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조지 멍크는 어린 시절부터 군인의 길을 걸었으며, 그의 가문 배경과 초기 경험은 그의 삶과 경력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1.1. 출생 및 가족
조지 멍크는 1608년 12월 6일 데번주 포드릿지에 있는 가문의 영지에서 토머스 멍크 경(1570~1627)과 엘리자베스 스미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엘리자베스 스미스는 엑서터 시장을 세 번 역임했으며, 주변 25개의 장원을 소유한 부유한 상인이었던 조지 스미스 경의 딸이었다. 멍크 가문은 데번에서 가장 오래된 가문 중 하나였으나, 상대적으로 가난했으며, 스미스 경이 딸의 지참금을 약속대로 지불하지 않아 사위와 일련의 값비싼 법적 분쟁을 겪었다. 1625년, 그의 아버지 토머스 경은 빚 때문에 투옥되었고 2년 후 감옥에서 사망했다.
그의 형제자매로는 남동생 니콜라스 멍크(1609~1661)가 있었는데, 그는 훗날 헤리퍼드 주교와 이튼 칼리지의 학장이 되었다. 또한 형 토머스(1647년 사망)도 있었다. 그의 이모 그레이스 스미스는 1643년 잉글랜드 내전 중 랜스다운 전투에서 전사한 베빌 그렌빌 경의 아내였다. 베빌 경의 아들이자 상속인이며 조지 멍크의 사촌인 제1대 바스 백작 존 그렌빌은 왕정복고를 통해 출세했는데, 이는 멍크의 영향이 컸다.
1.2. 교육 및 초기 영향
멍크는 가난한 젠트리 가문의 둘째 아들이었기에 직업 군인의 길을 택했다. 이는 당시 이러한 배경을 가진 젊은이들에게 흔한 선택이었다. 1626년 말, 그와 그의 형 토머스가 아버지를 투옥시킨 부보안관 니콜라스 배틴을 폭행하여 살인 미수 혐의로 체포된 것이 그의 군 입대 이유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그의 첫 군사 경험은 1625년 11월 카디스 원정의 실패였다. 이 원정에서 그는 사촌인 리처드 그렌빌 경이 지휘하는 중대의 소위로 복무했다. 이후 1627년 7월 생마르탱드레 공성전에서도 참전했는데, 이 원정 또한 재앙적이었다.
2. 초기 군 경력 (내전 이전)
멍크는 잉글랜드 내전 발발 이전에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군사적 경험을 쌓으며 그의 군사적 역량을 키웠다.
2.1. 네덜란드 복무
멍크는 다음 10년 대부분을 네덜란드 국가군에서 복무하며 보냈다. 당시 네덜란드 국가군은 합스부르크 스페인에 대항한 팔십년 전쟁에서의 성공으로 '전쟁의 기술'을 배우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 여겨졌다. 훗날 삼왕국 전쟁에서 양측에서 싸운 많은 장교들이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쳤는데, 토머스 페어팩스 경과 필립 스키폰 경 등이 그 예이다.
1632년 마스트리흐트 함락 당시 그는 옥스퍼드 백작 로버트 드 베르가 지휘하는 연대에서 복무했다. 옥스퍼드 백작은 최종 공격에서 전사했으며, 조지 고링 경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1637년까지 멍크는 고링 휘하의 중령으로, 전쟁의 마지막 주요 작전 중 하나였던 브레다 공성전에서 브레다를 습격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638년 도르드레흐트의 민간 당국과 다툼을 벌인 후 그는 사직하고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2.2. 영국 복귀 및 주교 전쟁
잉글랜드로 돌아온 멍크는 몬트조이 블런트 뉴포트 백작이 조직한 연대의 중령으로 1639년과 1640년의 주교 전쟁에 참전했다. 뉴포트 백작은 또한 군수감이었다. 멍크는 1640년 뉴번 전투에서 영국 포병대를 포획에서 구해내는 등 몇 안 되는 공로를 세운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자금 부족으로 군대는 해산되었고, 멍크는 다음 1년 동안 실업 상태로 지냈다.
3. 삼왕국 전쟁 시기
잉글랜드 내전이 발발하면서 조지 멍크는 왕당파로 복무하다 포로가 되었고, 이후 의회파로 전향하여 새로운 군사 경력을 시작했다.
3.1. 왕당파 복무 및 포로 생활

1641년 아일랜드 반란 이후, 잉글랜드 의회는 반란 진압을 위한 왕립 아일랜드군의 모집을 승인했다. 멍크는 그의 먼 친척인 제2대 레스터 백작 로버트 시드니가 조직한 연대의 대령이 되어 1642년 1월 더블린에 상륙했으며, 제1대 오먼드 공작 제임스 버틀러 휘하에서 복무했다. 이후 18개월 동안 그는 레인스터의 반군 거점들을 상대로 작전을 펼쳤으며, 이 기간 동안 킬데어주에서 여러 차례 학살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1643년 3월 뉴로스 전투에도 참전했다. 그러나 1642년 8월 제1차 잉글랜드 내전이 발발하면서 오먼드는 잉글랜드로부터 더 이상 증원군이나 자금을 받을 수 없게 되었고, 1643년 중반까지 아일랜드 가톨릭 연맹이 얼스터, 더블린, 코크시티를 제외한 아일랜드 대부분을 장악하게 되었다.
멍크를 포함한 오먼드의 장교들 대부분은 아일랜드군이 의회파와 왕당파 사이에서 중립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찰스 1세는 이 병력들을 잉글랜드 전쟁 승리에 활용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이에 1643년 9월 오먼드는 연맹과 휴전, 즉 "정전(Cessation)"에 합의했다. 양측의 파벌들은 가톨릭 신자들의 예배의 자유와 헌법 개혁을 포함하는 정전 조건에 반대했다. 개신교도들은 이를 위협으로 보았고, 많은 연맹원들은 자신들이 승리 직전이며 휴전으로 얻을 것이 없다고 느꼈다. 또한 그들은 찰스가 아일랜드 가톨릭 신자들에게 어떤 양보를 하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그의 입지를 약화시킬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멍크는 국왕에 대한 충성 맹세를 거부한 이들 중 한 명이었고, 오먼드에 의해 브리스틀로 포로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그는 결국 왕당파를 지지하기로 동의했지만, 1644년 1월 나트위치 전투에서 다시 포로로 잡혔다. 포로 교환이 흔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경험과 능력은 매우 높이 평가되어 그는 다음 2년 동안 구금 상태로 지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군사 및 정치 문제에 대한 관찰(Observations on Military and Political Affairs)이라는 군사 교본을 저술했다. 1646년 5월 찰스 1세가 항복한 후, 그는 의회가 아일랜드로 파견한 증원 연대 중 한 곳에 임명되는 것을 수락했으며, 1647년 9월에는 동부 얼스터의 의회파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3.2. 의회파로의 전환
멍크는 제2차 잉글랜드 내전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고 모든 장교들에게 지지 선언에 서명하도록 요구함으로써 의회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했다. 그러나 1649년 1월 찰스 1세의 처형 이후, 그의 얼스터 내 입지는 매우 불안정해졌다. 얼스터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정착민들이 지배하고 있었고, 로버트 먼로 휘하의 코버넌터 군대의 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잉글랜드가 협의 없이 자신들의 왕을 처형한 것에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칼뱅주의자로서 군주제를 신성하게 부여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처형을 신성모독으로 여겼다. 그 결과, 그들은 오먼드가 이끄는 왕당파-연맹 동맹으로 이탈했고, 절박한 상황에서 멍크는 얼스터의 가톨릭 지도자인 오언 로 오닐과 비밀 휴전에 합의했는데, 이 사실을 5월이 되어서야 의회에 알렸다.
런던으로 소환된 그는 의회 위원회로부터 질책을 받았지만, 위원회는 비밀리에 그를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절박한 상황을 인정했다. 일부는 멍크를 이전 왕당파 출신으로 불신했지만, 올리버 크롬웰은 1650년부터 1651년까지의 영국-스코틀랜드 전쟁에서 그에게 연대 지휘권을 부여했다. 이 연대는 던바 전투에 참전했으며, 이후 던디 공성전에서 던디를 습격했는데, 이 과정에서 800명의 민간인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4. 영연방 및 보호령 시기
조지 멍크는 잉글랜드 연방과 보호령 시기에 스코틀랜드 사령관으로서의 역할과 해군 제독으로서의 활약으로 명성을 쌓았다.
4.1. 스코틀랜드 사령관

보호령 기간 내내 멍크는 크롬웰에게 충성했으며, 크롬웰은 1652년 2월까지 그를 스코틀랜드 군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당시 멍크는 심각한 병에 걸려 회복을 위해 바스로 은퇴했다. 1653년 4월 크롬웰은 잔부 의회를 해산했고, 6월에는 멍크가 베어본 의회에서 데번주의 의원으로 지명되었다.
제1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이 공식적으로 1654년 2월 웨스트민스터 조약으로 끝났지만, 멍크는 소환되어 왕당파의 글렌케언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스코틀랜드로 파견되었다. 군사령관으로 임명된 그는 이전 임무에서 보여주었던 무자비한 전술을 사용하여 1655년 말까지 스코틀랜드를 평정했다. 그는 다음 5년 동안 이 직책을 유지하면서,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장교들을 해임하고 종교적 반대자들을 체포함으로써 자신의 충성심을 증명했다.
4.2. 제1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1652년 11월 제1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이 시작되자, 멍크는 포병 활용에 대한 전문성을 인정받아 로버트 블레이크와 리처드 딘과 함께 해군 제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653년 포틀랜드 해전, 갑바드 해전, 스헤베닝언 해전 등 해전에서 활약했다.
해군 제독으로 재임하는 동안 멍크는 블레이크와 윌리엄 펜과 함께 해군 개혁에 힘썼다. 특히 함대 전술에서 단종진을 채택하여 종렬로 상대에게 집중 포화를 퍼붓는 전술을 개발했으며, 이는 갑바드 해전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 전술은 네덜란드군도 스헤베닝언 해전에서 채택했으며, 곧 단종진은 전 세계 해군의 기본 진형이 되었다. 또한 영국-네덜란드 전쟁을 통해 해상 전략이 확립되었고, 지중해 확보와 제해권 획득 등 훗날 영국 해군에서 중요시되는 목표들이 설정되었다.
4.3. 보호령 시기에서의 역할
1658년 9월 올리버 크롬웰이 사망하자, 멍크는 호국경으로 임명된 그의 아들 리처드 크롬웰에게 지지를 보냈다. 1659년 1월 선출된 제3차 보호령 의회는 멍크와 같은 온건한 장로교도와 왕당파 지지자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들의 주요 목표는 군대의 권력과 비용을 줄이는 것이었다. 4월, 존 램버트와 찰스 플리트우드가 이끄는 군대 급진파는 의회를 해산하고 리처드 크롬웰의 사임을 강요했다. 때때로 월링퍼드 하우스 파티로 알려진 이 새로운 정권은 보호령을 폐지하고, 1653년 크롬웰에 의해 해산되었던 잔부 의회를 다시 소집했으며, 스코틀랜드에서 복무하는 많은 이들을 포함하여 충성심이 의심되는 장교와 관리들을 해임하기 시작했다.
5. 왕정복고
조지 멍크는 잉글랜드 공화정 말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찰스 2세의 왕정복고를 실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영국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5.1. 왕정복고 실현의 결정적 역할

멍크는 또 다른 왕당파 봉기 소문 때문에 그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의 사촌인 제1대 바스 백작 존 그렌빌과 동생 니콜라스는 시일드 노트와 같은 왕당파 지하 조직과 연결되어 있었다. 1659년 7월, 니콜라스는 찰스 2세로부터 개인적인 요청을 멍크에게 전달하며 그의 도움을 요청했고, 연간 최대 10.00 만 GBP를 제안했다. 1659년 8월 부스 봉기가 발발했을 때 멍크는 참여를 고려했지만, 봉기가 그가 개입할 시간을 갖기도 전에 무너졌다. 10월에는 월링퍼드 하우스 그룹이 잔부 의회를 해산했지만, 12월 초에 다시 소집해야만 했다.
1659년 말까지 잉글랜드는 무정부 상태로 치닫는 듯 보였고, 새로운 선거와 군사 통치 종식에 대한 광범위한 요구가 있었다. 멍크는 램버트가 이끄는 공화파에 대항하여 잔부 의회를 지지한다고 선언했으며, 아일랜드에서 함께 복무했던 시오필러스 존스 경과 협력하여 12월 말 더블린성을 점령했다. 동시에 그는 뉴 모델군의 전 사령관 토머스 페어팩스 경이 조직한 병력의 지원을 받으며 자신의 군대를 잉글랜드 국경으로 진군시켰다. 수적으로 열세이고 급여도 받지 못했던 램버트의 병력은 흩어졌고, 2월 2일 멍크는 런던에 입성했으며 4월에는 1660년 의회를 위한 선거가 치러졌다.
멍크의 지지가 왕정복고에 필수적이었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그 정책이 멍크에 의해 시작된 것인지 아니면 당시 압도적으로 왕정 복고를 지지하는 다수 의견을 따른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가 데번의 의원으로 선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관찰자들은 그가 정치에 거의 관심이 없었으며, 잉글랜드에 지역 기반이 없었고 군대 감축 제안이 그의 미래 영향력에 불리하게 작용했다고 지적했다.
5.2. 정치적 협상 및 영향
1660년 4월 4일 찰스 2세가 발표한 브레다 선언은 주로 멍크의 권고에 기반을 두었다. 이 선언은 잉글랜드 내전과 공위 기간 동안 저지른 행위에 대한 일반 사면을 약속했으며, 찰스 1세의 처형에 서명한 사람들은 제외되었다. 또한 같은 기간 동안 구매된 재산은 현재 소유주가 보유하며, 종교적 관용과 군대 미지급금 지불을 약속했다. 이러한 조건에 따라 의회는 찰스를 국왕으로 선포하고 그를 잉글랜드로 초청하기로 결의했다. 그는 5월 24일 네덜란드를 떠나 5일 후 런던에 입성했다.
5.3. 작위 및 보상

1660년 7월, 멍크는 앨버말 공작으로 서임되었고, 잉글랜드 추밀원에 임명되었다. 그는 또한 이전의 볼리우 궁전, 아일랜드와 잉글랜드에 연간 7000 GBP 상당의 토지, 연간 700 GBP의 연금, 그리고 데번주 총독을 포함한 여러 직책을 받았다. 그는 또한 그의 부양가족과 인척들을 위해 중요한 직책을 얻어주었다. 존 그렌빌은 바스 백작이 되었고, 니콜라스 멍크는 헤리퍼드 주교로 임명되었으며, 그의 사촌 윌리엄 모리스는 북부 장관이 되었고, 그의 처남 토머스는 군수감이 되었다.
멍크의 기마 호위대(Monck's Life Guards멍크스 라이프 가즈영어)는 근위 기병이 되었고, 3개 중대의 제2 퀸즈 중대(Queen's Troop퀸즈 트루프영어)가 되었다가 이후 다른 중대와 통합되어 라이프 가즈 연대가 되었다. 이듬해 1661년에는 "멍크 보병 연대"가 근위 보병 연대가 되어, 이후에는 당시의 통칭인 "콜드스트림 가즈"(Coldstream Guards콜드스트림 가즈영어)가 정식 명칭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663년, 멍크는 현재의 사우스캐롤라이나주와 노스캐롤라이나주인 캐롤라이나 식민지의 토지 소유자 8명 중 한 명으로 할당되었다.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는 앨버말 사운드는 그의 작위를 따서 명명되었다. 그는 또한 왕립 아프리카 회사의 주주가 되었는데, 이 회사는 대서양 노예 무역에 대한 네덜란드의 통제에 도전하기 위해 설립되었으며, 1665년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으로 이어진 양국 간의 상업적 긴장의 주요 요인이 되었다. 이 분쟁은 멍크와 조지 카터렛, 제1대 샤프츠베리 백작 앤서니 애슐리 쿠퍼, 제1대 알링턴 백작 헨리 베넷을 포함한 정부 내 다른 투자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6. 왕정복고 이후의 경력 및 공직
왕정복고 이후 조지 멍크는 군사적 지휘뿐만 아니라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도 중요한 행정적 역할을 수행하며 찰스 2세 정부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6.1.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함대 지휘권은 요크 공작 제임스에게 주어졌고, 샌드위치 백작이 그의 부관을 맡았으며, 멍크는 해군성에서 행정 업무를 맡았다. 그는 또한 1665년 런던 대역병 동안 대부분의 정부 인사들이 옥스퍼드로 피신했을 때 런던에 머물면서 많은 인기를 얻었다.
멍크와 루퍼트 왕자는 1666년 전역 동안 공동으로 함대를 지휘했다. 6월의 4일 해전은 네덜란드의 승리였지만, 7월의 성 제임스의 날 해전에서 영국이 승리하며 만회했다. 4일 해전에서 루퍼트 함대가 네덜란드의 동맹국 프랑스의 원군 저지를 위해 전장에서 이탈했기 때문에, 멍크는 열세 그대로 미힐 드 라위터가 이끄는 네덜란드 함대에 맞서야 했다. 이 해전에서 영국은 큰 피해를 입고 패배를 당했지만, 멍크는 전선을 무너뜨리지 않고 분전하여 네덜란드에도 큰 손상을 입히고 결국 양군 모두 후퇴하게 만들었다. 8월에는 네덜란드 연안의 상선 습격 작전인 홈즈의 분화도 실행했다.
6.2. 런던 대역병 및 대화재 시기

1665년 런던 대역병이 유행하자 멍크는 치안 유지를 위해 출동하여 런던에 남아있었다. 1666년 9월 런던 대화재가 발생하자 그는 질서 회복을 돕기 위해 소환되었다. 그는 화재로 인한 혼란 속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복구 작업을 지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여 국민적 신뢰를 얻었다.
6.3. 행정직 및 기타 공직
멍크는 1660년 6월 아일랜드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나, 1661년 8월 다시 심각한 병에 걸려 오먼드에게 자리를 넘겨주었고, 미들섹스주 총독이라는 추가 직책으로 "보상"받았다. 이후 그는 최전선 정치에서 벗어나 개인 재산 증식에 집중했다. 그의 아내는 직책 판매로 악명이 높았지만, 이는 흔한 관행이었고 아마도 그녀의 미천한 출신에 대한 불만을 반영한 것이었을 것이다. 새뮤얼 피프스는 그의 일기에서 그녀를 "촌스럽고 평범한 여자"이자 "더러운 여자"라고 비난했지만, 그의 견해는 멍크와 자신의 사촌 제1대 샌드위치 백작 에드워드 몬태규 사이의 해군성 통제 경쟁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현역 지휘였다. 자금 부족으로 함대는 해체되어야 했고, 이는 1667년 6월 굴욕적인 메드웨이 습격으로 이어져 전쟁이 끝났다. 의회의 비난을 피한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명인 멍크는 재무부 제1대신으로 임명되었으나, 그는 심각한 부종을 앓고 있어 회의 참석 능력이 제한되었다.
7. 개인 생활
조지 멍크의 개인 생활은 그의 군사적, 정치적 경력만큼이나 흥미로운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7.1. 결혼 및 가족
1653년 1월, 멍크는 런던의 말발굽공의 딸이자 토머스 래드퍼드의 미망인인 앤 클라지스(1619~1670)와 결혼했다. 래드퍼드의 사망은 결혼 1년 후까지 법적으로 확인되지 않았는데, 이 사실은 나중에 그녀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기도 했다. 앤의 오빠 토머스 클라지스는 헌신적인 왕당파였으며, 왕정복고 후 기사 작위를 받았고 잉글랜드 의회에서 오랜 경력을 쌓았다. 멍크와 앤 사이에는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아들 한 명, 제2대 앨버말 공작 크리스토퍼 멍크(1653~1688)가 있었다.
8. 사망 및 유산
조지 멍크는 그의 사망 이후에도 영국 역사에 깊은 흔적을 남겼으며, 그의 업적은 후대에 걸쳐 다양하게 평가되었다.
8.1. 사망 당시 상황
조지 멍크는 1670년 1월 3일 사망했다. 그는 사망 당시 심각한 부종을 앓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다. 그의 아내 앤 클라지스는 그가 사망한 지 3주 후에 뒤따라 사망했다.
8.2. 매장 및 기념

멍크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몇 년 후, 윌리엄 켄트와 피터 스히메이커스가 제작한 기념비가 멍크를 기리기 위해 사원에 세워졌다. 그의 명예를 기리는 발라드 앨버말 공작 전하의 죽음에 부쳐도 작곡되었다.
8.3. 역사적 평가 및 영향
올리버 크롬웰이 1658년 9월 사망한 후, 멍크는 그의 아들 리처드 크롬웰에게 지지를 보냈으나, 리처드는 군부의 반항을 억누르지 못하고 이듬해 1659년 5월 퇴임했다. 이후 권력 투쟁이 발생하고 존 램버트가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 정권을 수립하는 등 잉글랜드는 혼란에 빠졌다. 이 시기 스코틀랜드에 머물던 멍크는 대륙으로 망명한 왕당파와 연락을 취하며 왕정복고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는 1660년 1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국경을 넘어 잉글랜드로 진군하여 램버트를 체포하고 런던에 입성했다. 멍크는 공화정에 불만을 품고 왕정복고를 염원하던 국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크롬웰에 의해 해산되었던 장기 의회를 소집하고, 공화정에서 배제되었던 장로교 의원들을 복귀시켰다. 나아가 3월에는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했으며, 찰스 2세와 클래런던 백작 에드워드 하이드와의 협상을 통해 브레다 선언이 발표되도록 이끌었다. 4월에 왕당파가 복귀한 1660년 의회가 출범하고 5월에 왕정복고 선언이 이루어지면서, 멍크는 큰 혼란 없이 찰스 2세의 왕정 복귀를 실현시켰다.
멍크의 지지는 왕정복고에 필수적이었으며, 이는 잉글랜드 내전 이후의 정치적 혼란과 무정부 상태를 종식시키고 국가에 안정을 가져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비록 그가 1660년 이후 질병과 정치에 대한 흥미 부족으로 전면에 나서지는 못했지만, 런던 대역병과 대화재와 같은 위기 상황에서 중요한 리더십을 발휘하며 사회 질서 유지에 기여했다.
그의 사후, 앨버말 공작 작위와 멍크 가문은 외아들 크리스토퍼 멍크가 1688년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단절되었다. 이후 아놀드 반 케펠을 위해 앨버말 백작 작위가 신설되었고, 1696년 제임스 2세가 그의 서자 헨리 피츠제임스에게 앨버말 공작 작위를 부활시켰으나, 이는 실효성 없는 자코바이트 귀족 작위였으며 1702년 헨리 사망과 함께 소멸했다. 멍크의 군사 개혁, 특히 단종진의 채택은 세계 해군의 기본 진형이 되었으며, 지중해 확보와 제해권 획득이라는 목표는 훗날 영국 해군의 중요한 전략적 지침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