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잭 겔버(Jack Gelber, 1932년 4월 12일 ~ 2003년 5월 9일)는 미국의 극작가이자 연출가, 교육자이다. 그는 1950년대와 1960년대 오프 브로드웨이 연극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특히 1959년작 희곡 《더 커넥션》으로 큰 명성을 얻었다. 이 작품은 마약 중독에 빠진 재즈 음악가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당시 관객과 비평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리빙 시어터의 첫 번째 성공작이 되었다.
겔버는 평생 뉴욕에서 활동하며 글을 쓰고 연극을 연출했으며, 브루클린 칼리지와 컬럼비아 대학교 등에서 연극을 가르쳤다. 특히 브루클린 칼리지에서는 희곡 창작 MFA 과정을 개설하고 운영하며 후학 양성에도 힘썼다. 그의 작품들은 사회의 부조리와 인간의 좌절을 깊이 있게 탐구하며,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 참여와 같은 사회 운동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명확히 드러내기도 했다. 1999년에는 연극계에서의 평생 공로를 인정받아 에드워드 앨비 라스트 프론티어 극작가상을 수상했다.
2. 생애
2.1. 유년기 및 교육
잭 겔버는 1932년 4월 12일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몰리 싱어(Molly Singer)와 해럴드 겔버(Harold Gelber) 사이에서 세 아들 중 첫째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러시아와 루마니아계 유대계 미국인이었다. 아버지 해럴드는 판금공이었는데, 잭 겔버는 자신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잠시 이 직업을 이어받기도 했다. 일리노이 대학교 재학 중 소설에 관심을 갖게 되어 단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953년 저널리즘 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한 후, 겔버는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선박 수리공 조수로 일했다.
2.2. 초기 활동
샌프란시스코에서 캐럴 웨스텐버그를 만난 겔버는 1957년 12월 23일 뉴욕에서 결혼했다. 뉴욕으로 돌아온 후 그는 유엔 본부에서 등사기 조작원으로 일했다. 1957년 말, 그는 첫 희곡인 《더 커넥션》을 쓰기 시작했다. 2년 뒤인 1959년, 그는 이 대본을 리빙 시어터의 주디스 말리나와 줄리언 벡에게 제안했다. 말리나가 연출을 맡고 벡이 무대 디자인을 담당했으며, 겔버는 캐스팅, 리허설 지도, 티켓 판매에도 참여하며 작품 제작 전반에 관여했다.
3. 주요 활동 및 성과
잭 겔버는 극작가로서 여러 작품을 선보였을 뿐만 아니라, 연출가와 교육자로서도 활발히 활동하며 미국 연극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3.1. 연극 활동
겔버의 연극 활동은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더 커넥션》으로 시작되었으며, 이후 다양한 주제와 스타일의 희곡들을 발표하며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실험적인 접근을 이어갔다.
3.1.1. '더 커넥션'
《더 커넥션》은 1959년 7월 초연되었을 때부터 논란의 중심에 섰다. 특히 일간지 비평가들은 헤로인 중독에 대한 노골적인 묘사와 파격적인 공연 스타일에 반발했다. 그러나 연극 비평가 케네스 타이넌과 헨리 휴스, 시인 앨런 긴즈버그, 작가 노먼 메일러, 연출가 해럴드 클러먼, 제리 톨머와 같은 저명한 지지자들은 이 작품의 혁신적인 스타일, 사실적인 언어, 그리고 리얼리즘을 높이 평가했다.
《더 커넥션》은 리빙 시어터의 첫 번째 큰 성공작이 되었으며, 겔버와 리빙 시어터 모두를 미국 연극계의 중요한 존재로 부각시켰다. 이 작품은 1959-1960 시즌 빌리지 보이스의 오비 어워드에서 최우수 신작, 최우수 프로덕션, 최우수 배우상(리치 역의 워런 피너티)을 수상했다. 겔버는 또한 드라마 데스크 어워드의 전신인 버논 라이스 어워드도 받았다. 1961년 리빙 시어터는 이 작품을 유럽으로 가져가 파리의 테아트르 데 나시옹 페스티벌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더 커넥션》은 1960년대 초반 총 722회 공연되었으며, 이후 5개 언어로 번역되어 10개국과 미국 전역에서 공연되었다. 1961년 루이스 앨런이 제작하고 셜리 클라크가 연출한 영화 버전 또한 당시 논란이 되었다.
3.1.2. 기타 희곡 및 작품
《더 커넥션》 이후 겔버는 그와 같은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작가, 연출가, 교육자로서 길고 활발한 경력을 이어갔다. 그의 두 번째 희곡인 《더 애플》(The Apple)은 1961년 리빙 시어터에서 초연되었으나, 이 작품은 겔버의 작품 중 리빙 시어터가 제작한 마지막 작품이었다. 이 공연 직후 리빙 시어터는 해외로 이전했다. 1963년 존 사이먼 구겐하임 기념 재단은 겔버에게 구겐하임 펠로십을 수여했으며(3년 후 갱신), 이는 그의 창작 활동을 지원했다. 1964년에는 소설 《온 아이스》(On Ice)를 출간했다.
1965년 그는 뉴욕 시립대학교의 상주 작가가 되었다. 그의 세 번째 희곡인 《스퀘어 인 더 아이》(Square in the Eye, 1965, 《렛츠 페이스 잇》(Let's Face It)으로도 알려짐)는 곧이어 시어터 드 리스에서 이스타블리시먼트 시어터 컴퍼니에 의해 제작되었다. 겔버는 1966년 아널드 웨스커의 《더 키친》(The Kitchen) 연출을 통해 첫 연출가로서의 인정을 받았다.
1972년 록펠러 재단은 겔버에게 아메리칸 플레이스 시어터에서의 레지던시를 위한 펠로십을 수여했고, 그곳에서 그의 다음 희곡인 《슬립》(Sleep)이 공연되었다. 1973년 뉴욕 셰익스피어 페스티벌은 노먼 메일러의 1951년 소설을 각색한 겔버의 《바버리 쇼어》(Barbary Shore)를 제작했다. 그의 다음 작품인 《팜야드》(Farmyard)는 1975년 예일 레퍼토리 시어터에서 상연되었으며, 프란츠 크사버 크뢰츠의 1971년 희곡 《슈탈러호프》(Stallerhof)를 각색한 것이었다.
겔버는 1976년 아메리칸 플레이스 시어터에서 자신의 희곡 《잭 겔버의 새로운 희곡: 리허설》(Jack Gelber's New Play: Rehearsal)을 연출했고, 1980년 유진 오닐 시어터 센터에서 《스타터스》(Starters)를 연출하며 다시 오리지널 희곡 창작으로 돌아왔다. 8년 후 그의 열 번째 희곡인 《빅 샷》(Big Shot)이 이스트 코스트 아츠 컴퍼니에 의해 와일드클리프 시어터에서 제작되었다. 1990년대에는 겔버의 희곡 세 편이 더 제작되었는데, 《매직 밸리》(Magic Valley, 1990), 《리오 프리저브드》(Rio Preserved, 1998), 그리고 《챔버스》(Chambers, 1998)이다. 겔버의 마지막 작품은 《딜런스 라인》(Dylan's Line)이었다. 겔버는 2000년에 이 대본을 완성하고 같은 해 알래스카주 발데즈에서 열린 라스트 프론티어 연극 컨퍼런스에서 일부를 공연했다. 이 작품은 2003년 프린스턴의 매카터 시어터에서 초연되었다.
3.2. 연출 및 교육 활동
잭 겔버는 극작가로서의 활동 외에도 연출가와 교육자로서 활발히 활동했다. 1966년 아널드 웨스커의 《더 키친》 연출을 통해 첫 연출가로서의 인정을 받았다. 1967년 컬럼비아 대학교는 겔버를 드라마 학과 시간제 겸임 교수로 임명했다. 1968년에는 자신의 네 번째 희곡인 《더 쿠반 씽》(The Cuban Thing)의 대본을 완성하고 직접 연출했다.
1972년 겔버는 뉴욕 시립대학교의 브루클린 칼리지에서 영어과 정교수가 되었다. 그는 이 대학에 희곡 창작 MFA 과정을 개설했으며, 1990년대 후반 CUNY에서 은퇴할 때까지 이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브루클린 칼리지에서 약 30년간 재직하면서 그는 교수 경력과 전문 및 학생 공연 연출, 연극 워크숍 강의를 병행했다. 1973년 로버트 쿠버의 《더 키드》(The Kid)를 아메리칸 플레이스 시어터에서 연출하며 오비 어워드에서 뛰어난 연출상을 수상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그는 사망할 때까지 뉴 스쿨 대학교의 액터스 스튜디오 드라마 스쿨에서 겸임 교수로 재직했다.
3.3. 사회 참여 및 정치적 입장
잭 겔버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사회 운동에 참여하며 정치적 입장을 표명했다. 1968년 그는 베트남 전쟁에 항의하기 위해 세금 납부를 거부하겠다는 "작가 및 편집자 전쟁세 시위" 서약에 서명했다.
그의 희곡 《더 쿠반 씽》은 1950년대 기자로서 쿠바를 여행했던 경험과 1964년, 1967년의 최근 방문을 바탕으로 쓰였다. 이 작품은 1959년 쿠바 혁명을 겪는 중산층 가족의 경험을 묘사했다. 헨리 밀러스 시어터에서 제작된 이 연극은 냉전이 한창이던 시기에 피델 카스트로 공산주의 지도자를 호의적으로 묘사했다는 비판을 받으며 논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해석은 쿠바 망명자와 다른 이들의 격렬하고 때로는 폭력적인 시위를 촉발시켰고, 결국 이 연극은 단 하룻밤 만에 막을 내렸다. 겔버는 1968년 쿠바 영화 《저개발의 기억》(Memories of Underdevelopment)에 본인 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4. 이념 및 철학
잭 겔버의 작품과 활동은 사회의 부조리, 인간의 소외, 그리고 현실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특징으로 한다. 그는 연극을 통해 당대의 사회적, 정치적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특히 소외된 집단의 삶과 고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주력했다.
《더 커넥션》에서 마약 중독자들의 삶을 가감 없이 보여준 것은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직시하려는 그의 의지를 드러낸다. 이 작품은 단순한 자연주의를 넘어, 인간 존재의 불안정성과 사회적 시스템의 결함을 비판적으로 조명했다. 《더 애플》에서는 좌절과 폭력으로 가득 찬 혼란스럽고 부조리한 세상을 그렸으며, 이는 현대 사회의 혼돈과 개인의 무력감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스퀘어 인 더 아이》는 예술가의 좌절을 다루며,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 속에서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렸다.
그의 사회 참여는 단순히 작품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 참여는 그가 평화와 반전의 가치를 옹호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더 쿠반 씽》을 통해 쿠바 혁명을 다루고, 피델 카스트로에 대한 묘사로 논란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는 그가 정치적 변화와 민중의 삶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졌음을 시사한다. 비록 논란이 있었지만, 이는 당시 미국 사회의 지배적인 반공주의적 시각에 도전하려는 시도로 해석될 수 있다. 겔버는 연극이 단순한 오락을 넘어 사회적 대화와 비판을 위한 중요한 매개체가 될 수 있다고 믿었으며, 그의 작품들은 이러한 신념을 바탕으로 당대 미국 연극계에 신선한 충격과 깊은 질문을 던졌다.
5. 개인사
잭 겔버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캐럴 웨스텐버그를 만나 1957년 12월 23일 뉴욕시에서 결혼했다. 그들은 두 명의 자녀를 두었다.
6. 사망
잭 겔버는 2003년 5월 9일 뉴욕에서 발덴스트롬 마크로글로불린혈증이라는 혈액암으로 인해 7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 소식에 대해 극작가 에드워드 앨비는 "젊은 시절 《더 커넥션》에 너무나 큰 영향을 받고 활력을 얻었다"며, "그것은 흥미진진하고, 위험하며, 교훈적이고, 무서웠다. 연극이 그래야 하는 모든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7. 평가 및 영향
잭 겔버는 1950년대와 1960년대 오프 브로드웨이 연극 운동의 핵심 인물로서, 그의 작품과 활동은 미국 연극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7.1. 수상 및 영예
겔버는 그의 작품과 연출 활동으로 여러 주요 상과 인정을 받았다.
- 1960년: 《더 커넥션》으로 빌리지 보이스의 오비 어워드에서 최우수 신작, 최우수 프로덕션, 최우수 배우상 수상.
- 1960년: 오프 브로드웨이 연극에서의 뛰어난 업적으로 드라마 데스크 어워드의 전신인 버논 라이스 어워드 수상.
- 1961년: 《더 커넥션》으로 파리 테아트르 데 나시옹 페스티벌에서 그랑프리 수상.
- 1963년: 구겐하임 펠로십 수상 (1966년 갱신).
- 1972년: 록펠러 재단 펠로십 수상.
- 1973년: 로버트 쿠버의 《더 키드》 연출로 오비 어워드에서 뛰어난 연출상 수상.
- 1999년: 연극계에서의 평생 공로를 인정받아 에드워드 앨비 라스트 프론티어 극작가상 수상.
- 미국 예술 기금 보조금 및 예일 대학교 CBS 펠로십 수혜.
7.2. 비판 및 논란
겔버의 작품은 종종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대표작 《더 커넥션》은 마약 중독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파격적인 공연 스타일을 선보여 초연 당시 일부 비평가들의 반발을 샀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동시에 작품의 혁신성과 리얼리즘을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가장 큰 논란은 1968년작 《더 쿠반 씽》이었다. 이 작품은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 혁명을 호의적으로 묘사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냉전 시기 미국의 강한 반공주의 분위기 속에서 이러한 묘사는 쿠바 망명자와 다른 이들의 격렬한 시위를 불러일으켰고, 결국 연극은 단 하룻밤 만에 막을 내리는 초유의 사태를 겪었다. 이 사건은 겔버가 사회적, 정치적 금기를 깨고 논쟁적인 주제를 다루는 데 주저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7.3. 후대 영향
잭 겔버는 1950년대와 1960년대 오프 브로드웨이 연극 운동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 기억된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리빙 시어터와 함께 《더 커넥션》을 통해 미국 연극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은 것이다. 이 작품은 관객들에게 충격을 주고 깊은 사색을 유도하는 '참여 연극'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의 작품들은 이후 부조리극과 리얼리즘 연극에 영향을 미쳤으며, 사회 비판적이고 실험적인 연극의 발전에 기여했다.
에드워드 앨비와 같은 후대 극작가들은 겔버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언급하며, 그의 연극이 "흥미진진하고, 위험하며, 교훈적이고, 무서웠다. 연극이 그래야 하는 모든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이는 겔버가 단순히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 관객에게 도전하고, 불편하게 만들며, 궁극적으로는 성찰을 유도하는 연극의 본질을 추구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브루클린 칼리지에서 희곡 창작 MFA 프로그램을 개설하고 운영하며 수많은 후학을 양성했고, 이는 미국 연극 교육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겔버는 논란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회의 어두운 면을 직시하며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한 극작가로 후대에 기억되고 있다.
8. 작품 목록
잭 겔버의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
- 희곡
- 《더 커넥션》(The Connection, 1959)
- 《더 애플》(The Apple, 1960)
- 《스퀘어 인 더 아이》(Square in the Eye, 1965)
- 《더 쿠반 씽》(The Cuban Thing, 1968)
- 《슬립》(Sleep, 1972)
- 《바버리 쇼어》(Barbary Shore, 1973) - 노먼 메일러의 1951년 동명 소설 각색
- 《팜야드》(Farmyard, 1975) - 프란츠 크사버 크뢰츠의 1971년 희곡 《슈탈러호프》(Stallerhof) 각색
- 《잭 겔버의 새로운 희곡: 리허설》(Jack Gelber's New Play: Rehearsal, 1976)
- 《스타터스》(Starters, 1980)
- 《빅 샷》(Big Shot, 1988)
- 《매직 밸리》(Magic Valley, 1990)
- 《리오 프리저브드》(Rio Preserved, 1998)
- 《챔버스》(Chambers, 1998)
- 《딜런스 라인》(Dylan's Line, 2000, 2003년 초연)
- 기타 저작물
- 《온 아이스》(On Ice, 1964) - 소설
- 시나리오 - 《찰리 시링고》(Charlie Siringo, 1976) TV 프로덕션 포함
- 단편 소설 - 《에버그린 리뷰》(Evergreen Review) 및 《플레이보이》(Playboy)와 같은 정기간행물에 게재
- 논픽션 기사 - 《뉴욕 타임스》(The New York Times), 《더 네이션》(The Nation), 《더 드라마 리뷰》(The Drama Review) 등에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