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는 찰스 1세와 그의 아내 앙리에트 마리의 관계 개선과 일치했으며, 1628년 11월까지 그들의 오랜 불화는 끝이 났다. 아마도 찰스 1세의 정서적 유대는 버킹엄 공작에서 앙리에트 마리로 옮겨간 듯하다. 그녀는 처음으로 임신했고, 그들 사이의 유대감은 더욱 강해졌다. 그들은 함께 미덕과 가정생활의 이미지를 구현했으며, 그들의 궁정은 형식과 도덕의 모범이 되었다.
3.3. 개인 통치 (1629-1640)
1629년 1월, 찰스 1세는 1628년 6월 정회되었던 잉글랜드 의회의 두 번째 회기를 개회하며 톤세와 파운드세 문제에 대해 온건한 연설을 했다. 그러나 하원 의원들은 톤세와 파운드세를 납부하지 않아 재산을 몰수당한 의원 존 롤의 사례를 들어 찰스 1세의 정책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많은 의원들은 세금 부과를 권리청원 위반으로 간주했다. 찰스 1세가 3월 2일 의회 정회를 명령하자, 의원들은 하원 의장 존 핀치 경을 의장석에 앉혀 가톨릭, 아르미니우스주의, 톤세와 파운드세에 반대하는 결의안을 낭독하고 의회에서 환호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회기를 연장했다. 이는 찰스 1세에게는 너무나 지나친 행동이었고, 그는 의회를 해산하고 존 엘리엇 경을 포함한 9명의 의회 지도자들을 이 문제로 투옥시켰다. 이로 인해 이들은 순교자가 되었고, 그들의 항의에 대중적 지지를 얻게 되었다.
개인 통치는 평화를 필수적으로 요구했다. 유럽 전쟁을 위한 자금을 의회로부터 조달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고 버킹엄 공작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던 찰스 1세는 프랑스 및 스페인과 평화 조약을 맺었다. 이후 11년 동안 찰스 1세는 의회 없이 잉글랜드를 통치했으며, 이 시기는 '개인 통치' 또는 '11년 전제정치'로 알려져 있다. 의회 없이 통치하는 것이 예외적인 일은 아니었고, 선례도 있었다. 그러나 오직 의회만이 합법적으로 세금을 징수할 수 있었고, 의회 없이는 찰스 1세가 국고를 위한 자금을 확보할 수 있는 능력은 그의 관습적 권리와 특권에 한정되었다.
3.3.1. 재정 정책
엘리자베스 1세와 제임스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이미 막대한 재정 적자가 발생했다. 버킹엄 공작이 스페인과 프랑스를 상대로 벌인 단기적인 전쟁에도 불구하고, 찰스 1세는 해외에서 전쟁을 벌일 재정적 능력이 거의 없었다. 그의 통치 기간 내내, 그는 주로 방어를 위한 자원병력과 누이 엘리자베스를 지원하고 팔츠 선제후국의 회복이라는 외교 정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에 의존해야 했다. 잉글랜드는 여전히 유럽에서 세금이 가장 적은 나라였으며, 공식적인 소비세나 정기적인 직접세가 없었다.
의회를 다시 소집하지 않고 수입을 늘리기 위해 찰스 1세는 1세기 이상 사문화되었던 "기사작위 압류법"이라는 거의 잊힌 법을 부활시켰다. 이 법은 매년 토지에서 40 GBP 이상을 버는 모든 남성이 국왕의 대관식에 참석하여 기사 작위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 오래된 법령에 의존하여 찰스 1세는 1626년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벌금을 부과했다.
찰스 1세가 부과한 주요 세금은 "선박세"로 알려진 봉건적 부과금이었다. 이는 톤세와 파운드세보다 훨씬 더 많은 불만과 수익을 가져왔다. 이전에는 선박세 징수가 전쟁 중에만, 그리고 해안 지역에서만 허용되었다. 그러나 찰스 1세는 평화 시에도 그리고 왕국 전체에서 방어를 위해 세금을 징수하는 데 법적 제약이 없다고 주장했다. 해군 재무부에 직접 납부된 선박세는 1634년에서 1638년 사이에 매년 15.00 만 GBP에서 20.00 만 GBP를 제공했으며, 그 이후에는 수입이 감소했다. 선박세에 대한 반대는 꾸준히 증가했지만, 잉글랜드의 12명의 보통법 판사들은 이 세금이 국왕의 특권 범위 내에 있다고 판결했다. 1637년~1638년에 존 햄프던이 선박세 미납으로 기소된 사건은 대중적 항의의 발판을 제공했으며, 판사들은 7대 5의 근소한 차이로 햄프던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렸다.
찰스 1세는 또한 독점권을 부여하여 돈을 벌었는데, 이는 그러한 행위를 금지하는 법령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졌다. 비록 비효율적이었지만, 1630년대 후반에는 연간 약 10.00 만 GBP의 수입을 올렸다. 이러한 독점권 중 하나는 비누에 대한 것이었는데, 일부 후원자들이 가톨릭교도였기 때문에 경멸적으로 "교황 비누"라고 불렸다. 찰스 1세는 또한 상당한 불화를 대가로 스코틀랜드 귀족으로부터 자금을 조달했는데, 1625년의 철회법에 따라 1540년 이후 귀족에게 주어진 모든 왕실 또는 교회 토지 증여가 취소되었고, 계속 소유하려면 연간 임대료를 내야 했다. 또한, 잉글랜드의 왕실 임야 경계는 토지를 활용하고 재확인된 경계 내에서 토지 사용자들이 침범에 대한 벌금을 부과하여 수입을 극대화하기 위한 계획의 일환으로 고대의 한계로 복원되었다. 이 프로그램의 초점은 삼림을 벌채하고 목초지 및 경작지로 전환하기 위해 삼림 토지를 판매하는 것이었으며, 딘 숲의 경우 철강 산업 개발을 위한 것이었다. 삼림 벌채는 종종 서부 봉기와 같은 폭동과 소요를 야기했다.
이러한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찰스 1세는 1640년 중반에 파산 위기에 직면했다. 런던시는 자체적인 불만에 사로잡혀 그에게 어떠한 대출도 해주지 않았으며, 외세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궁지에 몰린 찰스 1세는 7월에 런던탑 조폐국에 신탁으로 보관되어 있던 13.00 만 GBP 상당의 은괴를 압수하며 나중에 소유주에게 8% 이자를 붙여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8월에는 동인도 회사가 대출을 거부하자 코팅턴 경이 회사의 후추와 향신료 재고를 압수하여 시장 가치보다 훨씬 낮은 6.00 만 GBP에 팔고 나중에 이자를 붙여 환불해주겠다고 약속했다.
3.3.2. 종교 정책
찰스 1세의 통치 기간 내내 잉글랜드의 종교 개혁은 정치적 논쟁의 최전선에 있었다. 아르미니우스주의 신학은 성직자의 권위와 개인이 구원을 거부하거나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강조했는데, 반대자들은 이를 이단이자 가톨릭 재도입의 잠재적 수단으로 보았다. 청교도 개혁가들은 찰스 1세가 아르미니우스주의에 너무 동정적이라고 여겼으며, 잉글랜드 교회를 더 전통적이고 성례전적인 방향으로 이끌려는 그의 열망에 반대했다. 또한, 그의 개신교 신민들은 유럽 전쟁을 면밀히 주시했으며, 스페인과의 찰스 1세의 외교와 해외 개신교 세력을 효과적으로 지원하지 못한 그의 실패에 점점 더 실망했다.
1633년, 찰스 1세는 윌리엄 로드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했다. 그들은 비국교도 설교자들을 제한하고, 『성공회 기도서』에 명시된 대로 전례를 거행하도록 강제하며, 영국 교회의 내부 건축을 제단 성례전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조직하고, 제임스 1세의 『운동경기서』를 재발행하여 안식일에 세속적 활동을 허용함으로써 종교적 통일성을 증진하기 위한 일련의 개혁을 시작했다. 청교도들이 성직을 맡을 수 있도록 성직록과 성직 임명권을 매입하던 조직인 '성직록 기부자들'은 해산되었다. 로드는 자신의 개혁에 반대하는 자들을 고등판무관 법원과 성실청에서 기소했는데, 이 두 법원은 당시 가장 강력한 법원이었다. 이 법원들은 반대하는 종교적 견해에 대한 검열로 인해 두려움을 샀고, 신사 계급에게 굴욕적인 처벌을 가하여 재산 계급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다. 예를 들어, 1637년 윌리엄 프린, 헨리 버튼, 존 배스트윅은 반주교적 소책자를 출판했다는 이유로 칼 씌우기, 채찍질, 절단형을 당하고 무기한 투옥되었다.
찰스 1세가 스코틀랜드에 자신의 종교 정책을 강요하려 했을 때 그는 수많은 어려움에 직면했다.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와 소원해졌다. 어린 시절 이후 그의 첫 방문은 1633년 스코틀랜드 대관식 때였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자신들의 전례 관행에서 많은 전통적인 의식을 제거했음에도 불구하고, 1637년, 그는 스코틀랜드 의회나 커크와 상의 없이 잉글랜드 성공회 기도서와 거의 동일한 새로운 기도서를 스코틀랜드에서 사용하도록 명령했다. 비록 찰스 1세의 지시 아래 스코틀랜드 주교들이 작성했지만, 많은 스코틀랜드인들은 이를 스코틀랜드에 성공회주의를 도입하려는 수단으로 보고 저항했다. 7월 23일, 기도서가 처음 사용된 일요일에 제니 게데스의 주도로 에든버러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불안은 커크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대중은 스코틀랜드의 개혁 종교를 옹호하고 커크와 의회가 승인하지 않은 어떠한 혁신도 거부하겠다고 맹세하는 국민 언약의 재확인을 중심으로 결집하기 시작했다. 1638년 11월에 열린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는 새로운 기도서를 비난하고, 주교제 교회를 폐지하며, 장로와 집사에 의한 장로교 통치를 채택했다.
3.3.3. 스코틀랜드 정책 및 주교 전쟁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의 불안을 자신의 권위에 대한 반란으로 인식하여 1639년 제1차 주교 전쟁을 촉발시켰다. 그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잉글랜드 의회로부터 보조금을 구하지 않고, 의회의 도움 없이 군대를 모아 스코틀랜드 국경의 베릭어폰트위드로 진격했다. 군대는 언약도들과 교전하지 않았는데, 국왕은 자신의 병력이 스코틀랜드군에 비해 수적으로 훨씬 열세라고 믿었기 때문에 패배를 두려워했다. 1639년 베릭 조약에서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 요새의 통제권을 되찾고 언약파 임시 정부의 해산을 확보했지만, 스코틀랜드 의회와 스코틀랜드 교회의 총회 소집이라는 결정적인 양보를 해야 했다.
제1차 주교 전쟁에서의 군사적 실패는 찰스 1세에게 재정적, 외교적 위기를 초래했으며, 이는 스페인으로부터 자금을 조달하려는 그의 노력과 동시에 팔츠 친척에 대한 지원을 계속하려던 그의 노력이 됭케르크 해전에서 네덜란드가 무력한 잉글랜드 해군 앞에서 켄트 해안에서 스페인 은괴 함대를 파괴하는 공개적인 굴욕으로 이어지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찰스 1세는 새로운 군사 작전을 시작하기 전에 시간을 벌기 위해 스코틀랜드인들과 평화 협상을 계속했다. 재정적 약점 때문에 그는 그러한 모험을 위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의회를 소집할 수밖에 없었다. 1640년 초 몇 달 동안 잉글랜드 의회와 아일랜드 의회가 모두 소집되었다. 1640년 3월, 아일랜드 의회는 18.00 만 GBP의 보조금을 승인하고 5월 말까지 9,000명의 병력을 모집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3월 잉글랜드 총선에서 왕당파 후보들은 부진했으며, 4월 찰스 1세와 잉글랜드 의회 간의 협상은 빠르게 교착 상태에 빠졌다. 제10대 노섬벌랜드 백작 앨저넌 퍼시와 제1대 스트라포드 백작 토머스 웬트워스는 국왕이 선박세를 포기하는 대가로 65.00 만 GBP를 받는 타협안을 중재하려 했지만 (다가올 전쟁 비용은 100.00 만 GBP로 추정되었다), 이것만으로는 하원 내 합의를 이끌어내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의원들의 추가 개혁 요구는 찰스 1세에게 무시당했고, 그는 여전히 상원의 지지를 유지했다. 노섬벌랜드 백작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단기의회'(Short Parliament)로 알려지게 된 이 의회는 소집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1640년 5월에 해산되었다.
이 시점에서 1632년부터 아일랜드 총독이었던 스트라포드 백작은 찰스 1세의 오른팔로 부상했으며, 윌리엄 로드 대주교와 함께 '철저 정책'(Thorough)이라고 불리는 정책을 추구했다. 이는 지방 또는 반정부적 이익을 희생하여 중앙 왕실 권위를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했다. 원래 국왕의 비판자였던 스트라포드 백작은 부분적으로는 버킹엄 공작의 설득으로 1628년 왕실에 충성하게 되었으며, 이후 로드 대주교와 함께 찰스 1세의 가장 영향력 있는 대신으로 부상했다.
잉글랜드 단기의회의 실패에 힘입어 스코틀랜드 의회는 국왕의 동의 없이 통치할 수 있다고 선언했으며, 1640년 8월 언약파 군대는 잉글랜드 노섬벌랜드 주로 진격했다. 국왕의 총사령관이었던 노섬벌랜드 경이 병에 걸리자, 찰스 1세와 스트라포드 백작은 직접 잉글랜드군을 지휘하기 위해 북쪽으로 갔다. 스트라포드 백작 자신도 통풍과 이질을 함께 앓고 있었다. 스코틀랜드 병사들은 상당수가 30년 전쟁의 베테랑이었으며, 잉글랜드군보다 훨씬 뛰어난 사기와 훈련을 받았다. 그들은 뉴캐슬어폰타인에 도달할 때까지 거의 저항을 받지 않았으며, 뉴번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을 물리치고 도시와 인접한 더럼 주를 점령했다.
의회 소집 요구가 커지자, 찰스 1세는 전례 없는 '귀족 대회의'를 소집하는 조치를 취했다. 9월 24일 요크에서 회의가 열릴 때쯤 찰스 1세는 의회를 소집하라는 거의 보편적인 조언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그는 귀족들에게 11월에 의회가 소집될 것이라고 알린 후, 그동안 스코틀랜드군에 맞서 자신의 군대를 유지할 자금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을지 고려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들은 평화를 권고했다. 1640년 10월에 체결된 굴욕적인 리폰 조약에서 휴전이 협상되었다. 이 조약은 스코틀랜드군이 노섬벌랜드와 더럼을 계속 점령하고, 최종 합의가 협상되고 스코틀랜드군에게 충분한 자금을 지급하기 위해 잉글랜드 의회가 다시 소집될 때까지 매일 850 GBP를 지급받을 것이라고 명시했다. 결과적으로 찰스 1세는 훗날 '장기의회'(Long Parliament)로 알려지게 될 의회를 소집했다. 다시 한번, 그의 지지자들은 선거에서 부진했다. 11월에 복귀한 493명의 하원 의원 중 350명 이상이 국왕에게 반대했다.
4. 장기의회와 내전 발발
개인 통치 종식 이후 소집된 '장기의회'는 찰스 1세의 권력을 급격히 약화시켰고, 그의 총신들을 탄핵하며 국왕과 의회 간의 대립을 심화시켰다. 아일랜드 반란과 '다섯 의원 사건'은 이러한 긴장을 폭발시켜 결국 잉글랜드 내전으로 이어졌다.
4.1. 단기 의회와 장기 의회 소집
'장기의회'는 '단기의회'만큼이나 찰스 1세에게 어려운 존재였다. 1640년 11월 3일 소집된 의회는 빠르게 국왕의 주요 고문들을 대역죄로 탄핵하는 절차를 시작했다. 스트라포드 백작은 11월 10일 구금되었고, 로드 대주교는 12월 18일 탄핵되었으며, 당시 대법관이었던 핀치 경은 다음 날 탄핵되어 12월 21일 찰스 1세의 허락을 받고 헤이그로 도피했다. 국왕이 마음대로 의회를 해산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의회는 3년 의회법을 통과시켰는데, 이 법은 최소 3년마다 의회를 소집해야 하며, 국왕이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대법관과 12명의 귀족이 의회를 소집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 법은 보조금 법안과 함께 통과되었고, 후자를 확보하기 위해 찰스 1세는 1641년 2월 마지못해 왕실 동의를 부여했다.
4.2. 대신들의 탄핵
스트라포드 백작은 의회파, 특히 존 핌의 주요 표적이 되었고, 1641년 3월 22일 대역죄로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헨리 베인 경의 스트라포드 백작이 잉글랜드를 진압하기 위해 아일랜드군을 사용하겠다고 위협했다는 핵심 주장은 입증되지 않았고, 4월 10일 핌의 주장은 무너졌다. 핌과 그의 동맹자들은 즉시 사권 박탈 법안을 발의했는데, 이는 단순히 스트라포드 백작을 유죄로 선언하고 사형을 선고하는 것이었다.
찰스 1세는 스트라포드 백작에게 "왕의 이름으로, 그대는 생명, 명예 또는 재산에 해를 입지 않을 것"이라고 확언했으며, 찰스 1세가 동의를 보류하면 사권 박탈 법안은 성공할 수 없었다. 더욱이 많은 의원들과 대부분의 귀족들은 사권 박탈 법안에 반대했는데, 한 의원의 말처럼 "정의의 칼로 살인을 저지르기"를 원치 않았다. 그러나 긴장이 고조되고 찰스 1세가 연루된 왕당파 군 장교들의 스트라포드 백작 지지 쿠데타 시도가 상황을 흔들기 시작했다. 하원은 4월 20일 압도적인 표차(찬성 204, 반대 59, 기권 230)로 법안을 통과시켰고, 상원도 5월에 동의했다(찬성 26, 반대 19, 불참 79). 5월 3일, 의회의 '1641년 항의문'은 찰스 1세의 "자의적이고 폭압적인 통치"의 "사악한 조언"을 비난했다. 청원서에 서명한 사람들은 국왕의 "인신, 명예, 재산"을 옹호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진정한 개혁 종교", 의회, 그리고 "신민의 권리와 자유"를 보존하겠다고 맹세하기도 했다. 불안정한 상황에서 가족의 안전을 우려한 찰스 1세는 판사들과 주교들과 상의한 후 5월 9일 마지못해 스트라포드 백작의 사권 박탈에 동의했다. 스트라포드 백작은 사흘 뒤 참수되었다.
또한 5월 초, 찰스 1세는 의회의 동의 없이 잉글랜드 의회를 해산하는 것을 금지하는 전례 없는 법안에 동의했다. 다음 달에는 선박세, 기사 작위 압류 벌금, 의회 동의 없는 소비세가 불법으로 선언되었고, 성실청과 고등판무관 법원이 폐지되었다. 남아있는 모든 형태의 세금은 톤세 및 파운드세법에 의해 합법화되고 규제되었다. 하원은 또한 주교와 주교제를 공격하는 법안을 발의했지만, 이는 상원에서 실패했다.
찰스 1세는 잉글랜드에서 중요한 양보를 했고, 1641년 8월부터 11월까지 스코틀랜드를 방문하여 스코틀랜드에서 장로교의 공식 설립을 인정함으로써 스코틀랜드에서의 입지를 일시적으로 개선했다. 그러나 '더 인시던트'로 알려진 스코틀랜드 왕당파 쿠데타 시도 이후 찰스 1세의 신뢰도는 크게 훼손되었다.
4.3. 아일랜드 반란
당시 아일랜드 인구는 크게 세 가지 사회정치적 집단으로 나뉘어 있었다. 게일어를 사용하고 가톨릭을 신봉하는 게일 아일랜드인, 중세 노르만족의 후손으로 주로 가톨릭을 신봉하는 올드 잉글리시, 그리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온 개신교 정착민으로 잉글랜드 의회와 언약도에 동조하는 뉴 잉글리시였다. 스트라포드 백작의 행정부는 아일랜드 경제를 개선하고 세수를 늘렸지만, 이는 강력한 통제와 압박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는 국왕을 지지하는 대규모 가톨릭 군대를 훈련시키고 아일랜드 의회의 권위를 약화시켰으며, 동시에 장로교도들에게 혐오스러운 윌리엄 로드의 성공회주의를 장려하면서 가톨릭으로부터 토지를 몰수하여 개신교 정착민에게 주었다. 그 결과, 세 집단 모두 불만을 품게 되었다. 스트라포드 백작의 탄핵은 아일랜드 정치에 새로운 전환점을 제공했으며, 모든 측이 그에게 불리한 증거를 제시하기 위해 협력했다. 잉글랜드 의회와 마찬가지로 아일랜드 의회의 올드 잉글리시 의원들은 스트라포드 백작에게 반대하면서도 찰스 1세에 대한 충성을 유지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국왕이 사악한 고문들에게 잘못 인도되었다고 주장했으며, 또한 스트라포드 백작과 같은 총독이 국왕이 직접 통치에 관여하는 것을 보장하는 대신 독재적인 인물로 부상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스트라포드 백작의 실각은 아일랜드에서 찰스 1세의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잉글랜드 하원은 스트라포드 백작이 투옥되어 있는 동안 아일랜드군 해산을 세 차례나 요구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자금 부족으로 찰스 1세는 스트라포드 백작의 재판이 끝날 무렵 군대를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토착 가톨릭 신자로부터 정착민 개신교도에게 토지 소유권이 이전되는 것을 둘러싼 분쟁, 특히 얼스터 식민지화와 관련된 분쟁은 아일랜드 의회가 잉글랜드 의회에 종속되도록 하려는 움직임에 대한 불만과 결합하여 반란의 씨앗을 뿌렸다. 1641년 10월 말 게일 아일랜드인과 뉴 잉글리시 사이에 무력 충돌이 발생하자, 올드 잉글리시는 국왕에 대한 충성을 표명하면서도 게일 아일랜드인 편에 섰다.
1641년 11월, 하원은 '대간주'를 통과시켰는데, 이는 찰스 1세의 통치 초기부터 그의 대신들이 저지른 행동(국왕이 자신도 모르게 가담한 거대한 가톨릭 음모의 일부라고 주장됨)에 대한 긴 불만 목록이었다. 그러나 이는 여러 면에서 핌의 지나친 조치였으며, 159대 148이라는 불과 11표 차이로 통과되었다. 더욱이 '대간주'는 상원에서 거의 지지를 받지 못했는데, '대간주' 자체가 상원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아일랜드 반란 소식과 찰스 1세의 공모에 대한 부정확한 소문이 결합되면서 긴장은 고조되었다. 11월 내내 일련의 선동적인 팜플렛이 아일랜드에서 벌어진 잔혹 행위, 즉 올드 잉글리시 영주들이 통제할 수 없었던 토착 아일랜드인에 의한 뉴 잉글리시 정착민 학살에 대한 이야기를 출판했다. "교황주의자" 음모론이 잉글랜드에서 유포되었고, 잉글랜드의 반가톨릭 정서는 강화되어 찰스 1세의 명성과 권위를 손상시켰다. 잉글랜드 의회는 찰스 1세가 아일랜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자금을 요청했을 때 그의 동기를 불신했다. 많은 하원 의원들은 그가 모금한 병력이 나중에 의회 자체에 사용될 수 있다고 의심했다. 핌의 '민병대 법안'은 국왕으로부터 군대 통제권을 빼앗으려는 의도였지만, 상원은 물론 찰스 1세의 지지도 얻지 못했다. 대신 하원은 이 법안을 왕실 동의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며 조례로 통과시켰다. '민병대 조례'는 더 많은 상원 의원들이 국왕을 지지하도록 유도한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시도로 찰스 1세는 이미 무법천지로 빠르게 변해가던 런던에서 런던탑을 악명 높지만 유능한 직업 군인인 토머스 런스퍼드 대령의 지휘 아래 두면서 큰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의회가 아일랜드 반군과 공모했다는 이유로 왕비를 탄핵하려 한다는 소문이 찰스 1세에게 전해지자, 그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했다.
4.4. 다섯 의원 사건
찰스 1세는 잉글랜드 의회 일부 의원들이 침략해온 스코틀랜드군과 내통했다고 의심했는데, 아마도 그의 의심은 옳았을 것이다. 1642년 1월 3일, 찰스 1세는 의회에 존 핌, 존 햄프던, 덴질 홀리스, 윌리엄 스트로드, 아서 해설리그 경 등 하원 의원 5명과 귀족 1명인 제2대 맨체스터 백작 에드워드 몬터규를 대역죄를 이유로 넘겨줄 것을 지시했다. 의회가 이를 거부하자, 아마도 앙리에트 마리가 찰스 1세에게 무력으로 다섯 의원을 체포하도록 설득한 것으로 보인다. 찰스 1세는 직접 체포를 결심했다. 그러나 영장 소식이 그보다 먼저 의회에 전해졌고, 찰스 1세가 1월 4일 무장 경호원들과 함께 하원에 들어서기 직전, 지명 수배된 의원들은 배를 타고 빠져나갔다. 윌리엄 렌탈 의장을 의장석에서 끌어내린 국왕은 그에게 의원들이 어디로 도망쳤는지 물었다. 렌탈은 무릎을 꿇은 채 유명한 답변을 남겼다. "폐하, 저는 이곳에서 볼 눈도 말할 혀도 없습니다. 오직 의회가 저를 지시하는 대로 따를 뿐입니다. 저는 의회의 하인입니다." 찰스 1세는 비참하게도 "내 새들이 모두 날아갔다"고 선언하며 빈손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 실패한 체포 시도는 찰스 1세에게 정치적으로 재앙이었다. 어떤 잉글랜드 군주도 하원에 들어선 적이 없었으며, 의원들을 체포하기 위해 의회 회의실을 침범한 전례 없는 그의 행동은 의회 특권에 대한 심각한 위반으로 간주되었다. 단번에 찰스 1세는 자신을 혁신과 무질서로부터의 방어자로 묘사하려던 지지자들의 노력을 무너뜨렸다.
의회는 빠르게 런던을 장악했고, 찰스 1세는 1월 10일 수도를 떠나 햄프턴코트궁으로 피신했으며, 이틀 뒤에는 윈저성으로 옮겼다. 2월에 아내와 장녀를 해외로 안전하게 보낸 후, 그는 북쪽으로 이동하여 킹스턴어폰헐의 군사 병기고를 점령하려 했으나, 4월에 도시의 의회파 주지사 존 호섬 경에게 입장을 거부당하며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4.5. 잉글랜드 내전 발발
1642년 중반, 양측은 무장을 시작했다. 찰스 1세는 중세의 배치위임징병 방식을 사용하여 군대를 모았고, 의회는 민병대를 위한 자원병을 모집했다. 협상은 무익하게 끝났고, 찰스 1세는 1642년 8월 22일 노팅엄에서 왕기를 세우며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했다. 그때까지 그의 군대는 대략 미들랜드, 웨일스, 서부 지역, 그리고 잉글랜드 북부를 통제했다. 그는 옥스퍼드에 궁정을 세웠다. 의회는 런던, 남동부, 그리고 이스트 앵글리아뿐만 아니라 잉글랜드 해군도 통제했다.
5. 잉글랜드 내전
잉글랜드 내전은 찰스 1세의 통치와 그의 왕권신수설에 대한 의회의 저항이 극에 달한 시기였다. 초기에는 혼전 양상이었으나, 의회군의 조직적인 반격과 주요 전투에서의 패배로 찰스 1세의 입지는 점차 약화되었고, 결국 그는 투항하여 내전은 의회파의 승리로 끝났다.
5.1. 군사 작전 및 주요 전투
몇 차례의 소규모 교전 후, 1642년 10월 23일 에지힐 전투에서 양측의 주력군이 본격적으로 맞붙었다. 찰스 1세의 조카인 라인 공자 루퍼트는 왕당파 지휘관 제1대 린지 백작 로버트 버티의 전투 전략에 동의하지 않았고, 찰스 1세는 루퍼트 편을 들었다. 린지 백작은 사임했고, 찰스 1세는 제1대 포스 백작 패트릭 루스벤의 도움을 받아 총사령관을 맡았다. 루퍼트의 기병대는 의회군 진영을 성공적으로 돌파했지만, 즉시 전장으로 복귀하는 대신 의회군의 보급 수송대를 약탈하러 떠났다. 대령으로 참전했던 린지 백작은 부상을 입고 의료 지원 없이 출혈 과다로 사망했다. 전투는 날이 어두워지면서 결정적인 승패 없이 끝났다.
찰스 1세의 말에 따르면, 전투 경험은 그에게 "극도로 깊은 슬픔"을 안겨주었다. 그는 옥스퍼드에서 재정비하며, 루퍼트의 런던 즉각 공격 제안을 거절했다. 일주일 후, 그는 11월 3일 수도로 향했고, 도중에 브렌트퍼드를 점령하는 동시에 시민 및 의회 대표단과 협상을 계속했다. 런던 외곽의 턴햄 그린 전투에서 왕당파 군대는 런던 민병대의 저항에 부딪혔고, 수적으로 우세한 병력에 직면하자 찰스 1세는 퇴각을 명령했다. 그는 옥스퍼드에서 겨울을 나며 도시 방어를 강화하고 다음 시즌의 전역을 준비했다. 양측 간의 평화 회담은 4월에 결렬되었다.
이후 몇 년 동안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앙리에트 마리는 1643년 2월부터 17개월 동안 영국에 머물다 돌아갔다. 1643년 7월 루퍼트가 브리스톨을 점령하자, 찰스 1세는 항구 도시를 방문한 후 세번강 상류의 글로스터를 포위했다. 도시 성벽을 무너뜨리려는 그의 계획은 폭우로 실패했고, 의회 구원군이 접근하자 찰스 1세는 포위를 풀고 서덜리 성으로 철수했다. 의회군은 런던으로 회군했고, 찰스 1세는 추격에 나섰다. 양군은 9월 20일 뉴베리에서 만났다. 에지힐 전투와 마찬가지로, 제1차 뉴베리 전투는 해질녘까지 교착 상태에 빠졌고, 양군은 교전을 중단했다. 1644년 1월, 찰스 1세는 옥스퍼드에서 의회를 소집했는데, 약 40명의 귀족과 118명의 하원 의원이 참석했다. 1645년 3월까지 지속된 옥스퍼드 의회는 대부분의 귀족과 하원 의원의 약 3분의 1의 지지를 받았다. 찰스 1세는 의회의 비효율성에 실망하여 아내에게 보낸 사적인 편지에서 의회를 "잡종"이라고 불렀다.
1644년, 찰스 1세는 잉글랜드 남부에 머물렀고, 루퍼트는 의회군과 스코틀랜드 언약파 군대의 위협을 받던 뉴어크와 요크를 구원하기 위해 북쪽으로 향했다. 찰스 1세는 6월 말 크로프레디 다리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북부의 왕당파는 며칠 뒤 마스틴 무어 전투에서 패배했다. 국왕은 남부에서 계속 작전을 수행하여 제3대 에식스 백작 로버트 데버루의 의회군을 포위하고 무장 해제시켰다. 옥스퍼드의 본거지로 북상하던 그는 겨울이 오기 전 뉴베리에서 두 번째로 싸웠지만, 전투는 결정적인 승패 없이 끝났다. 겨울 동안 양측이 재무장하고 재편성하는 동안 합의를 위한 시도는 다시 실패로 돌아갔다.
1645년 6월 14일 네이스비 전투에서 루퍼트의 기병대는 의회군의 신형군 측면을 다시 성공적으로 돌파했지만, 전장의 다른 곳에서는 반대 세력이 찰스 1세의 병력을 후퇴시켰다. 병사들을 재집결시키려던 찰스 1세는 앞으로 나아갔지만, 제1대 칸와스 백작 로버트 달젤이 국왕의 안전을 우려하여 그의 고삐를 잡고 뒤로 끌어당겼다. 왕당파 병사들은 칸와스 백작의 행동을 후퇴 신호로 오해하여 전선이 붕괴되었다. 군사적 균형은 의회군에게 결정적으로 기울었다. 이후 왕당파는 일련의 패배를 겪었고, 1646년 4월 옥스퍼드 공방전에서 찰스 1세는 (하인으로 변장하여) 탈출했다. 그는 뉴어크온트렌트를 포위하고 있던 스코틀랜드 장로교 군대에 투항했고, 뉴캐슬어폰타인으로 끌려갔다. 9개월간의 협상 끝에 스코틀랜드군은 잉글랜드 의회와 합의에 도달했다. 10.00 만 GBP를 받는 대가로, 그리고 장래에 더 많은 돈을 받기로 약속하고, 스코틀랜드군은 뉴캐슬에서 철수하고 1647년 1월 찰스 1세를 의회 위원들에게 넘겨주었다.
5.2. 왕당파 전략 및 옥스퍼드 궁정
내전 기간 동안 왕당파는 옥스퍼드에 궁정을 설치하고 전쟁을 지휘했다. 찰스 1세는 1644년 1월 옥스퍼드에서 별도의 의회를 소집했는데, 이는 왕당파의 지지를 결집하려는 시도였다. 이 옥스퍼드 의회에는 약 40명의 귀족과 118명의 하원 의원이 참여했으며, 대부분의 귀족과 약 3분의 1의 하원 의원들이 지지했다. 그러나 찰스 1세는 의회의 비효율성에 실망하여 사적인 편지에서 의원들을 "잡종들"이라고 불렀다.
왕당파 내부에는 의회파와의 화해를 포기하지 않는 온건파들이 있었다. 제1대 클래런던 백작 에드워드 하이드와 제2대 포크랜드 자작 루시어스 캐리는 종종 찰스 1세에게 화해를 진언했지만, 국왕은 왕비 앙리에트 마리와 급진파의 의견을 수용하여 화해를 거부하고 온건파를 멀리했다.
5.3. 왕비 헨리에타 마리아의 역할
내전 기간 동안 왕비 앙리에트 마리는 왕당파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1643년 2월부터 17개월가량 잉글랜드에 머물며 외교 및 재정 지원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녀는 왕가의 보물을 매각하여 군자금을 모았고, 프랑스 왕실과의 연결을 통해 외교적 지원을 모색했다. 그러나 내전이 격화되자 찰스 1세는 1644년 그녀를 프랑스로 망명시켰고, 이듬해인 1645년 3월에는 장남인 찰스 2세를 하이드에게 맡겨 프랑스로 망명시켰다.
5.4. 패배와 항복
내전에서의 거듭된 패배 끝에, 찰스 1세는 1646년 4월 옥스퍼드 공방전에서 (하인으로 변장하여) 탈출했다. 그는 어차피 패배가 불가피하다면 스코틀랜드에 투항하기로 결정했다. 스코틀랜드 언약도들은 그동안의 종교 정책 때문에 찰스 1세와 대립했지만, 스코틀랜드는 오랫동안 스튜어트 왕조를 지지해왔기 때문이었다. 찰스 1세는 뉴어크온트렌트를 포위하고 있던 스코틀랜드 군에 투항하여 뉴캐슬어폰타인으로 옮겨졌다.
스코틀랜드 군의 목적은 애초부터 주교 전쟁에 따른 전쟁 배상금이었고, 9개월간의 협상 끝에 잉글랜드 의회가 10.00 만 GBP의 배상금과 향후 추가적인 금액을 약속하자, 찰스 1세는 잉글랜드 의회에 넘겨졌고, 스코틀랜드 군은 1647년 1월 철수했다.
6. 투옥, 재판 및 처형
내전에서 패배한 찰스 1세는 의회에 의해 투옥되었고, 전례 없는 재판을 통해 대역죄로 기소되었다. 그는 재판의 합법성을 부정하며 자신의 왕권이 신에게서 부여받았음을 주장했으나, 결국 유죄 판결을 받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6.1. 투옥과 협상
의회는 찰스 1세를 노샘프턴셔의 홀든비 하우스에 가택 연금했다. 제1차 잉글랜드 내전이 끝난 후 의회는 신형군을 해산하려 했으나, 당시 신형군은 급여가 체불된 상태였고 아무런 보장도 없자 불만이 가득했다. 신형군 기병대 중령 조지 조이스는 이러한 상황에 불만을 품고 홀든비 하우스를 압박하여 6월 3일 신형군의 이름으로 찰스 1세의 신병을 확보했다.
찰스 1세는 청교도 내의 분파들 사이에 갈등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의회를 장악한 회중 교회의 독립파는 젠트리와 귀족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던 반면, 신형군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요먼 계급은 보다 급진적인 수평파가 장악하고 있었다. 이 둘 사이의 갈등은 상호 의심과 항명으로 불거지고 있었고, 찰스 1세는 이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고자 했다. 그는 먼저 뉴마켓으로, 그 다음 오트랜즈로, 그리고 햄프턴코트궁으로 옮겨졌으며, 그동안 여러 차례의 무익한 협상이 진행되었다. 11월, 그는 탈출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고, 아마도 프랑스나 잉글랜드 남부, 또는 스코틀랜드 국경 근처의 베릭어폰트위드로 향하려 했다. 그는 11월 11일 햄프턴코트궁을 탈출하여 사우샘프턴 워터 해안에서 로버트 해먼드 대령과 접촉했다. 해먼드 대령은 아일오브와이트주의 의회파 주지사였으며, 찰스 1세는 그가 자신에게 동정적이라고 믿었던 듯하다. 그러나 해먼드는 찰스 1세를 캐리스브루크 성에 가두고 의회에 찰스 1세가 자신의 구금 하에 있음을 알렸다.
캐리스브루크에서도 찰스 1세는 여러 세력과 계속해서 협상하려 했다. 스코틀랜드 교회와의 이전 갈등과는 정반대로, 1647년 12월 26일 그는 스코틀랜드인들과 비밀 조약을 체결했다. '인게이저먼트'라고 불리는 이 합의에 따라, 스코틀랜드인들은 찰스 1세의 이름으로 잉글랜드를 침공하고 그를 왕위에 복귀시키겠다고 약속했으며, 조건은 잉글랜드에 3년간 장로교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1648년 5월 왕당파가 봉기하여 제2차 잉글랜드 내전이 발발했고, 찰스 1세와 합의한 대로 스코틀랜드군이 잉글랜드를 침공했다. 켄트, 에식스, 컴벌랜드에서의 봉기와 남부 웨일스에서의 반란은 신형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1648년 8월 1648년 프레스턴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이 패배하면서 왕당파는 전쟁에서 승리할 어떠한 기회도 잃었다.
찰스 1세의 유일한 선택지는 협상으로 돌아가는 것이었고, 이는 아일오브와이트의 뉴포트에서 진행되었다. 1648년 12월 5일, 의회는 129대 83으로 국왕과의 협상을 계속하기로 투표했지만, 올리버 크롬웰과 군대는 그들이 피에 굶주린 폭군으로 간주하는 자와의 추가 협상에 반대했으며 이미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해먼드는 11월 27일 아일오브와이트 주지사에서 해임되었고, 다음 날 군대의 구금 하에 놓였다. 12월 6일과 7일 프라이드의 숙청에서 군부와 동조하지 않는 의원들은 토머스 프라이드 대령에 의해 체포되거나 배제되었고, 다른 의원들은 자발적으로 불참했다. 남은 의원들은 잔부의회를 구성했다. 이는 사실상 군사 쿠데타였다.
6.2. 반역죄 재판
1648년 말, 찰스 1세는 허스트 성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윈저 성으로 옮겨졌다. 1649년 1월, 잔부의회 하원은 그를 대역죄로 기소했지만, 상원은 이 혐의를 기각했다. 국왕을 재판하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잉글랜드의 세 보통법원 수석 판사들인 헨리 롤, 올리버 세인트 존, 존 와일드는 모두 이 기소가 불법이라고 반대했다.
잔부의회 하원은 단독으로 입법할 수 있다고 선언하고, 찰스 1세의 재판을 위한 별도의 법원을 설립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으며, 이 법안을 국왕의 재가 없이도 법률로 선언했다. 이 법에 의해 설립된 고등법원은 135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었지만, 많은 이들이 봉사를 거부하거나 불참했다. 찰스 1세의 대역죄 및 "기타 중범죄" 혐의 재판은 1649년 1월 20일 웨스트민스터 홀에서 시작되었고, 68명(모두 확고한 의회파)만이 참석했다. 존 브래드쇼가 재판장을 맡았고, 법무장관 존 쿡이 기소를 이끌었다.
찰스 1세는 국익이 아닌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자신의 권력을 사용하여 잉글랜드에 대한 반역죄로 기소되었다. 기소 내용은 그가 "자신에게 무제한적이고 폭압적인 권력을 세우고 유지하며 자신의 의지대로 통치하고, 인민의 권리와 자유를 전복하려는 사악한 계획"을 꾸몄으며, 이를 실행하기 위해 "현재 의회와 그 안에 대표된 인민에 대해 반역적이고 악의적으로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이었다. 또한 "찰스 스튜어트의 사악한 계획, 전쟁, 악행은 자신과 가족의 개인적 이익, 의지, 권력, 그리고 주장된 특권을 증진하고 유지하기 위해 수행되었으며, 이는 이 나라 인민의 공공 이익, 공통 권리, 자유, 정의, 평화에 반한다"고 명시되었다. 이는 현대적인 지휘 책임 개념을 예고하는 것으로, 기소는 그가 "해당 전쟁에서 행해지고 저질러졌거나 그로 인해 발생한 모든 반역, 살인, 약탈, 방화, 약탈, 황폐화, 손해 및 해악"에 대해 "유죄"라고 주장했다. 전쟁 중 약 30만 명, 즉 인구의 6%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재판 첫 사흘 동안, 찰스 1세는 변론을 요구받을 때마다 거부하며, "내가 어떤 권한으로 이곳에 불려왔는지, 어떤 합법적인 권한으로...?"라고 반문했다. 그는 어떤 법원도 군주에 대한 관할권이 없으며, 자신의 통치 권한은 신과 잉글랜드의 전통적인 법률에 의해 부여받았고, 자신을 재판하는 자들이 휘두르는 권력은 오직 무력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찰스 1세는 재판이 불법이라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어떤 지상의 권력도 나(너희의 왕인 나)를 범죄자로 정당하게 심문할 수 없다... 오늘의 절차는 신의 법률에 의해 정당화될 수 없다. 오히려 왕에 대한 복종의 권위는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명확히 보장되고 엄격히 명령되어 있다... 이 땅의 법률에 관해서는, 어떤 학식 있는 변호사도 왕에 대한 탄핵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모든 탄핵은 왕의 이름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격언 중 하나는 '왕은 잘못을 저지를 수 없다'는 것이다... 상원은 완전히 배제되었고, 하원은 그들 대부분이 구금되거나 위협받아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내가 들었던 무기는 이 왕국의 근본적인 법률을, 내 권력이 고대 정부를 완전히 바꾸었다고 생각하는 자들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것뿐이었다."
법원은 이와 대조적으로 주권 면제 원칙에 이의를 제기하며 "잉글랜드의 왕은 개인이 아니라, '국가의 법률에 따라, 그리고 그 외에는' 통치할 제한된 권한이 위임된 직위"라고 주장했다.
사흘째 재판이 끝난 후, 찰스 1세는 법정에서 퇴장당했고, 이후 이틀 동안 30명 이상의 증인이 그의 부재 중에 증언을 했다. 1월 26일,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다음 날, 국왕은 공개 재판에 소환되어 유죄가 선언되고 선고가 내려졌다. 판결문은 "이 모든 반역과 범죄에 대해 이 법원은 찰스 스튜어트가 폭군, 반역자, 살인자, 그리고 이 나라 선량한 인민의 공공의 적이므로, 그의 머리를 몸에서 잘라내어 사형에 처한다"고 명시했다. 59명의 위원들이 찰스 1세의 사형 집행 영장에 서명했다.
6.3. 처형과 사후 처리
찰스 1세의 처형은 1649년 1월 30일 화요일로 예정되었다. 그의 두 자녀인 엘리자베스와 글로스터 공작 헨리 스튜어트는 잉글랜드에 남아 의회파의 통제 하에 있었다. 그들은 1월 29일 그를 방문할 수 있었고, 그는 눈물을 흘리며 작별 인사를 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추운 날씨로 인해 몸이 떨리는 것을 군중이 두려움으로 오해할까 봐 두 벌의 셔츠를 요청했다. 그는 "날씨가 너무 매서워 몸이 떨릴 수도 있는데, 일부 관찰자들이 이를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으로 상상할까 봐 그러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구금되어 있던 세인트제임스궁에서 경비병의 호위 아래 화이트홀 궁전으로 걸어갔고, 그곳의 연회장 앞에 처형대가 세워져 있었다. 찰스 1세는 많은 병사들로 인해 관중들과 떨어져 있었고, 그의 마지막 연설은 처형대 위에 있던 몇몇 사람에게만 들렸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충실한 신하 스트라포드 백작의 처형을 막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비난하며, "내가 효력을 발휘하도록 허용한 부당한 판결이 이제 나에게 부당한 판결로 벌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누구 못지않게 인민의 자유를 원했다고 선언했지만, "하지만 그들의 자유는 정부를 갖는 데 있다... 그것은 그들이 정부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신민과 군주는 완전히 다른 존재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나는 타락할 수 있는 왕관에서 타락할 수 없는 왕관으로 갈 것이며, 그곳에는 어떠한 혼란도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오후 2시경, 찰스 1세는 기도를 마친 후 참수대에 머리를 대고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로 손을 뻗자, 단 한 번의 깨끗한 일격으로 참수되었다. 목격자 필립 헨리에 따르면, 모인 군중으로부터 "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고 다시는 듣고 싶지 않은"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고, 일부는 기념으로 국왕의 피를 손수건에 적셨다.
처형인은 복면을 쓰고 변장했기 때문에 그의 신원은 논란이 많다. 위원회는 런던의 일반 사형 집행인 리처드 브랜던에게 접근했지만, 그는 처음에는 거절했다. 당시로서는 상당한 액수인 200 GBP를 제안받았음에도 말이다. 아마도 그는 죽음의 위협을 받은 후 마음을 바꾸어 임무를 수행했을 수도 있지만, 조지 조이스, 윌리엄 휼렛, 휴 피터스 등 다른 인물들도 잠재적 후보로 지목되었다. 1813년 윈저에서 국왕의 시신을 검사한 결과 확인된 깨끗한 일격은 처형이 숙련된 사형 집행인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반역자의 잘린 머리를 높이 들고 "반역자의 머리를 보라!"고 외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지만, 찰스 1세의 머리는 전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은 사용되지 않았다. 아마도 처형인이 자신의 목소리가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처형 다음 날, 국왕의 머리는 몸에 다시 꿰매어졌고, 시신은 방부 처리되어 납 관에 안치되었다.
위원회는 찰스 1세의 시신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매장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그의 시신은 2월 7일 밤 윈저로 옮겨졌다. 그는 1649년 2월 9일 윈저성 세인트조지 예배당의 헨리 8세 금고에 헨리 8세와 그의 세 번째 아내 제인 시모어의 관 옆에 비공개로 매장되었다. 국왕의 아들인 찰스 2세는 훗날 하이드 파크에 정교한 왕실 영묘를 세울 계획을 세웠지만, 이는 결코 지어지지 않았다.
7. 유산 및 평가
찰스 1세의 통치와 비극적인 최후는 잉글랜드의 정치, 종교,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후대 역사가들로부터 다양한 평가와 비판을 받았다.
7.1. 순교와 왕당파 선전
찰스 1세의 처형 열흘 후, 그가 직접 썼다고 알려진 회고록 『에이콘 바실리케』(그리스어로 "왕의 초상")가 판매되기 시작했다. 이 책은 왕실 정책을 옹호하는 내용으로, 효과적인 왕당파 선전물로 입증되었다. 존 밀턴은 의회 측의 반박서인 『에이코노클라스테스』("성상 파괴자")를 썼지만, 왕당파 책의 비극적인 감동에 비하면 큰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성공회와 왕당파는 찰스 1세를 순교자의 이미지로 만들었으며, 1660년 캔터베리 및 요크 교구 회의에서 '순교왕 찰스'는 잉글랜드 성공회의 전례력에 추가되었다. 고교회파 성공회 신자들은 그의 사망 기념일에 특별 예배를 드렸다. 팰머스와 로열 턴브리지 웰스의 교회들, 그리고 '순교왕 찰스 협회'와 같은 성공회 신앙 단체들은 그의 명예를 기리기 위해 설립되었다.
7.2. 예술품 수집 및 후원
1623년 스페인 궁정을 방문한 경험에 부분적으로 영감을 받아, 찰스 1세는 열정적이고 박식한 예술품 수집가가 되었고, 역사상 가장 훌륭한 예술품 컬렉션 중 하나를 구축했다. 스페인에서 그는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스케치 모델이 되었고, 티치아노와 코레조 등의 작품을 구입했다. 잉글랜드에서는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연회장 천장화와 헤라르트 판 혼토르스트, 다니엘 마이텐스, 안토니 반 다이크와 같은 저지대 국가 예술가들의 그림을 의뢰했다. 제1대 버킹엄 공작 조지 빌리어즈와 제21대 애런델 백작 토머스 하워드를 포함한 그의 측근들은 그의 관심을 공유했으며, '화이트홀 그룹'으로 불렸다. 1627년과 1628년, 찰스 1세는 만토바 공작의 전체 컬렉션을 구입했는데, 여기에는 티치아노, 코레조, 라파엘로, 카라바조, 안드레아 델 사르토, 안드레아 만테냐의 작품이 포함되었다. 그의 컬렉션은 잔 로렌초 베르니니, 피터르 브뤼헐 더 아우더, 레오나르도 다 빈치, 한스 홀바인, 벤체슬라우스 홀라르, 틴토레토, 파올로 베로네세의 작품, 그리고 알브레히트 뒤러와 렘브란트의 자화상까지 포함하며 더욱 확장되었다. 찰스 1세가 사망할 무렵, 약 1,760점의 그림이 있었으며, 이들 대부분은 의회에 의해 판매되고 분산되었다.
7.3. 역사적 평가 및 비판
존 필립스 케년의 말처럼, "찰스 스튜어트는 모순과 논쟁의 인물"이다. 그를 성스러운 순교자로 여겼던 고교회파 토리당원들에게는 숭배받았지만, 그를 이중적이고 망상적이라고 생각했던 새뮤얼 로슨 가디너와 같은 휘그 역사학파 역사가들에게는 비난받았다. 최근 수십 년 동안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그를 비판했으며, 케빈 샤프만이 더 동정적인 견해를 제시했지만, 이는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샤프는 국왕이 양심적인 역동적인 인물이었다고 주장했지만, 배리 카워드는 찰스 1세를 "헨리 6세 이후 잉글랜드에서 가장 무능한 군주"라고 평가했으며, 로널드 허튼도 이 견해에 동의하며 그를 "중세 이후 우리가 가졌던 최악의 왕"이라고 불렀다.
전쟁 중 의회에 의해 참수된 윌리엄 로드 대주교는 찰스 1세를 "위대해지는 법을 알지도, 위대하게 만들어지는 법도 몰랐던 온화하고 우아한 군주"라고 묘사했다. 찰스 1세는 아버지보다 더 침착하고 세련되었지만, 고집이 강했다. 그는 자신에게 파멸을 가져온 인기 없는 정책들을 의도적으로 추구했다. 찰스 1세와 제임스 1세 모두 왕권신수설의 옹호자였지만, 제임스 1세의 절대주의적 특권에 대한 야망은 신민들과의 타협과 합의로 완화되었던 반면, 찰스 1세는 타협하거나 자신의 행동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믿었다. 그는 자신이 오직 신에게만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군주들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설명할 의무가 없으며, 오직 신에게만 설명할 의무가 있다"고 썼다.
7.4. 영향: 군주제와 의회
군주제가 전복되면서 잉글랜드는 공화국 또는 '잉글랜드 연방'이 되었다. 상원은 잔부의회에 의해 폐지되었고, 잉글랜드 국무원이 행정권을 장악했다. 영국과 아일랜드의 모든 중요한 군사적 반대 세력은 올리버 크롬웰의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크롬웰은 1653년 잔부의회를 강제로 해산하고, 자신을 호국경으로 하는 호국경 시대를 수립했다. 1658년 그의 사망 후, 그의 무능한 아들 리처드 크롬웰이 잠시 뒤를 이었다. 의회는 복원되었고, 1660년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가 국왕으로 즉위하며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찰스 1세가 1642년 하원 회의실을 침범한 전례 없는 사건은 의회 자유에 대한 심각한 침해였으며, 그의 다섯 의원 체포 시도 실패는 매년 의회 개원식에서 기념된다.
8. 사생활
찰스 1세의 사생활은 그의 결혼과 자녀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8.1. 결혼과 가족 (자녀)

찰스 1세는 프랑스 공주 앙리에트 마리 드 프랑스와 결혼하여 9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그 중 5명이 성인으로 성장했다. 그의 두 아들은 훗날 왕위에 올랐고, 두 자녀는 태어나자마자 또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찰스 제임스, 콘월 공작 겸 로스시 공작 | 1629년 5월 13일 | 1629년 5월 13일 | 태어난 날 사망. "웨일스 공 찰스"로 매장됨. |
찰스 2세 | 1630년 5월 29일 | 1685년 2월 6일 | 1662년 브라간사의 캐서린과 결혼. 합법적인 자녀는 없으나, 많은 서자들을 두었음. |
프린세스 로열 메리 | 1631년 11월 4일 | 1660년 12월 24일 | 1641년 오라녜 공 빌럼 2세와 결혼. 자녀 1명: 빌럼 3세. |
제임스 2세 | 1633년 10월 14일 | 1701년 9월 6일 | (1) 1659년 앤 하이드와 결혼. 메리 2세와 앤을 포함한 자녀를 두었음. (2) 1673년 모데나의 메리와 결혼. 자녀를 두었음. |
엘리자베스 | 1635년 12월 29일 | 1650년 9월 8일 | 젊은 나이에 사망. |
앤 스튜어트 | 1637년 3월 17일 | 1640년 11월 5일 | 젊은 나이에 사망. |
캐서린 스튜어트 | 1639년 6월 29일 | 1639년 6월 29일 | 태어난 날 사망. |
헨리, 글로스터 공작 | 1640년 7월 8일 | 1660년 9월 13일 | 자녀 없음. |
헨리에타 | 1644년 6월 16일 | 1670년 6월 30일 | 1661년 오를레앙 공 필리프 1세와 결혼. 자녀를 두었음. |
9. 작위, 칭호 및 영예
찰스 1세는 왕세자 시절부터 왕위에 오르기까지 다양한 작위와 칭호를 보유했으며, 여러 영예를 받았다.
9.1. 작위 및 칭호
- 1600년 11월 19일 ~ 1625년 3월 27일: 찰스 왕자
- 1600년 12월 23일 ~ 1625년 3월 27일: 올버니 공작, 오먼드 후작, 로스 백작, 아드마녹 영주
- 1605년 1월 6일 ~ 1625년 3월 27일: 요크 공작
- 1612년 11월 6일 ~ 1625년 3월 27일: 콘월 공작 및 로스시 공작
- 1616년 11월 4일 ~ 1625년 3월 27일: 웨일스 공 및 체스터 백작
- 1625년 3월 27일 ~ 1649년 1월 30일: 폐하
잉글랜드 국왕으로서 찰스 1세의 공식 칭호는 "찰스, 신의 은총으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프랑스, 아일랜드의 국왕, 신앙의 수호자 등"이었다. "프랑스의"라는 칭호는 명목상이었으며, 에드워드 3세부터 조지 3세까지 모든 잉글랜드 군주가 실제로 프랑스 영토를 얼마나 통제했는지와 관계없이 사용했다. 그의 사형 집행 영장에는 그를 "찰스 스튜어트, 잉글랜드 국왕"이라고 칭했다.
9.2. 영예
- KB: 바스 기사, 1605년 1월 6일 수훈
- KG: 가터 기사, 1611년 4월 24일 수훈
9.3. 문장
요크 공작으로서 찰스 1세는 왕국의 왕실 문장을 사용했으며, 세 개의 점이 있는 은색 레이블로 구별되었고, 각 점에는 세 개의 붉은색 토르토가 있었다. 웨일스 공으로서는 세 개의 점이 있는 평범한 은색 레이블로 구별되는 왕실 문장을 사용했다.
국왕으로서 찰스 1세는 구별 없는 왕실 문장을 사용했다. 사분할되었으며, 1사분면과 4사분면은 청색 바탕에 세 개의 황금색 플뢰르 드 리스 (프랑스 상징)와 적색 바탕에 세 마리의 황금색 사자가 파상으로 그려져 있었다 (잉글랜드 상징). 2사분면은 황금색 바탕에 붉은색 트레슈르 안에 붉은색 사자가 램펀트 자세로 그려져 있었다 (스코틀랜드 상징). 3사분면은 청색 바탕에 은색 현이 있는 황금색 하프가 그려져 있었다 (아일랜드 상징). 스코틀랜드에서는 스코틀랜드 문장이 1사분면과 4사분면에, 잉글랜드와 프랑스 문장이 2사분면에 배치되었다.
10. 조상
찰스 1세의 조상 가계도는 다음과 같다.
- 1. 찰스 1세
- 2. 제임스 1세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
- 4. 헨리 스튜어트, 단리 경
- 8. 매슈 스튜어트, 레녹스 백작
- 9. 마거릿 더글러스
- 5.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 10.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5세
- 11. 기즈의 메리
- 4. 헨리 스튜어트, 단리 경
- 3. 덴마크의 앤
- 6. 덴마크의 프레데리크 2세
- 12.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3세
- 13. 작센-라우엔부르크의 도로테아
- 7. 메클렌부르크의 조피
- 14. 메클렌부르크의 울리히 3세
- 15. 덴마크의 엘리자베트
- 6. 덴마크의 프레데리크 2세
- 2. 제임스 1세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