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및 배경
주셀리누 쿠비체크의 개인적인 삶과 정치 경력의 기반이 된 배경은 그의 성장 과정과 초기 전문 분야, 그리고 지방 정치 경험을 통해 형성되었습니다.
1.1. 출생과 가족
쿠비체크는 1902년 9월 12일 미나스제라이스주 지아만치나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행상인이었던 주앙 세자르 지 올리베이라(João César de Oliveira)였으며, 쿠비체크가 두 살 때 사망했습니다. 이후 그는 교사였던 어머니 줄리아 쿠비체크(Júlia Kubitschek, 1873-1973)에 의해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체코인과 로마니인 혈통을 가졌으며, 쿠비체크 성(Kubíček)은 체코어에서 유래했습니다. 일부 자료에서는 그의 조상이 이탈리아계 이민자였다고도 언급됩니다. 그는 지아만치나의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학창 시절에는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1.2. 교육
쿠비체크는 스무 살에 미나스제라이스 연방대학교에 입학했으며, 7년간의 학업 끝에 의사 면허를 취득했습니다. 1930년에는 파리로 건너가 비뇨기과 전문 과정을 밟았습니다. 학업을 마친 후 몇 개월간 유럽에서 생활하다가, 제툴리우 바르가스 대통령의 집권을 알린 1930년 혁명 이후 브라질로 돌아왔습니다.
1.3. 초기 경력
정치에 입문하기 전 의사로서의 활동과 지방 정치에서의 경력은 그의 정치적 기반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3.1. 의사로서의 활동
쿠비체크는 브라질로 돌아온 후 미나스제라이스주의 군사 경찰에서 의사로 복무하며 군 병원에서 환자들을 진료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입헌혁명에 참전했으며, 정치인 베네디투 발라다레스와 친분을 쌓았습니다. 발라다레스가 1933년 연방 개입자로 임명되자, 쿠비체크를 자신의 비서실장으로 발탁했습니다.
1.3.2. 정치 입문 및 지방 정치
1934년, 쿠비체크는 진보당의 지지를 받아 처음으로 연방 하원의원으로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했습니다. 그러나 1937년 이스타두 노부 쿠데타로 그의 임기는 취소되었고, 쿠비체크는 다시 의료 활동으로 돌아갔습니다.
1940년, 그는 발라다레스에 의해 벨루오리존치 시장으로 임명되어 1945년 10월까지 재임했습니다. 시장 재임 기간 동안 그는 도시의 공공 사업 확장과 인프라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도시 계획가 오스카르 니에메예르와 강력하고 전문적인 협력 관계를 구축했습니다. 니에메예르는 당시 벨루오리존치의 여러 시립 건물을 설계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
1945년 말, 그는 사회민주당 소속의 제헌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50년에는 미나스제라이스 주지사 선거에 출마하여 승리했습니다. 1951년 1월 31일 주지사로 취임한 그는 교통 및 에너지 문제 해결에 중점을 두어 CEMIG 에너지 회사를 설립하고 5개의 새로운 발전소를 건설했습니다. 또한 도로, 교량, 학교, 병원 개선을 추진하며 산업화를 장려했습니다.

2. 대통령 재임 (1956-1961)
주셀리누 쿠비체크의 대통령 재임 기간은 '50년 안에 50년 발전'이라는 슬로건 아래 브라질의 현대화를 위한 대규모 경제 정책과 인프라 사업이 추진된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 동안 브라질은 상당한 경제 성장을 경험했지만, 동시에 여러 경제적, 사회적 문제에 직면하기도 했습니다.
2.1. 선거와 취임
1954년 제툴리우 바르가스 대통령의 사망 후, 그의 부통령 주앙 카페 필류가 잔여 임기를 채웠고, 1955년 10월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습니다. 주셀리누 쿠비체크는 세 명의 후보 중 한 명으로 출마를 결정했습니다. 1955년 2월 공식화된 그의 선거 운동은 "5년 안에 50년 발전(50 years progress in 5)"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에너지, 농업, 산업, 교육, 교통을 강조한 개발주의적 공약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브라질 경제의 다각화와 외국인 투자 유치에 대한 의지를 표명했으며, 수도를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내륙의 중앙 위치로 이전하여 지역 개발을 촉진하겠다는 계획도 강조했습니다.
6개 정당의 연합으로 구성된 그의 러닝메이트는 주앙 굴라르트였습니다. 10월 3일, 쿠비체크는 35.6%의 득표율로 브라질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이에 야당인 국민민주연합(UDN)은 쿠비체크가 과반수 득표를 얻지 못했다는 이유로 선거 무효를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육군 장관이던 엔히키 테이셰이라 로트 장군과 고위 군 장교 연합은 쿠비체크의 취임을 보장하기 위해 군사 행동(예방 쿠데타)을 일으켰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주셀리누 쿠비체크는 1956년 1월 31일 브라질의 제21대 대통령으로 취임했습니다. 재임 초부터 비행기를 타고 브라질 전국을 순회하며 국민과 소통했기 때문에 '제트 대통령'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2.2. 경제 정책과 주요 사업
쿠비체크의 경제 계획은 '목표 계획(Goals plan)'으로 불렸으며, 1956년에 시작되어 6개의 주요 범주(에너지, 교통, 식량, 기간산업, 교육, 그리고 가장 중요한 브라질리아 건설)에 걸쳐 31가지 목표를 포함했습니다. 이 계획은 산업 확장과 국토 통합을 기반으로 브라질 경제를 다각화하고 성장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2.2.1. 산업화 및 외국인 투자
국가 산업 육성이 그의 주된 프로젝트였지만, '목표 계획'을 통해 외국인 투자에 대한 국가 경제 개방이 확대되었습니다. 그는 모든 수입 기계 및 산업 설비에 대한 세금을 면제했으며, 외국 자본 유치를 지원했습니다. 그러나 이 면제는 외국 자본이 국내 자본과 연계('연합 자본')될 경우에만 적용되었습니다. 국내 시장을 확대하기 위해 그는 관대한 신용 정책을 개발했습니다.
쿠비체크는 자동차 산업, 해군 산업, 중공업 및 수력 발전소 건설을 추진했습니다. 수력 발전 산업을 제외하고, 쿠비체크는 사실상 국영 기업이 없는 경제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그는 또한 교육 분야에서 매우 진보적인 의제를 제안했으나, 이는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2.2.2. 교통 및 에너지 인프라
쿠비체크는 지역 간 도로 건설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도로 건설에만 집중하고 철도 건설을 등한시했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이는 오늘날까지도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결정입니다. 도로 건설은 브라질리아 건설과 함께 아마존강 유역의 통합에 기여했습니다. 한 예로 벨렝-브라질리아 고속도로 건설이 있습니다. 이전에는 리우데자네이루나 상파울루에서 벨렝으로 가기 위해서는 대서양을 통한 선박 운송만이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 U보트에 의해 이 취약한 연결 고리가 차단되어 모든 상업 활동이 거의 중단된 바 있습니다.
2.2.3. 보건 정책
현직 의사로서 쿠비체크는 의료 개혁에 열정적이었습니다. 그는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중앙 보건 행정기관을 설립하여 농촌 지역의 보건 문제를 더욱 적절하게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결핵과 말라리아 문제를 해결하고 의료 접근성이 부족한 지역에 백신을 보급하기 위해 설립된 DNERU(National Department of Rural Endemics)라는 기관입니다.
2.3. 브라질리아 건설

내륙 개발과 국가 통합을 목표로 한 신수도 브라질리아 건설 프로젝트는 쿠비체크 정부의 상징적인 업적 중 하나입니다.
2.3.1. 계획 및 추진 배경
브라질리아 건설 아이디어는 이미 1891년, 1934년, 1946년 브라질 헌법에 명시되어 있었지만, 내륙 개발이라는 쿠비체크의 대선 공약에 따라 1956년에야 구체적인 계획이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수도를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옮기는 것에 대해 리우 시민들과 브라질 전역에서 논란과 반대가 있었습니다. "리우는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TV 프로그램에서 정치인, 주민, 전문가들이 토론을 벌였으며, 신문사의 독자 투고란에도 많은 의견이 실렸습니다.
2.3.2. 건설 과정 및 의의
도시 계획가 루시우 코스타, 건축가 오스카르 니에메예르, 조경 디자이너 호베르투 부를리 마르크스가 주도한 건설 작업은 1957년 2월에 시작되었습니다. 200대 이상의 중장비가 투입되었고, 대부분 브라질 북동부 출신인 30,000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들었습니다. 건설은 1960년 4월 21일까지 브라질리아를 완공하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밤낮으로 진행되었는데, 이는 미나스 제라이스 독립운동과 로마 건국을 기념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수도인 브라질리아는 불과 41개월 만에 목표일보다 빨리 사바나 한가운데에 도로, 정부 청사, 인프라, 주거 시설 등을 갖춘 모습으로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브라질리아는 개청 즉시 도시계획 및 근대 건축의 걸작으로 평가받았습니다.
브라질리아는 브라질의 광대한 영토를 연결하는 많은 도로 건설을 촉진했으며, 이를 통해 브라질의 가장 먼 지역을 통합하고, 인구 밀도가 낮은 지역에 개발을 가져오며, 브라질의 문화적, 영토적 통일성을 보장하는 전략적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새로운 수도는 모든 브라질 지역을 통합하고, 일자리를 창출하며, 브라질 북동부의 노동력을 흡수하고, 브라질 중서부와 브라질 북부의 경제를 활성화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2.3.3. 건설 관련 논란
브라질리아 건설은 막대한 재정적 부담을 초래했습니다. 과도한 차관과 수도 이전에 드는 막대한 비용은 이후 브라질 경제에 큰 부담으로 작용했으며,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이어진 초인플레이션과 그로 인한 경제 침체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기도 합니다. 또한, 상파울루나 리우데자네이루 등 해안가의 주요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육상 교통 수단도 제대로 확립되지 않은 브라질리아로 수도를 이전한 것이 효율성 저하를 초래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건설 과정 중에는 작업 속도를 맞추기 위해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했으나, 쿠비체크 정부는 이를 은폐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습니다. 또한 쿠비체크 정부는 종종 부패 혐의에 직면했습니다. 이 혐의는 그가 주지사 시절부터 시작되어 대통령 재임 기간, 특히 브라질리아 건설이 시작되면서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쿠비체크와 관련된 사람들이 건설 과정에서 특혜를 받았을 것이라는 심각한 의혹이 제기되었고, 항공사 파나이르 두 브라질이 이 기간 동안 사람과 물품 운송을 독점했던 것도 또 다른 논란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당시 시사 잡지 <타임>은 쿠비체크가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큰 재산을 소유하고 있다고 보도했으나, 이는 결코 증명되지 않았으며, 그가 사망했을 때 매우 적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음이 밝혀졌습니다. 하지만 차기 대선 후보였던 자니우 콰드루스는 대선 운동 중 "나라에서 부패를 쓸어버리겠다"고 공언하기도 했습니다.
2.4. 경제 성과와 비판
쿠비체크의 재임 기간은 브라질 경제에 긍정적인 성과와 함께 여러 부정적인 결과를 동시에 가져왔습니다.
2.4.1. 경제 성장과 대외 부채 증가
그의 지도 아래 산업은 더욱 강력해졌고, 단기적으로 경제는 호황을 누렸습니다. 산업 생산은 재임 말기에 80% 성장이라는 높은 수치를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경제가 에너지 자원에 더 의존하게 되면서 브라질은 1973년과 1979년의 석유 위기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국가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소비량의 80% 이상을 수입해야 했기 때문에 유가 4배 인상은 브라질의 부채와 나선형 인플레이션에 크게 기여했으며, 비판론자들은 이를 쿠비체크 행정부의 직접적인 결과로 비난했습니다. 실제로 브라질의 산업이 세계 시장에서 점점 더 경쟁력을 잃으면서 1980년대까지 경제는 계속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재임 기간 동안 외채는 8700.00 만 USD에서 2.97 억 USD로 급증했습니다.
2.4.2. 인플레이션 및 소득 불평등 심화
높은 인플레이션율과 소득 불균형이 심화되었고, 농촌 지역에서 시작된 파업은 도시 지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최저 임금은 브라질 역사상 가장 높은 수준으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그는 또한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대출을 모색했지만, 협상에서 철회했습니다. 그의 임기 말 산업 생산은 80% 성장했지만, 인플레이션율은 43%에 달했습니다.
3. 대통령 퇴임 이후
쿠비체크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정치적 활동을 이어갔으나, 1964년 군사정권의 쿠데타로 인해 심각한 정치적 시련을 겪었습니다.
3.1. 상원의원 및 정치 활동
1961년, 쿠비체크는 고이아스주의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65년 대선에 재출마를 모색하기도 했습니다.
3.2. 군사정권 하에서의 탄압과 망명
그러나 1964년 군사 쿠데타 이후, 쿠비체크는 군부에 의해 부패와 공산주의자들과의 연계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의 상원의원 임기는 취소되었고 10년간의 정치적 권리가 박탈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쿠비체크는 사실상 자의적인 망명 생활을 시작하여 미국과 유럽의 여러 도시를 방문했습니다.
1967년 3월 브라질로 돌아온 그는 카를루스 라세르다와 주앙 굴라르트와 함께 군사 독재에 반대하는 프렌치 암플라(Frente Ampla, 광범위 전선)를 조직하는 데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프렌치 암플라는 1년 뒤 군부에 의해 해산되었고, 쿠비체크는 잠시 투옥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정치적 권리 정지 10년 후 정치 생활로 복귀할 의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1975년 10월, 쿠비체크는 브라질 문학 아카데미 회원 자리에 출마했으나 낙선했습니다. 그는 미나스제라이스 문학 아카데미의 34번째 의석을 차지했습니다.
4. 죽음과 평가
주셀리누 쿠비체크는 교통사고로 사망했으나, 그 죽음을 둘러싼 논란은 그의 역사적 평가와 유산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현대 브라질의 아버지"로 불리며 국가 발전에 기여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4.1. 사망 경위와 논란
쿠비체크는 1976년 8월 22일 리우데자네이루주 헤젠지 시 근처에서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35만 명에 달하는 조문객들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으며, 그의 유해는 1981년 개관한 브라질리아의 JK 기념관에 안치되었습니다.
4.1.1. 교통사고 및 암살 의혹
당시 법의학 검사와 공식 보고서는 사고가 정상적인 교통사고로 인해 발생했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족은 이러한 결론에 이의를 제기했으며, 20년 후 유해 발굴을 요청하며 쿠비체크가 살해당했을 가능성을 제기했습니다. 그러나 유해 검사 결과는 이전 보고서를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2000년 4월 26일, 리우데자네이루의 전 주지사 리오넬 브리졸라는 1976년 몇 달 간격으로 사망한 전 브라질 대통령 주앙 굴라르트와 쿠비체크가 미국이 지원한 콘도르 작전의 일환으로 살해되었다고 주장하며 그들의 죽음에 대한 국가 진실 위원회 조사를 요청했습니다. 그들의 죽음은 원래 각각 심장마비와 교통사고로 보고되었습니다.
2013년 12월 10일, 상파울루 시 진실 위원회는 쿠비체크의 죽음이 군부에 의한 암살이었다고 발표했으나, 증거 등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명확히 밝히지 않았습니다. 반면 2014년 3월 27일, 브라질 국가 진실 위원회는 쿠비체크가 암살되지 않았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이처럼 그의 죽음은 군사 정권과의 연관성에 대한 의혹과 함께 지속적인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4.2. 역사적 평가와 유산
쿠비체크는 브라질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그의 업적과 그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게 제시됩니다.
4.2.1. "현대 브라질의 아버지"로서의 평가
쿠비체크는 국가 발전과 현대화에 기여한 인물로서 브라질 국민들로부터 "현대 브라질의 아버지"라는 존칭과 함께 폭넓은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JK'라는 약칭은 전 대통령을 기리는 보편적인 약어가 되었습니다.
4.2.2. 주요 업적에 대한 긍정적 및 비판적 시각
브라질리아 건설과 경제 발전은 그의 주요 업적으로 긍정적으로 평가받습니다. 그의 리더십 아래 산업 생산이 크게 성장했으며, 이는 브라질 경제의 중요한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그러나 브라질리아 건설과 수도 이전에 따르는 막대한 재정적 부담과 무리한 차관 도입은 이후 브라질 경제에 큰 어려움을 초래했으며, 초인플레이션과 같은 경제적 혼란의 원인 중 하나로 비판받습니다. 또한 복지 축소와 물가 상승 등 당시 정책이 초래한 경제적, 사회적 문제점과 소득 불균형 심화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존재합니다. 이와 같이 쿠비체크의 업적은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경제적, 사회적 부작용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4.3. 기념 및 문화적 영향
쿠비체크의 업적을 기리는 수많은 기념물과 장소 명칭, 그리고 대중 매체에서의 묘사는 그가 브라질 사회에 미친 지속적인 영향력을 보여줍니다.
4.3.1. 기념물, 명칭 및 사회적 존경
브라질리아 국제공항은 '프레지덴치 주셀리누 쿠비체크 국제공항'으로, 주셀리누 쿠비체크 다리와 주셀리누 쿠비체크 발전소 또한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습니다. 브라질리아에는 '쿠비체크 플라자'라는 고급 호텔도 있습니다. 또한 '주셀리누 쿠비체크, 산타 마리아'와 같이 그의 이름을 딴 도시도 많이 존재합니다.
과거 1985년부터 발행되던 옛 10만 크루제이루 지폐와 1986년의 크루자두로 화폐 단위가 변경되면서 발행된 100 크루자두 지폐에도 그의 초상화가 사용되었습니다.
4.3.2. 대중 매체에서의 묘사
2006년 레지 글로부는 쿠비체크의 삶을 바탕으로 한 미니시리즈 JK를 제작했습니다. 이 드라마에서는 바그네르 모라가 18세부터 43세까지의 쿠비체크를, 조제 윌케르가 44세부터 75세까지의 쿠비체크를 연기하여 그의 이미지가 대중에게 어떻게 전달되었는지 보여주었습니다.

5. 사생활
주셀리누 쿠비체크의 개인적인 삶은 그의 공적인 이미지와 함께 브라질 대중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5.1. 결혼과 자녀
쿠비체크는 1931년 사라 레모스와 결혼했습니다. 이들 부부는 1943년 딸 마르시아를 낳았고, 1947년에는 마리아 에스텔라를 입양했습니다. 그의 딸 마르시아 쿠비체크(1943-2000)는 1980년 쿠바계 미국인 발레 스타 페르난두 부호네스와 결혼했습니다. 마르시아 쿠비체크는 1987년 브라질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91년부터 1994년까지 연방구의 부지사를 역임했습니다.
6. 관련 항목
- 1964년 브라질 쿠데타
- 브라질리아
- 브라질의 역사 (1945년-1964년)
- 오스카르 니에메예르
- 루시우 코스타
- 주셀리누 쿠비체크 다리
- 프레지덴치 주셀리누 쿠비체크 국제공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