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정여창은 1836년 11월 18일(도광 16년 음력 10월 10일) 안후이성 루장(현 차오후시 및 루장현)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유복하지 못하여, 그는 3년 정도 사숙에 다녔을 뿐 10세 무렵에는 더 이상 학문을 배울 기회를 얻지 못했다.
1.1. 초기 경력
1854년(함풍 4년), 태평천국의 난으로 태평천국군이 루장을 점령하자 정여창은 엽운래(葉芸來엽운래 (yèyúnlái)중국어)가 이끄는 태평천국군에 합류했다. 그러나 1861년(함풍 11년) 청나라의 증국번이 이끄는 상군이 안경을 포위하자, 그는 정학기와 함께 투항하여 오히려 안경 공략에 공을 세웠다. 이 공로로 그는 천총(千総천총 (qiānzǒng)중국어, 정육품 무관)으로 임용되었다. 1862년(동치 원년)에는 이홍장의 회군에 편입되어 태평천국군과 싸웠고, 그 용맹함을 인정받아 유명전의 부대에 발탁되었다.
1864년(동치 3년), 태평천국이 멸망하자 정여창은 유명전을 따라 북상하여 염군과 싸웠다. 1868년(동치 7년) 동염군을 격퇴한 공로로 제독총병관(종일품 무관)의 벼슬과 '협용파도로'(協勇巴圖魯협용파도로 (xiéyǒngbātúlǔ)중국어, 만주어로 '용감한 영웅'이라는 뜻의 칭호)라는 용사의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1874년(동치 13년) 청나라 조정이 군축을 결정하자, 정여창은 유명전에게 자신의 부대 축소에 대한 부당함을 격렬하게 항의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에 격분한 유명전이 정여창을 암살하려 했으나, 암살 계획을 미리 들은 정여창은 즉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화를 피했다.
2. 해군 건설 및 지휘
정여창은 청나라의 근대화 운동인 양무운동에 참여하여 북양 함대를 건설하고 지휘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2.1. 근대화 운동 참여
1875년(광서 원년), 북양통상대신 겸 직례총독이었던 이홍장이 서양식 해군을 창설한다는 소식을 듣고 정여창은 그에게 의탁했다. 이홍장은 정여창과 유명전 사이의 불화를 고려하여, 정여창을 상군에 재배치하는 대신 신해군 창설의 핵심 인물로 삼았다. 이홍장은 정여창에게 상하이 도대(道台도대 (dàotái)중국어), 강남 제조기계 총국 감독 등 요직을 맡기며 그를 해군력 발전에 적극적으로 참여시켰다. 정여창은 중국 내에 현대적인 장갑순양함을 건조할 수 있는 조선소를 건설하여 해외 수입 의존도를 줄여야 한다고 이홍장에게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위해위와 뤼순항에 해군 기지를 건설하는 데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2. 해외 함선 인수 및 시찰
1880년(광서 6년), 정여창은 신해군 최초의 순양함으로 영국 암스트롱 사에 발주했던 '초용'(超勇초용 (chāoyǒng)중국어)과 '양위'(揚威양위 (yángwēi)중국어)를 인수하기 위해 임태증(林泰曽임태증 (líntàizēng)중국어), 등세창(鄧世昌등세창 (dèngshìchāng)중국어) 등의 승조원들을 이끌고 영국 뉴캐슬어폰타인으로 건너갔다. 그는 이 과정에서 뉴캐슬의 사진작가 H.S. 멘델스존에 의해 사진이 찍히기도 했다. 그는 또한 독일과 프랑스를 방문하여 그들의 조선 기술을 익히는 데 주력했다.
2.3. 북양 함대 사령관
1888년(광서 14년), 북양 함대가 정식으로 출범하면서 정여창은 제독(수사제독, 함대 사령장관)에 임명되었다. 1888년부터 1894년까지 북양 함대를 이끌었으며, 1894년에는 해군 부장관으로 승진했다.
1891년(광서 17년) 7월부터 8월까지 정여창은 최신예 거대 함대를 이끌고 일본을 방문했다. 이 방문은 일본에 대한 청나라의 해군력을 과시하고 위협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일본 방문 중 그는 세토 내해를 유람하며 계단식 밭을 보고 "언덕 중턱을 경작하는 빈궁한 소국이 비옥한 땅이 무한한 대청제국에 전쟁을 거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라고 일본을 조롱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또한, 체류 중 게이샤 오시카(おしか오시카 (Oshika)일본어)와 연인 관계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1891년 이후 청나라 해군 예산은 대폭 삭감되었다. 이는 이화원 개수 등에 예산을 전용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정여창은 이러한 어려운 재정 상황 속에서도 함대를 운영해야만 했으며, 이 시기 이후 북양 함대는 더 이상 군함을 추가로 구매하지 못했다.
3. 주요 군사 활동 및 사건
정여창은 청일 전쟁 이전에도 주요 군사 작전 및 외교적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3.1. 임오군란
1882년(광서 8년),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발발하자, 정여창은 청나라 함장 오장경의 명령에 따라 북양 함대 군함 5척을 이끌고 조선에 파병되었다. 그는 임오군란을 진압하는 데 기여했으며, 오장경은 이 과정에서 흥선대원군을 납치하여 청나라로 귀국했다. 이를 통해 조선에는 친청 정권이 복귀했고, 청나라는 기존의 종주국으로서의 존재감을 재확인하며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다.
3.2. 나가사키 사건
1886년(광서 12년), 정여창은 북양 함대를 이끌고 홍콩, 일본의 나가사키, 조선의 부산과 원산,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를 순방하며 무력 시위를 벌였다. 같은 해 8월 13일, 나가사키에 정박 중이던 북양 함대의 '진원'(鎮遠진원 (zhènyuǎn)중국어)함 선원들이 현지 유곽에서 술에 취해 난투극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일본 경찰관 한 명이 살해당했다. 이틀 뒤인 8월 15일, 현지 주민, 경찰, 정여창의 선원들 사이에 폭동이 발생하여 '나가사키 사건'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폭동으로 청나라 선원 6명이 사망하고 45명이 부상했으며, 일본 경찰관 5명이 사망하고 16명이 부상당했다. 이 사건은 심각한 외교적 마찰을 빚었으나, 정여창은 1891년에 북양 함대를 이끌고 일본을 다시 방문할 수 있었다.
3.3. 청불 전쟁
1884년(광서 10년) 청불 전쟁 당시의 활약으로 정여창은 청나라 황제로부터 황마갑(黃馬甲, 황색 기마복)을 하사받았다. 이는 청나라에서 전통적으로 최고 권위의 군사적 포상 중 하나였다.
4. 청일 전쟁
1894년(광서 20년) 청일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북양 함대는 세계 8위의 해군력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정여창은 일본 제국 해군과의 직접적인 대결을 주장했으나, 이홍장은 함대 보존을 위해 압록강 하구 동쪽으로는 작전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 이는 청나라의 귀중한 현대식 군함들이 손상되거나 파괴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이홍장은 예산 부족으로 광둥 함대에서 순양함을 빌려와 북양 함대에 편입시켰을 정도로 해군력 보존에 신경을 썼으며, 북양 함대가 괴멸할 경우 청나라의 제해권을 지킬 함선이 남지 않을 것을 우려하여 육상전 위주로 일본을 격파하려 했다.
그러나 일본이 연합함대를 조직하여 육상 부대 수송 지원 등에 참여하자, 청나라 내부에서는 "북양 함대는 왜 출동하지 않느냐?"는 여론이 높아졌다. 8월 10일 일본 연합함대가 서해로 진입하자 광서제까지 이홍장에게 "정여창이 일본 해군을 무서워하는 것이냐?"고 질책했다. 이에 이홍장은 부득이 북양 함대에 출동 명령을 내렸다.
4.1. 황해 해전
1894년 9월 17일, 압록강 하구 앞바다에서 일본 연합함대와 조우하여 황해 해전이 벌어졌다. 정여창은 함대 사령관으로서 기함 '정원'의 함교에서 지휘를 맡고 있었다. 그러나 주포 발사 시 발생한 사고로 함교가 파괴되면서 정여창이 부상을 입었다. 이 사고로 북양 함대에는 큰 문제가 발생했다. 기함이 지휘 불능 상태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권한 위양 절차가 명확히 정해져 있지 않아, 북양 함대의 각 함선들은 개별적으로 전투를 시작했다. 결국 약 5시간에 걸친 이 전투에서 북양 함대는 주력 12척 중 5척이 격침되는 참패를 당하고 웨이하이로 후퇴했다.
4.2. 위해위 공방전
황해 해전 이후, 정여창은 이홍장의 명령에 따라 남은 북양 함대의 본거지를 웨이하이웨이로 옮겼다. 그는 좌승함을 '진원'으로 바꾸고 오로지 방비에만 전념했다. 정여창은 위해위를 방어하는 육상 부대의 전력에 불안감을 느꼈으나, 육상 포대는 북양 함대의 관할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러한 불안은 개선되지 못했다.
1895년 1월 20일, 일본군은 산둥반도의 영성에 상륙했다. 일본 연합함대사령장관인 이토 스케유키는 정여창에게 항복을 권유했으나, 정여창은 이를 거부했다. 일본군은 육로를 통해 위해위의 육상 포대를 공략하여 해상과 육상에서 북양 함대를 포위했다. 며칠간의 전투 끝에 2월 12일, 정여창은 병사들의 목숨을 살려주는 것을 조건으로 항복을 수락했다.

5. 최후
5.1. 자결
1895년 2월 12일, 정여창은 병사들의 안전을 조건으로 항복을 수락한 직후, 기함 '진원' 함내에서 아편을 과다 복용하여 자결을 선택했다. 향년 58세였다. 그의 부관인 유보천 제독 또한 자신의 군함을 폭파시키도록 명령한 뒤 자결했다. 북양 함대의 잔존 병력은 일본군에 항복했다.
정여창의 시신은 정크선으로 후송될 예정이었으나, 이토 스케유키의 독단적인 주선으로 화물선 '강제호'(康濟號강제호 (kāngjìhào)중국어) 한 척이 노획 처분에서 풀려나 정여창의 시신을 운구할 수 있게 되었다. 정여창의 시신을 태운 배는 일본 해군의 경례를 받으며, 목숨을 건진 병력과 함께 본국으로 귀환했다.

6. 사후 평가 및 복권
정여창의 죽음 이후, 그의 명예는 청 정부에 의해 실추되었으나, 이후 재평가를 통해 회복되었다.
6.1. 청 정부의 책임 전가
'북양 함대의 소멸' 소식을 들은 광서제는 대노하여 정여창에게 전쟁 패배의 모든 책임을 전가했다. 광서제는 정여창의 모든 관직과 칭호를 박탈하고, 그의 재산을 몰수했으며, 심지어 장례를 치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이는 패전의 책임을 개인에게 돌려 황실의 권위를 유지하려는 의도였다.
6.2. 명예 회복
그러나 정여창의 자결은 일본군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1910년, 당시 해군대신인 아이신교로 짜이쉰(愛新覺羅 載洵아이신교로 짜이쉰 (àixīnjuéluó zàixún)중국어, 광서제의 친동생)과 남북양수사 겸 광동수사 제독이었던 사전빙(薩鎮氷사전빙 (sàzhènbīng)중국어) 등의 탄원 결과, 정여창의 모든 관직과 칭호가 복권되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한 후, 1912년에는 그의 가족들이 정식으로 장례를 치르고 그를 합당하게 매장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공적과 희생은 재평가되어 근대 청나라 해군 건설에 기여한 인물로 인정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