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제임스 조지프 콜린스(James Joseph Collins영어, 1870년 1월 16일 ~ 1943년 3월 6일)는 미국의 프로 야구 선수이자 감독이었다. 그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14시즌 동안 3루수로 활약했으며, 특히 혁신적인 수비와 뛰어난 타격 능력을 겸비한 선수로 평가받는다. 콜린스는 번트 타구를 처리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이며 현대 3루수 수비의 개척자로 여겨진다. 선수 경력 동안 통산 타율 .294, 65홈런, 1055득점, 983타점을 기록했으며, 1898년 내셔널 리그 홈런왕을 차지하기도 했다.
선수 생활과 병행하여 보스턴 아메리칸스 (현 보스턴 레드삭스)의 초대 선수 겸 감독을 맡아 팀을 이끌었다. 그는 1903년 월드 시리즈에서 피츠버그 파이리츠를 꺾고 보스턴 아메리칸스를 초대 챔피언으로 이끌며 역사적인 우승을 달성했다. 그의 리더십 아래 보스턴 아메리칸스는 1903년과 1904년 두 차례 아메리칸 리그 페넌트를 우승했다.
콜린스는 1945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3루수로서 최초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수비 혁신과 초기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 기여한 바는 후대 야구 선수들과 팀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은퇴 후에는 고향인 버펄로에서 공원부에서 일했으며, 1943년 폐렴으로 사망했다.
2. 생애
콜린스는 뉴욕주 나이아가라폴스에서 태어나 버펄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세인트조지프 전문대학을 졸업한 후 철도 회사에서 일하며 프로 야구 경력을 시작했다.
2.1. 출생 및 어린 시절
제임스 조지프 콜린스는 1870년 1월 16일 미국 뉴욕주 나이아가라폴스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버펄로 시티 리그에서 야구를 하며 성장했다.
2.2. 교육
콜린스는 세인트조지프 전문대학을 졸업하며 학업을 마쳤다.
2.3. 초기 경력 개발
학업을 마친 후 콜린스는 델라웨어-라카와나-웨스턴 철도에서 일했다. 그는 1893년 이스턴 리그 소속의 버펄로 바이슨스에서 프로 야구 경력을 시작했다. 당시 이스턴 리그는 현재의 인터내셔널 리그의 전신이었다.
3. 선수 경력
콜린스는 마이너 리그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인 후 메이저 리그에 데뷔하여 내셔널 리그와 아메리칸 리그에서 3루수로서 혁신적인 수비와 뛰어난 타격 능력을 선보였다. 특히 보스턴 아메리칸스의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하며 팀을 초대 월드 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3.1. 마이너 리그
콜린스는 1893년 이스턴 리그 소속의 버펄로 바이슨스에서 프로 야구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그 시즌에 주로 유격수로 출전하여 76경기에서 타율 .286을 기록했다. 1894년에는 바이슨스에 의해 외야수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외야수로서 125경기에서 타율 .352와 9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시즌 종료 후, 그의 계약은 보스턴 비니터스 (현재의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에 의해 500 USD에 인수되었다.
3.2. 메이저 리그 데뷔 및 내셔널 리그 활약
콜린스는 1895년 보스턴 비니터스에서 우익수로 10경기를 뛰며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경력을 시작했다. 같은 해 5월 19일, 그는 다시 500 USD에 루이빌 커늘스로 이적되었다. 루이빌에서 그는 곧 팀의 주전 3루수가 되었고, 시즌 남은 기간 동안 타율 .279를 기록했다. 그의 더 큰 영향력은 수비에서 나타났는데, 그는 번트 안타의 수를 줄이기 위해 뒤로 물러서기보다는 잔디 위에서 전진하여 수비했다. 당시 스포팅 가이드지는 그의 수비를 "매가 먹이를 낚아채듯"이라고 묘사했다.

1895년 시즌 후, 콜린스는 보스턴 비니터스로 돌아왔다. 시즌 초반에는 조 해링턴이 팀의 주전 3루수였으나, 콜린스는 곧 주전 자리를 차지했고, 해링턴은 7월에 방출되었다. 콜린스는 1897년 타율 .346를 기록하고 132 타점을 올리며 뛰어난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이 해 척살과 보살 부문 모두에서 리그 선두를 기록했으며, 이 업적은 1900년에도 다시 달성했다. 1898년에는 타율 .328 (리그 7위), 111 타점을 기록하고 리그 최다인 15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인상적인 시즌을 보냈다.
3.3. 아메리칸 리그 이적 및 선수 겸 감독
1900년 시즌이 끝난 후, 당시 최고의 3루수로 평가받던 콜린스는 새로 창설된 아메리칸 리그의 보스턴 아메리칸스 (현재의 보스턴 레드삭스)로부터 감독직을 제안받았다. 그는 5500 USD의 연봉, 3500 USD의 계약 보너스, 그리고 팀 수익의 일부를 받는 조건으로 이 제안을 수락했다. 이는 보스턴 비니터스의 구단주 아서 소든이 그를 붙잡으려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일이었다.
콜린스와 소든은 언론을 통해 서로를 비난했다. 콜린스는 더 나아가 내셔널 리그 구단주들이 선수들의 급여를 억제하기 위해 공모했다고 비난하며 "만약 그들이 팀 전체를 준다고 해도 나는 이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콜린스는 사이 영을 포함한 다른 내셔널 리그 스타 선수들을 보스턴 아메리칸스로 영입했다. 선수 겸 감독으로서 첫 시즌에 그는 팀을 시카고 화이트삭스에 4경기 뒤진 2위로 이끌었다.
3.4. 월드 시리즈 우승
1902년, 콜린스는 부상으로 인해 108경기 출전에 그쳤고, 보스턴 아메리칸스는 3위로 시즌을 마쳤다. 이 시즌에 그는 팀 역사상 첫 인사이드 더 파크 그랜드 슬램을 기록했다. 다음 시즌인 1903년, 콜린스는 보스턴 아메리칸스를 첫 아메리칸 리그 페넌트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를 14.5경기 차이로 제치고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아메리칸 리그와 내셔널 리그 우승팀이 9전 5선승제의 "월드 시리즈"에서 맞붙기로 합의하면서, 보스턴 아메리칸스는 아메리칸 리그를 대표하게 되었다. 시리즈 초반 홈에서 3경기 중 2경기를 패하고, 피츠버그에서 열린 첫 경기도 패했지만, 보스턴 아메리칸스는 피츠버그에서 다음 3경기를 연달아 승리했다. 이후 홈으로 돌아와 보스턴에서 8차전을 승리하며 역사상 첫 월드 시리즈 챔피언이 되었다. 콜린스 자신은 이 시리즈에서 타율 .250을 기록했으며, 2개의 3루타와 5개의 득점을 올렸다.
3.5. 후기 경력 및 은퇴
1904년에도 보스턴 아메리칸스는 페넌트를 다시 우승했다. 콜린스는 타율 .271을 기록했으며, 8시즌 중 5번째로 리그 척살 부문에서 선두를 차지했다. 그러나 존 맥그로 감독이 이끄는 뉴욕 자이언츠가 포스트시즌 대결을 거부하면서 보스턴 아메리칸스는 자신들의 타이틀을 방어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1905년, 보스턴 아메리칸스는 4위로 미끄러졌다. 콜린스는 팀 회장 존 I. 테일러와 갈등을 겪었으며, 시즌 도중 팀을 그만두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선수로서 콜린스는 타율 .276을 기록했지만, 부상으로 인해 다시 출전 시간을 놓쳤다. 1906년, 콜린스는 팀의 최하위 부진과 함께 두 차례 출장 정지를 당했고, 결국 칙 스탈에게 감독직을 넘겨주었다. 또한 무릎 부상으로 시즌 막판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콜린스는 1907년 시즌을 보스턴 아메리칸스와 함께 시작했지만, 그의 팀 이적은 시간 문제였다. 스프링 트레이닝 기간 중 칙 스탈이 자살하는 불분명한 사건이 발생했고, 보스턴 아메리칸스는 콜린스 대신 사이 영을 감독으로 임명했다. 이후 시즌 첫 3개월 안에 조지 허프와 밥 웅갈로브가 차례로 감독직을 맡았다. 보스턴 아메리칸스에서 41경기를 뛴 후, 콜린스는 6월 내야수 존 나이트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로 이적했다. 그는 타율 .278을 기록했지만, 당시까지 경력 최저인 .330의 장타율을 기록했으며, 경력 처음으로 홈런을 치지 못했다. 1908년에는 타율 .217로 더욱 부진했고, 결국 방출되었다.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경력이 끝난 후에도 콜린스는 마이너 리그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1909년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 소속의 미니애폴리스 밀러스에서 뛰었고, 은퇴하기 전까지 2시즌 동안 이스턴 리그의 프로비던스 그레이스에서 활약했다.
4. 감독 경력
콜린스는 보스턴 아메리칸스의 초대 감독으로서 팀을 이끌며 두 차례 아메리칸 리그 페넌트 우승과 역사적인 첫 월드 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그는 선수 영입과 팀 운영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후기에는 팀 부진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4.1. 보스턴 아메리칸스 감독
콜린스는 보스턴 아메리칸스 (현 보스턴 레드삭스)의 초대 감독을 역임했다. 그는 1901년부터 1906년까지 팀을 이끌었으며, 이 기간 동안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했다. 감독으로서 첫 시즌인 1901년에는 팀을 시카고 화이트삭스에 4경기 뒤진 2위로 이끌었다. 1903년에는 보스턴 아메리칸스를 첫 아메리칸 리그 페넌트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같은 해 월드 시리즈에서 피츠버그 파이리츠를 5승 3패로 꺾고 초대 월드 시리즈 우승 감독이 되었다. 1904년에도 팀을 아메리칸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으나, 뉴욕 자이언츠의 존 맥그로 감독이 대결을 거부하여 월드 시리즈는 열리지 않았다. 1906년 시즌 중 팀의 부진(최하위)과 개인적인 문제로 인해 칙 스탈에게 감독직을 넘겨주었다.
4.2. 감독으로서의 전술 및 운영
선수 겸 감독으로서 콜린스는 팀의 리더십을 직접 수행했다. 그는 사이 영과 같은 내셔널 리그의 스타 선수들을 보스턴 아메리칸스로 영입하며 팀 전력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감독 재임 기간 동안 보스턴 아메리칸스는 초기 아메리칸 리그의 경쟁 속에서 꾸준히 상위권을 유지하며 뛰어난 운영 능력을 보여주었다.
연도 | 팀 | 리그 | 경기 수 | 승 | 패 | 승률 | 순위 | 비고 |
---|---|---|---|---|---|---|---|---|
1901년 | BOS | AL | 138 | 79 | 57 | .581 | 2위 | |
1902년 | BOS | AL | 138 | 77 | 60 | .562 | 3위 | |
1903년 | BOS | AL | 141 | 91 | 47 | .659 | 1위 | 월드 시리즈 우승 |
1904년 | BOS | AL | 157 | 95 | 59 | .617 | 1위 | 월드 시리즈 미개최 |
1905년 | BOS | AL | 153 | 78 | 74 | .513 | 4위 | |
1906년 | BOS | AL | 115 | 35 | 79 | .307 | 8위 | 8월 25일 해고 (선수로 잔류) |
총계 | 842 | 455 | 376 | .548 |
5. 주요 업적 및 수상
콜린스는 3루수로서 번트 타구 처리 등 현대적인 수비 방식을 개척하며 야구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메이저 리그 통산 타율 .294, 65홈런 등 뛰어난 기록을 남겼으며, 1898년 내셔널 리그 홈런왕을 차지하는 등 여러 개인 타이틀을 획득했다.
5.1. 수비적 혁신
콜린스는 특히 그의 수비 능력으로 높이 평가받았다. 그는 번트 타구를 처리하는 능력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었으며, 데뷔 이전에는 3루수 라인으로 향하는 번트 타구를 주로 유격수가 처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콜린스는 3루수의 현대적인 수비 플레이를 개척한 인물로 여겨진다. 그는 번트 안타의 수를 줄이기 위해 뒤로 물러서기보다는 잔디 위에서 전진하여 수비했다. 2012년 기준으로, 그는 브룩스 로빈슨에 이어 3루수의 통산 척살 기록에서 역대 2위를 차지하고 있다. 일본 소스에서는 그의 수비를 "매가 먹이를 낚아채듯"이라고 묘사했다고 언급한다.
5.2. 통산 기록 및 타이틀
콜린스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14시즌 동안 활약했다. 그의 통산 기록은 다음과 같다: 타율 .294, 65 홈런, 1055 득점, 983 타점, 1999 안타, 352 2루타, 116 3루타, 194 도루. 개인 타이틀로는 1898년 내셔널 리그 홈런왕을 한 차례 차지했다 (15개). 그는 1897년과 1900년에 내셔널 리그에서 척살과 보살 부문 모두에서 리그 선두를 기록했다. 1904년에는 8시즌 중 5번째로 리그 척살 부문에서 선두를 차지했다.
6. 명예의 전당 및 평가
콜린스는 1945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3루수로서 최초로 헌액되었으며, 그의 혁신적인 수비와 리더십은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팀 운영에서의 갈등이나 특정 목록에서 제외된 사례 등 일부 비판과 논란도 존재한다.
6.1. 명예의 전당 헌액
콜린스는 1945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그는 주로 3루수로서 선정된 최초의 선수였다. 1981년 로런스 리터와 도널드 호니그는 그들의 저서 《역대 위대한 야구 선수 100인》 (The 100 Greatest Baseball Players of All Time)에 콜린스를 포함시켰다. 1985년, 콜린스는 버펄로 야구 명예의 전당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

6.2. 긍정적 평가
콜린스는 3루수 포지션의 현대적인 수비 방식을 개척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특히 번트 타구 처리 능력은 그의 독보적인 수비 기여로 꼽힌다. 그는 아메리칸 리그 초창기 보스턴 아메리칸스의 선수 겸 감독으로서 팀을 이끌고 초대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는 그의 리더십과 전술적 역량을 보여주는 중요한 업적이다. 선수로서도 내셔널 리그에서 타율 .346, 132타점, 15홈런(리그 최다) 등 뛰어난 공격력을 보여주며 공수 겸장의 면모를 과시했다. 그의 이름은 여러 야구 명예의 전당에 오르고, 위대한 선수 목록에 포함되는 등 야구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6.3. 비판 및 논란
콜린스는 1905년 보스턴 아메리칸스의 팀 회장 존 I. 테일러와 갈등을 겪었으며, 시즌 도중 팀을 그만두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1906년에는 팀이 최하위를 기록하는 부진 속에서 두 차례 출장 정지를 당했고, 결국 감독직에서 해임되었다. 이는 그의 감독 경력에서 부정적인 측면으로 기록된다. 1900년 시즌 후 아메리칸 리그로 이적할 당시, 그는 내셔널 리그 구단주들이 선수들의 급여를 억제하기 위해 공모했다고 비난하며 언론과의 갈등을 겪기도 했다. 1976년 에스콰이어 잡지의 기사에서 스포츠 기자 해리 스타인이 발표한 "역대 올스타 논쟁 유발자"라는 5개 민족별 야구 팀 목록에서, 공간 제약 때문에 콜린스가 포함된 아일랜드계 팀이 생략된 일화가 있었다. 이는 그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평가에서 제외되거나 간과될 수 있었던 상황을 보여준다.
7. 개인 생활
콜린스는 1907년 사라 머피와 결혼하여 두 딸을 두었다. 야구 선수 생활에서 은퇴한 후, 그들은 고향인 버펄로로 돌아갔다. 콜린스는 버펄로 공원부에서 일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는 1943년 3월 6일, 73세의 나이로 폐렴으로 사망했다.
8. 영향력
콜린스는 3루수 수비의 혁신을 통해 후대 야구 선수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초기 메이저 리그의 발전에 기여했다. 또한 그의 삶은 대중문화, 특히 음악 작품의 영감이 되기도 했다.
8.1. 후대에 미친 영향
콜린스는 3루수 포지션의 수비 방식을 혁신하여 후대 선수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번트 타구에 대한 그의 전진 수비는 현대 야구의 3루수 수비의 기초를 다졌다. 그의 선수 겸 감독으로서의 성공적인 리더십은 초기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새로운 리그의 정착과 팀의 성장에 중요한 본보기가 되었다. 그는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3루수로서 최초로 헌액된 인물로서, 이 포지션의 중요성을 확립하고 후대 3루수들의 명예의 전당 입성에 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8.2. 대중문화 속 모습
보스턴 기반의 셀틱 펑크 밴드 드롭킥 머피스는 2013년 앨범 《사인드 앤 실드 인 블러드》 (Signed and Sealed in Blood)에 "지미 콜린스의 장례식" (Jimmy Collins' Wake)이라는 곡을 수록했다. 이 곡은 원래 리처드 존슨이 작사했으며, 뉴욕주 버펄로에 있는 현재 K.O. 바 앤 그릴에서 열린 콜린스의 장례식을 다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