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조희(趙姬, 기원전 280년경 ~ 기원전 228년)는 중국 전국 시대 진나라의 진 장양왕의 왕후이자 진 시황제의 생모이다. 본래 조나라 출신으로, 상인 여불위의 첩이었으나 여불위의 계략으로 진나라의 볼모였던 자초에게 바쳐졌다. 이후 자초가 진나라의 왕이 되면서 왕후가 되었고, 그의 사후에는 태후로서 권력을 누렸다.
조희의 삶은 여불위와의 지속적인 관계, 그리고 가짜 환관 노애와의 불륜 및 사생아 출산이라는 파격적인 사생활로 점철되었다. 특히 노애가 일으킨 반란은 진나라 조정에 큰 혼란을 야기했으며, 이 사건으로 인해 조희는 유폐되고 노애와의 자녀들은 처형되는 비극을 맞았다. 사마천을 비롯한 후대 역사가들은 조희의 사생활을 비판적으로 평가했으며, 진시황의 친자 논란은 그녀의 삶을 둘러싼 가장 큰 역사적 쟁점 중 하나로 남아있다. 그녀의 이러한 행동은 아들 진시황의 성격과 통치 방식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분석된다.
2. 생애
조희는 상인 여불위의 첩에서 진나라의 왕후, 그리고 태후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녀의 삶은 권력과 욕망, 그리고 비극으로 얽혀 있으며, 특히 아들인 진시황의 통치와 성격 형성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2.1. 출생 및 조나라에서의 삶
조희는 조나라의 수도 한단 출신으로,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단지 조나라 여성이라는 의미에서 '조희'라 불렸다. 그녀는 조나라의 부유한 명문가 출신으로, 외모가 매우 아름다웠으며 춤을 잘 추는 것으로 유명했다. 당시 큰 상인이었던 여불위는 조희의 미모에 반해 그녀를 첩으로 삼아 함께 살았다.
이 무렵 진나라의 왕족이자 진 소양왕의 손자, 진 효문왕의 아들인 영이인(嬴異人, 훗날의 자초)이 조나라에 볼모로 와 있었다. 여불위는 영이인을 눈여겨보고 그를 진나라 왕의 후계자로 만들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어느 날 영이인이 여불위의 집에 방문했다가 조희를 보고 첫눈에 반해 그녀를 자신에게 달라고 청했다. 여불위는 잠시 화가 났으나, 영이인에게 이미 막대한 재산을 투자했고 그를 기이하게 여겨 자신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조희를 영이인에게 바쳤다.
이때 조희가 이미 여불위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고, 그 아이가 훗날 영정이 된다는 설이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진시황의 정통성을 부정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비판적인 견해도 존재한다.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조희는 영이인과 관계를 가진 후 만삭이 되어 영정을 낳았다고 되어 있어, 임신 시기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기원전 257년, 진나라의 장군 왕흘이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포위하는 한단 전투가 발발했다. 조나라는 볼모로 잡혀 있던 영이인을 죽이려 했으나, 여불위가 600근의 금을 감시자들에게 뇌물로 주어 영이인을 진나라로 탈출시켰다. 조나라는 영이인의 부인인 조희와 아들 영정을 죽이려 했으나, 조희가 부유한 명문가 출신이었던 덕분에 가족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모면하고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2.2. 진나라 왕후 및 태후 시절
기원전 251년, 진 소양왕이 사망하고 영이인의 아버지인 안국군이 진 효문왕으로 즉위했으며, 영이인은 태자가 되었다. 이에 조나라에서는 조희와 아들 영정을 진나라로 돌려보냈다. 기원전 250년, 진 효문왕이 즉위한 지 3일 만에 사망하고 태자 영이인이 진 장양왕으로 즉위하자, 조희는 마침내 진나라의 왕후가 되었다.
기원전 247년, 진 장양왕이 사망하고 태자 영정이 13세의 나이로 진나라 왕으로 즉위했다. 이에 영정의 생모인 조희는 태후(太后)의 자리에 올랐다. 당시 진나라의 상국(相國)이 된 여불위는 진왕 영정이 어리다는 점을 이용하여 조희와 몰래 간통을 계속했다. 그러나 진왕 영정이 성장하면서 여불위는 이 사실이 발각될까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여불위는 자신의 사가(舍人) 중 음경이 유난히 큰 노애라는 자를 찾아내 그를 조희에게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는 노애에게 수레바퀴를 음경으로 돌리는 기이한 공연을 자주 펼치게 하여 소문이 조희의 귀에 들어가도록 했다. 조희는 노애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를 탐하게 되었고, 여불위는 사람을 시켜 노애를 모함하여 궁형(腐刑)을 당한 것처럼 위장시킨 후, 뇌물을 써서 노애의 수염과 눈썹을 밀어 가짜 환관으로 꾸며 궁 안으로 들여보내도록 조희에게 권했다.
가짜 환관이 된 노애는 조희를 모시게 되었고, 조희는 노애와 간통하며 그를 매우 총애했다. 결국 조희는 노애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고, 이 사실이 발각될까 두려워 점을 친다는 핑계로 잠시 궁을 떠나 옹으로 거처를 옮겼다. 조희는 옹에서 노애와의 사이에서 두 명의 아들을 낳아 숨겨 길렀다.
노애는 조희의 총애를 등에 업고 막대한 권력을 휘둘렀다. 그는 늘 조희의 곁에서 모든 일을 마음대로 결정했으며, 그의 집에는 수천 명의 노복이 있었고, 벼슬을 얻으려 노애의 식객이 된 자들도 천여 명에 달했다. 기원전 239년, 진왕 영정의 이복동생인 성교(成蟜)가 조나라로 망명하여 반란을 꾀하자, 노애는 이를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장신후(長信侯)에 봉해지고 산양군(山陽郡)에 식읍을 받았다. 이후에도 하서(河西)와 태원(太原) 두 군을 봉지로 받아 그 세력이 더욱 커졌다.
2.3. 노애의 난과 유폐
기원전 238년(진시황 9년) 4월, 진왕 영정이 어머니 조희가 있는 옹으로 와서 관례를 치르고 성인식을 가졌다. 이때 누군가가 진왕에게 노애가 사실 환관이 아니며, 조희와 간통하여 아들 둘을 낳아 숨겨두었고, 조희와 모의하여 진왕이 죽으면 노애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으려 한다는 사실을 고발했다. 진왕 영정은 관리들을 시켜 이 사실을 심문하여 전말을 알아냈다.
자신의 음모가 발각된 것을 안 노애는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그는 왕의 옥새와 태후의 인장을 도용하여 옹현의 군사, 진왕의 호위군사, 관의 기병, 융적(戎翟)의 우두머리 및 가신들을 동원해 기년궁(蘄年宮)을 공격했다. 이에 진왕 영정은 창평군과 창문군에게 군대를 내어 노애를 공격하도록 명령했고, 함양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수백 명의 목을 베었다.
노애는 패하여 도망쳤고, 진왕 영정은 즉시 전국에 노애를 사로잡는 자에게는 1백만 냥을, 죽이는 자에게는 50만 냥을 준다는 명령을 내렸다. 결국 노애와 그의 무리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반란에 연루된 위위(衛尉) 갈(竭), 내사(內史) 사(肆), 좌익(佐弋) 갈(竭), 중대부령(中대부령) 제(齊) 등 20명은 모두 효수형에 처해졌다. 노애는 사지를 찢는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져 거리에 조리돌림당했으며, 그의 삼족(三族)이 멸족되는 참혹한 형벌을 받았다.
같은 해 9월, 진왕 영정은 조희가 노애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을 자루에 넣어 곤봉으로 때려 죽이는 잔혹한 방식으로 처형하고, 조희를 옹으로 유폐시켰다. 이 사건으로 인해 진왕 영정은 어머니를 유폐시킨 불효자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2.4. 복귀와 말년
조희가 옹에 유폐된 후, 많은 신하가 진왕 영정에게 어머니를 다시 궁으로 모실 것을 간언했으나, 영정은 분노하여 간언하는 자들을 처벌했다. 그러나 제나라 출신인 모초(茅焦)가 진왕 영정에게 "진나라가 바야흐로 천하를 통일하려 하는데, 대왕께서 모후를 유배시켰다는 소문이 돌면 제후들이 이를 듣고 진나라를 배반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라고 간언했다. 모초는 또한 간언하는 신하들을 죽이는 것은 사대부들의 마음을 차갑게 만들어 더 이상 진왕을 위해 일하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진왕 영정은 모초의 간언을 받아들여, 어머니를 유폐시킨 것이 천하 통일에 방해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간언하다 죽임을 당한 대신들을 후하게 장사 지내고, 기원전 237년 10월, 직접 수레를 이끌고 옹으로 가서 태후 조희를 함양으로 맞아들였다. 조희는 다시 감천궁(甘泉宮)에 거처하게 되었고, 이로써 모자 관계는 회복되었다. 모초는 이 공로로 상경(上卿)에 봉해졌다.
조희가 복귀한 후, 여불위는 상국 자리에서 해임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여불위의 영향력이 여전히 크고 제후들이 그를 찾아오는 일이 잦아지자, 진왕 영정은 여불위가 변란을 일으킬까 두려워했다. 결국 영정은 여불위에게 "그대가 진나라에 무슨 공이 있어 진나라가 그대에게 하남을 봉하고 십만 호의 식읍을 주었는가? 그대가 진나라와 무슨 친분이 있어 중부(仲父)라 칭하는가? 가족과 함께 촉으로 옮겨가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여불위는 자신이 더 이상 진왕의 분노를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기원전 235년에 스스로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조희는 여불위가 사망한 지 6년 후인 기원전 229년 또는 기원전 228년에 5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당시 영정은 아직 진왕이었으므로, 조희는 왕태후의 신분이었다. 훗날 영정이 중국을 통일하고 진 시황제로 즉위한 후, 그는 어머니 조희에게 제태후(帝太后)라는 시호를 추증했으며, 진 장양왕과 함께 지양(茝陽)에 합장되었다.
3. 역사적 평가 및 논란
조희의 삶은 그녀의 아들인 진 시황제의 탄생과 통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로 평가되지만, 동시에 그녀의 사생활과 관련된 논란으로 인해 비판적인 시각이 지배적이다.
가장 큰 논란은 진 시황제의 친자 문제이다. 『사기』의 저자 사마천은 조희가 이미 여불위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자초에게 바쳐졌고, 그 아이가 훗날 진시황이 되었다고 기록했다. 사마천은 진시황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러한 기록을 남겼다는 해석이 많다. 그러나 청나라의 학자 양옥승은 『사기』 원문에서 조희가 '스스로 임신한 몸을 숨겼다(姬自匿有身)'고 하면서도 '만삭이 되어(至大期時) 아들 정을 낳았다'고 기록한 점을 지적하며, '만삭'이라는 표현은 여성이 관계 후 정상적으로 임신 기간을 거쳐 아이를 낳았음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양옥승은 사마천이 두 가지 모순된 표현을 한 문장에 병기한 것은 당시 널리 퍼져 있던 소문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직접적으로 확정하지 않는 '춘추필법'의 일종으로 해석했다. 현대 학계에서는 이러한 친자 논란이 진나라의 정통성을 훼손하기 위해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비판적인 시각이 우세하다.
또한 조희의 사생활, 특히 여불위와의 지속적인 간통과 노애와의 불륜 및 사생아 출산은 당대와 후대 역사가들로부터 '음란하다(淫亂)'는 평가를 받으며 강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사기』는 조희가 태후가 된 후에도 '음란함을 그치지 않았다(太后淫不止)'고 기록하며 그녀의 문란한 사생활을 강조했다. 이러한 평가는 그녀의 도덕적 결함을 부각시키며, 당시 사회의 도덕관념에 비추어 용납될 수 없는 행위로 간주되었다.
조희의 행동은 단순히 개인적인 스캔들을 넘어 당시 진나라의 정치적 안정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노애의 난은 진왕 영정의 통치 초기 진나라 조정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했으며, 이는 진시황이 이후 더욱 강력하고 중앙집권적인 통치를 추구하게 된 배경 중 하나로 작용했다. 그녀의 사생활 논란은 아들인 진시황의 권위에 흠집을 내고, 진나라의 왕실에 대한 불신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4. 영향
조희의 삶과 행동은 아들인 진 시황제의 통치 방식과 성격 형성, 그리고 진나라 역사 전반에 간접적으로나마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첫째, 조희와 여불위, 그리고 노애를 둘러싼 일련의 스캔들과 노애의 반란은 어린 진왕 영정에게 깊은 상처와 불신을 안겨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어머니의 불륜과 그로 인한 이복동생들의 처형, 그리고 자신을 노린 반란은 진시황으로 하여금 인간에 대한 깊은 불신과 냉혹한 성격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을 수 있다. 이는 훗날 진시황이 잔혹한 법치주의를 펼치고, 반대 세력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며, 절대적인 황권을 확립하려 한 배경 중 하나로 분석된다.
둘째, 노애의 난은 진나라의 정치적 안정에 큰 위협이 되었다. 왕실 내부의 권력 다툼과 사적인 욕망이 국가의 근간을 흔들 수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통해 진시황은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모든 권력을 황제에게 집중시키며 신하들의 권한을 철저히 제어하는 통치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더욱 박차를 가했다. 여불위의 숙청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셋째, 조희의 유폐와 모초의 간언으로 인한 복귀는 진시황이 천하 통일이라는 대업을 이루기 위해 개인적인 감정보다는 국가의 대의를 우선시했음을 보여준다. 어머니를 유폐시킨 행위가 다른 제후국들에게 진나라에 대한 불신을 심어줄 수 있다는 모초의 지적은 진시황이 자신의 이미지를 관리하고 대외적인 명분을 중요하게 여겼음을 시사한다. 이는 진시황이 통일 후에도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고 새로운 제도를 확립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 것과도 연결된다.
결론적으로 조희의 사생활과 그로 인한 정치적 파동은 진시황의 개인적인 성장과 통치 철학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진나라의 역사적 흐름과 중국 통일 제국의 기틀을 다지는 과정에도 간접적으로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5. 대중문화 속 모습
조희의 파란만장한 삶과 논란이 많은 인물상은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재해석되고 있다.
- 만화 및 애니메이션 《킹덤》
- 아름다운 춤꾼이자 여불위의 연인으로 묘사된다. 아들 정을 낳은 후 한단에 갇히는 동안 정에게 냉담하고 심지어 가학적인 태도를 보인다. 왕태후가 된 후에도 여불위의 계략으로 노애와 관계를 맺고 자녀를 낳는다. 노애의 난 이후 유폐되지만, 노애와의 자녀들은 비밀리에 죽임을 당하는 대신 추방된 것으로 그려진다.
- 영화
- 《진·시황제》(1962년): 야마다 이스즈가 조희 역을 연기했다.
- 《시황제 암살》(1998년): 구용비가 조희 역을 연기했다.
- 텔레비전 드라마
- 《동주열국 전국편》(1997년): 선링이 조희 역을 연기했다.
- 《시황제 열전 퍼스트 엠퍼러》(2001년): 쑹자가 조희 역을 연기했다.
- 《려희전 시황제의 어머니》(2017년): 천이사가 조희 역을 연기했다.
- 《호란전》(2019년): 우진옌이 주연을 맡아 조희 역을 연기했다.
- 《시황제 천하통일》(원제 『대진부』, 2020년): 주주가 조희 역을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