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지펑페이는 중국 산시성 윈청시 린이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1.1. 출생과 가족
지펑페이는 1910년 2월 2일 산시성 윈청시 린이현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지훙빈(姬宏邠)이었고, 초기에는 지뤄(吉洛)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졌다. 그의 배우자는 쉬한빙(徐寒冰)이다.
1.2. 교육
지펑페이는 중국 인민해방군에 입대한 후 군의관 훈련을 받았다. 그는 오랫동안 부대 내의 위생 및 정치 업무에 관여하며 전문성을 쌓았다.
2. 혁명 경력
지펑페이는 중국 혁명 과정에 일찍이 참여하여 중국공산당과 중국 인민해방군의 핵심 인물로 성장했다.
2.1. 중국 인민해방군 입대
지펑페이는 1931년 닝두 봉기 이후 중국 홍군에 입대하며 군 경력을 시작했다.
2.2. 중국공산당 입당 및 활동
그는 1933년에 중국공산당에 입당했으며, 대장정에도 참여한 오랜 경력의 당원이었다.
3. 외교 및 공직 경력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지펑페이는 주로 외교 분야에서 활동하며 중국의 국제적 위상 확립에 기여했고, 이후 다양한 고위 공직을 역임하며 국가 정책 결정에 참여했다.
3.1. 외교부 활동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후, 지펑페이는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에서 일하며 외교관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3.1.1. 동독 주재 대사
지펑페이는 동독으로 외교 임무를 이끌었으며, 1950년 9월 동독 주재 대사로 임명되어 1955년 1월까지 재직했다. 특히 1953년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초대 동독 주재 대사로 공식 임명되었는데, 당시 43세의 나이로 중국 최연소 대사였다.
3.1.2. 외교부 차관
1955년, 그는 외교부 부부장으로 소환되어 근무했다. 이후 저우언라이 (1949년~1958년 외교부장)와 천이 (1958년~1972년 외교부장)와 함께 중국 외교를 이끄는 핵심 인물 중 한 명으로 활약했다.
3.1.3. 외교부 장관
1972년 6월 천이의 사망 이후, 지펑페이는 외교부장직을 대행하다가 같은 해 정식으로 외교부장에 임명되어 1974년 11월까지 재직했다. 이 시기에 그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도 선출되었다.
3.2. 중일 공동 성명 서명
1972년, 지펑페이는 일본의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 오히라 마사요시 외무상, 그리고 중국의 저우언라이 총리와 함께 중일 공동 성명에 서명했다. 이 성명은 중일 국교 정상화를 실현하는 역사적인 문서로 평가받는다.
3.3. 문화대혁명 시기 활동
문화대혁명이 발발했을 때, 지펑페이는 천이와 차오관화와 더불어 외교부를 지배하는 '반혁명파'의 일원으로 지목되어 초기에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직무에 남아 상대적으로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1972년 천이 사망 후에는 외교부장직을 대행하며 혼란스러운 시기에도 외교 업무를 수행했다.
3.4. 문화대혁명 이후의 주요 직책
문화대혁명 이후의 시기에 지펑페이는 여러 중요한 직책을 맡으며 중국의 재건과 개혁에 기여했다.
3.4.1.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그는 1975년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의 총서기로 임명되었고, 1978년에 공식적으로 확인되어 1979년까지 이 직책을 수행했다. 또한 1978년 3월부터 1983년 6월까지 제5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을 겸임했다.
3.4.2. 국무원 및 당 직책
1979년, 지펑페이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대외연락부의 부장으로 임명되어 1982년까지 재직했다. 1980년부터 1982년까지는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의 부총리 겸 비서장을 역임했다. 그는 또한 연장자 공무원들의 은퇴를 돕기 위해 설립된 당 기구인 중국공산당 중앙고문위원회의 상임위원으로 1985년 9월부터 1992년 10월까지 활동했다.
3.4.3. 홍콩 및 마카오 사무 담당
1983년부터 1990년까지 국무원홍콩마카오사무판공실 주임을 맡아 홍콩과 마카오의 중국 반환 사전 준비를 담당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홍콩 특별행정구 기본법 초안 작성 위원회 주임을 겸임했으며, 홍콩 문제에 관한 중영 공동 선언 조인식에도 참석했다.
4. 개인사 및 논란
지펑페이의 말년은 아들의 부패 사건과 그로 인한 사망 관련 의혹으로 얼룩졌다.
4.1. 아들의 부패 사건
1999년, 지펑페이의 아들인 지성더(姬胜德)는 중국 인민해방군 정보부의 고위 간부였다. 그는 기밀 정보를 팔고 공적 자금을 횡령한 부패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지성더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훔친 돈을 반환하고 다른 비리 사실을 폭로하면서 형량이 20년 징역형으로 감형되었다. 일부 소식통에 따르면 그의 형량은 무기징역으로 변경되기도 했다.
4.2. 사망 관련 의혹
지펑페이는 2000년 2월 10일 베이징에서 9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 경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아들의 부패 사건과 관련하여 장쩌민 당시 총서기에게 아들의 무고함을 주장했으나 거절당하자 이에 항의하며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논란으로 인해 그의 장례식은 조용하게 치러졌으며, 2001년 10월 신화통신사에서 발표된 그의 사망 기사 또한 매우 간략했다.
5. 평가 및 유산
지펑페이는 중국 외교의 초석을 다지고 국가 발전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지만, 말년의 사건들은 그의 유산에 복합적인 그림자를 드리웠다.
5.1. 긍정적 평가
지펑페이는 신화통신사에 의해 "뛰어난 공산주의 투사"이자 "외교 전선의 걸출한 지도자"로 칭송받았다. 그는 중화인민공화국 초기 외교 체계 구축과 국제 관계 확립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5.2. 기념 및 추모
2010년 2월 22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는 지펑페이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좌담회가 개최되어 그의 업적과 공헌을 다시 한번 높이 평가하고 추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