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즈엉녓레(Dương Nhật Lễ양일례베트남어, ? ~ 1370년 12월 14일)는 대월(Đại Việt대월베트남어) 쩐 왕조(Nhà Trần쩐 왕조베트남어)의 제8대 황제로, 1369년부터 1370년까지 재위했다. '혼덕공(Hôn Đức Công혼덕공베트남어)'으로도 불리는 그는 쩐 왕조의 혈통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쩐 유종(Trần Dụ Tông진유종베트남어) 황제의 유언에 따라 황위에 올랐다. 그의 즉위는 비(非) 쩐씨 혈통이라는 점에서 심각한 정통성 논란을 야기했다.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즈엉녓레는 국정 운영을 태만히 하고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었으며, 자신의 성씨를 본래의 즈엉씨로 되돌리려 시도하여 황실과 신하들의 큰 반발을 샀다. 이는 결국 두 차례의 정변으로 이어졌고, 특히 쩐푸(Trần Phủ진부베트남어, 훗날 쩐 예종(Trần Nghệ Tông진예종베트남어))가 주도한 두 번째 정변으로 폐위된 후 아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즈엉녓레의 혼란스러운 통치는 쩐 왕조의 쇠퇴와 멸망을 가속화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된다.
2. 출생과 배경
즈엉녓레의 출생과 배경은 그의 황위 계승에 대한 정통성 논란의 핵심 원인이 되었다. 그는 배우 부모에게서 태어났으나 왕족에게 입양되어 황실의 일원이 되었다.
2.1. 부모와 어린 시절
즈엉녓레는 배우 즈엉크엉(Dương Khương양강베트남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무용수이자 미인이었으며, 연극에서 '서왕모(西王母서왕모중국어)' 역을 자주 맡아 '왕모(王母왕모중국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당시 유교 사회에서 배우는 천한 직업으로 여겨졌다. 즈엉녓레의 어머니가 임신했을 때, 쩐 명종(Trần Minh Tông진명종베트남어)의 아들이자 쩐 유종의 이복형인 공숙왕(Cung Túc Vương공숙왕베트남어) 쩐응우옌죽(Trần Nguyên Dục진원욱베트남어)이 그녀의 미색에 반해 아내로 삼았다. 즈엉녓레는 1349년에 태어나 궁중에서 쩐응우옌죽의 아들로 길러지며 쩐씨 성을 갖게 되었다.
2.2. 입양과 왕위 계승 준비
쩐 명종의 적장자였던 즈엉녓레의 양아버지 공숙왕 쩐응우옌죽은 명종에게 무능하거나 오만하다고 여겨져 황위를 계승하지 못하고, 대신 그의 이복동생인 쩐 유종이 황위에 올랐다. 쩐 유종은 자녀가 없었기에, 1369년 5월 25일(음력) 병으로 위독해지자 죽기 직전 즈엉녓레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는 조서를 내렸다. 유종이 사망한 후, 황실과 신하들은 즈엉녓레가 쩐 왕조의 혈통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의 즉위를 강력히 반대했으며, 이는 황통의 단절을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황실에서는 고 유종의 유언에 반하여 공정왕 쩐푸를 옹립하려는 계획까지 있었다. 그러나 헌자황태후(Hiến Từ Hoàng Thái Hậu헌자황태후베트남어)는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369년 6월 15일(음력) 즈엉녓레를 입궁시켜 즉위하도록 했다. 헌자황태후는 공숙왕 쩐응우옌죽이 명종의 적장자였음에도 일찍 죽어 황위를 계승하지 못했으니, 그의 아들인 즈엉녓레가 후계자로서 황위를 계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3. 즉위 과정
즈엉녓레의 황제 즉위는 그의 비(非) 쩐 왕조 혈통으로 인해 심각한 정통성 논란을 야기했으며, 이는 쩐 왕조의 혼란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3.1. 황제 승계의 논란
쩐 유종의 죽음 이후, 즈엉녓레의 황위 계승은 쩐 왕조의 전통적인 계승 규범을 위반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심각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황실과 신하들은 즈엉녓레가 쩐 왕조의 혈통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의 즉위를 강력히 반대했으며, 이는 황통의 단절을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부 신하들은 고 유종의 유언에 반하여 공정왕 쩐푸를 옹립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이러한 즈엉녓레의 즉위는 후대 사관들에게 쩐 왕조에 혼란기를 가져온 '황당한 거동'으로 맹렬히 비판받았다.
3.2. 즉위와 개원
즈엉녓레는 1369년 6월 15일(음력) 헌자황태후의 지지 아래 황제로 즉위했다. 즉위 직후 그는 연호를 '다이딘(Đại Định대정베트남어)'(1369년~1370년)으로 선포하며 '위대한 평화'를 표방했다. 그는 양아버지인 공숙왕 쩐응우옌죽을 '황태백(Hoàng Thái Bá황태백베트남어)'으로 추증하고, 8월에는 헌자황태후와 쩐 유종의 황후인 의성황후(Nghi Thánh Hoàng Hậu의성황후베트남어)를 각각 태황태후와 황태후로 책봉했다. 또한, 공정왕 쩐푸의 딸 쩐씨를 황후로 삼았다. 그는 쩐 유종의 이복형제들인 공정왕 쩐응우옌짝(Trần Nguyên Trác진원탁베트남어)을 태재(太宰태재중국어)로, 공정왕 쩐푸를 태사(太師태사중국어)로, 공선왕(Cung Tuyên Vương공선왕베트남어) 쩐낀(Trần Kính진경베트남어)을 우상국(右相國우상국중국어)으로 임명했다. 같은 시기, 명나라 사절단이 쩐 유종에 대한 책봉을 위해 대월에 도착했으나, 즈엉녓레(명나라와의 외교명은 쩐녓끼엔(Trần Nhật Kiên진일견베트남어))는 명나라 사신 장이닝(张以宁장이닝중국어)으로부터 책봉을 거부당했다. 이에 즈엉녓레는 도순흠(Đỗ Thuấn Khâm두순흠베트남어)을 명나라에 파견하여 유종의 부고를 알리고 책봉을 요청했다.
즈엉녓레의 연호는 다음과 같다.
혼덕공 | 원년 | 2년 |
---|---|---|
서력 | 1369년 | 1370년 |
간지 | 기유 | 경술 |
연호 | 대정 원년 | 2년 |
4. 통치와 정책
즈엉녓레의 통치는 국정 운영의 태만, 사치와 향락, 그리고 황실 내부의 심각한 갈등으로 얼룩져 쩐 왕조의 쇠퇴를 가속화했다.
4.1. 국정 운영과 개인적 향락
즈엉녓레는 선황제 쩐 유종과 마찬가지로 국정 운영을 소홀히 하고 개인적인 향락에 몰두했다. 그는 매일 술과 유흥에 빠져 지냈으며, 연극 관람과 유랑을 즐겼다. 심지어 자신의 친아버지인 배우 즈엉크엉을 궁중으로 불러들여 '영서가(令書家영서가중국어)'라는 직책을 맡기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무도한 행적은 황실과 신하들 모두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4.2. 왕실 내부의 갈등
즈엉녓레는 즉위한 지 약 반년 만인 1369년 12월 14일(음력) (1370년 1월 12일), 자신을 황위에 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헌자황태후를 독살하도록 명령했다. 이는 헌자황태후가 즈엉녓레의 즉위를 후회하기 시작했기 때문으로 전해진다. 그의 이러한 행적은 황실 내부의 심각한 갈등을 야기했다. 1370년 9월 20일(음력) (10월 9일), 명종의 황자이자 태재였던 쩐응우옌짝과 그의 아들 쩐응우옌띠엣(Trần Nguyên Tiết진원설베트남어), 그리고 명종의 황녀인 천녕공주(Thiên Ninh Công Chúa천녕공주베트남어)의 두 아들이 반란을 일으켜 즈엉녓레를 죽이려 했다. 즈엉녓레는 궁전 담장을 넘어 신교(新橋신교중국어) 아래에 숨어 목숨을 건졌다. 다음날, 즈엉녓레는 병사들을 이끌고 입궁하여 주모자들을 붙잡아 쩐응우옌짝과 쩐응우옌띠엣을 포함한 18명을 살해했다.
4.3. 성씨 변경 시도와 반발
즈엉녓레는 1370년 1월, 자신의 성씨를 본래의 즈엉씨(Dương양씨베트남어)로 되돌리려 시도했다. 이러한 그의 행보는 봉건 사회에서 이족(異族)이 황위에 오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당시의 사상과 정면으로 배치되었으며, 쩐 왕조의 종실과 백관들 모두에게 큰 실망과 분노를 안겨주었다. 이는 즈엉녓레의 통치에 대한 반발이 극에 달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결국 쩐 왕조의 종실들이 그를 축출하려는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5. 몰락과 죽음
즈엉녓레의 몰락은 황실 내부의 반발과 정변으로 시작되었으며, 결국 그는 폐위된 후 비참하게 처형되었다.
5.1. 정변과 폐위
1370년 9월, 즈엉녓레의 장인이자 태사(太師)였던 공정왕 쩐푸는 즈엉녓레가 쩐응우옌짝을 처형한 후 자신에게도 화가 미칠 것을 우려하여 타강진(Đà Giang타강진베트남어)으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그는 동생인 공선왕 쩐낀, 장숙상후(Chương Túc Thượng Hầu장숙상후베트남어) 쩐응우옌단(Trần Nguyên Đán진원단베트남어), 천녕공주 응옥타(Ngọc Tha옥타베트남어) 등과 비밀리에 연합하여 청화부(Thanh Hóa Phủ청화부베트남어)에서 즈엉녓레를 토벌하기 위한 군사를 일으켰다. 쩐낀은 무기와 군수품 조달을 담당하며 형을 도왔다. 당시 즈엉녓레가 신뢰하던 소위(少尉소위중국어) 쩐응오랑(Trần Ngô Lang진오랑베트남어)은 사실 쩐푸와 내통하고 있었으며, 즈엉녓레가 보낸 군사들에게 비밀리에 쩐푸에게 합류하도록 지시하여 즈엉녓레의 군대는 계속해서 약화되었다. 즈엉녓레는 여러 차례 남북 군대를 보내 반란을 진압하려 했으나, 병사들이 쩐푸에게 합류하면서 단 한 명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로 인해 쩐푸와 쩐낀의 군사력은 더욱 강해졌다.
1370년 11월 13일(음력) (12월 1일), 공정왕 쩐푸의 군대가 끼엔흥(Kiến Hưng건흥베트남어)부에 도달하자, 쩐응오랑은 즈엉녓레에게 퇴위 및 죄를 인정하는 글을 써서 쩐푸에게 바치라고 권고했다. 즈엉녓레는 쩐푸를 만나 무릎 꿇고 죄를 인정했으며, 결국 황제 자리에서 폐위되어 '혼덕공'으로 강등되었다. 며칠 후인 11월 15일(음력), 공정왕 쩐푸가 황제로 즉위하니, 그가 바로 쩐 예종이다. 쩐 쫑낌(Trần Trọng Kim진중금베트남어)의 역사서 《베트남 사략(Việt Nam sử lược월남사략베트남어)》에 따르면, 즈엉녓레를 축출하려는 계획은 쩐푸 자신이 아닌 황실 신하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쩐푸는 즈엉녓레의 죽음 이후에야 황위에 올랐다고 한다. 11월 21일(음력), 쩐푸와 쩐낀, 천녕공주가 군대를 이끌고 수도 탕롱(Thăng Long승룡베트남어)으로 돌아와 즈엉녓레를 강구(Giang Khẩu강구베트남어) 방에 감금했다.
5.2. 처형
감금된 즈엉녓레는 자신을 배신한 쩐응오랑에게 복수심을 품었다. 그는 쩐응오랑을 불러 궁궐에 숨겨둔 금 항아리가 있다고 속여 그가 무릎 꿇는 순간 목을 졸라 살해했다. 쩐응오랑의 조카 쩐테도(Trần Thế Đỗ진세도베트남어)가 이 사실을 쩐 예종에게 보고하자, 예종은 즉시 즈엉녓레와 그의 아들 리에우(Liễu류베트남어)를 몽둥이로 때려 죽일 것을 명령했다. 즈엉녓레와 그의 아들은 1370년 11월 26일(음력) (12월 14일)에 처형되었으며, 시신은 다이몽산(Đại Mông Sơn대몽산베트남어)에 매장되었다. 즈엉녓레가 사망한 후, 그의 어머니는 참파(Chăm Pa참파베트남어)로 도피하여 참파의 왕 체봉응아(Chế Bồng Nga제봉아베트남어)에게 대월을 공격하여 복수해 달라고 간청했다. 체봉응아는 즈엉녓레의 어머니의 요청을 받아들여 대월의 수도 탕롱을 공격하고 궁궐을 불태우는 등 쩐 왕조에 큰 혼란과 피해를 입혔다.
6. 가족 관계
즈엉녓레는 공정왕 쩐푸(훗날 쩐 예종)의 딸인 쩐씨를 황후로 맞이했다. 그에게는 아들 리에우(Liễu류베트남어)가 있었으나, 1370년 즈엉녓레가 처형될 때 함께 몽둥이로 맞아 죽임을 당했다.
7. 역사적 평가와 영향
즈엉녓레의 통치는 후대 사가들로부터 정통성 문제와 국정 혼란으로 인해 혹독한 평가를 받으며, 쩐 왕조 쇠퇴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다.
7.1. 황통의 정통성 문제
즈엉녓레는 쩐 왕조의 혈통이 아닌 인물로서 황위에 올랐기 때문에,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그리고 사후에도 황통의 정통성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당시의 봉건 사상은 이족(異族)이 황위를 계승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으며, 그가 자신의 성씨를 즈엉씨로 되돌리려 했던 시도는 이러한 정통성 논란을 더욱 심화시켰다. 후대의 베트남 사관들은 즈엉녓레의 제위를 정식으로 인정하지 않고, 그를 쩐 왕조의 '찬탈자'로 간주했다. 대표적인 역사서인 《대월사기전서(Đại Việt sử ký toàn thư대월사기전서베트남어)》조차 그의 재위 기간을 본기(本紀)에 포함시키지 않고, 쩐 유종 본기 뒤편과 쩐 예종 본기 앞편에 부록하는 방식으로 그의 비정통성을 명확히 했다.
7.2. 쩐 왕조 쇠퇴의 원인
즈엉녓레의 짧고 혼란스러운 통치는 이미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던 쩐 왕조의 멸망을 가속화하는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그의 무능하고 부도덕한 국정 운영, 황실 내부의 대규모 숙청, 그리고 성씨 변경 시도로 인한 반발은 쩐 왕조의 정치적 불안정성을 극대화시켰다. 특히 그의 재위 기간에 발생한 황실 내부의 대규모 학살과 이로 인한 혼란은 쩐 왕조의 붕괴를 초래한 일련의 사건들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의 사망 후 어머니가 참파에 도움을 요청하여 참파가 탕롱을 공격하고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는 쩐 왕조 후기 황제들에게 큰 고통과 어려움을 안겨주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그를 "쩐 왕조의 망나니 아들"로 평가하며, 그의 통치가 쩐 왕조 쇠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강조한다.
7.3. 후대 평가
즈엉녓레는 후대 사가들로부터 대체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그의 황위 계승은 전통적인 규범을 어겼다는 점에서 '황당한 거동'으로 비판받았으며, 그의 통치는 국정 태만, 사치와 향락, 황실 내부의 잔혹한 숙청, 그리고 성씨 변경 시도와 같은 일련의 과오로 점철되었다. 이러한 행적들은 그가 황제로서의 자질과 능력이 부족했음을 보여주며, 결국 그가 빠르게 폐위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원인으로 지적된다. 베트남의 정사(正史)들은 그를 쩐 왕조의 정통 황제로 인정하지 않고 '찬탈자'로 기록하며, 그의 치세가 쩐 왕조의 국력 약화와 혼란을 심화시켜 멸망의 길을 재촉했다고 평가한다. 폐위 후 '혼덕공'으로 강등되고 시호조차 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후대에서 그에게 내려진 부정적인 평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