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조지 이스트먼은 뉴욕주 워터빌에 있는 부모의 10 acre 농장에서 조지 워싱턴 이스트먼과 마리아 이스트먼(결혼 전 성은 킬번) 부부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에게는 엘런 마리아와 케이티라는 두 명의 누나가 있었다.
1.1. 출생과 가족
이스트먼의 아버지는 1840년대 초 뉴욕주 로체스터에서 이스트먼 상업 대학을 설립했다. 로체스터는 당시 급속한 산업화로 인해 미국 최초의 "붐 타운" 중 하나가 되었다. 1860년, 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되자 가족은 농장을 포기하고 로체스터로 이주했다. 아버지는 1862년 4월 27일 뇌 질환으로 사망했다. 이스트먼의 어머니는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고 조지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하숙생을 받았다. 둘째 누나 케이티는 어릴 적 소아마비에 걸려 1870년 말 조지가 15세 때 사망했다.
1.2. 어린 시절과 교육
이스트먼은 주로 독학으로 공부했지만, 8세 이후 로체스터의 사립 학교에 다녔다. 어린 조지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일찍 학교를 떠나야 했다. 14세에 사무원으로 일을 시작했으며, 주당 3 USD를 받는 보험 회사에서 일하다가 이후 연 800 USD를 받는 로체스터 은행으로 옮겼다. 그는 사진 사업에서 성공을 거두기 시작하면서 자신을 키우느라 고생한 어머니에게 보답하겠다고 다짐했다.
1.3. 초기 경력
이스트먼은 1874년(또는 1870년대) 사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당시 사진은 유리판에 감광 유제를 바르고 마르기 전에 촬영해야 하는 복잡한 과정이었다. 그는 1879년에 94 USD를 주고 카메라와 현상 장비를 구입했다. 조지 먼로와 조지 셀던에게 사진 기술을 배운 후, 3년간의 실험 끝에 1879년 건판 코팅 기계를 개발했다. 그는 건판에 대한 특허를 영국과 미국에서 취득했으며, 1880년에 사진 사업을 시작했다.
2. 경력 및 혁신
조지 이스트먼은 사진 산업의 대중화를 이끌며 수많은 혁신을 이루었다. 그는 건판에서 롤 필름으로의 전환을 주도하고, 코닥 카메라를 발명하여 사진 촬영 과정을 간소화했으며, "버튼만 누르세요, 나머지는 저희가"라는 슬로건으로 대중의 참여를 유도했다.
2.1. 사진에 대한 관심과 초기 실험
이스트먼은 은행원으로 일하던 1870년대에 사진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는 유리판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 유연한 필름 롤을 만들기 위한 실험을 시작했다. 1884년, 그는 유리판 대신 유제를 바른 롤 종이를 사용하는 사진 재료에 대한 특허를 획득했다. 1885년에는 필름 롤에 대한 특허를 받았고, 이후 이 롤 필름을 사용할 카메라 개발에 집중했다.
2.2. 이스트먼 코닥 설립
1881년, 이스트먼은 헨리 스트롱과 함께 이스트먼 건판 회사를 설립했다. 스트롱이 회사 사장을 맡았고 이스트먼은 회계 담당으로 대부분의 경영 업무를 처리했다. 회사를 설립하는 데는 수년간 모은 5500 USD가 사용되었다. 1888년, 그는 자신이 만든 "코닥"이라는 이름의 카메라에 대한 특허를 획득하고 출시했다. 급성장하던 이스트먼 건판 회사는 1889년에 이스트먼 컴퍼니로 재편되었고, 1892년에는 이스트먼 코닥으로 법인화되었다. 같은 해, 그는 회사 이름을 "코닥"으로 변경하고 필름 롤과 포장재에 노란색을 사용하기 시작하여 "노란 코트의 남자 코닥"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2.3. 롤 필름과 코닥 카메라 발명
1888년 9월 4일, 이스트먼은 코닥 상표를 등록하고 세계 최초의 롤 필름 카메라 "넘버 1 코닥"을 출시했다. 이 카메라는 25 USD에 판매되었으며, 100장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롤 필름이 장착되어 있었다. 모든 노출이 끝나면 사진가는 카메라를 로체스터의 이스트먼 회사로 다시 보냈고, 회사는 10 USD 또는 5 USD의 비용으로 필름을 현상하고 각 노출의 인쇄본을 만들었으며, 카메라에 새 필름 롤을 장착하여 사진과 함께 사진가에게 돌려보냈다.
사진 촬영과 복잡한 필름 현상 과정을 분리한 것은 혁신적이었고, 아마추어들도 사진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어 카메라의 인기는 즉시 폭발적이었다. 1888년 8월까지 이스트먼은 주문을 맞추기 위해 고군분투했으며, 그와 직원들은 곧 여러 다른 카메라를 개발했다. 1889년에는 화학자 헨리 라이헨바흐와 함께 최초의 니트로셀룰로스 필름 공정에 대한 특허를 획득했다. 1895년에는 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작고 휴대하기 쉬운 카메라를 5 USD에 출시하여 미국과 전 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00년에는 1 USD짜리 브라우니 카메라 시리즈를 출시하여 사진과 카메라를 대중에게 급속히 보급시켰다. 1904년, 이스트먼은 컬러 사진에 관심을 가졌고, 다음 10년간 컬러 필름 생산 실험에 자금을 지원했다. 그 결과 존 캡스태프가 개발한 2색 공정인 코다크롬이 탄생했다. 이후 1935년에는 더 유명한 2세대 코다크롬, 즉 최초로 상용화된 일체형 트라이팩 필름이 출시되었다.
2.4. "버튼만 누르세요, 나머지는 저희가" 슬로건
이스트먼은 "버튼만 누르세요, 나머지는 저희가 합니다(You press the button, we do the rest영어)"라는 슬로건을 만들었는데, 이는 대중에게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 슬로건은 사진 촬영을 대중화하는 데 큰 마케팅 효과를 가져왔으며, 길버트 & 설리번의 오페레타 『유토피아 주식회사』에서도 사용될 정도로 사회적 관심을 끌었다.
2.5. 필름 산업의 성장과 코닥의 지배력


이스트먼은 카메라 판매보다는 추가 필름 롤 판매에서 대부분의 수익이 발생할 것이라고 인식하고 필름 생산에 집중했다. 모든 카메라 제조업체에 고품질의 저렴한 필름을 제공함으로써 코닥은 경쟁사들을 사실상의 사업 파트너로 만들었다. 코닥은 특허와 인수를 통해 필름 시장에서 독점을 추구하며 급속한 성장을 경험했다. 1896년까지 코닥은 국제적으로 필름 공급의 선두 주자가 되었고, 1915년에는 로체스터에서 가장 큰 고용주가 되어 8,000명 이상의 직원을 고용하고 연간 1570.00 만 USD의 수익을 올렸다. 이스트먼 사망 직후인 1934년에는 코닥의 직원이 23,000명에 달했다.
필름의 가장 큰 시장 중 하나는 새로 떠오르는 영화 산업이었다. 토머스 에디슨과 다른 영화 제작자들이 1908년 모션 픽처 특허 회사를 설립했을 때, 이스트먼은 코닥이 영화 산업에 필름을 독점적으로 공급하도록 협상했다. 그의 독점적 행위는 연방 정부의 주목을 끌었고, 1911년 코닥에 대한 반독점 조사가 시작되었다. 이는 1913년 코닥에 대한 소송으로 이어졌고, 1921년 최종 판결에서는 코닥에게 가격 담합을 중단하고 많은 이권을 매각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스트먼과 그의 변호사들은 이후 몇 년간 수많은 특허 침해 소송에 시달렸는데, 여기에는 1892년 해고된 라이헨바흐로부터의 소송도 포함되었다. 가장 큰 소송은 경쟁 필름 생산 업체인 안스코로부터 제기되었다. 발명가 한니발 굿윈은 이스트먼과 라이헨바흐보다 앞선 1887년에 니트로셀룰로스 필름에 대한 특허를 출원했지만, 1898년에야 승인되었다. 안스코는 1900년에 이 특허를 구입하여 코닥을 침해 혐의로 고소했다. 코닥은 결국 10년 이상 지속된 이 소송에서 패소하여 회사에 500.00 만 USD의 손실을 입혔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이스트먼은 항공 정찰을 위한 조종사 훈련을 위해 로체스터에 사진 학교를 설립했다. 성장하는 노동조합 활동 시대에 이스트먼은 노동자들의 요구를 예측하여 노조 운동에 대처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그는 1910년 산업재해 보상을 제공하는 복지 기금과 1912년 모든 직원을 위한 이익 공유 프로그램을 포함한 여러 직원 복지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2.6. 주요 특허

조지 이스트먼이 취득한 주요 사진 관련 특허는 다음과 같다.
- 미국 특허 226503 "판 코팅 방법 및 장치" (1879년 9월 출원, 1880년 4월 발효)
- 미국 특허 306470 "사진 필름" (1884년 5월 10일 출원, 1884년 10월 14일 발효)
- 미국 특허 306594 "사진 필름" (1884년 3월 7일 출원, 1884년 10월 14일 발효)
- 미국 특허 317049 (윌리엄 H. 워커와 공동) "사진 필름용 롤 홀더" (1884년 8월 출원, 1885년 5월 발효)
- 미국 특허 388850 "카메라" (1888년 3월 출원, 1888년 9월 4일 발효)
이스트먼은 또한 데이비드 H. 휴스턴의 롤 필름 홀더에 대한 미국 특허 248179 "사진 장치" (1881년 6월 21일 출원, 1881년 10월 11일 발효)의 라이선스를 취득한 후 이를 매입했다.
3. 자선 활동 및 사회 공헌
조지 이스트먼은 평생 동안 교육, 의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광범위한 기부를 통해 사회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자신의 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것을 중요한 가치로 여겼다.
3.1. 자선 철학과 기부 규모
이스트먼은 생전에 약 1.00 억 USD를 다양한 기관에 기부하여 당대 미국 주요 자선가 중 한 명이 되었다. 이 금액은 1932년 이스트먼 사망 당시 가치로 2022년 기준 20.00 억 USD 이상에 해당한다. 그는 익명을 선호하여 "스미스 씨"라는 가명으로 기부했으며, 자신의 가난했던 어린 시절과 아이들이 학업을 중단하지 않도록 돕고 싶다는 동기에서 자선 활동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3.2. 교육 분야 기여
그의 가장 큰 기부는 로체스터 대학교와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에 집중되어 프로그램과 시설을 구축하는 데 사용되었다. 1918년, 그는 로체스터 대학교에 이스트먼 음악 학교 설립을 위한 기금을 기부했으며, 1921년에는 같은 대학에 의학 및 치의학부를 설립했다. 1901년에는 로체스터 공과대학교의 전신인 기계 연구소에 62.50 만 USD를 기부하는 등 상당한 지원을 했다. 또한 그는 미국 남부의 두 역사적 흑인 대학인 햄프턴 대학교와 터스키기 대학교에 당시 가장 많은 기부를 한 인물이기도 하다. MIT의 경우, 그는 찰스강변에 위치한 제2 캠퍼스의 여러 건물 건설에 자금을 지원했으며, 이 캠퍼스는 1916년에 개교했다.
3.3. 문화 기관 설립
이스트먼은 1922년에 로체스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창단하고 초대 음악 감독으로 앨버트 코츠를 영입했다. 같은 해 9월 4일, 그는 로체스터에 이스트먼 극장을 개관했는데, 이 극장 안에는 어머니를 기념하는 실내악 홀인 킬번 극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3.4. 의료 및 보건 분야 기여

이스트먼은 건강 증진에 관심을 가졌으며, 저소득층 주민들을 위한 진료소에 자금을 지원했다. 1915년, 그는 로체스터에 이스트먼 치과 진료소 설립을 위한 기금을 제공했다. 1926년에는 로열 프리 병원 이사장인 조지 리델 남작의 요청을 받고 런던에 치과 진료소 설립을 위해 20.00 만 GBP를 기부했다. 이 기부금으로 UCL 이스트먼 치과 연구소가 1931년 11월 20일 개원했으며, 중앙 런던의 소외계층 아동들에게 치과 진료를 제공하는 데 전념했다. 현재 이 기관은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의 일부이다. 1929년에는 옥스퍼드 대학교에 매년 뛰어난 미국 학자가 방문 교수로 재직할 수 있도록 조지 이스트먼 방문 교수직을 설립했다. 이스트먼은 또한 스톡홀름에 1937년 개원한 아동 치과 진료소인 이스트먼 연구소(Eastmaninstitutet스웨덴어)에도 자금을 지원했다. 그는 로마, 파리, 브뤼셀에도 유사한 치과 시설을 설립했다.
3.5. 도시 연구 및 행정 개혁 지원
1915년, 이스트먼은 로체스터에 시립 연구국을 설립하여 정보 수집 및 정부 정책 권고를 담당하게 했다. 이 기관은 나중에 지방 정부 연구 센터로 이름이 바뀌어 현재까지 그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1924년, 이스트먼과 연구국은 로체스터 정부를 시티 매니저 시스템으로 변경하는 안건에 대한 주민 투표를 지지했으며, 이는 통과되었다.
3.6. 달력 개혁 운동 지지
1920년대에 이스트먼은 달력 개혁에 관심을 가졌으며, 모세스 B. 코츠워스가 개발한 13개월 국제 고정 달력을 지지했다. 1925년 1월 17일, 이스트먼은 코츠워스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그는 처음에는 코츠워스에게 1년 동안 비밀리에 자금을 지원하다가 나중에는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이스트먼은 새로운 세계 달력 캠페인의 계획 및 자금 지원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국제 연맹의 요청으로 미국 내 달력 간소화 전국 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에 "달력 개선의 문제"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고, 네이션스 비즈니스에 "비즈니스 세계에 달력 개혁의 중요성"이라는 글을 쓰는 등 13개월 달력 시스템을 홍보하기 위한 여러 기사를 작성했다. 코닥은 1928년부터 1989년까지 이 달력을 회계에 적용했다. 이스트먼은 사망할 때까지 코츠워스의 캠페인을 지원했다. 1931년 국제 연맹에서 관련 회의가 열렸지만, 이스트먼의 사망과 제2차 세계 대전의 긴장 고조로 인해 이 달력은 고려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4. 사생활
조지 이스트먼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지만, 그의 삶에는 가까운 가족 관계와 개인적인 취미가 있었다.
4.1. 가족 및 인간관계
이스트먼은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와 누나 엘런 마리아, 그리고 그녀의 가족들과 매우 가깝게 지냈다. 그는 사업 동료 조지 디크먼의 아내이자 훈련된 가수인 조세핀 디크먼과 오랜 기간 플라토닉 관계를 유지했으며, 특히 1907년 어머니 마리아 이스트먼이 사망한 후 그녀와 더욱 친밀해졌다. 어머니 마리아의 죽음은 조지에게 특히 큰 충격이었다. 그는 평소 예의를 병적으로 중시했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친구들 앞에서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는 나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하루 종일 울었다. 살기 위해 멈출 수 없었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조지의 선물을 좀처럼 받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트먼은 어머니 생전에 충분히 효도할 수 없었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 사후에도 어머니를 기리는 노력을 계속했다. 1922년 9월 4일, 그는 로체스터에 이스트먼 극장을 개관했는데, 여기에는 어머니의 기억을 기리는 킬번 극장(실내악 홀)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의 저택인 이스트먼 하우스에는 어머니의 어린 시절 집에서 가져온 장미 덤불이 보존되어 있다.
4.2. 취미와 관심사
이스트먼은 열렬한 여행가였으며, 음악 감상과 사교 모임을 즐겼고, 피아노 연주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4.3. 독신 생활
그는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한 자료에 따르면, 그의 과학 연구에 대한 몰두 때문에 여자친구가 그를 떠났고, 이것이 그의 평생 독신 생활의 시작이 되었다고 한다.
5. 말년과 죽음
조지 이스트먼은 사업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후에도 회사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했으며, 말년에는 질병으로 인한 고통과 우울증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5.1. 경영 일선에서의 은퇴

1925년, 이스트먼은 코닥의 일상적인 경영에서 물러나 공식적으로 사장직에서 은퇴했다. 그러나 그는 사망할 때까지 이사회 의장으로서 회사와 관계를 유지했으며, 특히 연구 개발 부서의 발전에 기여했다. 1911년, 그는 코닥 직원들에게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이스트먼 신탁 및 저축 은행을 설립했으며, 이 기관은 나중에 ESL 연방 신용조합으로 재편되었다.
5.2. 질병과 자살
이스트먼은 사망하기 전 2년 동안 척추에 영향을 미치는 질환으로 인해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그는 서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걸음걸이는 느린 발걸음으로 변했다. 현대 의학에서는 이를 외상이나 노화로 인한 추간판 탈출증으로 인한 고통스러운 신경근 압박 또는 척추관 협착증과 같은 퇴행성 질환의 한 형태로 진단할 수 있다. 그의 어머니도 생애 마지막 2년 동안 휠체어를 사용하며 고통받았는데, 이스트먼은 어머니가 겪는 고통을 목격했으며, 점점 심해지는 통증과 신체적 쇠약으로 인해 더욱 우울해졌다. 어머니의 건강 기록에는 자궁암 수술 성공만 기록되어 있어 어머니의 척추 질환 여부는 불확실하다.
결국 1932년 3월 14일, 이스트먼은 심장에 한 발의 총을 쏘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유서에는 "친구들에게, 내 할 일은 끝났다 - 왜 기다려야 하는가? GE."라고 적혀 있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노년의 노쇠나 기타 쇠약해지는 질병에 대한 두려움이 그의 행동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5.3. 장례와 유산
이스트먼의 장례식은 로체스터의 성 바울 성공회 교회에서 거행되었으며, 그의 관은 샤를 구노의 "로마 행진곡"에 맞춰 운구되었다. 그의 유해는 그가 설립한 회사의 부지, 현재 이스트먼 비즈니스 파크로 알려진 곳에 안장되었다. 로체스터 보안 신탁 회사가 이스트먼의 유산 집행을 담당했으며, 그의 모든 유산은 로체스터 대학교에 기증되었다.
6. 유산과 평가
조지 이스트먼의 발명, 사업, 그리고 자선 활동은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삶과 업적은 다양한 방식으로 기념되고 평가받는다.
6.1. 대중적 이미지와 전기
이스트먼은 대중의 주목을 싫어했으며 자신의 이미지를 엄격하게 통제하려고 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정보를 공유하는 것을 꺼렸고, 여러 차례 이스트먼과 코닥은 전기 작가들이 그의 기록에 완전히 접근하는 것을 막았다. 그의 결정적인 전기는 마침내 1996년에 출판되었다.
6.2. 명예와 기념

이스트먼은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서 영화 부문에 두 개의 별로 대표되는 유일한 인물이다. 하나는 할리우드 대로 6800 블록 북쪽에, 다른 하나는 바인 스트리트 1700 블록 서쪽에 있다. 두 별 모두 그가 브로마이드 인화지를 개발하여 영화 산업의 표준이 된 업적을 기린다.
로체스터 대학교의 리버 캠퍼스에 있는 이스트먼 쿼드랭글은 이스트먼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954년에는 이스트먼의 100번째 생일을 기념하여 이스트먼의 전 동료이자 대학 동문인 찰스 F. 허치슨의 기부로 이스트먼 쿼드랭글 중앙 근처에 자오선 표지가 세워졌다. 2009년 가을에는 로체스터 대학교 이스트먼 쿼드랭글의 자오선 표지에서 북동쪽으로 약 18 m (60 ft) 떨어진 곳에 이스트먼의 동상이 세워졌다.

로체스터 공과대학교에는 그의 지원과 상당한 기부를 기려 그를 위한 건물이 헌정되어 있다. MIT는 그가 자금을 지원한 건물 중 하나에 이스트먼의 부조 명판을 설치했는데, 학생들은 행운을 빌기 위해 이스트먼의 코를 문지르는 전통이 있다.
이스트먼은 로체스터 이스트 애비뉴 900번지에 저택을 지어 친구들을 초대하여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개인 음악회를 열었다. 로체스터 대학교는 그의 사망 후 수십 년 동안 이 저택을 다양한 용도로 사용했다. 1949년, 이 저택은 조지 이스트먼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재개관했으며, 미국 국립역사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이스트먼의 어린 시절 집은 파괴될 위기에서 구출되어 그의 어린 시절 모습으로 복원되었으며, 제네시 컨트리 빌리지 및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1930년, 그는 미국 화학자 협회 금메달을 수상했다. 1934년에는 코닥 파크(현재 이스트먼 비즈니스 파크)에 조지 이스트먼 기념비가 공개되었다. 1954년 7월 12일, 미국 우편 서비스는 이스트먼의 100번째 생일을 기념하여 3센트 기념 우표를 발행했으며, 이 우표는 로체스터에서 처음 발행되었다.

1966년에는 조지 이스트먼 박물관이 국립 역사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미시시피 주립 대학교 데이브 C. 스왐 화학 공학과의 강당은 스왐에게 영감을 준 이스트먼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968년, 이스트먼은 국제 사진 명예의 전당 및 박물관에 헌액되었다.

6.3. 사진 및 영화 산업에 미친 영향
이스트먼의 롤 필름 발명은 루이 르 프랭스, 레옹 불리, 토머스 에디슨, 뤼미에르 형제, 조르주 멜리에스 등 세계 최초의 영화 제작자들에 의해 1888년 영화 필름 발명의 토대가 되었다. 그는 사진 촬영을 비싸고 소수의 열광적인 사람들만이 즐기던 취미에서 널리 인기 있고 비용이 저렴하며 쉽게 참여할 수 있는 활동으로 변화시킨 인물이다. 또한 그는 표준 사진 재료를 대량 생산한 최초의 회사 중 하나를 설립했으며, 1889년 이전에 이스트먼이 설계한 유연하고 투명한 필름은 영화 산업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6.4. 역사적 및 사회적 평가
이스트먼은 로체스터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잘 알려진 주민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사진을 변화시킨 인물로 기억된다.
6.5. 비판과 논란
이스트먼의 측근이었던 매리언 글리슨은 훗날 그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에 대해 "당시의 전형적인 견해, 즉 온정적이었지만 사회적 교류에는 엄격하게 반대했다"고 묘사했다. 그는 햄프턴 대학교와 터스키기 대학교에 관대한 기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로체스터에 존재했던 사실상의 인종 분리를 옹호하고 강화했다. 코닥은 이스트먼 생전에 거의 흑인 직원을 고용하지 않았으며, 1939년 뉴욕주 의회 아프리카계 미국인 생활 조건 위원회는 코닥에 단 한 명의 흑인 직원만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스트먼 치과 진료소 또한 흑인 지원자를 거부했으며, 이스트먼 극장은 흑인 관객을 발코니로 제한했다. 이스트먼은 1929년 월터 화이트 회장의 직접적인 요청을 포함하여 전미 유색인 지위 향상 협회(NAACP) 대표들과의 만남 요청을 여러 차례 거부했다.
1925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이스트먼은 미국 우생학 협회에 매년 1.00 만 USD를 기부했으며(1932년에는 1.50 만 USD로 증액), 이는 이민과 "인종 혼합"에 대한 우려가 많았던 당시 상류층 사이에서 인기 있는 대의명분이었다.
7. 기타 매체에서의 재현
PBS의 아메리칸 익스피리언스는 "사진의 마법사: 조지 이스트먼과 그가 사진을 변화시킨 이야기"라는 제목의 에피소드를 제작했으며, 2000년 5월 22일에 처음 방영되었다. 로체스터의 조지 이스트먼 박물관에서는 그의 삶을 다룬 여러 단편 다큐멘터리 영화가 상영되었다.
8. 관련 항목
- 스탠리 모터 캐리지 컴퍼니
- ESL 연방 신용조합
- 지방 정부 연구 센터
- 모션 픽처 특허 회사
- 미국 우생학 협회
- 국제 고정 달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