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린 시절과 배경
잔 앙투아네트 베퀴 뒤바리 백작부인은 겸손한 배경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았으며, 초기 직업을 통해 사회적 상승을 이루었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마리-잔 베퀴는 1743년 8월 19일 프랑스 샹파뉴 지방의 보쿨뢰르에서 재봉사 안 베퀴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일부에서는 수도사 장 자크 고마르였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어린 시절, 그녀의 어머니는 또 다른 아들을 낳은 직후 가출하여 도피했고, 잔은 한동안 숙모의 손에 맡겨져 자랐다. 7살이 되던 해,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잔은 파리로 옮겨와 계부인 금융가의 보살핌을 받으며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녀의 교육은 파리 외곽의 생트 오르 수도원에서 시작되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녀의 어머니 안 베퀴는 직업 매춘부였으며, 귀족들의 사치품과 다이아몬드, 장신구, 귀금속에 대한 욕망과 귀족 작위에 대한 열등감에 비정상적으로 집착했다고 한다. 재물을 모으기 위해 심지어 어린 딸인 잔을 강제로 살롱에 끌고 가 매춘을 시켰으며, 잔은 어린 나이부터 온갖 화장과 정형에 대한 압박감으로 피부병을 앓는 등 모진 학대와 수탈을 겪었다고 전해진다. 주변의 회고록에서는 안 베퀴가 사교계 인맥들의 약점과 감정 관계를 교묘하게 악용하여 이간질하고, 악성 루머와 험담, 스캔들을 만들어내며 사회를 혼탁하게 만드는 것을 즐겼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그녀의 어머니와 잔 모두 단두대의 희생자가 되었는데, 이는 세상에서 가장 추악하고 끔찍한 매춘부들의 최후로 평가되기도 한다.
1.2. 초기 경력과 사회적 부상
15세에 수도원 교육을 마친 잔은 수도원을 떠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는 몽시외르 빌리아르-뒤몽소의 집에서 쫓겨나 어머니의 남편인 니콜라 랑송에게 돌아갔다. 수입이 필요했던 잔은 처음에는 파리 거리에서 장신구를 팔았다. 1758년에는 젊은 미용사 라메츠의 보조로 일자리를 찾았고, 그와 짧은 관계를 맺었으며, 소문에 따르면 딸을 낳기도 했다. 이후 노부인 마담 드 라 가르드의 독서 동반자(dame de compagnie)로 고용되었으나, 라 가르드의 두 아들과 그들의 아내 중 한 명의 관심을 끌자 해고되었다.
1760년부터 잔은 마담 라빌 부부의 세련된 모자 가게 "라 토일레트"에서 모자 장인의 조수이자 grisette그리제트프랑스어로 일했다. 라빌의 딸인 아델라이드 라빌-기아르는 잔의 좋은 친구가 되었다. 당시 그려진 초상화에 따르면, 잔은 두꺼운 곱슬머리와 아몬드 모양의 푸른 눈을 가진 아름다운 금발 여성이었다. 1763년, 그녀가 마담 키스누아의 매춘업소 겸 카지노를 방문했을 때, 그녀의 아름다움은 장바티스트 뒤바리의 눈에 띄었다. 그는 잔을 자신의 집에 들여 정부로 삼았고, 그녀를 Mademoiselle Lange마드무아젤 랑주프랑스어라고 불렀다. 1766년부터 뒤바리는 잔이 파리 귀족 사회의 최고위층에서 고급 매춘부(courtesan)로서 경력을 쌓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녀는 정부 각료와 왕실 시종을 포함한 많은 상류층 고객을 확보하며 파리 사교계에서 빠르게 명성을 얻었다.
2. 루이 15세의 정부
잔 앙투아네트 베퀴 뒤바리 백작부인은 루이 15세와의 만남을 통해 공식 정부가 되었고, 궁정에서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며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마리 앙투아네트와의 갈등을 겪기도 했다.
2.1. 국왕과의 만남과 정부가 되기까지

1764년 퐁파두르 후작 부인이 사망하고, 1765년 왕세자 루이 페르디낭, 1767년 왕세자비 마리아 요제파, 1768년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가 연이어 사망하면서 루이 15세는 깊은 실의에 빠져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1768년, 잔은 루이 15세에게 소개되었다. 당시 그녀는 리슐리외 공작을 비롯한 많은 귀족 고객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리슐리외 공작은 그녀를 베르사유 궁전으로 데려갔다. 국왕은 그녀의 미모에 큰 관심을 보였고, 그의 시종이자 조달자인 도미니크 르벨을 통해 그녀를 불렀다.
루이 15세는 잔을 공식 정부(maîtresse-en-titre)로 삼기를 원했지만, 당시 궁정 예법상 왕의 공식 정부는 귀족 출신이어야 했다. 이에 따라 그녀의 전 애인이었던 장바티스트 뒤바리의 남동생인 기욤 뒤바리 백작과 서둘러 결혼이 추진되었다. 1768년 9월 1일, 그녀는 기욤 뒤바리 백작과 결혼하여 '뒤바리 백작부인'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이 결혼식에는 장바티스트 뒤바리가 작성한 위조된 출생증명서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잔의 나이를 3살 어리게 보이게 하고 그녀의 미천한 배경을 감추기 위함이었다.
결혼 후 잔은 르벨의 예전 방이었던 국왕의 거처 위쪽에 자리 잡았다. 공식적인 소개가 이루어지지 않아 국왕과 함께 대중 앞에 나설 수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외로운 생활을 했다. 그녀의 낮은 신분과 매춘부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소수의 귀족만이 그녀를 인정하려 했다. 궁정에 정식으로 소개되기 위해서는 적절한 후원자가 필요했고, 리슐리외 공작은 막대한 도박 빚을 탕감해주는 대가로 마담 드 베아른을 설득하여 그녀의 후원자가 되게 했다.
처음 두 번의 소개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한 번은 마담 드 베아른이 발목을 삐었다고 가장했고, 다른 한 번은 국왕이 사냥 중 말에서 떨어져 팔이 부러지는 사고로 취소되었다. 마침내 1769년 4월 22일, 잔은 궁정에 정식으로 소개되었다. 궁전 밖의 군중과 거울의 방에 모인 궁정 신하들 사이에서는 온갖 소문이 난무했다. 그녀는 국왕이 전날 보내준 보석으로 장식된 은백색 금실 자수 가운을 입고, 전례 없는 거대한 옆 부풀림 치마(panniers)와 화려한 머리 장식을 한 채 궁정 사람들을 기다리게 했다.
2.2. 궁정 생활과 영향력

궁정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잔은 남편의 누이이자 교양 있는 독신 여성인 클레르 프랑수아즈 뒤바리와 친구가 되어 궁정 예법을 배웠다. 이후 미르푸아 원수 부인과도 친분을 맺었으며, 다른 귀부인들은 뇌물을 받고 그녀의 수행원이 되었다. 잔은 사치스러운 생활에 빠르게 익숙해졌다. 루이 15세는 그녀에게 어린 벵골인 노예 자모르를 주었는데, 그녀는 자모르에게 우아한 옷을 입히고 교육을 시켰다. 1793년 재판 증언에서 자모르는 자신의 출생지를 치타공이라고 밝혔으며, 아마도 시디족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스탠리 루미스의 전기 《뒤바리》에 따르면, 잔의 일상은 오전 9시에 자모르가 가져다주는 아침 코코아 한 잔으로 시작되었다. 그녀는 가운과 보석을 고른 후 옷을 입었고, 헤어드레서 베를린(특별한 날에는 노켈)이 와서 머리를 손질했다. 그 후 친구들과 재봉사, 보석상, 화가 등 최고의 물품을 제공하는 상인들을 맞이했다.
그녀는 사치스러웠지만 본성은 선량했다. 막대한 빚 때문에 저택에서 강제 퇴거당하고 부인이 집행관과 경찰관을 총으로 쏴 죽여 사형 선고를 받은 루센 백작 부부의 사정을 들은 마담 드 베아른이 잔에게 이를 알리자, 잔은 국왕에게 그들을 용서해달라고 간청하며 국왕이 동의할 때까지 무릎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루이 15세는 감동하여 "마담, 당신이 나에게 청하는 첫 번째 은혜가 자비로운 행위라니 기쁘오!"라고 말했다. 또한 잔은 사산한 아이의 출산을 숨긴 죄로 교수형을 선고받은 어린 소녀의 사면을 요청한 몽시외르 망드빌의 방문을 받았다. 프랑스 재상에게 보낸 잔의 편지로 그 소녀는 목숨을 구했다.

국왕의 공식 정부로서 잔은 궁정의 모든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그녀는 값비싸고 사치스러운 가운을 입었으며, 다이아몬드가 목과 귀를 장식하여 왕실 재정에 더욱 부담을 주었다. 그녀는 친구와 적을 모두 만들었는데, 가장 강력한 적수는 퐁파두르 후작 부인의 자리를 노렸으나 실패했던 그라몽 공작 부인 베아트릭스였다. 베아트릭스는 처음부터 오빠와 함께 잔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으며, 잔과 국왕에 대한 비방 전단지를 작성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잔은 에마뉘엘 아르망 드 비뉴로 뒤 플레시, 에귀용 공작과 친분을 맺었고, 그는 에티엔 프랑수아 드 슈아죌 공작에 맞서 잔의 편을 들었다. 잔의 궁정 내 권력이 강해지면서 슈아죌은 자신의 영향력이 약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국왕은 7년 전쟁 이후 나라가 지쳤다고 믿었지만, 슈아죌은 프랑스가 다시 전쟁을 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포클랜드 제도 소유권을 놓고 영국과 다투는 스페인을 지지했다. 뒤바리는 1770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이 음모를 국왕에게 폭로했고, 슈아죌은 장관직에서 해임되어 궁정에서 추방되었다.
이러한 음모에도 불구하고, 잔은 전임자인 퐁파두르 후작 부인과는 달리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으며, 새로운 가운과 보석에 대한 열정을 더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국왕은 그녀가 국무회의에 참여하도록 허락하기까지 했다. 국왕이 노아유 공작에게 뒤바리 부인이 자신에게 새로운 즐거움을 알려주었다고 말하자, 공작은 "폐하, 그것은 폐하께서 매춘 업소에 가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잔은 선량한 성품과 예술가 후원으로 알려졌지만, 국왕이 그녀에게 막대한 재정적 사치를 베풀면서 점점 더 인기가 없어졌다. 그녀는 한때 월 3000 FRF 리브르에 달하는 막대한 수입에도 불구하고 항상 빚에 시달렸다. 그녀는 슈아죌 공작과 에귀용 공작이 국왕과 알베르틴-엘리자베트 파테르의 비밀 결혼을 주선하여 그녀를 폐위시키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루이 15세가 사망할 때까지 그 지위를 유지했다.
2.3. 마리 앙투아네트와의 관계

잔과 마리 앙투아네트의 관계는 매우 논쟁적이었다. 두 사람은 1770년 5월 15일 라 뮈에트 성에서 열린 가족 만찬에서 처음 만났다. 이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왕세손 루이 오귀스트(훗날 루이 16세)와 결혼하기 전날이었다. 잔이 국왕의 정부가 된 지 1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이들은 그녀가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상과 달리 그녀는 참석했고, 이는 참석자 대부분에게 불쾌감을 주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화려한 외모와 높은 목소리로 군중 속에서 눈에 띄는 잔을 주목했다. 노아유 백작 부인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잔이 국왕을 기쁘게 한다고 말했고, 14세의 왕세손비는 순진하게도 그녀와 경쟁할 것이라고 말했다. 프로방스 백작(훗날 루이 18세)은 곧 새로운 왕세손비를 실망시켰고, 그녀는 노골적인 부도덕함에 분노했다. 왕세손비가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을 지지하는 슈아죌을 후원하면서 두 사람의 경쟁은 계속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뒤바리 부인에게 말을 걸기를 거부하며 궁정 예법을 무시했다. 그녀는 잔의 배경을 못마땅하게 여겼을 뿐만 아니라, 프로방스 백작으로부터 로앙 추기경이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에 대한 음란한 이야기를 할 때 잔이 크게 웃었다는 소식을 듣고 모욕감을 느꼈다. 잔은 격렬하게 국왕에게 불평했고, 국왕은 다시 오스트리아 대사 메르시에게 불평했으며, 메르시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달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결국 1772년 새해 첫날 무도회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잔에게 간접적으로 "오늘 베르사유에 사람이 참 많군요"라고 무심하게 말하며, 잔이 대답할지 말지 선택할 여지를 주었다.
2.4.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

1772년, 루이 15세는 뒤바리 부인을 위해 전례 없는 사치스러운 목걸이를 만들도록 파리의 보석상 뵈머와 바상주에게 의뢰했다. 이 목걸이의 예상 비용은 200.00 만 FRF 리브르에 달했다. 그러나 루이 15세가 사망했을 때 이 목걸이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대금도 지불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 목걸이는 훗날 잔 드 라 모트-발루아가 연루된 스캔들을 촉발시켰는데, 이 사건에서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로앙 추기경에게 뇌물을 주고 목걸이를 구매하도록 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 비난은 프랑스 혁명 발발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3. 망명과 말년
루이 15세 사망 후 뒤바리 부인은 추방당했지만, 루브시엔 성으로 돌아와 개인적인 관계를 이어갔으며,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
3.1. 루이 15세 사후 추방과 귀환
시간이 흐르면서 루이 15세는 죽음과 회개를 생각하기 시작했고, 잔의 침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경우가 늘었다. 잔과 함께 프티 트리아농에 머무는 동안, 루이 15세는 천연두의 첫 증상을 느꼈다. 그는 밤에 궁전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고, 그의 딸들과 잔은 그의 곁을 지켰다. 1774년 5월 4일, 국왕은 잔에게 감염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하고 자신이 고해성사와 종부성사를 준비할 수 있도록 베르사유를 떠나라고 제안했다. 그녀는 뤼에유 근처의 에귀용 공작의 영지로 물러났다.

국왕이 사망하고 그의 손자인 루이 16세가 즉위하자,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는 잔을 모 근처의 퐁토담 수도원으로 추방했다. 처음에는 수녀들이 그녀를 차갑게 대했지만, 곧 그녀의 소심한 태도에 마음을 열었고, 특히 라 로슈-퐁텐넬 수녀원장은 그녀에게 친절했다.
수도원에서 1년을 보낸 후, 잔은 해가 지기 전까지 돌아오는 조건으로 주변 시골을 방문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한 달 후, 그녀는 더 멀리 나갈 수 있게 되었지만, 베르사유에서 10 km 이내, 특히 그녀가 사랑했던 루브시엔 성으로는 갈 수 없었다. 2년 후, 그녀는 루브시엔으로 이사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루이 15세가 그녀에게 하사했던 루브시엔 성에서 그녀는 다시 우아한 생활을 영위했다.
3.2. 개인적인 관계와 혁명의 영향
이후 몇 년 동안 잔은 루이 에르퀼 티몰레옹 드 코세-브리삭과 연인 관계를 맺었다. 그녀는 또한 헨리 시모어와도 사랑에 빠졌는데, 시모어는 그의 가족과 함께 루브시엔 성 근처로 이사 오면서 그녀를 만났다. 시간이 지나면서 시모어는 비밀스러운 연애에 지쳐 잔에게 '나를 내버려 둬'라고 영어로 쓴 그림을 보냈고, 화가 르무안이 1796년에 이를 모사했다. 브리삭 공작은 시모어에도 불구하고 잔을 마음에 품고 있었기에 이 메나주 아 트루아에서 더 충실한 모습을 보였다.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파리를 방문 중이던 브리삭은 군중에게 붙잡혀 린치를 당했다. 그날 밤늦게, 잔은 취한 군중이 루브시엔 성으로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고, 그녀가 내다본 열린 창문으로 브리삭의 머리가 담긴 피 묻은 천이 날아들어왔다. 그 광경을 본 그녀는 기절했다。1791년 1월, 브리삭 공작의 죽음 이후 잔은 영국으로 도피하여 망명 귀족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4. 투옥, 재판 및 처형
프랑스 혁명 중 잔 뒤바리 백작부인은 체포되어 반역죄 혐의로 재판을 받았고, 결국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4.1. 혁명 정부에 의한 체포와 재판

잔의 노예였던 자모르는 뒤바리 부인의 다른 하인들과 함께 자코뱅 클럽에 가입했다. 그는 혁명가 조지 그리브의 추종자가 되었고, 이후 공안위원회의 간부가 되었다. 잔은 1792년에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자모르에게 그리브와의 관계에 대해 추궁했다. 자모르의 깊은 연루를 깨달은 그녀는 그에게 3일 내로 하인 일을 그만두라고 통보했다. 자모르는 즉시 자신의 주인을 공안위원회에 고발했다.
주로 자모르의 증언을 바탕으로, 뒤바리 부인은 혁명을 피해 도피한 망명 귀족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1793년 3월, 그녀는 자신의 저택에 보관된 보석을 회수하기 위해 프랑스로 돌아왔다가 공화주의자들에게 붙잡혀 콩시에르쥬리 감옥으로 압송되었다. 파리의 혁명 재판소가 그녀에게 반역죄를 선고하고 사형을 선고하자, 그녀는 숨겨둔 보석의 위치를 밝히며 자신을 구하려 했으나, 이러한 시도는 헛수고로 돌아갔다. 1793년 12월 7일, 그녀는 단두대로 보내졌다.
4.2. 단두대에서의 최후
1793년 12월 8일, 뒤바리 부인은 혁명 광장(현재의 콩코르드 광장)에서 단두대로 참수되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50세였다. 단두대로 가는 덤프트럭 위에서 그녀는 쓰러져 "아파요! 왜 이러세요?!"라고 비명을 질렀다. 공포에 질린 그녀는 자비를 구하며 군중에게 도움을 간청했다. 그녀가 처형 집행인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제발, 집행인님,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De grâce, monsieur le bourreau, encore un petit moment!드 그라스, 무슈 르 부로, 앙코르 앙 프티 모망!프랑스어)였다고 전해진다. 그녀의 시신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포함한 다른 많은 희생자들과 함께 마들렌 묘지에 묻혔다.
당시 사형 집행인이었던 샤를-앙리 상송은 그녀와 구면이었는데, 잔이 울면서 목숨을 구걸하자 이에 견디지 못하고 아들에게 형 집행을 맡겼다고 한다. 상송은 자신의 수기에 "모두 뒤바리 부인처럼 울부짖으며 목숨을 구걸했더라면, 사람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공포 정치가 더 빨리 끝났을지도 모른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그녀의 프랑스 내 재산은 파리 혁명 재판소로 넘어갔지만, 그녀가 영국으로 밀반출했던 보석들은 1795년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서 팔렸다. 이 판매 대금은 콜로넬 요한 케글레비치가 마인츠 전투에서 헤센 용병들에게 급여를 지급하는 데 사용되었다.
5. 평가와 영향
잔 앙투아네트 베퀴 뒤바리 백작부인의 삶과 행동은 역사적으로 다양한 평가와 비판을 받았으며, 그녀는 여러 문화적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
5.1. 역사적 평가와 비판

잔 뒤바리는 사치스러운 생활 방식과 미천한 출신 배경으로 인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녀는 국왕의 막대한 재정적 지원에도 불구하고 항상 빚에 시달렸으며, 이는 왕실 재정에 큰 부담을 주어 대중의 불만을 가중시켰다. 특히 마리 앙투아네트를 비롯한 루이 15세의 딸들은 그녀의 매춘부 출신을 경멸하며 노골적으로 무시했다.
그녀는 퐁파두르 후작 부인처럼 정치에 깊이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자신보다 높은 귀족들이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을 즐겼다는 점에서 사회적 상승 욕구와 구체제의 모순을 보여주는 인물로 평가된다. 이러한 점은 당시 프랑스 사회의 계급적 긴장과 혁명적 분위기를 심화시키는 데 일조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의 성품에 대한 상반된 평가도 존재한다. 일부 기록에서는 그녀가 사치스러웠지만 본성은 선량하고 너그러웠으며, 궁정의 일부 귀족들에게는 친근하고 호감 가는 인물이었다고 묘사한다. 실제로 그녀는 빚으로 인해 사형 선고를 받은 부부나 영아 살해 혐의로 교수형에 처해질 위기에 처한 소녀를 위해 국왕에게 자비를 간청하여 목숨을 구해주기도 했다. 사형 집행인 샤를-앙리 상송이 그녀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공포 정치를 성찰하는 계기로 삼았다는 일화는 그녀가 단순히 부정적인 인물로만 평가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
5.2. 문화적 유산

잔 뒤바리의 이름은 여러 요리와 문화 작품에 남아 있다.
- 음식: 루이 15세가 콜리플라워를 좋아했다는 일화에 따라, 콜리플라워 포타주 수프는 '크렘 뒤바리'(crème du Barry크렘 뒤바리프랑스어)라고 불린다. 이 요리의 특징은 크림 같은 흰 소스이며, 콜리플라워는 그녀의 파우더 바른 곱슬머리를 연상시킨다는 설이 있다.
- 장소: 1769년 루이 15세가 그녀에게 선물한 이브린주의 루브시엔 성은 이후 '마담 뒤바리의 성'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성은 프랑스 국정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나, 1989년 일본인 사업가 요코이 히데키에게 고급 호텔로 재활용하는 조건으로 매각된 후 방치되어 도난과 노후화가 심화되는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후 프랑스 투자자가 성을 매입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 영화: 뒤바리 부인은 여러 영화에서 다양한 배우들에 의해 연기되었다.
- 1915년 영화 《뒤바리》: 미세스 레슬리 카터
- 1917년 영화 《마담 뒤바리》: 테다 바라
- 1919년 영화 《마담 뒤바리》: 폴라 네그리
- 1930년 영화 《열정의 여인 뒤바리》: 노마 탈마지
- 1934년 영화 《마담 뒤바리》: 돌로레스 델 리오
- 1938년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의 생애》: 글래디스 조지
- 1943년 영화 《뒤바리 워즈 어 레이디》: 루실 볼
- 1949년 영화 《블랙 매직》: 마고 그래햄
- 1954년 영화 《마담 뒤바리》: 마르틴 카롤
- 2006년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 아시아 아르젠토
- 2023년 영화 《잔 뒤바리》: 마이웬 (감독 겸 주연), 조니 뎁이 루이 15세 역으로 출연.
- 문학:
-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백치》에서 레베데프는 뒤바리 부인의 삶과 처형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녀의 영혼을 위해 기도한다.
- 샐리 크리스티의 2017년 소설 《베르사유의 적들》에서 뒤바리 부인은 주요 등장인물 중 한 명이다.
- 텔레비전:
- BBC/CANAL+의 8부작 드라마 《마리 앙투아네트》에서 프랑스 배우 가이아 바이스가 뒤바리 부인을 연기했으며, 마리 앙투아네트와의 관계가 주요 주제 중 하나이다.
- 만화:
- 이케다 리요코의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1972-1973)
- 사카모토 신이치의 만화 《이노상》(2013-2015)과 《이노상 루주》(2015-2020)
- 이소미 진게츠의 만화 《경국의 재봉사 로즈 베르탱》(2019-)
- 고이데 요시토의 만화 《악역 영애로 전생했는데 마리 앙투아네트였습니다》(2020-2022)
- 애니메이션:
- 1979-1980년 방영된 TV 애니메이션 《베르사유의 장미》
- 게임:
- 아이디어 팩토리의 2016년 플레이스테이션 비타용 연애 어드벤처 게임 《장미에 숨겨진 베리테》
- 오페라:
- 카를 밀뢰커의 3막 오페레타 《그레핀 뒤바리》
- 잔니노 안토나 트라베르시와 엔리코 골리스치아니의 1912년 오페라 《라 뒤바리》
6. 관련 항목
- 루이 15세
- 마리 앙투아네트
- 퐁파두르 후작 부인
- 폴리냐크 백작 부인
- 프랑스 혁명
-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
- 베르사유 궁전
- 루브시엔 성
- 마들렌 묘지
- 자모르
- 샤를-앙리 상송
- 라 뮈에트 성
- 우비강
- 베르사유의 장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