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클로드 조지 보우스라이언 경(Claude George Bowes-Lyon, 14th Earl of Strathmore and Kinghorne)은 영국의 저명한 귀족이자 지주로, 1855년 3월 14일 런던 라운즈 스퀘어에서 제13대 스트래스모어와 킹호른 백작 클로드 보우스라이언과 프랜시스 스미스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영국 왕실의 중요한 인척으로, 조지 6세의 왕비이자 훗날 왕대비 엘리자베스로 알려진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의 아버지이며,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외할아버지이기도 합니다.
그의 삶은 꾸밈없고 겸손한 성품으로 특징지어집니다. 특히 소작인들에게 이례적으로 친절하게 대하고 직접 영지를 가꾸는 등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소박한 모습을 보여주어 '오래된 맥킨토시 코트와 끈'으로 비유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1904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백작 작위를 계승했으며, 글래미스 성을 포함한 광대한 영지를 소유했습니다. 말년에는 난청을 겪었으며, 1944년 11월 7일 글래미스 성에서 89세의 나이로 기관지염으로 사망했습니다.
2. 초기 생애 및 교육
클로드 조지 보우스라이언의 유년기와 학업 과정은 귀족 가문의 전형적인 틀을 따르면서도, 그의 독특한 성품이 형성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2.1. 출생과 가문 배경
클로드 조지 보우스라이언은 1855년 3월 14일 런던의 벨그라비아 지역에 위치한 라운즈 스퀘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제13대 스트래스모어와 킹호른 백작 클로드 보우스라이언이었고, 어머니는 프랜시스 도라 스미스였습니다. 그의 남동생인 패트릭 보우스라이언은 1887년 윔블던 선수권 대회 남자 복식에서 우승한 테니스 선수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2.2. 교육
그는 명문 사학인 이튼 칼리지에서 1869년부터 1872년까지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튼 칼리지에서의 학창 시절은 그의 초기 지적 성장과 사회적 인맥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3. 초기 경력 및 군 복무
귀족으로서 클로드 조지 보우스라이언은 일찍부터 사회 활동과 군 복무를 시작했습니다.
3.1. 군 복무
이튼 칼리지에서 교육을 마친 후, 그는 1876년에 근위 기병대 제2 연대(Life Guards)에 장교로 임관하여 6년간 복무했습니다. 결혼한 다음 해인 1882년에 군 복무를 마쳤습니다. 그는 또한 영토군의 활동적인 구성원이었으며, 블랙 워치 제4/5대대의 명예 대령직을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4. 결혼 및 자녀
클로드 조지 보우스라이언의 결혼 생활은 원만했으며, 열 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4.1. 결혼 생활
그는 1881년 7월 16일 서리주 피터셤에서 세실리아 캐번디시-벤팅크와 결혼했습니다. 두 사람의 부부 관계는 매우 원만하고 화목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자녀들에게 키스하기 전에 콧수염을 연극적으로, 그러나 정중하게 가르는 독특한 습관이 있었습니다.
4.2. 자녀
클로드 조지 보우스라이언과 세실리아 캐번디시-벤팅크 사이에는 6남 4녀, 총 열 명의 자녀가 태어났습니다.
이름 | 출생 | 사망 | 나이 | 비고 |
---|---|---|---|---|
바이올렛 히아신스 보우스라이언 (Violet Hyacinth Bowes-Lyon) | 1882년 4월 17일 | 1893년 10월 17일 | 11세 | 디프테리아로 사망. |
메리 프랜시스 보우스라이언 (Lady Mary Frances Bowes-Lyon) | 1883년 8월 30일 | 1961년 2월 8일 | 77세 | 1910년 제16대 엘핀스톤 경 시드니 엘핀스톤과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습니다. |
패트릭 보우스라이언, 글래미스 경 (Patrick Bowes-Lyon, Lord Glamis) | 1884년 9월 22일 | 1949년 5월 25일 | 64세 | 1908년 제10대 리즈 공작의 딸인 도로시 오스본 영애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습니다. 1944년에 제15대이자 제2대 스트래스모어와 킹호른 백작 작위를 계승했습니다. |
존 보우스라이언 경 (Lieutenant The Hon. John Bowes-Lyon) | 1886년 4월 1일 | 1930년 2월 7일 | 43세 | '조크'로 불렸습니다. 1914년 제21대 클린턴 남작의 딸인 페넬라 헵번-스튜어트-포브스-트레퓨시스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으며, 자녀 중에는 앤 보우스라이언, 넬리사 보우스라이언과 캐서린 보우스라이언이 있습니다. 형 패트릭, 동생 퍼거스와 함께 블랙 워치 보병 연대에서 복무했습니다. |
알렉산더 프랜시스 보우스라이언 (The Hon. Alexander Francis Bowes-Lyon) | 1887년 4월 14일 | 1911년 10월 19일 | 24세 | '알렉'으로 불렸습니다. 대뇌 기저부의 종양으로 잠자던 중 사망했으며, 미혼이었습니다. |
퍼거스 보우스라이언 경 (Captain The Hon. Fergus Bowes-Lyon) | 1889년 4월 18일 | 1915년 9월 27일 | 26세 | 1914년 제5대 포털링턴 백작의 딸인 크리스티안 노라 도슨-데이머 영애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습니다. 루스 전투 초기 단계에서 전사했습니다. |
로즈 콘스턴스 보우스라이언 영애 (Lady Rose Constance Bowes-Lyon) | 1890년 5월 6일 | 1967년 11월 17일 | 77세 | 1916년 제4대 그랜빌 백작 윌리엄 레버슨-고어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습니다. |
마이클 클로드 해밀턴 보우스라이언 경 (Lieutenant-Colonel The Hon. Michael Claude Hamilton Bowes-Lyon) | 1893년 10월 1일 | 1953년 5월 1일 | 59세 | '미키'로 불렸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홀츠민덴 포로 수용소의 전쟁포로였습니다. 1928년 엘리자베스 캐터와 결혼했으며, 그녀는 1923년 요크 공작 앨버트와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의 결혼식에서 신부 들러리였습니다. 그의 자녀로는 퍼거스 보우스라이언, 제17대 스트래스모어와 킹호른 백작, 메리 콜먼 영애, 패트리샤 테틀리 영애, 앨버말 보우스라이언이 있습니다. 천식과 심부전으로 베드퍼드셔주에서 사망했습니다. |
엘리자베스 앤절라 마거릿 보우스라이언 영애 (Lady Elizabeth Angela Marguerite Bowes-Lyon) | 1900년 8월 4일 | 2002년 3월 30일 | 101세 | 1923년 요크 공작 앨버트(훗날 조지 6세)와 결혼하여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포함한 자녀를 두었습니다. 1936년 영국 왕비가 되었고, 남편 사후에는 왕대비로 알려졌습니다. |
데이비드 보우스라이언 경 (The Hon. Sir David Bowes-Lyon) | 1902년 5월 2일 | 1961년 9월 13일 | 59세 | 1929년 레이첼 클레이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정치전집행부에서 근무했습니다. |
5. 귀족으로서의 삶과 영지 소유
클로드 조지 보우스라이언은 백작으로서 광대한 영지를 책임감 있게 관리했으며, 그의 검소하고 겸손한 성품은 특히 소작인들과의 관계에서 두드러졌습니다.


5.1. 작위 계승과 영지 관리
1904년 2월 16일,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백작 작위를 계승하고 제14대 스트래스모어와 킹호른 백작이 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에 걸친 광대한 영지를 물려받았는데, 여기에는 유서 깊은 글래미스 성을 비롯하여 세인트 폴스 월든 버리, 깁사이드 홀, 더럼주의 스트리트럼 성, 그리고 하트퍼드 근처의 울머스 파크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그는 임업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영국에서 씨앗부터 낙엽송을 재배한 최초의 인물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의 영지에는 많은 소작농들이 있었고, 그는 이들에게 매우 이례적으로 친절하게 대하는 것으로 명성이 높았습니다.
5.2. 개인적 품성과 소작인 관계
그의 동시대인들은 클로드 조지 보우스라이언을 소박하고 꾸밈없는 인물로 묘사했습니다. 그는 종종 "끈으로 묶은 낡은 맥킨토시 코트"를 입은 모습으로 발견될 정도로 검소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영지에서 직접 노동을 즐겼으며, 방문객들이 그를 흔한 노동자로 착각할 정도로 육체노동에 몰두했습니다. 또한 아침 식사로 직접 코코아를 만들고, 저녁 식사 시에는 항상 와인을 희석할 물 한 주전자를 옆에 두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겸손하고 실용적인 성품은 소작인들에 대한 그의 친절한 태도와 함께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는 단순한 지주를 넘어, 소작인들의 삶에 진정으로 관심을 기울이며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6. 왕실과의 관계 및 공적 역할
그의 딸이 영국 왕실의 일원이 되면서 클로드 조지 보우스라이언은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고, 여러 공직과 서훈을 받으며 공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6.1. 딸의 결혼과 왕실 인척 관계
백작은 왕족과의 결혼에 대해 다소 유보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23년 4월 그의 막내딸 엘리자베스는 조지 5세와 메리 왕비의 둘째 아들인 요크 공작 앨버트 왕자(훗날 조지 6세)와 결혼했습니다. 이 결혼을 기념하여 스트래스모어 경은 로열 빅토리아 훈장 나이트 그랜드 크로스(GCVO)를 받았습니다. 그의 손녀인 엘리자베스 공주(훗날 엘리자베스 2세 여왕)는 1926년 4월 런던 메이페어의 브루턴가 17번지에 있는 그의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1936년, 그의 사위가 조지 6세라는 이름으로 국왕이 되면서, 그는 새로운 왕비의 아버지로서 왕실의 외척이라는 중요한 위치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1937년 대관식 기념 서훈에서 그는 가터 훈장 나이트 컴패니언과 연합왕국 귀족 작위인 제1대 스트래스모어와 킹호른 백작 작위를 받았습니다. (그는 이미 스코틀랜드 귀족 작위로는 제14대 스트래스모어와 킹호른 백작이었으나, 스코틀랜드 귀족 작위만으로는 자동으로 영국 상원에 앉을 수 없었기에, 이전에 아버지에게 수여된 보우스 남작 작위를 통해서만 상원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의 딸과 사위의 대관식에는 백작과 백작부인이 메리 왕비 및 두 손녀인 엘리자베스 공주와 마거릿 공주와 함께 왕실 특별석에 앉았습니다.
6.2. 공직 및 서훈
클로드 조지 보우스라이언은 여러 공직을 수행했으며 다양한 서훈을 받았습니다. 그는 앤거스주의 주지사를 역임했으며, 그의 딸이 왕비가 되자 이 직책을 사임했습니다. 그가 받은 주요 서훈은 다음과 같습니다:
- 1923년: 로열 빅토리아 훈장 나이트 그랜드 크로스(GCVO)
- 1928년: 시슬 훈장 나이트(KT)
- 1937년: 가터 훈장 나이트 컴패니언(KG)
- 1937년 6월 1일: 연합왕국 귀족 작위 제1대 스트래스모어와 킹호른 백작
- 1938년: 성 요한 훈장 나이트 오브 그레이스
7. 말년과 사망
클로드 조지 보우스라이언의 말년은 건강상의 어려움을 겪었으며, 향년 89세로 그의 영지에서 평화롭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7.1. 말년
생애 말년에 클로드 조지 보우스라이언은 극심한 난청을 겪었습니다. 그의 아내인 스트래스모어 백작부인은 그보다 앞선 1938년에 사망했습니다.
7.2. 사망
클로드 조지 보우스라이언 경은 1944년 11월 7일, 향년 89세의 나이로 글래미스 성에서 기관지염으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장례식은 사망 사흘 뒤인 11월 10일 글래미스 성에서 거행되었으며, 그는 그곳에 안장되었습니다. 그의 작위는 아들인 패트릭 보우스라이언, 글래미스 경에게 계승되었습니다.
8. 가계
클로드 조지 보우스라이언 경의 가계는 여러 세대에 걸쳐 영국 귀족 가문들과 혼인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 제14대 스트래스모어와 킹호른 백작 클로드 보우스라이언
- 아버지: 제13대 스트래스모어와 킹호른 백작 클로드 보우스라이언
- 어머니: 프랜시스 도라 스미스
- 친할아버지: 글래미스 경 토머스 라이언-보우스
- 친할머니: 샬럿 그림스테드
- 외할아버지: 오스왈드 스미스
- 외할머니: 헨리에타 밀드레드 호지슨
- 증조할아버지 (친가): 제11대 스트래스모어와 킹호른 백작 토머스 라이언-보우스
- 증조할머니 (친가): 메리 엘리자베스 루이사 카펜터
- 증조할아버지 (친가): 조지프 발렌타인 그림스테드
- 증조할머니 (친가): 샬럿 제인 사라 월시
- 증조할아버지 (외가): 조지 스미스
- 증조할머니 (외가): 프랜시스 메리 모즐리
- 증조할아버지 (외가): 로버트 호지슨, 칼라일 주임 사제
- 증조할머니 (외가): 메리 터커
9. 문장
클로드 조지 보우스라이언 경의 문장(Coat of Arms)은 그의 가문인 보우스라이언 가문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의 문장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뉩니다.
- 첫 번째와 네 번째 사분면**: 은색 바탕에 파란색의 사자가 뒷발로 서 있는 문장입니다. 사자의 혀와 발톱은 붉은색이며, 이중 테두리는 파란색 백합 무늬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이는 라이언(Lyon) 가문의 문장입니다.
- 두 번째와 세 번째 사분면**: 담비 무늬 바탕에 세 개의 활이 세로로 나란히 그려져 있습니다. 이는 보우스(Bowes) 가문의 문장입니다.
이처럼 문장에는 활(bows)과 사자(lions)가 모두 포함되어 있어, 보우스라이언(Bowes-Lyon)이라는 가문의 이름을 나타내는 유사장의 좋은 예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문장 위에는 백작관이 놓여 있습니다.
그의 문장을 지지하는 동물로는 오른쪽(dexter)에 유니콘이, 왼쪽(sinister)에 사자가 있습니다. 유니콘은 은색 바탕에 금색 발톱과 뿔을 가지고 있고, 사자는 위쪽은 금색, 아래쪽은 붉은색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문장의 모토는 라틴어로 "In Te, Domine, Speravi"이며, 이는 "주님, 당신을 신뢰하나이다"라는 뜻입니다.
10. 유산 및 역사적 평가
클로드 조지 보우스라이언 경은 단순히 왕실의 중요한 인척을 넘어, 그의 개인적 성품과 영지 관리 방식으로 후대에 긍정적인 유산을 남겼습니다. 그의 삶은 겸손과 소박함이라는 가치를 실천한 귀족의 본보기로 평가됩니다.
그는 권위적이고 고귀한 신분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꾸밈없고 검소한 생활을 유지하며, 직접 영지를 가꾸고 육체노동을 즐겼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그가 형식적인 위상보다는 실제적인 삶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겼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그가 소작인들에게 이례적으로 친절하게 대하고 그들의 삶에 깊이 공감하려 노력했다는 점은 단순한 지주-소작인 관계를 넘어선 인간적인 배려와 상호 존중의 정신을 반영합니다. 이는 당시 사회의 계급적 분위기 속에서 매우 드물고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만한 특징으로, 그의 인품을 높이 사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그의 유산은 단지 재산이나 작위의 계승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의 삶의 방식과 소작인에 대한 배려는 단순한 귀족의 자선 행위를 넘어, 인간적인 연대와 책임감을 강조하는 모범이 되었습니다. 클로드 조지 보우스라이언 경은 권력과 부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겸손을 잃지 않고 타인을 배려하는 인물로 기억되고 있으며, 그의 이러한 미덕은 그의 후손들과 영국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