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존 앤드루 하키스(John Andrew Harkes영어, 1967년 3월 8일 ~ )는 미국의 전 축구 선수이자 축구 지도자이다. 그는 미국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인물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뛴 최초의 미국인 선수이자,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득점을 기록한 두 번째 미국인 선수이며, 주요 잉글랜드 토너먼트 결승전(1991년 풋볼 리그 컵 결승전)에 출전한 최초의 미국인 축구 선수이다. 1996년 MLS로 이적한 후에는 D.C. 유나이티드에서 두 차례의 MLS컵 우승을 차지했다.
1990년대 대부분의 기간 동안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핵심 미드필더로 활약했으며, 두 번의 FIFA 월드컵에 참가했다. 특히 스티브 샘프슨 당시 감독에 의해 "종신 주장"으로 임명되었으나, 1998년 FIFA 월드컵을 앞두고 이 칭호가 박탈되고 최종 명단에서 제외되는 논란을 겪었다. 하키스는 국가대표팀 경력을 90경기 출전 6골로 마감했다. 은퇴 후에는 ESPN의 MLS 및 미국 국가대표팀 경기 해설가로 활동했으며, 2010년 FIFA 월드컵 중계에도 참여했다. 또한 FC 신시내티와 그린빌 트라이엄프 SC의 감독을 역임했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존 하키스는 뉴저지주 커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그의 가족 배경과 학업 및 초기 축구 경력은 그의 삶과 이후의 선수 경력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2.1. 어린 시절 및 교육
하키스는 축구 열기가 뜨거운 뉴저지주 커니에서 성장했으며, 미래의 국가대표팀 동료인 토니 메올라와 탭 라모스와 함께 유소년 및 고등학교 축구를 했다. 그는 1985년 커니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재학 중 뉴저지주 고등학교 체육 협회 챔피언십 경기에서 네 차례 뛰었으며, 1984년에는 팀을 그룹 4 주 챔피언십으로 이끌어 24승 0패의 기록을 달성했다. 같은 해, 그는 퍼레이드 매거진 선정 올해의 고등학생 선수로 선정되었다. 1999년에는 스타-레저에 의해 1980년대 뉴저지주 고등학교 축구 선수 중 상위 10인에 이름을 올렸다.
고등학교 졸업 후, 하키스는 버지니아 대학교에 진학하여 1985년부터 1987년까지 축구를 계속했다. 그는 1986년과 1987년에 올-아메리칸 1군으로 선정되었고, 1987년에는 미국 대학 최고의 선수에게 주어지는 헤르만 트로피를 수상했다. 대학 시절 그는 훗날 D.C. 유나이티드의 감독이 되는 브루스 아레나의 지도를 받았다. 1988년에는 국가대표팀에 전념하기로 결정하고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참가했으며, 1990년 FIFA 월드컵 예선에 돌입했다.
2.2. 가족 및 유산
하키스의 부모는 모두 스코틀랜드 이민자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 짐은 던디 출신이며 던디 유나이티드 FC의 유소년 팀 선수였다. 존 하키스는 미국에서 태어난 첫 세대이다. 그는 현재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고 있으며, 이는 D.C. 유나이티드에서 뛰던 시절부터 이어져 왔다.
그의 자녀로는 클렘슨 대학교에서 대학 축구를 했던 딸 로렌 하키스와, 2016년 헤르만 트로피를 수상하고 D.C. 유나이티드, 스코틀랜드의 던디 유나이티드 FC, 그리고 존 하키스 자신이 1999년부터 2001년까지 뛰었던 뉴잉글랜드 레볼루션에서 활약한 아들 이안 하키스가 있다.
3. 선수 경력
존 하키스는 아마추어 및 대학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며, 잉글랜드와 미국 MLS에서 성공적인 프로 경력을 쌓았다.
3.1. 아마추어 및 대학 경력
하키스는 버지니아 대학교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1986년과 1987년에 올-아메리칸 1군으로 선정되었으며, 1987년에는 미국 대학 축구 최고의 선수에게 주어지는 헤르만 트로피를 수상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아메리칸 사커 리그의 올버니 캐피털스에서 프로 경력을 시작했으며, 그 해 리그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3.2. 잉글랜드 프로 경력
하키스는 1990년 잉글랜드 풋볼 리그의 셰필드 웬즈데이로 이적하며 잉글랜드 무대에 진출했다. 그 시즌 더비 카운티 FC와의 경기에서 32 m 거리에서 날린 강력한 슛이 전 잉글랜드 월드컵 골키퍼 피터 실턴을 지나 골망을 흔들었고, 이 골은 잉글랜드 축구 "올해의 골"로 선정되었다. 같은 시즌, 셰필드 웬즈데이가 1991년 풋볼 리그 컵 결승전에 진출하면서 하키스는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뛴 세 번째 미국인 선수가 되었다. 당시 2부 리그(현 EFL 챔피언십) 소속이던 셰필드 웬즈데이는 1부 리그(현 프리미어리그) 팀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1-0으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또한 그 해 셰필드 웬즈데이는 1부 리그로 승격했다.
1993년, 하키스는 아스널 FC와의 풋볼 리그 컵 결승전에서 2-1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결승전에서 득점을 기록한 유일한 미국인 선수가 되었다. 이는 FA 트로피 결승전에서 콜체스터 유나이티드 소속의 마이크 마스터스가 득점한 이후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미국인 선수가 기록한 두 번째 골이었다. 리그 컵에서의 실망스러운 결과 한 달 뒤, 셰필드 웬즈데이는 FA컵 결승전에서도 다시 아스널과 맞붙어 1-1 무승부 후 재경기에서 2-1로 패배했다.
하키스는 1993년 여름 더비 카운티 FC로 이적하여 두 시즌을 더 뛰었다. 1995년, MLS는 첫 시즌 준비를 시작했고, 하키스는 리그와 계약한 주요 미국인 선수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리그 개막이 1996년으로 연기되면서, 그는 1년 동안 웨스트햄 유나이티드로 임대 이적하여 12경기에 출전했다.
3.3. 미국 메이저 리그 사커(MLS) 경력

1996년, 하키스는 해외에서 뛰던 다른 미국 국가대표팀 동료들과 함께 MLS 출범을 위해 미국으로 복귀했다. MLS는 재능의 균등한 분배를 위해 여러 주요 미국인 선수들을 영입하여 각 팀에 배정했다. 하키스는 D.C. 유나이티드에 배정되어 팀의 첫 번째 선수가 되었다. 첫 시즌에 그는 팀을 MLS컵 우승과 US 오픈컵 우승으로 이끌었다. D.C. 유나이티드는 1997년에도 MLS컵 타이틀을 성공적으로 방어했으며, 하키스는 결승골을 어시스트했다.
1998년 FIFA 월드컵 최종 명단에서 제외되는 실망에도 불구하고, 하키스는 D.C. 유나이티드가 리그 정규 시즌 최고 기록인 서포터스 실드를 차지하는 데 기여했으나, 시카고 파이어 SC에게 MLS컵 결승전에서 패배했다. 그는 또한 D.C. 유나이티드가 CONCACAF 챔피언스컵을 우승한 최초의 MLS 클럽이 되도록 도왔고, 코파 인테라메리카나에서는 브라질의 CR 바스쿠 다 가마를 꺾는 이변을 연출했다.
1998년 시즌이 끝난 후, 그는 잉글랜드로 돌아가 노팅엄 포레스트에서 2주간의 입단 테스트를 받았다. 1999년 1월 28일, 노팅엄 포레스트는 하키스를 2개월 임대 기간 동안 영입했다. 그는 노팅엄 포레스트에서 단 3경기에 출전했는데, 여기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1-8로 대패한 악명 높은 경기도 포함되어 있다. 이후 그는 미국으로 돌아왔다.
3.3.1. 뉴잉글랜드 레볼루션
하키스가 잉글랜드에 머무는 동안, 1999년 2월 2일 D.C. 유나이티드는 2000년 MLS 슈퍼드래프트의 1라운드 및 2라운드 지명권과 향후 고려 사항을 대가로 하키스를 뉴잉글랜드 레볼루션으로 트레이드했다. D.C. 유나이티드는 샐러리캡 여유를 확보하기 위해 하키스를 트레이드했다. 이 트레이드를 둘러싸고 약간의 불확실성이 있었는데, 레볼루션은 하키스가 3월 15일까지 합류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노팅엄 포레스트는 임대 계약이 프리미어리그 시즌이 끝날 때까지 하키스를 잉글랜드에 머물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레볼루션의 단장 브라이언 오도노반은 하키스가 3월 중순까지 합류하지 못하면 거래가 무효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결국 3월 16일, 하키스의 임대 기간이 종료되면서 그는 공식적으로 뉴잉글랜드에 합류할 수 있었다. 하키스는 5월 15일 콜럼버스 크루와의 경기에서 후반 75분 에드윈 고터와 교체 투입되며 뉴잉글랜드 데뷔전을 치렀다. 5월 23일 LA 갤럭시와의 경기에서 첫 선발 출전했으나 1-0으로 패배했다. 6월 5일 시카고 파이어 SC와의 경기에서 홈 데뷔전을 치렀고 2-0으로 패배했다. 또한 하키스는 1999년 뉴잉글랜드 레볼루션 시즌 중 8월 6일과 10월 9일 두 차례 레볼루션의 주장을 맡았다. 그는 뉴잉글랜드에서의 첫 시즌 동안 22경기에서 8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하키스는 2000년 뉴잉글랜드 레볼루션 시즌 대부분 동안 주장 완장을 찼으며, 레볼루션이 1997년 이후 처음으로 MLS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6월 3일 마이애미 퓨전과의 경기에서 2-0으로 승리하며 클럽에서의 첫 골을 기록했다. 하키스는 2000년 MLS 올스타전에 레볼루션을 대표하여 출전한 유일한 선수였다. 2001년 뉴잉글랜드 레볼루션 시즌 동안 하키스는 단 5경기 출전에 그쳤는데, 2001년 5월 11일 레볼루션이 파토 아길레라와 2002년 MLS 슈퍼드래프트의 조건부 지명권을 대가로 하키스를 콜럼버스 크루로 트레이드했기 때문이다.
3.3.2. 콜럼버스 크루
콜럼버스 크루로 이적한 하키스는 2002년 부상으로 어려움을 겪은 시즌을 보낸 후, 2003년 현역 은퇴를 발표했다.
4. 국제 경기 경력

존 하키스는 1990년 FIFA 월드컵과 1994년 FIFA 월드컵에 참가했다.
4.1.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
하키스는 1987년 3월 23일 캐나다와의 경기에서 국가대표팀 데뷔전을 치렀다. 그는 1987년 팬아메리칸 게임의 미국 대표팀 소속이었다. 그는 빠르게 국가대표팀의 주전으로 자리 잡았고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출전했다. 그 해 미국은 1승 1무 1패를 기록하며 2라운드 진출에 실패했다. 하키스는 다가오는 월드컵 예선 과정에서 계속해서 국가대표팀에서 뛰었다. 팀은 최종 예선 경기에서 트리니다드 토바고를 상대로 1-0의 예상치 못한 원정 승리를 거두며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1990년, 그는 대부분 대학 및 세미프로 선수들로 구성된 1990년 FIFA 월드컵 대표팀의 일원이었다. 미국은 체코슬로바키아에 1-5로 대패했지만, 개최국이자 결국 준결승에 진출한 이탈리아에게 0-1, 오스트리아에게 1-2로 패하며 선전했다. 비록 세 경기 모두 패했지만, 하키스, 탭 라모스, 토니 메올라, 마르셀로 발보아 등 1990년 대표팀의 많은 선수들이 10년 동안 미국 국가대표팀의 핵심을 이루며 MLS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미국은 1994년 월드컵에서 개최국으로서 더 나은 성적을 거두었다. 조별 리그에서 콜롬비아를 2-1로 꺾고 16강에 진출했다. 하키스는 안드레스 에스코바르의 자책골에 기여했는데, 이는 몇 주 후 콜롬비아 수비수의 총격 사망으로 이어진 비극적인 사건의 원인이 되었다. 하키스가 어니 스튜어트를 겨냥해 왼쪽에서 올린 크로스를 에스코바르가 걷어내려다 실수로 자신의 골키퍼를 지나쳐 골망을 흔들었다. 그러나 하키스는 루마니아와의 조별 리그 경기에서 두 번째 옐로카드를 받아 1경기 출장 정지 징계를 받으면서 브라질과의 16강전에 출전하지 못했다. 브라질은 이 경기에서 1-0으로 승리하며 결국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다.
4.2. 코파 아메리카 1995
1995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하키스는 초청 팀으로 참가한 미국을 이끌고 디펜딩 챔피언 아르헨티나를 3-0으로 꺾는 이변을 연출하며 준결승에 진출했다. 그는 우루과이의 엔초 프란체스콜리와 함께 대회 공동 MVP로 선정되었다.
4.3. 1998년 월드컵 논란
1996년, 1998년 FIFA 월드컵 예선이 시작되기 전, 스티브 샘프슨 감독은 하키스를 "종신 주장"으로 임명했다. 이는 샘프슨이 감독으로 있는 한 하키스가 원하는 대로 국가대표팀 주장을 맡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는 예선에서 팀의 어시스트를 이끌며 미국이 3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샘프슨 감독은 "리더십 문제"를 이유로 하키스를 월드컵 대표팀 명단에서 논란의 여지 없이 제외시켰으며, 당시에는 이 결정이 완전히 설명되지 않았다. 이러한 제외로 인한 쓰라림과 "종신 주장"이라는 칭호의 아이러니는 1999년 데니스 키어넌과 공동 집필한 그의 자서전 Captain for Life: And Other Temporary Assignments의 영감이 되었다. 이 책에서 하키스는 샘프슨이 "수백 번의 출전 기록을 가진 선수들에게 신뢰가 부족하다"고 비판했으며, "어리고 국제 경험이 부족한 선수들에게 엄청난 압박을 가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월드컵을 앞두고 스티브가 제대로 한 일은 단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고 결론지었다. 1998년 월드컵에서 미국 대표팀은 조별 리그 세 경기 모두 패배하며 전체 최하위로 마감했다.
2010년 2월, 샘프슨과 전 팀 동료 에릭 위날다는 하키스가 위날다의 아내 에이미와 불륜 관계였다는 의혹을 폭로하며, 이것이 하키스의 대표팀 제외의 실제 원인이었다고 밝혔다. 샘프슨 감독은 팀 내 불화를 해소하고 라커룸의 화합을 되찾기 위해 하키스를 제외하기로 결정했으며, 관련자들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당시에는 침묵을 지켰다고 설명했다. 이 폭로는 하키스의 경력에 큰 오점으로 남았다. 샘프슨은 2016년 알렉시 랄라스와의 팟캐스트 인터뷰에서 위날다의 주장을 확인해주었다.
하키스는 1999년 그의 전 대학 감독인 브루스 아레나에 의해 다시 국가대표팀에 소집되었고, 그 해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미국이 동메달을 획득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2000년에 90경기 출전을 끝으로 국제 경력을 마감했다.
4.4. 국가대표팀 통계
하키스는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총 90경기에 출전하여 6골을 기록했다.
# | 날짜 | 장소 | 상대팀 | 스코어 | 결과 | 대회 |
---|---|---|---|---|---|---|
1 | 1989년 8월 13일 |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 대한민국 | 1-2 | 1-2 | 친선 경기 |
2 | 1990년 2월 24일 | 캘리포니아주 팔로알토 | 소련 | 1-0 | 1-3 | 친선 경기 |
3 | 1992년 5월 30일 | 워싱턴 D.C. | 아일랜드 | 3-1 | 3-1 | 1992년 US컵 |
4 | 1992년 5월 6일 | 일리노이주 시카고 | 이탈리아 | 1-1 | 1-1 | 1992년 US컵 |
5 | 1995년 6월 11일 |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 나이지리아 | 1-1 | 3-2 | 1995년 US컵 |
6 | 1995년 6월 18일 | 워싱턴 D.C. | 멕시코 | 3-0 | 4-0 | 1995년 US컵 |
5. 지도자 경력
존 하키스는 선수 은퇴 후 코치로서의 경력을 시작했으며, 여러 팀에서 감독직을 수행했다.
5.1. FC 신시내티

2015년 8월, 당시 3부 리그였던 USL 챔피언십의 새로운 프랜차이즈인 FC 신시내티의 창단이 발표되었고, 하키스는 이 팀의 초대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하키스가 지휘한 2016년 FC 신시내티 시즌에서 클럽은 12승 6무 4패의 기록으로 USL 동부 콘퍼런스 3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2017년 2월 17일, FC 신시내티는 2017년 시즌을 앞두고 하키스의 해고를 발표했다. 외부에서는 이 해고가 놀라운 일로 받아들여졌으며, 이후 신시내티 인콰이어러의 팻 브레넌에 따르면 2016-17년 비시즌 기간 동안 "무질서하고 다소 혼란스러운 내부 상황"이 있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5.2. 그린빌 트라이엄프 SC
2018년 8월, 하키스는 2019년 USL 리그 원에 합류할 새로운 클럽인 그린빌 트라이엄프 SC의 초대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하키스는 구단의 전체 기술 부문을 이끌기 위해 3년 계약을 체결했다. 팀의 첫 시즌인 2019년에 그린빌 트라이엄프는 리그 3위를 차지하고 플레이오프 준우승을 기록했다。2020년 시즌에는 리그 1위를 차지하고 플레이오프에서 우승했으며, 하키스는 USL 리그 원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2021년 1월 26일, 그린빌 트라이엄프는 하키스와의 계약을 2023년 시즌까지 연장했다. 그린빌 트라이엄프는 2021년과 2022년 시즌 모두 리그 2위로 마감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그린빌 트라이엄프 SC의 감독을 맡았다.
6. 은퇴 후 활동
선수 및 지도자 경력 외에도 존 하키스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축구 발전에 기여했다.
6.1. 언론 및 방송 활동
2003년 현역 은퇴를 발표한 후, 하키스는 D.C. 유나이티드의 유소년 육성 부문 이사를 역임했으며, 폭스 스포츠 채널의 피치 리포터로도 활약했다。
그는 2006년 FIFA 월드컵 당시 ESPN과 ABC의 해설자로 활동했으며, 2008년부터 2011년까지 양 방송사의 주요 해설자를 맡았다. 이 기간 동안 그는 MLS와 미국 국제 경기를 중계했으며, 2010년 FIFA 월드컵 해설에도 참여했다. 2012년부터 2013년까지는 컴캐스트 스포츠넷이 중계하는 D.C. 유나이티드 경기의 주요 해설자로 활동했다.
6.2. 기타 활동
2006년 D.C. 유나이티드에서의 직책을 마친 후, 그는 브루스 아레나 감독 밑에서 뉴욕 레드불스의 수석 코치로 합류했으나, 아레나 감독이 해임되자 함께 팀을 떠났다.
하키스는 장기적인 유소년 육성 지원을 위해 2010년 아메리칸 스코어즈라는 자선 단체의 이사회에 합류하여 초등 및 중등학생을 위한 방과 후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7. 수상 및 평가
존 하키스는 그의 뛰어난 선수 및 지도자 경력을 통해 수많은 영예와 인정을 받았다.
7.1. 미국 축구 명예의 전당
2005년, 존 하키스는 미국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이는 그의 미국 축구 발전에 대한 지대한 공헌과 선수로서의 뛰어난 업적을 인정받은 결과이다.
7.2. 주요 수상 경력
- 개인 선수 수상
- 퍼레이드 매거진 선정 올해의 고등학생 선수: 1984
- 헤르만 트로피: 1987
- 아메리칸 사커 리그 베스트 일레븐: 1989
- 잉글랜드 축구 "올해의 골": 1990
- 코파 아메리카 공동 MVP: 1995
- MLS 올스타전 선정: 1997, 1998, 1999, 2000
- 클럽 선수 수상
- 셰필드 웬즈데이
- 풋볼 리그 컵: 1990-91 우승; 1992-93 준우승
- FA컵: 1992-93 준우승
- D.C. 유나이티드
- MLS컵: 1996, 1997 우승
- US 오픈컵: 1996 우승
- MLS 서포터스 실드: 1998 우승
- CONCACAF 챔피언스컵: 1998 우승
- 코파 인테라메리카나: 1998 우승
- 셰필드 웬즈데이
- 국가대표팀 선수 수상
-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1999 동메달
- 감독 수상
- 그린빌 트라이엄프
- USL 리그 원 챔피언: 2020
- USL 리그 원 올해의 감독상: 2020
- 그린빌 트라이엄프
8. 논란 및 비판
존 하키스의 경력 전반에 걸쳐 몇 가지 논란과 비판이 제기되었다.
가장 큰 논란은 1998년 FIFA 월드컵을 앞두고 그가 국가대표팀에서 제외된 사건이다. 스티브 샘프슨 감독은 그를 "종신 주장"으로 임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리더십 문제"를 이유로 월드컵 최종 명단에서 제외했다. 당시 이 결정은 언론과 팬들 사이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고, 샘프슨 감독은 이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제공하지 않았다. 하키스 역시 자신의 자서전에서 샘프슨 감독의 리더십을 강하게 비판하며, 그가 월드컵을 제대로 지휘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이후 2010년, 샘프슨 감독과 전 팀 동료 에릭 위날다는 하키스가 위날다의 아내 에이미와 불륜 관계였다는 의혹을 폭로하며, 이것이 하키스의 대표팀 제외의 실제 원인이었다고 밝혔다. 샘프슨 감독은 팀 내 불화를 해소하고 라커룸의 화합을 되찾기 위해 하키스를 제외하기로 결정했으며, 관련자들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당시에는 침묵을 지켰다고 설명했다. 이 폭로는 하키스의 경력에 큰 오점으로 남았다. 샘프슨은 2016년 알렉시 랄라스와의 팟캐스트 인터뷰에서 위날다의 주장을 확인해주었다.
또한, FC 신시내티 감독 재임 시절에도 논란이 있었다. 2016년 시즌을 성공적으로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2017년 시즌을 앞두고 갑작스럽게 해고되었는데,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구단 내부적으로 "무질서하고 다소 혼란스러운" 비시즌 기간을 보냈다는 점이 해고의 배경으로 지적되었다. 이는 그의 지도 방식이나 구단 관리 능력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질 수 있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