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및 배경
장셰린은 1940년 6월 25일 상하이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가는 장쑤성 전장시에 뿌리를 두고 있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장셰린은 어린 시절 펜홀더 표면 고무를 사용하는 전진 속공형 선수로 탁구를 시작했다. 그러나 어느 날 탁구장에서 커트맨의 아름다운 폼에 깊은 감명을 받아, 펜홀더 그립을 유지한 채 커트 주전형으로 전향하게 된다. 1958년에는 상하이 증기 터빈 공장 기술 학교에 입학했으며, 같은 해 상하이 대표 아마추어 팀의 일원으로 전국 탁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했다.
1.2. 초기 활동
선수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이 시기, 장셰린은 가족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매일 경기를 위해 기술 학교에서 장거리를 이동해야 했고, 이로 인해 교통비가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탁구 선수가 되는 대신 상하이 증기 터빈 공장에서 경력을 쌓으면 안정적인 생활이 보장되었던 점도 가족들이 반대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러나 1959년 제1회 중화인민공화국 전국 운동회 출전이 확정되고, 이후 상하이 팀으로부터 정식 입단 제의를 받게 되면서 그는 상하이 증기 터빈 공장을 떠나 탁구 선수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2. 선수 경력
2.1. 탁구 입문 및 스타일 개발
장셰린은 1959년 또는 1960년경 롱핌플 고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고무는 상하이 훙솽시 공장에서 폐기 예정이던 불량품 고무를 얻어 사용한 것으로, 원래는 이질 고무의 탑 시트로 제작된 것이었다. 그는 이 고무를 라켓에 뒤집어 붙여 사용해 보니 우연히 사용하기 편리한 것이 있었고, 이를 계속 사용하게 되었다. 다만, 장셰린이 사용했던 것은 현재의 롱핌플 고무보다 돌기가 낮아, 표면 고무보다 돌기가 약간 높은 정도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안정적인 커트와 예측 불가능한 스핀을 활용하여 롱핌플 고무를 성공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2.2. 주요 대회 및 성과
1960년경 상하이 팀의 에이스로 자리매김한 장셰린은 1961년 제26회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 베이징 대회에 중국 대표로 선발되어 남자 단식에서 일본의 호시노 노부야와 미키 케이이치를 꺾고 동메달을 획득했다. 1963년 제27회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 프라하 대회에서는 남자 단식 동메달을 차지했으며, 왕즈량과 짝을 이룬 남자 복식에서 우승하며 중국 선수로는 최초로 남자 복식 세계 챔피언에 올랐다. 또한 이 해부터 남자 단체전 멤버로 선발된 그는 이질 고무를 활용하여 드라이브 위주의 일본 선수들을 상대로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며 중국 남자 단체전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당시 롱핌플 고무의 존재는 중국 외에는 알려지지 않았고, 일본 선수들은 롱핌플 특유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패배했다.

1965년 제28회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 류블랴나 대회에서는 왕즈량과 함께 남자 복식 은메달을, 린후이칭과 함께 혼합 복식 은메달을 획득했다. 남자 단식에서는 8강전에서 서독의 에버하르트 셰러와 맞붙어 첫 게임부터 촉진룰까지 가는 대접전 끝에 패했지만, 이 경기는 오기무라 이치로로부터 "근래 보기 드문 대승부"라고 평가받았다. 남자 단체전에서는 지난 대회에 이어 결승에서 일본을 꺾고 우승했지만, 이 결승전에서는 철저한 장셰린 대책을 세우고 경기에 임한 다카하시 히로시에게 패했다. 다카하시 히로시는 일본 선수 중 장셰린에게 승리한 유일한 선수로 기록되었다.
2.3. 문화대혁명과 선수 경력
1965년 이후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불어 닥쳤고, 중국 대표팀은 1967년과 1969년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에 불참했다. 이로 인해 장셰린의 선수 경력은 큰 영향을 받았다.
2.4. 은퇴
문화대혁명 이후 국제 대회에 복귀한 1971년 제31회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 나고야 대회에서는 린후이칭과 함께 혼합 복식에만 출전하여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1973년 제32회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 사라예보 대회에서는 메달을 획득하지 못했으며, 이 해를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3. 지도자 경력
장셰린은 선수 은퇴 후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며 중국 탁구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3.1. 중국 여자 탁구팀 지도
1972년 이후 그는 중국 여자 탁구 국가대표팀의 코치가 되었고, 이어서 감독으로 취임했다. 그는 1975년부터 1991년까지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 여자 단체전에서 8연패를 달성하는 등 전례 없는 성공을 거두었다. 1995년 제43회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 톈진 대회를 마지막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나기까지, 그는 중국 여자 탁구팀을 세계 선수권 대회 단체전에서 총 10차례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의 지도 아래 중국 여자 탁구는 세계 최강의 자리를 확고히 했다.
3.2. 기타 직책
장셰린은 지도자 경력 외에도 행정가로서 다양한 직책을 역임했다. 그는 중국 탁구 협회 부회장과 국가체육총국 탁구·배드민턴 관리센터 부주임을 지내며 중국 탁구 행정 및 발전에 기여했다.
4. 플레이 스타일
장셰린은 펜홀더 커트 주전형 선수로, 동료 선수였던 왕즈량이 유럽 스타일의 셰이크핸드 커트맨이었던 것과 대조를 이루었다. 장셰린이 탁구를 시작할 당시 상하이에는 셰이크핸드 커트맨이 없었다고 한다.
오기무라 이치로는 장셰린의 플레이 스타일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장셰린의 전술적 특징은 넓은 커트 수비를 기반으로 하며, 적절하다고 판단될 때 언제든 공격할 수 있는 포어핸드와 백핸드의 강타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 커트의 변화 모션이나 너클볼성 쇼트를 더하여 상대의 페이스를 흐트러뜨리는 복잡한 구성의 올라운드 플레이를 펼쳤다."
오기무라가 이러한 평가를 기록한 1967년 당시, 일본에서는 장셰린이 롱핌플 고무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고, 롱핌플 고무의 특성 또한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당시 유럽의 커트맨들은 이질 고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고, 일본 선수들은 이에 대해 이질 고무를 활용한 강력한 루프 드라이브로 커트를 띄운 후 강타를 날리는 전술을 확립하고 있었다. 그러나 롱핌플 고무를 사용하는 장셰린은 이러한 루프 드라이브에 대해 매우 날카롭게 깎인 커트로 낮게 반구할 수 있었으며, 상대방이 타구 지점을 예측하기 어려운 바닥에 스칠 듯한 커트 등 교란 전술을 구사했다. 이로 인해 장셰린의 커트는 일본 선수들 사이에서 '마구'로 불리며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키는 170 cm였다.
5. 수상 및 인정
장셰린은 선수와 지도자로서 탁구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여러 상을 수상했다. 2001년에는 국제 탁구 연맹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2008년에는 국제 탁구 연맹 공로상(ITTF Merit Award)을 수상했다. 또한,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회식에서는 중국의 국기인 오성홍기를 게양하는 영예를 안았다. 그의 선수 시절 최고 세계 랭킹은 3위였다.
6. 유산 및 영향력
장셰린은 탁구 역사상 가장 혁신적인 선수 중 한 명으로 기억된다. 그가 세계 최초로 롱핌플 고무를 실전에서 효과적으로 활용한 것은 탁구 기술 발전에 중요한 이정표를 세웠다. 그의 독특한 펜홀더 커트 스타일과 변화무쌍한 플레이는 후대 선수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특히 중국 탁구의 기술적 다양성을 확장하는 데 기여했다.
선수 은퇴 후 중국 여자 탁구 대표팀을 이끌며 이룩한 전례 없는 성공은 그의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입증했으며, 중국이 세계 탁구 강국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지도 철학과 전략은 중국 탁구 시스템에 깊이 뿌리내려 지속적인 성공의 기반이 되었다. 장셰린은 선수와 지도자 양쪽에서 탁구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받는다.
7. 관련 항목
- 탁구 선수 목록
-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 메달리스트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