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조기(趙岐조기중국어, 108? ~ 201)는 후한 중기부터 말기에 걸쳐 활약한 관료이자 학자로, 자는 빈경(邠卿빈경중국어)이며, 본래 이름은 가(嘉가중국어)였다. 그는 경조윤 장릉현(長陵縣) 사람으로, 당대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 속에서도 타협하지 않는 청렴한 성품과 깊이 있는 학식으로 이름을 떨쳤다. 특히 환관 세력의 횡포에 맞서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는 태도를 일관되게 보여주며 의로운 지식인의 표상이 되었다.

조기는 관직 생활 동안 여러 차례 박해를 겪고 은둔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다시금 공직에 복귀하여 사회에 기여하고자 노력했다. 그의 가장 큰 학술적 업적은 《맹자》에 대한 주석서인 《맹자장구(孟子章句맹자장구중국어)》를 저술한 것으로, 이는 후대 유학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고주(古注고주중국어)'의 대표적인 저작으로 자리매김했다. 이 문서는 조기의 생애와 정치적 역경, 학술적 성과, 그리고 후대에 미친 영향을 통해 그의 진취적인 삶과 고결한 정신을 조명한다.
2. 생애와 배경
조기는 후한 시대의 혼란 속에서 태어나 성장하며, 개인적인 고난과 사회적 부패에 맞서는 삶을 살았다. 그의 초기 생애와 가족 관계는 그가 지닌 강직한 성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된다.
2.1. 출생, 가족, 그리고 교육
조기는 약 108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자는 빈경(邠卿빈경중국어)이다. 그의 본래 이름은 가(嘉가중국어)였고, 원래 자는 대경(臺卿대경중국어)이었다. '대경'이라는 자는 그가 어사대에서 태어난 것에 기인하여 지어졌다고 전해지지만, 훗날 난리를 피하여 이름을 조기로 바꾸었다. 그는 사례의 경조윤 장릉현(長陵縣) 출신이다. 조기는 어려서부터 경서에 밝고 재능과 기예가 뛰어났으며, 당대 명문가였던 마융(馬融마융중국어)의 가문에 장가들었다. 구체적으로는 마융의 형의 딸과 혼인했다고도 전해지며, 다른 기록에는 마융의 숙부 마돈(馬敦마돈중국어)의 딸인 마종강(馬宗姜마종강중국어)과 혼인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조기는 마융 일가가 외척이라는 점을 경멸하여, 그들과 대면하는 것을 꺼렸다.
2.2. 초기의 성품과 원칙
조기는 젊어서부터 사람됨이 결백하고 우직하여 타협하지 않는 성품을 지녔다. 이러한 성품 탓에 관직에 나아갔을 때도 사람들의 미움을 받기 일쑤였다. 특히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시련 중 하나는 삼십대 무렵부터 7년 동안 큰 병을 앓았다는 점이다. 이 긴 투병 생활은 그의 정신을 더욱 단련시켰고, 병상에서 벗어난 후 그는 더욱 확고한 신념과 원칙을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고난은 그가 훗날 정치적 박해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강직함을 유지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3. 정치 경력과 도전
조기는 후한 말기의 혼란스러운 정치 환경 속에서 여러 관직을 역임했으나, 그의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은 당시의 부패한 권력과 끊임없이 충돌하게 만들었다.
3.1. 초기 관직 임명
조기는 영흥 2년(154년), 조정의 부름을 받아 사공연(司空掾사공연중국어)으로 임명되며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 시기 그는 지방관이 부모의 상을 치르기 위해 임지를 떠나는 것을 허락해야 한다고 주청하여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이후 그는 대장군 양기(梁冀양기중국어)의 밑에 들어가 간언을 올렸으나, 양기는 그의 충언을 듣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기는 피씨현장(皮氏長피씨장중국어)으로 전출되었다. 이때 하동태수 유우(劉佑유우중국어)가 군을 떠나자, 후임으로 중상시 좌관(左慭좌관중국어)의 형인 좌승(左昇좌승중국어)이 부임했다. 피씨현은 하동군의 속현이었으므로, 조기는 환관 가문의 부하가 되는 것을 치욕으로 여겨 그날 바로 서쪽으로 돌아가 임지를 떠났다. 이후 경조윤 연독(延篤연독중국어)이 조기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그를 공조(功曹공조중국어)로 삼았다.
3.2. 권력 집단과의 대립과 은둔
조기는 과거 중상시 당형(唐衡당형중국어)의 형인 당현(唐玹당현중국어)이 경조의 호아도위(虎牙都尉호아도위중국어)로 부정한 방법으로 임명되었을 때부터 그를 비난했다. 당현은 이러한 비난에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다. 연희 원년(158년), 당현이 경조윤에 취임하자 조기는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을 우려하여 조카 조전(趙典조전중국어)과 함께 도주했다. 당현은 즉시 조기의 집안사람들을 잡아들이고 법을 엄격히 적용하여 모두 죽였다.
조기는 환관 세력의 박해를 피해 사방으로 피난을 다니며 이름을 숨기고 북해의 시내에서 떡장사를 하는 등 비루한 생활을 이어갔다. 이때 안구 사람 손숭(孫嵩손숭중국어)이 조기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그를 수년간 숨겨주었다. 이는 당시 만연했던 사회적 부패와 부당한 권력에 대한 조기의 저항적인 태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자, 의로운 인물들이 서로를 도왔던 사례로 평가된다. 훗날 당씨 일족이 주멸되면서 환관 세력이 몰락하자, 조기는 다시 세상에 나왔고 조정은 조기와 손숭의 이야기를 듣고 두 사람 모두를 불러들였다.
3.3. 복직과 이후의 관직 임명
환관 세력의 몰락 이후 조기는 복직하여 다시 관직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는 병주자사(并州刺史병주자사중국어)로까지 승진했으나, 당시 유행하던 당고의 금(黨錮의 禁)으로 인해 또다시 실각하는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황건적의 난 이후 혼란스러운 정세 속에서 인재가 필요해지자, 조기는 다시 등용되었다.
하진(何進하진중국어)의 추천을 받아 돈황태수(敦煌太守돈황태수중국어)에 임명되었지만, 임지로 부임하던 도중 도적 떼의 습격을 받아 겨우 장안으로 피신했다. 이후 동탁이 헌제를 장안으로 천도시키자, 조기는 태복(太僕태복중국어)에 임명되었다. 흥평 원년(194년) 헌제가 낙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되자, 조기는 형주로 파견되어 유표(劉表유표중국어)에게 동탁이 파괴한 낙양의 수복을 요청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조기는 그대로 형주에 머물렀으며, 과거 자신을 숨겨주었던 은인 손숭(孫嵩손숭중국어)이 유표에게 몸을 의지하고 있음을 알고 그를 청주자사(青州刺史청주자사중국어)로 추천해주었다. 이후 조기는 태상(太常태상중국어)에 취임하며 높은 관직에 올랐다.
4. 학술 활동과 저작
조기는 격변하는 정치 상황 속에서도 학문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고 귀중한 저술을 남겼다. 특히 그의 맹자 주석은 후대 유학 연구의 기반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했다.
4.1. 맹자장구
조기의 대표작은 《맹자장구(孟子章句맹자장구중국어)》이다. 이는 맹자에 대한 주석서로, 당시에는 《맹자》의 중요성이 제대로 인식되지 않던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조기가 심혈을 기울여 정리하고 주석을 달았다. 《맹자장구(孟子章句맹자장구중국어)》는 후한 시대에 저술된 맹자 주석 중 현재까지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주요 저작 중 하나로, 후대 유학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책은 주자(朱子주자중국어)의 '신주(新注신주중국어)'에 대비되는 '고주(古注고주중국어)'의 대표적인 저작으로 인정받으며,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십삼경주소중국어)》에도 포함되어 있다. 조기의 주석은 간결하고 명확하며, 맹자의 사상을 후대에 정확히 전달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4.2. 기타 저술
《맹자장구(孟子章句맹자장구중국어)》 외에도 조기는 《삼보결록(三輔決錄삼보결록중국어)》이라는 저술을 남겼다. 이 책은 당시 삼보(三輔삼보중국어) 지역의 인물들에 대한 간략한 전기들을 모아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삼보결록(三輔決錄삼보결록중국어)》의 원본은 현존하지 않지만, 후대 학자들이 이 책의 내용들을 모아 편찬한 '집일서(輯佚書집일서중국어)'를 통해 일부 내용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서진(西晉서진중국어)의 지우(摯虞지우중국어)가 이 책에 주석을 달았으며, 그 서문은 《후한서(後漢書후한서중국어)》의 주석에 인용되어 남아있다.
5. 사생활
조기의 사생활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으나, 그의 가족 관계와 특별한 인연을 맺었던 인물들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5.1. 가족과 관계
조기는 마융의 가문에 장가들어 마융의 숙부 마돈(馬敦마돈중국어)의 딸인 마종강(馬宗姜마종강중국어)과 혼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외척으로서의 마융 일가를 경멸하여 그들과 거리를 두었다. 또한, 조카 조전(趙典조전중국어)은 조기가 당현(唐玹당현중국어)의 박해를 피해 도피할 때 함께 동행했던 인물로, 조기의 도피 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기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바로 손숭(孫嵩손숭중국어)이다. 손숭은 조기가 환관의 박해를 피해 숨어 지내던 시절, 그를 숨겨주고 도와준 은인으로, 조기는 훗날 자신이 복직했을 때 손숭을 청주자사(青州刺史청주자사중국어)로 추천하며 그 은혜를 갚았다. 이러한 관계는 조기가 개인적인 의리와 신의를 중시했음을 보여준다.
6. 사망
조기는 201년에 사망했다. 그는 90여 세의 고령으로 생을 마감했으며, 이는 당시의 혼란스러운 시대를 고려할 때 매우 장수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사망은 후한 말기의 격동적인 시대 속에서 한 시대의 지식인이자 관료의 종말을 알리는 것이었다.
7. 유산과 평가
조기는 한 시대를 풍미한 학자이자 관료로서 후대에 다양한 방식으로 기억되고 평가받고 있다. 그의 청렴함과 학술적 업적은 오늘날까지도 꾸준히 조명되고 있다.
7.1. 역사적 평가
조기는 평생 동안 청렴한 공직자로서의 자세를 유지하며 부패한 권력에 맞섰다는 점에서 높은 역사적 평가를 받는다. 그는 환관 당현(唐玹당현중국어)과의 대립에서 보여주듯이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강직한 성품을 지녔으며, 이는 당대 많은 지식인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또한 그는 정치적 박해 속에서도 학문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고 귀중한 저술을 남기며, 학자로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후대의 평가는 그의 도덕적 청렴함과 학술적 기여를 높이 평가하며, 혼란스러운 후한 말기에 드물게 빛나는 인물로 인식하고 있다.
7.2. 경학에 미친 영향
특히 조기의 맹자 주석은 경학(經學경학중국어)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가 저술한 《맹자장구(孟子章句맹자장구중국어)》는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맹자》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그 의미를 심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조기의 주석은 《맹자》가 사서(四書사서중국어)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후대 유학의 중요한 경전으로 인정받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의 주석은 주자(朱子주자중국어)의 '신주(新注신주중국어)' 이전의 가장 중요한 주석인 '고주(古注고주중국어)'의 대표 격으로 여겨지며, 이는 맹자 연구의 초기 기반을 다졌다는 점에서 학술적으로 매우 높은 위상을 지닌다.
8. 대중문화
조기는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삼국지연의중국어)》에 등장하며 대중에게도 그 이름이 알려져 있다.
8.1. 삼국지연의
조기는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삼국지연의중국어)》 제7회에서 동탁이 원소와 공손찬을 화해시키기 위해 보낸 사자로 단 한 차례 등장한다. 그는 마일제(馬日磾마일제중국어)와 함께 원소와 공손찬을 찾아가 화해를 중재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 내용은 역사서인 《후한서(後漢書후한서중국어)》에도 마일제와 조기가 원소와 공손찬에게 사자로 파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소설 속 조기의 역할이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9. 같이 보기
- 삼국지 인물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