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및 경력
조지 패짓 톰슨은 어린 시절부터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의 학업,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그리고 전자 회절 발견을 포함한 주요 학문적 업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험을 했다. 특히 핵물리학 연구와 과학 저술 활동을 통해 과학계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조지 패짓 톰슨은 1892년 5월 3일 잉글랜드 케임브리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1906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저명한 물리학자 조지프 존 톰슨이며, 어머니는 로즈 엘리자베스 패짓으로 조지 에드워드 패짓의 딸이었다. 톰슨은 케임브리지의 더 퍼스 스쿨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이후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하여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했다. 그는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학업을 이어갔다.
1.2.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및 초기 활동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톰슨은 학업을 잠시 중단하고 영국 육군의 퀸스 로열 웨스트 서리 연대에 임관했다. 프랑스에서 짧은 기간 복무한 후, 1915년에는 왕립 항공대로 전보되어 판버러 비행장 등지에서 공기역학 연구에 참여했다. 그는 1920년에 대위 계급으로 전역했다.
1.3. 학문적 경력
전쟁이 끝난 후, 톰슨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펠로우가 되었으며, 이후 애버딘 대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1929년부터 1930년까지는 미국 뉴욕주 이타카에 위치한 코넬 대학교에서 비상주 강사로 활동했다. 1930년에는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의 교수로 임명되어 휴 롱번 캘린더의 후임으로 물리학과를 이끌었다. 그는 1952년까지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에 재직했으며, 같은 해 케임브리지 대학교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의 학장(Master)으로 취임하여 1962년까지 이 직책을 수행했다.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는 그의 재임 기간을 기리기 위해 1964년 렉햄프턴 캠퍼스에 현대 건축물인 조지 톰슨 빌딩을 건립했다. 그는 1930년에 왕립 학회의 펠로우로 선출되었다.
1.4. 전자 회절 발견
조지 패짓 톰슨의 가장 중요한 과학적 업적은 전자의 파동적 특성을 실험적으로 증명한 것이다. 그는 1927년 애버딘 대학교에서 얇은 금속 필름을 통과하는 음극선의 회절 현상을 관찰함으로써 전자의 파동성을 입증했다. 그는 두께 3 × 10-6 cm의 알루미늄, 금, 백금과 같이 결정 구조가 알려진 얇은 금속 필름을 통해 전자를 산란시켰고, 관찰된 회절 패턴의 크기를 측정했다. 각 경우에 그가 관찰한 회절은 루이 드 브로이가 1920년대에 물질파 또는 드 브로이 가설로 처음 제안했던 파동 이론의 예측값과 5% 이내의 오차를 보였다. 이 발견은 파동-입자 이중성 원리에 대한 추가적인 증거를 제공했으며, 이는 현대 양자역학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이 공로로 그는 미국의 물리학자 클린턴 데이비슨과 함께 1937년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특히 그의 아버지 조지프 존 톰슨이 전자를 입자로 발견한 반면, 아들인 조지 패짓 톰슨은 전자가 파동처럼 회절될 수 있음을 보여주어, 한 가족 내에서 전자의 상반된 두 가지 본질을 밝혀낸 유례없는 과학사적 기록을 남겼다.
1.5. 핵물리학 연구 및 MAUD 위원회
1930년대 후반부터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톰슨은 핵물리학 분야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며, 특히 군사적 응용에 집중했다. 그는 1940년부터 1941년까지 원자폭탄 개발 가능성을 검토한 핵심적인 MAUD 위원회의 의장을 맡았다. MAUD 위원회는 "우라늄 폭발의 군사적 응용(Military Application of Uranium Detonation)"의 약자로, 영국의 원자폭탄 연구 프로그램이었으며, 이후 미국의 맨해튼 계획과 공동 연구로 이어졌다. 이 위원회는 원자폭탄의 제조가 실현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고, 이는 연합국의 원자폭탄 개발 노력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말년에도 그는 핵에너지 관련 연구를 계속했다.
1.6. 과학 저술 활동
톰슨은 공기역학 분야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과학의 가치에 대한 여러 저술을 남겼다. 그는 1959년부터 1960년까지 영국 과학 진흥 협회의 회장직을 역임했으며, 이 기간 동안 "과학의 두 가지 측면(Two aspects of science영어)"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진행했다.
2. 수상 및 영예
조지 패짓 톰슨은 그의 뛰어난 과학적 업적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포함하여 여러 권위 있는 학술상과 영예를 받았다.
2.1. 노벨 물리학상
1937년, 조지 패짓 톰슨은 전자 회절을 통해 전자의 파동적 특성을 발견한 공로로 미국의 물리학자 클린턴 데이비슨과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2.2. 기타 수상 및 서훈
- 1926년: 하워드 N. 포츠 메달
- 1939년: 휴즈 메달
- 1943년: 기사 작위(Knight Bachelor) 서임
- 1948년: 베이커리언 메달
- 1949년: 로열 메달
- 1959년 ~ 1960년: 영국 과학 진흥 협회 회장
- 1960년: 패러데이 메달
3. 개인 생활
조지 패짓 톰슨은 학문적 업적 외에도 안정적인 가족 생활을 영위했으며, 그의 자녀들 또한 사회 각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3.1. 가족 관계

1924년, 톰슨은 애버딘 대학교의 총장이었던 조지 애덤 스미스 경의 딸인 캐슬린 부캐넌 스미스(Kathleen Buchanan Smith)와 결혼했다. 그들은 두 아들과 두 딸을 두었으며, 부인 캐슬린은 1941년에 사망했다.
그의 아들 중 한 명인 존 톰슨 경(Sir John Thomson, 1927년 ~ 2018년)은 고위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1977년부터 1982년까지 인도 주재 고등판무관을, 1982년부터 1987년까지 유엔 주재 상임대표를 역임했다. 그의 손자인 애덤 톰슨 경(Sir Adam Thomson, 1955년생) 또한 고위 외교관으로, 2010년부터 2013년까지 파키스탄 주재 고등판무관을, 2014년부터 2016년까지 NATO 주재 상임대표를 지냈다. 그의 딸 중 한 명인 릴리언 클레어 톰슨(Lillian Clare Thomson)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경제학자이자 등산가인 요하네스 드 빌리에르 그라프와 결혼했다.
3.2. 사망
조지 패짓 톰슨은 1975년 9월 10일, 83세의 나이로 케임브리지에서 사망했다. 그는 케임브리지 남쪽에 위치한 그랜체스터 교구 교회 묘지에 그의 부인과 함께 안장되었다.
4. 영향 및 유산
조지 패짓 톰슨의 과학적 발견은 현대 물리학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가족 또한 여러 분야에서 사회에 기여하며 그의 유산을 이어갔다.
4.1. 과학사적 기여
톰슨의 전자 회절 발견은 루이 드 브로이의 물질파 가설을 실험적으로 확증함으로써 양자역학의 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의 업적은 파동-입자 이중성이라는 양자 세계의 근본적인 개념을 확고히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는 현대 물리학의 기본 원리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특히 그의 아버지 조지프 존 톰슨이 전자를 입자로 발견하고 아들인 조지 패짓 톰슨이 전자의 파동적 특성을 증명함으로써, 전자의 이중적 본질을 한 가족이 밝혀낸 유례없는 과학사적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4.2. 가족의 유산
조지 패짓 톰슨의 자녀와 손자들은 외교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공직에 헌신했다. 그의 아들 존 톰슨 경과 손자 애덤 톰슨 경은 모두 고위 외교관으로서 영국의 국제 관계에 기여하며 톰슨 가문의 사회적 유산을 이어갔다.
5. 관련 항목
- 물질파
- 핀치 (물리학)
- Z-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