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자크 앙크티유의 초기 생애는 그의 가족 배경과 교육, 그리고 아마추어 사이클 선수로서의 경험을 통해 형성되었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자크 앙크티유는 1934년 1월 8일 노르망디 루앙 교외의 몽생테냥에 있는 한 병원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당시 부아기욤 근처에 집을 가지고 있었다.
앙크티유의 아버지 에르네스트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사망한 프로이센 병사 에른스트의 손자였다. 에른스트는 에르네스트의 할머니 멜라니 그루와 관계를 맺은 후 사망했고, 멜라니는 나중에 프레데리크 앙크티유와 결혼하여 자크의 할아버지인 에르네스트 빅토르를 입양했다. 그의 할아버지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사망했고, 이로 인해 자크의 아버지 에르네스트는 11세의 나이에 가장이 되었다. 1929년 5월 25일, 에르네스트는 2세 때 고아가 되어 수녀원에서 자란 자크의 어머니 마리와 결혼했다. 자크에게는 필리프라는 남동생이 있었다.
앙크티유는 4세 때 아버지로부터 첫 자전거를 선물 받았다. 자크가 7세였을 때, 아버지 에르네스트는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후 귀가하여 독일 점령군을 위한 건축 일 외에는 일자리를 찾지 못하자, 가족과 함께 캥캉푸아 근처의 르 부르게로 이사하여 딸기 농부가 되었다. 어린 앙크티유는 이곳에서 학교를 다녔고, 특히 수학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다. 에르네스트 앙크티유는 과음 후 종종 폭력적으로 변했고, 자크의 어머니는 결국 아들들을 아버지에게 맡기고 파리의 아파트로 이사했다. 앙크티유는 11세에 두 번째 자전거가 너무 작아져 새 자전거가 필요했다. 아버지가 새 자전거를 사줄 형편이 되지 않자, 자크는 딸기밭에서 일꾼 중 한 명을 대신하여 일할 수 있도록 성공적으로 설득했고, 필요한 돈을 벌어 직접 스텔라 자전거를 구입했다.
14세에 그는 금속공이 되기 위해 루앙 남부 소트빌레루앙의 기술 대학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그는 주말에 아마추어 자전거 경주를 하고 그의 아버지가 지역 사이클 클럽인 AC 소트빌레의 회장이었던 모리스 디외루아와 만나 친구가 되었다. 그를 통해 앙크티유는 1950년 여름 늦게 앙드레 부셰의 지도로 클럽에 가입하여 자전거 경주에 입문했다. 그 해에는 더 이상 경주에 참가하기에는 너무 늦었기 때문에, 그는 다가오는 시즌을 위해 몸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부셰는 앙크티유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에게 훈련용 자전거와 경주용 자전거 두 대를 제공했으며, 타이어 무료 공급, 자전거 정비, 성과 보너스까지 약속했다. 1950년 말, 앙크티유는 졸업장을 받았고 1951년 1월 말까지 소트빌레의 한 작업장에서 시간당 64 FRF의 적은 급여를 받으며 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용주가 클럽 훈련을 위해 목요일 저녁 휴가를 허락하지 않자, 그는 3월 초에 직장을 그만두고 사이클링 경력을 추구하며 아버지의 농장에서 다시 일하기 시작했다.
1.2. 아마추어 경력
앙크티유의 첫 아마추어 경주는 1951년 4월 8일 르아브르에서 열렸다. 디외루아가 우승했지만 앙크티유는 완주했다. 그는 같은 해 5월 3일 그랑프리 모리스 라투르에서 네 번째 경주 만에 첫 승리를 거두었다. 그 시즌 동안 그는 7월에 팀 동료들과 함께 노르망디 팀 타임 트라이얼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는 등 총 8번의 우승을 차지했다. 시즌 마지막 경주는 지역 아마추어 선수들을 위한 시즌 내내 진행된 '마요 데 죄네' 대회의 마지막 경주이기도 한 그의 첫 개인 타임 트라이얼이었다. 대회 선두 주자로서 디외루아보다 4분 늦게 마지막으로 출발한 앙크티유는 친구를 따라잡고 추월하는 것을 주저했지만, 결국 그렇게 하여 경주와 대회 전체에서 우승했다.
1952년 두 번째 아마추어 시즌에 앙크티유는 주니어에서 시니어 등급으로 승격했다. 그 해 그는 11번의 우승과 5번의 3위권 내 입상을 기록했다. 노르망디 지역 챔피언십 경주에서 그는 캉의 강력한 사이클 클럽 라이벌 선수들에게 경기 내내 견제를 받았다. 결승선에서 120 km를 남기고 상대의 전술에 좌절한 앙크티유는 은퇴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부셰는 그를 계속 격려했다. 앙크티유는 발가락 끈을 풀고 그룹 뒤로 물러나 은퇴할 것처럼 가장했고, 상대들은 그가 은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그는 그룹 뒤에서 공격하여 경쟁자들을 따돌리고 선두 그룹과의 5분 격차를 좁힌 후 우승했다. 그는 또한 그랑프리 드 프랑스 타임 트라이얼에서 12분이라는 상당한 차이로 우승했다. 그의 첫 전국 대회 출전은 1952 헬싱키 올림픽 예선전이었는데, 그는 3위를 차지했다. 얼마 후 그는 카르카손에서 열린 프랑스 아마추어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며 그 해 후반에 헬싱키 올림픽 프랑스 대표팀에 선발되었다. 8월 3일, 그는 1952년 하계 올림픽 도로 경주에 출전했지만 12위에 그쳐 실망했다. 그는 알프레드 토넬로와 클로드 루에르와 함께 팀 경주에서 동메달을 획득하며 더 나은 성적을 거두었다. 다음으로 그는 룩셈부르크에서 열린 1952 UCI 도로 세계 선수권 대회 아마추어 도로 경주에 참가했는데, 여기에는 샤를리 골과 릭 반 루이와 같은 미래의 스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평탄한 지형에서 진행된 코스는 앙크티유에게 적합하지 않았고, 그는 그룹 내에서 완주하여 그룹 내 모든 완주자들과 함께 공동 8위를 기록했다.
앙크티유는 아마추어로서의 마지막 시즌에 "독립 선수" 자격을 취득했다. 이 범주는 아마추어와 프로 사이의 중간 단계로 1966년에 폐지되었다. 이를 통해 그는 젊은 프로 선수들과 함께 경주에 참가하여 자신을 더 시험할 수 있었다. 노르망디 독립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한 후, 그의 첫 프로 경쟁 경주는 8월에 열린 3단계 투르 드 라 망슈에서였다. 첫 단계에서 그는 미래의 세계 챔피언 장 스타블린스키에 24초 뒤진 2위를 차지했다. 다음 날 38.6 km 타임 트라이얼에서 앙크티유는 거의 2분 차이로 우승하며 경주 선두를 차지했다. 셰르부르로 향하는 마지막 단계에서 라이벌 팀 선수들은 그를 흔들기 위해 노력했고, 심지어 그를 도랑에 추락시키기까지 했다. 앙크티유는 다른 선수들의 전술에 반대하는 또 다른 독립 선수 모리스 펠레의 도움을 받아 그룹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앙크티유는 무사히 펠로톤에서 완주하며 종합 우승을 차지했다. 아마추어 부문에서 앙크티유는 파리-노르망디 신문이 주최하는 시즌 내내 진행된 '마요 데 아스' 대회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대회의 마지막 경주는 1953년 8월 23일에 열린 122 km 타임 트라이얼이었다. 앙크티유는 이 대회에서 2위 클로드 르 베르를 9분 차이로 제치고 우승했으며, 평균 시속 42.05 kph라는 아마추어 선수로서는 전례 없는 속도를 기록했다. 이는 라디오 룩셈부르크의 기자 알렉스 비로트가 "노르망디에서는 1킬로미터가 900미터밖에 안 될 수도 있다!"라고 농담하게 만들었다. 이 업적 이후 앙크티유는 프랑스에서 가장 권위 있는 크리테리움 경주인 시르퀴 뒤 롤른에 초청받았는데, 그 해에는 투르 드 프랑스 우승자 루이종 보베도 참가했다. 앙크티유는 선두 그룹에서 완주했지만, 마지막 스프린트에서 다른 미지의 선수에게 저지당해 우승을 놓쳤고, 우승은 보베에게 돌아갔다.
2. 프로 경력 및 업적
앙크티유의 프로 경력은 1953년 그랑프리 데 나시옹에서의 성공적인 데뷔로 시작되었으며, 이후 투르 드 프랑스 5회 우승을 포함한 수많은 그랜드 투어 승리를 통해 사이클링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그의 군 복무 기간과 아워 레코드 도전, 그리고 레이몽 푸리도르와의 치열한 라이벌 관계는 그의 경력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만들었다.
2.1. 경력 초기와 그랑프리 데 나시옹
투르 드 라 망슈에서의 성공 이후, 앙크티유는 여러 프로 팀으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전 프로 선수이자 라 페를 팀의 스포츠 디렉터인 프랑시스 펠리시에는 9월에 열리는 그랑프리 데 나시옹에 출전하기 위해 그에게 계약을 제안했다. 이 대회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타임 트라이얼 대회로, 종종 타임 트라이얼 선수들을 위한 "비공식 세계 선수권 대회"로 불렸다. 아직 미성년자였던 앙크티유는 계약서에 서명하기 위해 부모의 동의가 필요했으며, 이 계약은 1953년 9월부터 10월까지 두 달 동안 유효했고, 그는 월 3.00 만 FRF을 받았다. 라 페를과의 계약은 처음에 앙크티유와 그의 코치 부셰 사이에 갈등을 일으켰고, 부셰는 법적 조치를 위협했지만, 두 사람은 앙크티유가 경주를 준비하는 데 부셰가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제때 화해했다.

그랑프리 데 나시옹은 9월 27일 베르사유에서 파리의 파르크 데 프랭스까지 140 km의 거리에서 열렸다. 앙크티유는 코스를 설명하는 엽서를 여러 곳에서 자신에게 보내는 등 철저히 준비했다. 경기 당일, 그는 첫 몇 킬로미터 내에 펑크와 자전거 교체로 인해 지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강하게 출발했다. 그는 결국 로제 크레통보다 거의 7분 앞서 타임 트라이얼에서 우승했다. 불과 19세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위고 코블레가 2년 전에 세운 트랙 기록에 35초 차이로 근접했다. 이 승리로 앙크티유는 스포츠 언론에서 즉각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투르 드 프랑스 디렉터 자크 고데는 레키프에 "어린 챔피언이 태어났을 때"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
앙크티유는 3주 후 스위스 그랑프리 드 루가노에서 또 다른 승리를 거두었다. 앙크티유는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권위 있는 2인 타임 트라이얼인 트로페오 바라키에 초청받았다. 그곳으로 가는 길에 앙크티유는 당시 최고의 사이클 선수로 여겨지던 그의 우상 파우스토 코피를 방문했다. 두 사람은 트로페오 바라키에 함께 출전했고, 코피는 리카르도 필리피와 함께 우승했다. 앙크티유와 그의 파트너인 베테랑 선수 앙토닌 롤랑은 2위를 차지했다. 롤랑은 경기 후 "나는 잘 준비되어 있었고 컨디션도 매우 좋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크는 나를 죽였고 마지막 30 km 동안 나는 버틸 수 없었다. 나는 간신히 매달려 있었다"고 말했다.
2.2. 군 복무와 세계 기록 도전
앙크티유의 프로 선수로서 첫 풀 시즌인 1954년의 첫 큰 도전은 시즌 초에 열리는 일주일간의 스테이지 레이스인 파리-니스였다. 비록 20세에 불과했지만, 그는 타임 트라이얼 스테이지에서 우승하고 종합 7위를 기록했다. 우승은 없었지만 강력한 결과로 그는 졸링겐에서 열린 1954 UCI 도로 세계 선수권 대회 프랑스 팀에 합류할 수 있었다. 결승선에서 45 km를 남기고 앙크티유는 보베, 코피, 골을 포함한 선두 그룹의 일부였다. 앙크티유는 곧 뒤처졌지만 보베는 세계 타이틀을 획득했고, 앙크티유는 코피보다 앞선 5위라는 믿을 만한 성적을 거두었다. 시즌 내내 앙크티유와 펠리시에 사이의 긴장은 고조되었는데, 펠리시에는 그의 젊은 천재가 식단과 음주에 대한 충분한 규율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펠리시에가 그 해 그랑프리 데 나시옹에서 위고 코블레를 따라가기로 결정했을 때, 앙크티유는 이러한 신뢰 상실에 분노했다. 경기 당일, 그는 코블레를 압도적으로 이겼다. 결승선에서 앙크티유는 펠리시에를 무시하고 파리 외곽에 있는 펠리시에의 카페로 차를 몰고 가 우승자 꽃다발을 감독의 아내에게 전달했다.
파리-투르에서 11위를 차지한 후, 앙크티유는 당시 프랑스에서 30개월 동안 의무적으로 시행되던 병역 의무를 이행해야 했다. 그는 조앵빌의 스포츠맨 대대로 전속되어 다음 해에도 훈련하고 사이클링 경력을 계속할 수 있는 큰 재량권을 부여받았다. 트로페오 바라키에서 앙크티유는 이번에는 보베와 파트너를 맺었지만, 경기 전 3시간밖에 잠을 자지 못하고 이탈리아에 늦게 도착하여 다시 코피와 필리피 조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1955년 시즌은 라 페를 팀에게는 마지막 시즌이 될 것이었는데, 자금이 바닥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봄에 앙크티유는 파리-루베에서 체인이 끊어진 후 14위를 기록했고, 크리테리움 내셔널에서는 충돌 후 기권해야 했다. 그는 크리테리움 뒤 도피네 리베레에서 15위를 차지하며 더 많은 경험을 쌓았다. 프랑스 전국 도로 경주 선수권 대회에서 그는 팀 동료 앙드레 다리가드가 보베를 꺾고 우승하는 것을 도왔다. 시즌 말, 앙크티유는 트랙에서 개인 추발 전국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고, 1955 UCI 도로 세계 선수권 대회 도로 경주에서 6위를 차지한 후, 그랑프리 데 나시옹에서 3회 연속 우승을 추가했다.

언론에서는 앙크티유에게 1942년 11월에 파우스토 코피가 세운 1시간 동안 가장 긴 거리를 달리는 아워 레코드를 깨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결국 앙크티유는 1955년 10월 22일 밀라노의 벨로드롬 비고렐리에서 기록에 도전하겠다고 발표했다. 앙크티유는 매우 빠른 속도로 도전을 시작했고 곧 코피의 분할 기록을 앞섰지만, 결국 속도가 느려지고 끝까지 지쳐 코피보다 600 m 짧은 거리를 기록하며 실패했다. 시즌의 마지막 경주는 다시 한번 트로페오 바라키였는데, 이번에는 다리가드와 함께 팀을 이루었지만, 다시 코피와 필리피 조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계속되는 알제리 전쟁으로 인해 모든 병역 의무에는 알제리에서의 6개월 복무가 포함되었고, 앙크티유는 1956년 하반기에 이를 시작해야 했다. 따라서 그는 그 전에 아워 레코드에 다시 도전하기로 결정했다. 그 전에 그는 또 다른 전국 추발 타이틀을 획득했지만, 충돌로 인해 파리-니스에서 기권해야 했다. 이제 엘리에트 팀에서 뛰고 있던 그는 앤트워프 3일 경주에서 한 스테이지에서 우승했다. 앙크티유는 6월 25일에 아워 레코드에 두 번째로 도전했다. 다시 너무 빨리 시작한 그는 5분을 남기고 도전을 포기했다. 불과 4일 후 또 다른 도전이 예정되었다. 이번에는 너무 빨리 시작하지 않고 엄격한 일정에 따라 앙크티유는 세 번째 시도 만에 마침내 코피의 거리를 넘어섰고, 46.159 km로 아워 레코드를 경신하여 코피보다 311 m 더 멀리 갔다.
기록 경신 후 앙크티유는 1956 UCI 트랙 사이클 세계 선수권 대회 개인 추발에서 은메달을 획득하며 시즌을 이어갔다. 그랑프리 데 나시옹에서 또 다른 승리가 뒤따랐다. 앙크티유와 다리가드는 이탈리아로 함께 가서 사이클링의 모뉴먼트 클래식 중 하나인 지로 디 롬바르디아에 처음으로 참가했고, 다리가드가 이 경주에서 우승했다. 앙크티유는 알제리로 파견되어 시즌을 마쳤다.
2.3. 첫 번째 투르 드 프랑스 우승 (1957년)
앙크티유는 1957년 3월 1일 군대에서 제대했다. 그의 첫 복귀 경주는 불과 하루 뒤 제노아-니스에서 열렸는데, 그는 보베에게 스프린트에서 2위를 차지했다. 앙크티유가 군 복무 기간 동안 10 kg을 늘렸다는 점을 고려하면 인상적인 결과였다. 그는 파리-니스를 시작하기 전에 이전 체중으로 돌아오기 위해 한 달 동안 1200 km를 훈련했다. 이 경주에서 그는 산악 스테이지 5 타임 트라이얼에서 우승하여 종합 선두를 차지했고, 이를 끝까지 지켜냈다. 마지막 순간의 결정으로 앙크티유는 다시 1957 UCI 트랙 사이클 세계 선수권 대회 개인 추발에 참가했지만, 결국 챔피언이 된 로제 리비에르에게 패했다.
이제 앙크티유는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사이클링 경주인 투르 드 프랑스의 유력한 우승 후보로 여겨졌다. 이 시기에 투르의 선수들은 다른 모든 경주와 달리 트레이드 팀이 아닌 국가 대표팀으로 경쟁했다. 프랑스 팀의 매니저 마르셀 비도에게는 선수 선발이 어려웠다. 1956 투르 드 프랑스는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지역 팀의 프랑스 선수 로제 발코비악이 우승했기 때문에 그는 이번에는 자동으로 국가 대표팀에 선발되었다. 한편, 3회 투르 우승자 보베와 그의 팀 동료 라파엘 제미니아니도 선발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앙크티유와 다리가드는 둘 다 함께 선발되어야만 출전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보베가 1957 지로 디탈리아에서 투르를 건너뛸 것이라고 발표하면서 앙크티유에게 유리하게 선발이 결정되었다.

투르에서 앙크티유는 프랑스 팀의 유일한 신인이었다. 1단계에서 그는 충돌에 휘말렸지만, 안전하게 그룹으로 복귀했다. 앙크티유의 첫 스테이지 우승은 그의 고향인 루앙으로 향하는 3단계에서 나왔다. 샤를루아로 향하는 5단계에서 앙크티유는 다른 선수와 함께 탈출하여 경력 처음으로 종합 선두의 옐로 저지를 획득했다. 그는 이틀 동안 선두를 유지했고, 9단계에서 공격하여 토농레뱅으로 향하는 스테이지에서 우승하여 옐로 저지를 되찾았고, 주요 라이벌들에게 11분 앞섰다. 또 다른 우승 후보인 페데리코 바하몬테스는 경주에 영향을 미치는 극심한 폭염으로 인해 다음 휴식일에 기권했다. 경주의 첫 고산 스테이지인 브리앙송에서 앙크티유는 스테이지 우승자 가스토네 넨치니와 마르셀 얀센스에 2분도 채 안 되는 차이로 4위를 차지했지만, 얀센스에 11분 앞서 선두를 유지했다. 몇몇 평탄한 스테이지가 이어진 후, 앙크티유의 라이벌들은 그가 펠로톤 뒤쪽에서 달리는 것을 이용하여 14단계에서 공격했고, 모두 종합 순위 10위 안에 드는 7명의 선두 그룹을 형성했다. 다리가드는 뒤로 처져 앙크티유와 함께 격차를 좁히기 위해 노력했다. 다음 날, 앙크티유는 바르셀로나의 몬주익 서킷에서 열린 타임 트라이얼에서 우승하여 종합 선두를 더욱 늘렸다. 그는 18단계에서 약간의 시간을 잃었지만, 20단계 타임 트라이얼에서 우승하며 첫 투르 드 프랑스 우승을 확정 지었다. 얀센스에 대한 그의 최종 우승 마진은 거의 15분이었다. 23세의 나이로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가장 어린 투르 우승자였다.
투르 이후 앙크티유는 바레헴에서 열린 1957 UCI 도로 세계 선수권 대회에 참가했다. 경주의 마지막 부분은 3명의 프랑스 선수와 3명의 벨기에 선수로 구성된 6인 그룹 간의 경쟁이었다. 릭 반 스텐베르겐이 보베와 다리가드를 제치고 스프린트에서 우승했고, 앙크티유는 6위를 차지했다. 그는 다시 그랑프리 데 나시옹에서 우승하며 에르콜레 발디니를 꺾었다. 파리 6일 경주에서 그는 다리가드와 이탈리아의 페르디난도 테루치와 함께 트랙에서 경쟁하며 우승했다.
2.4. 도전과 좌절 (1958-1959년)
1958년, 앙크티유는 시즌을 느리게 시작했다. 그는 3월 파리-니스에서 타임 트라이얼 스테이지에서 우승했지만, 종합 10위에 그쳤고, 며칠 후 밀라노-산레모에서도 같은 순위를 기록했다. 크리테리움 내셔널에서 12위를 차지한 후, 그는 자신에게 적합하다고 느꼈던 파리-루베를 목표로 삼았다. 결승선에서 아직 200 km를 남기고 그는 공격을 시작하여 17명의 선두 그룹을 만들었고, 이는 앙크티유의 끊임없는 페이스 조절로 인해 곧 4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펠로톤의 벨기에 팀들은 격차가 4분 이상 벌어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앙크티유는 결승선까지 13 km를 남기고 타이어 펑크 후 선두 그룹으로 돌아오는 데 성공했지만, 그룹은 결국 결승선 4km 전에서 잡혔다. 루베에서 우승하지 못한 것은 대중에게 주목받았는데, 그가 우승을 목표로 클래식 경주에 출전한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앙크티유는 덩케르크 4일 경주에서 우승하며 실망감을 만회했다. 투르 드 프랑스를 준비하면서 앙크티유는 프랑스 전국 도로 경주 선수권 대회에서 8위를 차지했다.
디펜딩 챔피언으로서 앙크티유는 투르 드 프랑스 프랑스 팀의 1순위였다. 그러나 비도는 3회 우승자 보베를 제외할 수 없었고, 이로 인해 팀은 두 명의 주장을 갖게 되었다. 앙크티유는 이에 동의했지만, 보베의 절친한 동맹인 제미니아니가 팀에서 제외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도는 양보했고 보베가 제미니아니를 옹호하지 않으면서 그들의 우정은 이후 심하게 틀어졌다. 제미니아니는 센터-미디 지역 팀의 리더로 투르에 참가하여 프랑스 주력 팀을 공격할 모든 기회를 이용했다. 경주가 별다른 사건 없이 시작된 후, 제미니아니는 6단계에서 공격하여 앙크티유에 10분 앞섰다. 이틀 후, 투르의 첫 타임 트라이얼에서 앙크티유는 일반적으로 타임 트라이얼리스트보다 클라이머로 여겨지던 샤를리 골이 자신이 가장 잘하는 종목에서 그를 7초 차이로 이기면서 또 다른 타격을 입었다. 18단계, 몽방투 산악 타임 트라이얼에서 앙크티유는 골에게 4분 이상을 잃었다. 그는 투르 시작 전부터 이러한 결과가 예상된다고 말했지만, 오르막이 자신보다 골에게 더 적합했기 때문에 앙크티유가 이미 잃은 시간을 고려하면 여전히 큰 타격이었다. 한편 제미니아니는 옐로 저지를 확보하기에 충분한 성적을 거두었고, 다음 단계에서 골의 적절치 못한 기계적 문제로 인해 더 많은 시간을 벌었다. 21단계 엑스레뱅으로 향하면서 제미니아니가 종합 선두를 달리고 있었고, 앙크티유는 7분 57초 뒤진 3위, 골은 15분 이상 뒤진 5위였다. 이 단계는 5개의 오르막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두 번째 오르막에서 골이 비가 내리고 추운 상황에서 공격했다. 앙크티유는 따라갔고 다음 오르막인 콜 드 포르트 기슭에서 골에 2분밖에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앙크티유는 양모 대신 가벼운 실크 저지를 입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날씨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단계 끝에 22분을 잃었고 흉부 감염에 걸렸다. 제미니아니도 크게 다르지 않아 골에게 15분을 잃었고, 골은 마지막 타임 트라이얼에서 우승하며 투르에서 우승했다. 감염에도 불구하고 앙크티유는 프랑스 팀이 팀 종합 순위에서 우승하는 것을 돕기 위해 다음 단계에 출발하기로 결정했지만, 피를 토한 후 40.6 °C의 열로 병원에 입원하여 기권해야 했다.
앙크티유는 감염에서 회복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가 나중에 자신의 경력에서 가장 낮은 지점이라고 묘사한 시기에 그는 은퇴까지 고려했지만, 결국 경력을 계속했다. 이 질병은 랭스에서 열린 1958 UCI 도로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의 그의 노력에 여전히 방해가 되었고, 그는 기권했다. 그는 시즌 말 타임 트라이얼 3개 대회인 제네바와 루가노 그랑프리, 그리고 그랑프리 데 나시옹에서 6회 연속 우승하며 회복했다. 그는 파리-투르와 지로 디 롬바르디아에서 모두 12위를 기록한 후, 트로페오 바라키에서 2위를 차지하며 도로 시즌을 마쳤다. 트랙에서 앙크티유, 다리가드, 테루치는 벨로드롬 디베르에서 마지막으로 열린 파리 6일 경주에서 타이틀을 방어하며 그 해를 마무리했다. 앙크티유의 전기 작가 폴 하워드는 나중에 1958년을 그의 année terrible끔찍한 해프랑스어라고 묘사했다.
1959년 초, 로제 리비에르는 앙크티유에게 심각한 도전자이자 라이벌로 떠올랐다. 그는 앙크티유를 꺾고 개인 추발 세계 챔피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발디니의 아워 레코드를 깼고 결국 다시 한번 기록을 갱신하여 1시간 동안 47 km 이상을 달린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두 선수는 파리-니스 도로에서 처음으로 맞붙었다. 두 선수 모두 우승하지 못했고, 리비에르가 종합 순위에서 더 높은 순위를 차지했지만, 앙크티유의 팀 동료 장 그라치크가 우승했고, 앙크티유는 타임 트라이얼에서 더 빨랐다.

1959년, 앙크티유는 파우스토 코피를 따라잡아 지로 디탈리아와 투르 드 프랑스를 같은 해에 우승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지로에는 이전에 1956년에 우승했던 골도 참가했다. 앙크티유는 경주를 강하게 시작하여 2단계의 짧은 타임 트라이얼 후 핑크 저지를 차지했다. 그는 다음 날 언덕 정상 피니시에서 골에게 선두를 내주었다. 골은 7단계에서 베수비오산 산악 타임 트라이얼에서 우승하여 2위 앙크티유에 대한 자신의 우위를 2분 19초로 늘렸다. 앙크티유는 다음 날 또 다른 타임 트라이얼에서 골에게 22초를 되찾았다. 산마리노의 몬테 티타노를 세 번 오르는 12단계에서 그는 골을 따돌려 1분 30초를 벌었고, 자신의 격차를 34초로 줄였다. 15단계에서 앙크티유는 여러 선수들과 함께 내리막에서 탈출하여 골에게 2분 30초를 더 벌어 핑크 저지를 되찾았다. 경주를 선두로 달리면서 앙크티유는 수사로 향하는 19단계 타임 트라이얼에서 우승했다. 시속 47.713 kph (리비에르의 아워 레코드 속도보다 빠름)의 평균 속도로 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앙크티유는 골에게 2분 1초밖에 벌리지 못했는데, 골은 앙크티유보다 1분 30초 먼저 출발하여 앙크티유가 그를 추월했을 때 손실을 제한하기 위해 따라붙었기 때문이다. 타임 트라이얼 후 앙크티유는 종합 순위에서 골에게 3분 49초 앞섰다. 따라서 결정적인 단계는 쿠르마외르로 향하는 21단계였는데, 골은 콜 뒤 프티생베르나르에서 공격하여 결국 앙크티유보다 거의 10분 앞서 스테이지 피니시에 도착하여 종합 우승을 확정 지었다。 앙크티유는 지로에서 골에게 6분 12초 뒤진 2위를 차지했다.
1959 투르 드 프랑스에서 프랑스 국가 대표팀은 앙크티유, 보베, 제미니아니, 리비에르 등 4명의 종합 우승 후보로 시작했다. 후자 두 명은 같은 트레이드 팀에서 뛰었고 잘 지냈지만, 다른 선수들 사이에는 동정심과 협력이 거의 없었다. 결국 보베는 콜 드 리제랑 정상에서 그의 마지막 투르에서 기권했고, 제미니아니는 전년보다 훨씬 약해져 종합 우승의 위협이 되지 못했다. 프랑스 팀의 주요 경쟁자는 골, 스페인의 페데리코 바하몬테스, 이탈리아의 에르콜레 발디니, 그리고 센터/미디 지역 팀에서 뛰던 프랑스 선수 앙리 앙글라드였다. 종합 순위에 중요한 첫 단계는 6단계 타임 트라이얼이었는데, 리비에르가 우승했고, 발디니보다 21초, 앙크티유보다 거의 1분 빨랐다. 다음 날, 앙글라드는 선두 그룹의 일부였고, 나머지 선수들보다 거의 5분 앞섰다. 13단계에서 앙글라드는 앙크티유보다 앞서 우승했고, 발디니와 바하몬테스도 선두 그룹에 있었다. 골은 이 단계에서 고통받아 20분을 잃었고, 사실상 우승 경쟁에서 제외되었다. 앙글라드는 이제 종합 순위에서 2위를 차지했으며, 발디니, 바하몬테스, 앙크티유보다 3분 이상 앞섰고, 리비에르는 앙글라드에 6분 이상 뒤졌다. 이틀 후, 바하몬테스는 퓌 드 돔 산악 타임 트라이얼에서 우승하여 앙글라드의 선두에서 3분 이상을 벌었다. 앙크티유는 이제 2위 바하몬테스에 5분 이상 뒤진 6위에 놓였다. 알프스의 17단계에서 바하몬테스와 골은 함께 탈출했고, 골은 단계 우승을 차지했고 바하몬테스는 다른 경쟁자들보다 3분 30초 앞서 경주 선두로 올라섰다. 다음 단계는 여러 고산 오르막이 있는 경주의 결정적인 단계였다. 콜 드 리제랑을 지난 후, 앙크티유와 리비에르는 선두 그룹에 있었고, 바하몬테스와 골을 따돌렸지만, 그들이 다시 따라잡도록 허용했다. 다음 오르막인 콜 뒤 프티생베르나르의 내리막에서 앙글라드, 발디니, 골이 공격했다. 앙크티유와 리비에르는 모두 바하몬테스가 다른 선수들과 다시 접촉하는 것을 도왔다. 발디니는 단계에서 우승했지만 바하몬테스는 선두를 유지했고, 앙글라드에 4분 4초 앞섰으며, 앙글라드는 다음 날 또 1분을 잃었다. 디종으로 향하는 마지막 전 단계 타임 트라이얼에서 리비에르는 다시 앙크티유보다 앞서 우승했고, 그를 1분 38초 차이로 이겼으며, 바하몬테스는 종합 우승을 확정 지었다. 프랑스 선수들이 마지막 단계에서 파르크 데 프랭스에 들어섰을 때, 군중들은 앙크티유와 리비에르가 동료 프랑스 선수 앙글라드에 대항하여 바하몬테스와 공모했다고 느끼며 야유를 보냈다. 그렇게 하기로 한 결정은 다른 프랑스 선수가 투르에서 우승했다면 수익성 있는 투르 후 크리테리움에서의 앙크티유의 참가비 가치가 떨어졌을 것이라는 사실에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 앙크티유는 결국 투르에서 4위 리비에르보다 17초 앞선 종합 3위를 차지했다.
잔트보르트에서 열린 1959 UCI 도로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앙크티유는 그의 친구 다리가드가 우승했을 때 9위를 차지했다. 9월 초, 그는 데르니 뒤에서 진행되는 권위 있는 크리테리움 데 아스에서 우승했다。 앙크티유는 그랑프리 마르티니와 그랑프리 드 루가노 타임 트라이얼에서 우승하며 시즌을 마쳤지만, 1953년 첫 우승 이후 처음으로 그랑프리 데 나시옹에 참가하지 않았고, 이 대회는 알도 모저가 리비에르를 제치고 우승했다. 트로페오 바라키에서 앙크티유는 다리가드와 짝을 이루어 3위에 그쳤는데, 그들이 출발 시간을 1분 이상 놓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모저와 발디니 조에게도 압도당했다.
2.5. 투르 드 프랑스 4연패와 5회 우승
2년 동안 주요 스테이지 레이스에서 우승하지 못하고 리비에르가 타임 트라이얼에서 그의 적수임을 증명하면서, 앙크티유의 스타는 1960년 초에 빛을 잃는 것처럼 보였다. 리비에르와 프랑스 팀의 리더십을 공유하고 싶지 않았던 앙크티유는 따라서 그 해에는 지로 디탈리아에만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파리-니스의 2단계 팀 타임 트라이얼에서 기계적 문제로 고통받던 앙크티유는 팀 동료들에게 뒤처져 주요 라이벌들에게 4분 30초를 잃었다. 4단계에서 큰 브레이크어웨이가 형성되었고, 앙크티유의 팀은 추격을 조직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로 인해 선두 그룹은 나머지 선수들보다 23분 이상 앞서 들어왔고, 사실상 그 안에 있지 않은 누구도 종합 우승을 놓고 경쟁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앙크티유의 저조한 컨디션은 6b 단계 타임 트라이얼에서 4위에 그쳤을 때 더욱 두드러졌고, 그는 다음 날 기권했다. 그는 크리테리움 내셔널에서 3위를 차지한 후, 투르 오브 플랜더스에서 14위를 기록했다.

1960 지로 디탈리아의 첫 타임 트라이얼에서 앙크티유는 2위를 차지했지만, 3단계에서 자신이 속한 브레이크어웨이를 이용하여 종합 선두를 차지했다. 앙크티유는 6단계에서 브레이크어웨이에 참가했던 요스 호베나르스에게 선두를 넘겨주었다. 14단계의 긴 타임 트라이얼에서 앙크티유는 발디니보다 1분 27초, 골보다 6분 이상 앞서며 선두를 되찾았다. 그의 속도는 너무 빨라서 주최 측이 일반적인 규칙을 적용했다면 70명의 선수가 시간 제한을 넘겼을 것이다. 결국 규칙이 완화되어 두 명의 선수만이 탈락했다. 마지막 산악 단계들을 앞두고 앙크티유는 이제 넨치니에게 3분 40초 앞섰고, 골은 7분 32초 뒤진 5위였다. 20단계는 경주 역사상 처음으로 가비아 고개를 포함했다. 오르막에서 넨치니는 앙크티유가 타이어 펑크를 겪은 후 그에게서 격차를 벌릴 수 있었다. 위험한 내리막에서 더 많은 펑크와 세 번의 자전거 교체가 이어져 앙크티유의 경주 선두가 위험에 처했다. 그는 아고스티노 콜레토와 협력하여 추격 노력을 돕기 위해 돈을 제안했고, 손실을 제한했다. 보르미오의 결승선에서 골이 넨치니를 제치고 우승했고, 앙크티유는 2분 34초밖에 잃지 않아 28초 차이로 핑크 저지를 유지했다. 의례적인 마지막 단계가 이어진 후, 앙크티유는 밀라노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지로 우승자가 되었다.
앙크티유가 불참한 상황에서 리비에르는 1960 투르 드 프랑스에 프랑스 팀의 리더로 참가했고, 14단계에서 넨치니를 따라가려다 가파른 내리막에서 충돌하여 잘 달리고 있었다. 그는 10 m 아래 협곡으로 떨어져 두 개의 척추가 부러져 즉시 경력을 마감했다. 따라서 앙크티유와의 위대한 라이벌 관계는 갑작스럽게 끝났다. 폴 하워드는 나중에 리비에르의 사고로 인해 "1960년 말까지 앙크티유는 적어도 프랑스 사이클링계에서는 심각한 적수로부터 일시적으로 자유로워졌다"고 썼다.
동독에서 열린 1960 UCI 도로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앙크티유는 준비가 거의 되지 않은 상태로 도착했지만, 여전히 9위를 차지했다. 그랑프리 드 루가노에서 또 다른 강력한 타임 트라이얼 성과가 뒤따랐는데, 앙크티유는 너무 빨라서 2위 질베르 데스메는 앙크티유가 그를 추월하여 결승선까지 따라갔기 때문에 그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크리테리움 데 아스에서 또 다른 우승을 차지하며 기록 속도를 경신했다. 경주 시작 10 km 지점에서 다리 상태를 시험하기 위해 공격했던 앙크티유는 너무 기분이 좋아서 속도를 늦추지 않고 결승선까지 혼자 달렸다.
1961년 초, 앙크티유는 파리-니스에서 우승했다. 크리테리움 내셔널에서 그는 1.5 km를 남기고 공격하여 알시옹-레루로 팀을 옮긴 다리가드를 제치고 우승했다. 이는 앙크티유의 첫 원데이 도로 경주 우승이었다. 그는 지로 디탈리아를 준비하기 위해 투르 드 로망디에 참가하여 타임 트라이얼에서 우승하고 종합 10위를 기록했다.
지로에서 앙크티유는 9단계 타임 트라이얼에서 우승했고, 다음 날 브레이크어웨이에서 이전 선두 기욤 반 통게를루보다 앞서 결승선에 도달하여 핑크 저지를 획득했다。 14단계에서 종합 3위였던 아르날도 팜비앙코를 포함한 7명의 선수 그룹이 탈출했다. 결승선에서 그들은 앙크티유를 포함한 펠로톤보다 1분 42초 앞섰고, 팜비앙코는 선두로 올라섰다. 앙크티유는 17단계에서 20초를 더 잃었고, 그 후 경주는 고산으로 접어들었다. 펜저 요흐와 스텔비오 고개 오르막이 포함된 결정적인 20단계에서 골은 팜비앙코보다 2분 앞서 우승했고, 앙크티유는 3분(이 중 2분은 시간 보너스)을 더 잃었다. 따라서 팜비앙코는 앙크티유보다 3분 45초 앞서 지로에서 우승했다.
투르 전 전국 선수권 대회에서 앙크티유는 4위를 차지했고, 그 해 초 밀라노-산레모에서 우승했던 레이몽 푸리도르가 우승했다. 푸리도르는 앙크티유의 새로운 주요 라이벌로 떠올랐지만, 그의 팀 매니저 앙토닌 마뉴가 그가 앙크티유를 위해 일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1961 투르 드 프랑스 프랑스 팀에서 제외되었다. 투르는 앙크티유의 고향인 루앙에서 시작되었고, 출발 전 그는 첫날부터 끝까지 경주 선두를 유지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첫날에는 오전에 베르사유로 향하는 도로 스테이지와 오후에 타임 트라이얼 두 단계가 진행되었고, 옐로 저지는 하루가 끝날 때만 수여되었다. 앙크티유는 이미 다리가드가 우승한 첫 단계에서 우승 브레이크어웨이에 참가했고, 오후에는 2위 선수보다 3분 이상 앞서 타임 트라이얼에서 우승하여 종합 선두로 올라섰다. 경주 내내 앙크티유는 매우 수동적으로 달렸고, 공격을 추격하고 손실을 제한했을 뿐, 자신은 공격에 나서지 않았다. 이로 인해 대중에게는 지루한 경주로 여겨졌고, 투르가 진행될수록 주최 신문 레키프의 판매 부수는 감소했다. 앙크티유는 19단계 타임 트라이얼에서 우승하여 그의 두 번째 투르 드 프랑스 우승을 사실상 확정 지었고, 2위 골보다 거의 3분 빠르게 코스를 마쳤다. 파리로 향하는 마지막 단계에서 그는 팀 동료 로베르 카잘라와 함께 공격했고, 카잘라가 단계에서 우승했다. 귀도 카를레시는 같은 브레이크어웨이를 이용하여 골을 따돌리고 2위를 차지했다. 앙크티유의 우승 마진은 12분 14초였다. 관중들은 경주 중 흥미가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앙크티유가 파르크 데 프랭스에 도착했을 때 야유를 보냈다.
투르 이후 앙크티유는 베른에서 열린 1961 UCI 도로 세계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여 선두 그룹에서 13위를 차지했다. 그는 1958년 이후 처음으로 그랑프리 데 나시옹에 참가하여 기록적인 시간으로 우승했고, 2위 데스메를 9분 이상 차이로 이겼다. 그랑프리 드 루가노에서 우승한 후, 그는 트로페오 바라키에서 미셸 스톨커와 짝을 이루어 5위에 그쳤는데, 이는 그의 경력 중 이 대회에서 가장 낮은 순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즌 말에 그는 권위 있는 경주에서 높은 순위를 차지하여 받은 점수를 바탕으로 올해 최고의 선수에게 주어지는 슈퍼 프레스티지 페르노 상을 처음으로 수상했다.
1962년 새 시즌에 앙크티유의 팀 엘리에트는 해체되어 은퇴한 앙크티유의 전 라이벌 제미니아니가 스포츠 디렉터로 있는 생라파엘 팀과 합병했다. 그의 시즌 초 성적은 좋지 않았고, 제노아-니스와 파리-니스 모두에서 기권해야 했다. 앙크티유는 사이클링의 3대 그랜드 투어를 모두 우승한 최초의 선수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이는 1962년에 부엘타 아 에스파냐를 목표로 삼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여기서 그는 루디 알티그와 팀 리더십을 공유해야 했다. 경주는 15단계 타임 트라이얼에서 결정되었는데, 알티그가 결정적으로 우승했다. 앙크티유는 그 후 경주에서 기권했고, 프랑스로 돌아온 후 바이러스성 간염 진단을 받았다. 알티그는 결국 부엘타에서 우승했다. 의사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의사는 질병으로 인해 앙크티유가 너무 약해졌다고 느꼈지만, 그는 투르를 준비하기 위해 크리테리움 뒤 도피네 리베레에서 경주했다. 그는 5단계에서 고통받아 17분을 잃었지만, 종합 12위로 경주를 마치는 데 성공했다.

1962 투르 드 프랑스에서 주최 측은 국가 대표팀 규정을 폐지하고 선수들이 트레이드 팀으로 경쟁할 수 있도록 허용했으며, 이는 앙크티유가 생라파엘 팀에서 뛰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푸리도르는 당시 세계 챔피언 릭 반 루이와 함께 그의 주요 경쟁자로 여겨졌으며, 둘 다 첫 투르에 참가했다. 알티그가 우승한 첫 단계에서 펠로톤 내의 브레이크어웨이로 인해 푸리도르는 거의 8분을 잃었다. 앙크티유는 8b 단계 타임 트라이얼에서 우승하여 종합 순위 12위로 올라섰는데, 이는 이전에 브레이크어웨이에 참가했지만 종합 우승의 위협으로 여겨지지 않던 여러 선수들 뒤에 있었다. 피레네 산맥에서 열린 첫 번째 산악 단계인 11단계에서 반 루이는 오토바이가 충돌을 일으켜 넘어져 기권해야 했다. 고산에서 열린 12단계 이후 앙크티유는 6위로 올라섰다. 다음 날은 쉬페르바녜르로 향하는 산악 타임 트라이얼이었다. 앙크티유는 이 날 스테이지 우승자 바하몬테스와 투르의 깜짝 스타 제프 플랑카르에 이어 3위를 차지했고, 플랑카르가 경주 선두로 올라섰으며, 앙크티유는 1분 8초 뒤진 4위였다. 19단계에서 푸리도르는 탈출하여 단계에서 우승했고, 앙크티유는 플랑카르와 함께 완주하여 시간 차이를 유지했다. 그러나 앙크티유는 2위로, 푸리도르는 3위로 올라섰다. 리옹으로 향하는 68 km 타임 트라이얼인 20단계에서 앙크티유는 쉽게 우승했고, 코스 중간 지점에서 푸리도르를 3분 차이로 따라잡았으며, 플랑카르를 5분 19초 차이로 이겼다. 이로써 앙크티유는 기록적인 3번째 투르 우승을 차지했고, 플랑카르보다 4분 59초 앞섰다. 플랑카르는 마지막 날 파리로 향하는 길에 앙크티유가 충돌했을 때 공격하지 않는 스포츠맨십을 보여주었다. 투르 이후 앙크티유는 경주 내내 촌충에 감염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촌충에서 회복하는 동안 앙크티유는 살로에서 열린 1962 UCI 도로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15위에 그쳤고, 그의 친구이자 팀 동료인 장 스타블린스키가 우승했다. 여전히 약해진 상태에서 그는 시즌 후반의 대부분의 타임 트라이얼을 건너뛰었지만, 알티그와 함께 트로페오 바라키에 참가했다. 이 대회를 잘 준비하지 못했던 앙크티유는 처음부터 고통받았고, 선두에서 교대할 수 없었으며, 알티그의 슬립스트림에 머물러야 했고, 어떤 지점에서는 따라잡기 위해 알티그가 그를 밀어야 하는 굴욕을 겪었다. 그들이 결승선에 도달했을 때, 그들의 시간은 벨로드롬 입구에서 측정되었다. 그들이 경기장에 들어섰을 때, 앙크티유는 날카로운 오른쪽 코너를 돌지 못하고 잔디밭으로 돌진하여 관중들에게 충돌했다. 두 사람은 기록적인 시간으로 우승했지만, 앙크티유는 얼굴에 피를 흘린 채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알티그는 혼자 우승 랩을 돌았다. 이 경험으로 굴욕감을 느낀 앙크티유는 2주 후 알티그의 고향인 바덴바덴에서 열린 비슷한 2인 타임 트라이얼 대회를 잘 준비했다. 이번에는 앙크티유가 빠른 페이스를 설정했고, 알티그는 따라가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1963년 초, 앙크티유는 또 다른 부엘타 도전을 준비하며 파리-니스와 크리테리움 내셔널에서 우승했다. 그는 좋은 컨디션으로 1963 부엘타 아 에스파냐에 출전했다. 그는 첫날 오후 1b 단계 타임 트라이얼에서 2위 선수보다 2분 51초 앞서 우승했고, 시간 보너스를 포함하여 라이벌들에게 3분 이상의 우위를 점했다. 앙크티유의 팀은 어려운 첫 주 동안 모든 공격을 무력화시켰다. 나머지 단계는 대부분 평탄하여 앙크티유에게 적합했다. 비록 타라고나로 향하는 12b 단계 타임 트라이얼에서 위경련으로 고통받아 2위에 그쳤지만, 그는 결국 호세 마르틴 콜메나레호를 3분 6초 차이로 이기며 쉽게 부엘타에서 우승했다. 이 승리로 그는 모든 그랜드 투어에서 우승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투르를 준비하기 위해 앙크티유는 크리테리움 뒤 도피네 리베레에 참가하여 타임 트라이얼과 종합 순위에서 우승했다. 그 후 그는 스타블린스키가 전국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는 것을 도왔고, 자신은 3위를 차지했다. 1963 투르 드 프랑스는 앙크티유와 바하몬테스 간의 싸움이 되었는데, 바하몬테스는 첫 단계에서 브레이크어웨이에 참가하여 시간을 벌었다. 6b 단계 타임 트라이얼에서 우승한 후, 앙크티유는 종합 순위 7위로 올라섰는데, 이는 이전에 브레이크어웨이에 참가했지만 위협으로 여겨지지 않던 여러 선수들 뒤에 있었지만, 바하몬테스와 푸리도르보다 1분 이상 앞섰다。 10단계에서 그는 바하몬테스와 함께 머물렀고 결승선에서 그를 제치고 스프린트에서 우승하여 그의 첫 산악 단계 우승을 차지했다. 17단계에서 앙크티유와 제미니아니는 체인이 끊어진 것처럼 가장하는 속임수를 써서 앙크티유가 콜 드 라 포르클라즈 오르막을 위해 더 가벼운 자전거로 바꿀 수 있도록 했고, 이는 그가 가파른 오르막에서 바하몬테스와 함께 머물고 결승선에서 다시 그를 제치고 스프린트에서 우승할 수 있도록 했다. 이로써 그는 경주 선두로 올라섰고, 마지막 타임 트라이얼에서 그의 우위를 늘렸다. 바하몬테스에 대한 그의 최종 우승 마진은 3분 35초였고, 그는 투르에서 4회 우승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론세에서 열린 1963 UCI 도로 세계 선수권 대회 도로 경주에서 앙크티유는 추격 그룹에 1km 앞서 단독 선두를 달리고 있었지만, 다른 선수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뒤돌아보며 노력을 포기했다. 결승선 후 2위 반 루이는 앙크티유에게 짜증을 냈는데, 그가 확실한 승리 기회를 포기했다고 말했다. 시즌 말, 그는 푸리도르와 짝을 이루어 트로페오 바라키에 참가하여 2위를 차지했다. 그는 시즌 최고의 선수에게 주어지는 슈퍼 프레스티지 페르노를 두 번째로 수상했다.

1964년 시즌 초, 앙크티유는 다시 파리-니스에서 경주했지만, 오르막 타임 트라이얼에서 푸리도르에게 패하여 6위에 그쳤다. 그가 봄 클래식 헨트-벨게헴에 출전했을 때, 앙크티유가 원데이 경주에서 보통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에게 큰 기대를 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결승선 몇 킬로미터 전, 코스에 익숙하지 않은 앙크티유는 다른 선수에게 결승선이 어디인지 물었다. 멀지 않다는 대답을 듣고 그는 그룹에서 벗어나 프랑스 외 지역에서 열린 원데이 도로 경주에서 첫 승리를 거두는 놀라운 승리를 차지했다. 1964년, 앙크티유는 다시 파우스토 코피를 따라잡아 지로와 투르를 같은 해에 우승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는 1964 지로 디탈리아를 강하게 시작하여 5단계 타임 트라이얼에서 시속 48 kph 이상의 속도로 우승하며 경주 선두를 차지했다. 비록 그는 추가적인 단계 우승을 추가하지 못했지만, 밀라노 결승선까지 핑크 저지를 잃지 않았고, 이탈로 질리올리를 1분 22초 차이로 이겼다.

1964 투르 드 프랑스는 앙크티유와 푸리도르 간의 2인 싸움이 되었다. 푸리도르는 첫 단계에서 충돌 후 14초를 잃었지만, 7단계에서 그룹으로 탈출하여 시간을 되찾았고, 앙크티유는 34초 뒤져 결승선에 도달했다. 다음 날, 앙크티유는 타이어 펑크로 47초를 더 잃었다. 9단계 모나코에서 푸리도르는 단계 우승을 위해 스프린트했지만, 한 바퀴 더 남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번째 바퀴에서는 앙크티유가 단계에서 우승하여 1분 시간 보너스를 얻었다. 다음 날, 앙크티유는 타임 트라이얼에서도 우승하여 푸리도르에게 46초의 추가 우위를 점했다. 종합 순위에서 앙크티유는 2위, 푸리도르는 3위로 31초 뒤졌다. 안도라에서의 휴식일 동안, 사치스러운 식습관으로 유명한 앙크티유는 통째로 구운 양고기인 méchoui메슈이프랑스어를 먹는 모습이 사진에 찍혔다. 다음 날, 14단계에서 앙크티유는 첫 오르막에서 뒤처지며 경주에서 기권까지 고려하는 등 좋지 않게 시작했다. 푸리도르, 바하몬테스, 옐로 저지 조르주 그루사르에게 4분 뒤진 앙크티유는 함께 잘 협력하는 7명의 선수 그룹에 속해 격차를 좁히는 데 성공했다. 푸리도르는 28 km를 남기고 자전거를 바꿔야 했고, 감독이 다시 출발할 때 너무 세게 밀어 도랑에 빠졌다. 단계가 끝날 때까지 푸리도르는 앙크티유에게 2분 37초를 잃었다. 푸리도르는 다음 단계 뤼숑에서 강력한 단독 승리를 기록하여 종합 순위에서 앙크티유와의 격차를 9초로 줄일 만큼 충분한 시간을 벌었다. 17단계 타임 트라이얼에서 앙크티유는 우승했지만, 푸리도르는 펑크와 느린 자전거 교체에도 불구하고 손실을 37초로 줄이는 데 성공하여 종합적으로 앙크티유에게 56초 뒤졌다. 20단계는 경주의 결정적인 구간으로, 퓌 드 돔 오르막에서 끝났다. 푸리도르는 단계 초반에 공격했지만, 알티그의 도움으로 앙크티유에게 따라잡혔다. 그들이 마지막 오르막에 도달했을 때, 바하몬테스와 훌리오 히메네스는 탈출했고, 앙크티유와 푸리도르는 나란히 오르막을 올랐다. 투르의 가장 역사적인 단계 중 하나가 될 이 경주에서 두 경쟁자는 팔꿈치를 맞대고 오르막을 올랐고, 900 m 지점에서 앙크티유가 약해지면서 푸리도르가 천천히 그를 앞서나갔다. 결승선까지 푸리도르는 앙크티유의 우위에서 42초를 벌었지만, 앙크티유는 옐로 저지를 유지했다. 결승선을 통과한 후 앙크티유는 제미니아니에게 얼마나 시간을 잃었는지 물었다. 그의 스포츠 디렉터가 "14초"라고 대답하자 앙크티유는 "음, 내가 필요한 것보다 13초 더 많군"이라고 답했다. 앙크티유는 파리로 향하는 마지막 타임 트라이얼에서 우승하여 푸리도르에게 55초의 최종 우승 마진을 늘렸다. 이는 앙크티유의 5번째 투르 우승이었고, 그와 푸리도르 간의 치열한 대결은 프랑스에서 사이클링 붐을 일으켰다. 앙크티유는 코피 이후 처음으로 지로와 투르를 같은 해에 우승한 선수가 되었다.
앙크티유는 투르 이후 거의 경주하지 않았고, 살랑슈에서 열린 1964 UCI 도로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7위를 차지했으며, 시즌 말 타임 트라이얼을 모두 건너뛰었다.
2.6. 후반기 경력 및 주요 그랜드 투어 우승

1965년에 생라파엘이 앙크티유 팀의 스폰서를 중단하자, 포드 프랑스가 스폰서를 이어받았다. 당시 프로 사이클 선수들의 주 수입은 도시 중심에서 여러 바퀴를 도는 소규모 경주인 크리테리움에서 나왔는데, 앙크티유는 투르 우승 횟수를 늘려도 자신의 시작 금액 가치가 증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자 1965년에는 세 그랜드 투어 중 어느 것에도 참가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시즌 초에 그는 파리-니스와 크리테리움 내셔널에서 모두 우승했으며, 새로운 스폰서인 포드를 달래기 위해 몬테카를로 랠리에도 3일 동안 참가했다.
그랜드 투어 대신 제미니아니는 또 다른 위업을 제안했다. 1965 크리테리움 뒤 도피네 리베레는 560 km에 달하는 클래식 경주인 보르도-파리가 시작하는 날에 끝났는데, 이 경주는 너무 길어서 부분적으로 데르니 뒤에서 진행되었다. 제미니아니는 앙크티유의 아내 자닌에게 이 아이디어를 제안했고, 그녀는 남편에게 두 경주 모두에서 우승을 시도하도록 설득했다. 이 시도에 대한 발표는 신문에 헤드라인을 장식하며 두 경주에 상당한 홍보 효과를 가져왔다. 처음에는 이 아이디어에 반대했던 크리테리움 뒤 도피네 주최 측은 결국 앙크티유가 아비뇽 (도피네의 결승 도시)에서 보르도까지 가는 데 충분한 시간을 주기 위해 마지막 단계의 시작 시간을 한 시간 앞당겨 이 시도를 도왔다. 크리테리움 뒤 도피네에서 앙크티유는 주로 단계 피니시에서의 시간 보너스와 타임 트라이얼에서의 근소한 승리를 통해 간신히 우승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푸리도르를 1분 43초 차이로 이기며 경주에서 우승했다. 오후 5시에 시상대에 선 지 불과 15분 만에 앙크티유는 이미 차에 타고 호텔로 이동하여 목욕과 저녁 식사를 한 후, 님 공항으로 향했고, 개인 제트기를 타고 보르도로 날아갔다. 파리로 향하는 경주는 한밤중에 시작되었고, 잠을 자지 못한 앙크티유는 초반에 고통받았다. 새벽에 은퇴 직전까지 갔지만, 팀 동료들의 설득으로 계속했다. 그는 결국 톰 심슨과 스타블린스키와 함께 브레이크어웨이에 합류한 후, 결승선 8 km 지점의 코트 드 피카르디 오르막에서 공격하여 스타블린스키에 57초 앞서 경주에서 우승했다.
산세바스티안에서 열린 1965 UCI 도로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완주하지 못한 후, 앙크티유는 시즌 말 타임 트라이얼로 돌아왔다. 그는 알티그를 제치고 그랑프리 데 나시옹에서 우승했고, 잔니 모타를 꺾고 그랑프리 드 루가노에서 우승했다. 앙크티유는 스타블린스키와 짝을 이루어 그의 두 번째 트로페오 바라키에서 우승했다. 앙크티유는 세 번째로 슈퍼 프레스티지 페르노를 수상했다.
앙크티유는 지로 디 사르데냐에서 우승하며 1966년을 강하게 시작했다. 파리-니스에서 그는 경주 선두를 달리고 있었지만, 자전거가 제대로 장착되지 않아 언덕 타임 트라이얼에서 푸리도르에게 시간을 잃었다. 앙크티유는 잔니 모타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 선수들과 동맹을 맺었고, 그들의 합동 공격은 푸리도르를 압박하여 앙크티유가 단계와 종합 우승을 차지할 수 있도록 했다. 5월 초, 그는 사이클링 달력에서 가장 오래된 경주이자 스포츠의 모뉴먼트 중 하나인 리에주-바스토뉴-리에주 출발선에 섰다. 앙크티유는 모타, 펠리체 지몬디, 젊은 에디 메르크스가 포함된 그룹에서 단독으로 탈출하여 우승할 기회가 있다고 느꼈다. 세 사람이 그를 다시 잡기 위해 잘 협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앙크티유의 우위는 결승선까지 계속 커졌고, 그는 거의 5분 차이로 우승했다. 결승선 후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그는 도핑 검사를 위해 소변 샘플을 제출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는 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떠났다. 다음 날, 그가 거부로 인해 벨기에 사이클 연맹에 의해 실격 처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지만, 앙크티유가 공식적으로 검사를 요청받지 않았다고 주장하자 당국은 양보했고 그의 승리는 인정되었다.

전년과 달리 앙크티유는 1966 지로 디탈리아에 출전했다. 첫 단계에서 그는 열성적인 팬이 그에게 물을 주려다 넘어지고 유리병이 땅에 깨지면서 두 번의 타이어 펑크를 겪었다. 앙크티유가 타이어를 수리하는 동안 다른 모든 우승 후보들을 포함한 22명의 선수 그룹이 탈출했고, 결승선에서 그는 3분 15초를 잃었다. 13단계 타임 트라이얼에서 비토리오 아도르니에 이어 2위를 차지하며 종합 10위로 올라섰지만, 앙크티유는 더 이상 지로에서 우승할 수 없다고 느꼈고, 젊은 이탈리아 선수의 인기가 크리테리움에서의 자신의 재정적 기회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지몬디의 우승을 막는 데 주력했다. 산악 단계에서 몇 차례 강력한 라이딩을 한 후, 앙크티유는 결국 지로에서 우승자 모타에게 4분 40초 뒤진 3위를 차지했다.

1966 투르 드 프랑스는 다시 앙크티유와 푸리도르 간의 싸움이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9단계에서 앙크티유는 새로 도입된 반도핑 검사에 반대하는 선수들의 파업을 주도했다. 앙크티유와 푸리도르는 주로 서로를 견제했고, 이로 인해 앙크티유의 팀 동료 뤼시앵 에마르와 얀 얀센이 10단계에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푸리도르는 14b 단계 타임 트라이얼에서 앙크티유에 7초 앞서 우승했다. 17단계에서 에마르는 교착 상태를 이용하여 선두 그룹에서 벗어나 단계에서 우승하고 경주 선두를 차지했다. 질병으로 약해진 앙크티유는 다음 단계에서 얀센과 푸리도르의 공격을 추격하며 에마르를 도왔고, 다음 날 기권했다. 에마르는 결국 얀센과 푸리도르를 제치고 투르에서 우승했다.
투르 이후 앙크티유는 뉘르부르크링 경주 서킷에서 열린 1966 UCI 도로 세계 선수권 대회에 참가했다. 경주 후반에 앙크티유와 푸리도르는 모타와 함께 선두 그룹에 있었지만, 두 프랑스 선수는 협력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알티그가 따라잡을 수 있었다. 마지막 스프린트에서 최고의 스프린터인 알티그는 쉽게 우승하여 홈에서 타이틀을 획득했다. 앙크티유는 푸리도르보다 앞선 2위를 차지했는데, 이는 그가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달성한 가장 높은 순위였다. 앙크티유는 그 후 그의 경력에서 마지막으로 그랑프리 데 나시옹에 출전하여 9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슈퍼 프레스티지 페르노에서 앙크티유는 대회 마지막 경주인 지로 디 롬바르디아를 앞두고 높은 순위에 있었다. 그는 4위를 차지하여 그의 경력에서 네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시즌 내내 진행된 대회에서 우승하기에 충분한 점수를 얻었다.

포드 프랑스가 스폰서를 철회하면서 앙크티유는 그의 많은 팀 동료들과 디렉터 제미니아니처럼 빅 팀으로 옮겼다. 1967년까지 앙크티유는 원데이 경주에 덜 출전하기 시작했지만, 그의 고향인 루앙에서 열린 크리테리움 내셔널에 급히 출전하여 우승했다. 앙크티유는 다시 1967 지로 디탈리아에 출전하여 초반에 시간을 잃었지만, 16단계 타임 트라이얼에서 4위를 차지하며 핑크 저지를 차지했고, 다른 모든 우승 후보들은 저조한 성적을 보였다. 그는 다음 날 실바노 스키아본에게 선두를 내주었는데, 스키아본은 프랑코 발마미온과 함께 성공적인 브레이크어웨이를 공유했다. 20단계 시작 시점에 두 명의 팀 동료밖에 남지 않았던 앙크티유는 단계에서 손실을 제한하여 종합 선두를 되찾았지만, 지몬디에게 34초밖에 앞서지 못했다. 다음 단계에서 그는 여러 공격을 막아냈지만, 결국 지몬디가 탈출하여 앙크티유에게 4분 9초를 벌었고, 그를 2위로 강등시켰다. 마지막 날의 마지막 전 단계에서 앙크티유는 여러 공격을 시도했지만, 지몬디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지쳐서 그는 발마미온에게 2위를 내주고 지로에서 3위를 차지했다.
1967 투르 드 프랑스를 위해 투르 드 프랑스는 국가 대표팀으로 돌아왔고 마르셀 비도는 푸리도르를 리더로 선택했으며, 앙크티유는 불참했다. 그는 대신 리비에르의 11년 된 아워 레코드를 깨는 시도를 하기로 결정했다. 9월 27일, 그는 다시 벨로드롬 비고렐리에서 시도하여 146 m 차이로 기록을 깼다. 앙크티유가 라이딩을 마친 후, 스포츠 관리 기구인 국제 사이클 연맹 (UCI)이 지정한 의사가 도핑 검사를 실시하기 위해 그에게 접근했다. 제미니아니는 벨로드롬에 화장실이 없으며 앙크티유가 야외에서 소변 샘플을 제공하지 않을 것이라고 항의했다. 의사가 앙크티유와 함께 그의 호텔로 가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검사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따라서 앙크티유의 기록은 UCI에 의해 비준되지 않았다. 앙크티유는 그의 경력에서 처음으로 1967 UCI 도로 세계 선수권 대회 프랑스 팀에 선발되지 않았지만, 베르나르 기요와 짝을 이루어 트로페오 바라키에서 2위를 차지하며 시즌을 마쳤다. 그 해 말, 앙크티유는 프랑스 프로 사이클 선수 연합의 회장이 되어 관리 기관과 경주 주최 측에 대한 선수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역할을 맡았다.
앙크티유의 경력 마지막 두 시즌은 비교적 조용했다. 그는 1968년에 많이 경주하지 않았고, 그의 유일한 승리는 지몬디와 함께 트로페오 바라키에서 나왔다. 1969년에 그는 파리-니스에서 3위를 차지한 후 투르 오브 바스크 컨트리에서 우승했는데, 이는 프로 선수로서 그의 마지막 승리였다. 그의 마지막 프로 도로 경주는 졸더르에서 열린 1969 UCI 도로 세계 선수권 대회 도로 경주였는데, 그는 40위를 차지했다. 그는 여러 가을 크리테리움에 참가했고, 라 시팔 벨로드롬에서 트랙 이벤트에서 마지막으로 경주했는데, 이 장소는 나중에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앙크티유의 마지막 출전은 1969년 12월 27일 벨기에에서 열린 트랙 이벤트였다.
3. 라이딩 스타일
앙크티유는 부드러운 라이더였고, 미국 저널리스트 오웬 멀홀랜드에 따르면 아름다운 페달링 기계였다.
"자크 앙크티유가 자전거를 타는 모습은 우리 미국인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타고난 귀족이라는 생각에 신뢰를 더합니다. '앙크'는 처음으로 진지하게 탑 튜브에 걸터앉은 날부터 대부분의 라이더들이 평생을 찾아 헤매는 완벽함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50년 첫 경주를 시작으로 19년 후 은퇴할 때까지 앙크티유는 수많은 프레임 아래에 있었지만, 그 정의할 수 없는 균형감은 항상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 모습은 그레이하운드 같았습니다. 그의 팔과 다리는 전후 도로가 엉망이던 시대의 관습보다 더 길게 뻗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발가락은 아래를 향했습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라이더들은 발목 움직임을 자랑했지만, 자크는 큰 기어 학교의 첫 주자였습니다. 그의 부드러운 힘은 스포츠에 대한 그의 전체적인 접근 방식을 지배했습니다. 노르망디 캥캉푸아 출신의 그는 얇은 마팍 브레이크 레버에 손을 편안하게 얹고 다른 사람들이 따라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동안 순항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4. 은퇴 후 활동
프로 사이클링에서 은퇴한 후, 앙크티유는 대부분의 시간을 자신의 농장을 돌보는 데 보냈지만, 수익성이 좋지는 않았다. 그는 또한 칸에 여러 부동산과 노르망디에 자갈 채취장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업 외에도 앙크티유는 파리-니스와 그랑프리 뒤 미디 리브르의 경주 디렉터로 활동했다. 그는 레키프 스포츠 신문에 칼럼을 썼고, 처음에는 유럽 1 라디오에서, 그 다음에는 안텐 2 텔레비전에서 경주 해설가로 일했다。 1970년대 초, 앙크티유는 알제리에서 그의 군대 상사였던 리샤르 마리예가 프랑스 국가 사이클링 팀을 운영하는 것을 돕기로 동의했다. 앙크티유는 그의 직위에서 실제적인 기능을 수행하지는 않았지만, 사이클링계에서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마리예에게 더 큰 권위를 부여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앙크티유는 1987 UCI 도로 세계 선수권 대회 직전까지 이 직책을 계속했다.
5. 라이벌 관계와 사회적 의미

앙크티유는 투르에서 레이몽 푸리도르를 꾸준히 이겼지만 푸리도르는 더 인기가 많았다. 그들의 팬들 사이의 분열은 뚜렷해졌는데, 투르가 프랑스 사회에 미친 영향을 연구한 두 사회학자는 이것이 프랑스의 과거와 현재를 상징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분열의 정도는 앙크티유와 가까웠던 피에르 샤니가 들려준 이야기에서 잘 드러난다.
"투르 드 프랑스는 가장 작은 마을, 심지어 가족까지도 두 개의 라이벌 진영으로 나누는 큰 결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아내가 자크 앙크티유를 선호하자 그녀를 뜨거운 난로의 그릴에 앉히고 치마를 들어 올린 채 붙잡고 있던 남자를 압니다. 그 남자는 레이몽 푸리도르를 선호했기 때문입니다. 다음 해에 그 여자는 푸리도르 지지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남편은 지몬디에게 충성을 바꿨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들은 바로는 그들이 고집을 부리고 이웃들이 불평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장-뤽 뵈프와 이브 레오나르는 그들의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자크 앙크티유에게서 자신을 발견한 사람들은 그가 라이딩하는 방식에서 스타일과 우아함을 우선시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이러한 유동성과 쉬워 보이는 모습 뒤에는 승리하는 프랑스의 이미지가 있었고,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들은 그와 자신을 동일시했습니다. 겸손한 사람들은 레이몽 푸리도르에게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의 얼굴은 노력으로 주름져 있었고, 이는 그들이 끊임없이 일하는 땅에서 살아가는 삶을 대변했습니다. 그의 상식적인 발언은 대중을 즐겁게 했습니다. 경주, 심지어 어려운 경주도 수확하는 하루보다 짧습니다. 따라서 많은 대중은 불운과 영원한 2위의 위치를 상징하는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었는데, 이는 푸리도르의 기록이 특히 풍부했다는 점에서 사실과는 거리가 먼 이미지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영원한 2위라는 표현과 푸리도르 콤플렉스는 힘든 삶과 연관되어 있으며, 자크 마르세유가 르 피가로에 '이 나라는 푸리도르 콤플렉스로 고통받고 있다'는 헤드라인으로 기사를 썼을 때도 나타났습니다."
6. 개인사 및 가족 관계

1957년 3월, 앙크티유는 그의 주치의의 아내이자 7살 연상인 자닌 보에다와 불륜을 시작했다. 그들은 관계가 시작되기 몇 년 전부터 서로를 알고 있었다. 앙크티유는 막 군대에서 제대했는데, 알제리에서 알제 오페라의 발레리나 폴 볼랑과 불륜을 시작했었다. 이 불륜은 대중의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볼랑은 1957년 6월 루앙으로 가서 앙크티유의 부모를 방문했는데, 그가 자신에게 결혼을 제안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자닌에게 볼랑에게 결혼할 의사가 없다는 소식을 전하게 했다. 1958년 초, 자닌은 남편에게 계속되는 불륜을 고백했지만, 남편은 이혼을 거부했다. 앙크티유는 훈련 캠프를 떠나 노르망디로 가서 보에다 부부의 문을 두드렸다. 잠옷만 입은 자닌은 그와 함께 파리로 갔다. 그들은 그 시점부터 함께 살았다. 자닌의 두 자녀, 딸 애니와 아들 알랭은 2년 후 그들과 함께 살게 되었다. 자닌은 앙크티유의 대부분의 경주에 동행했는데, 당시에는 파트너가 그렇게 하는 것이 드문 일이었다. 1958년 말, 자닌의 남편은 그녀에게 이혼을 허락했고, 그녀와 앙크티유는 1958년 12월 22일 결혼했다. 1967년 말, 앙크티유는 루앙 근처에 소유하고 있던 농장 옆의 샤토를 구입했다. 그는 이를 갚기 위해 경력을 2년 연장했다.

프로 사이클링에서 은퇴한 후, 앙크티유는 자신만의 자녀를 갖기를 강하게 원했지만, 자닌은 더 이상 임신할 수 없었다. 따라서 앙크티유는 대리모를 이용할 것을 제안했는데, 아이를 낳아줄 사람에게 돈을 지불하는 방식이었다. 자닌은 자신들이 아이를 빼앗을 수도 있는 낯선 사람이라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고, 대신 18세 딸 애니에게 가서 의붓아버지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갖는 것에 동의를 구했다. 1971년 딸 소피가 태어난 후에도 애니와 앙크티유는 성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그는 자닌과 12년 동안 행복하게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 소피의 친자 관계를 둘러싼 상황은 일반 대중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자닌에 따르면 가까운 친구들은 알고 있었다. 애니는 결국 다른 남자를 만나 앙크티유와의 관계를 끝내고 1983년에 이사했고, 소피는 처음에는 그와 할머니와 함께 지냈다. 몇 달 후, 애니를 질투하게 만들어 다시 얻으려는 듯, 앙크티유는 가족과 함께 살던 의붓아들 알랭의 아내 도미니크를 유혹했다. 앙크티유의 새로운 불륜은 가족을 파탄시켰고, 소피는 애니와 함께 이사했고 자닌은 곧 파리로 떠났다. 알랭도 떠나 재혼했다. 앙크티유와 자닌은 결국 1987년 9월에 이혼했다. 도미니크와 앙크티유는 1986년 4월 2일 아들 크리스토퍼를 낳았다.
7. 도핑 및 논란
앙크티유는 자신이 약물을 복용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으며, 프랑스 텔레비전에서 정부 장관과의 토론에서 보르도-파리를 물만 마시고 달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바보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와 다른 사이클 선수들은 "추위, 폭염, 비, 산악"을 뚫고 달려야 했으며, 원하는 대로 자신을 치료할 권리가 있다고 말한 후, "나를 내버려 두십시오. 모두가 약물을 복용합니다"라고 덧붙였다. 도핑에 대한 묵시적인 용인은 국가 최고위층까지 이어졌다. 샤를 드골은 "도핑? 무슨 도핑? 그가 해외에서 라 마르세예즈 (국가)를 연주하게 했는가, 안 했는가?"라고 말했다.
앙크티유는 프로 선수들이 노동자이며, 지리 교사처럼 자신의 고통을 치료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67년 투르 드 프랑스에서 톰 심슨의 사망을 포함하여 약물 관련 사건으로 더 많은 선수들이 사망하거나 건강 문제를 겪었다는 보고가 나오면서 그의 주장은 지지를 잃었다.
하지만 사이클 선수 공동체에서는 규칙과 검사가 있다면 검사가 일관되고 품위 있게 수행되어야 한다는 앙크티유의 주장에 큰 지지를 보냈다. 그는 세계 아워 레코드를 경신한 후 비고렐리 트랙 한가운데서 검사를 거부한 것은 직업적 품위, 즉 대중 앞에서 챔피언이 조롱당하지 않을 권리 때문이라고 말했다.
앙크티유가 그날 세운 비공식 기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기에 선수 페르디난트 브라케에 의해 깨졌다. 앙크티유는 프랑스 정부가 자신에게 축하 전보를 보내지 않고 프랑스인이 아닌 브라케에게 보낸 것에 상처를 받았다. 이는 앙크티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척도였으며, 그가 이후 프랑스 팀에서 조용히 제외된 방식도 마찬가지였다.
8. 질병과 죽음
앙크티유는 1987년 5월 25일 진행성 위암 진단을 받았다. 그의 어린 시절 친구 디외루아와 동료 투르 우승자 베르나르 이노에 따르면, 앙크티유는 여름 동안 해설 의무를 다하기 위해 병원에 가기 전까지 적절한 치료를 미루었다고 한다. 8월 11일, 그는 위 절제술을 받았다. 그는 1987년 11월 18일 루앙의 생틸레르 클리닉에서 소피와 도미니크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망했다.
9. 유산 및 평가
1997 투르 드 프랑스는 앙크티유의 첫 투르 우승 40주년이자 사망 10주년을 기념하여 루앙 주변에서 그랑 데파르를 개최하며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첫 단계가 열린 날, 그의 무덤에서 기념식이 열렸고 캥캉푸아의 한 부두는 케 앙크티유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10. 주요 성과 및 수상 경력
앙크티유는 그의 경력 동안 수많은 중요한 우승과 기록을 달성하며 사이클링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랜드 투어 | 1953 | 1954 | 1955 | 1956 | 1957 | 1958 | 1959 | 1960 | 1961 | 1962 | 1963 | 1964 | 1965 | 1966 | 1967 | 1968 | 1969 |
---|---|---|---|---|---|---|---|---|---|---|---|---|---|---|---|---|---|
부엘타 아 에스파냐 | 미개최 | ||||||||||||||||
DNF | 1 | ||||||||||||||||
지로 디탈리아 | |||||||||||||||||
2 | 1 | 2 | |||||||||||||||
1 | |||||||||||||||||
3 | 3 | ||||||||||||||||
투르 드 프랑스 | |||||||||||||||||
1 | DNF | 3 | |||||||||||||||
1 | 1 | 1 | 1 | ||||||||||||||
DNF | |||||||||||||||||
경주 | 1953 | 1954 | 1955 | 1956 | 1957 | 1958 | 1959 | 1960 | 1961 | 1962 | 1963 | 1964 | 1965 | 1966 | 1967 | 1968 | 1969 |
---|---|---|---|---|---|---|---|---|---|---|---|---|---|---|---|---|---|
파리-니스 | |||||||||||||||||
7 | |||||||||||||||||
1 | 10 | 11 | DNF | 1 | DNF | 1 | 6 | 1 | 1 | 16 | 10 | 3 | |||||
투르 오브 바스크 컨트리 | 미개최 | 1 | |||||||||||||||
투르 드 로망디 | |||||||||||||||||
8 | 10 | ||||||||||||||||
크리테리움 뒤 도피네 | |||||||||||||||||
15 | |||||||||||||||||
12 | 1 | ||||||||||||||||
1 | |||||||||||||||||
미개최 | 4 | ||||||||||||||||
![]() 볼타 아 카탈루냐 | |||||||||||||||||
2 | 1 | ||||||||||||||||
모뉴먼트 결과 타임라인 | |||||||||||||||||
---|---|---|---|---|---|---|---|---|---|---|---|---|---|---|---|---|---|
모뉴먼트 | 1953 | 1954 | 1955 | 1956 | 1957 | 1958 | 1959 | 1960 | 1961 | 1962 | 1963 | 1964 | 1965 | 1966 | 1967 | 1968 | 1969 |
밀라노-산레모 | |||||||||||||||||
12 | 17 | 10 | |||||||||||||||
23 | |||||||||||||||||
투르 오브 플랜더스 | |||||||||||||||||
14 | |||||||||||||||||
파리-루베 | |||||||||||||||||
53 | 15 | 31 | 25 | 14 | 24 | 8 | 60 | 31 | |||||||||
16 | |||||||||||||||||
리에주-바스토뉴-리에주 | |||||||||||||||||
1 | |||||||||||||||||
4 | |||||||||||||||||
지로 디 롬바르디아 | |||||||||||||||||
23 | 12 | 21 | 34 | 17 | |||||||||||||
8 | 4 | ||||||||||||||||
1953 | 1954 | 1955 | 1956 | 1957 | 1958 | 1959 | 1960 | 1961 | 1962 | 1963 | 1964 | 1965 | 1966 | 1967 | 1968 | 1969 | |
---|---|---|---|---|---|---|---|---|---|---|---|---|---|---|---|---|---|
세계 선수권 대회 | |||||||||||||||||
5 | 6 | ||||||||||||||||
6 | DNF | 9 | 9 | 13 | 15 | 14 | 7 | DNF | 2 | ||||||||
11 | 40 | ||||||||||||||||
전국 선수권 대회 | |||||||||||||||||
DNF | |||||||||||||||||
3 | |||||||||||||||||
3 | |||||||||||||||||
- | 불참 |
---|---|
DNF | 완주하지 못함 |
10.1. 트랙
- 1956년: 1956 UCI 트랙 사이클 세계 선수권 대회 개인 추발 2위
- 1957년: 파리 6일 경주 우승 (앙드레 다리가드, 페르디난도 테루치와 함께)
10.2. 세계 기록
종목 | 기록 | 날짜 | 벨로드롬 | 트랙 |
---|---|---|---|---|
아워 레코드 | 46.159 km | 1956년 6월 29일 | 벨로드롬 비고렐리 (밀라노) | 실내 |
1967년 9월 27일 |
- 1967년 앙크티유는 47.493 km의 기록 거리를 세웠지만, 경기 후 도핑 검사를 거부하여 UCI에 의해 기록이 비준되지 않았으며, 10월 13일 UCI는 이 기록을 인정하지 않기로 투표했다.
10.3. 수상 및 훈장
- BBC 해외 스포츠 올해의 인물: 1963년
- 레지옹 도뇌르 훈장 슈발리에: 1966년
11. 관련 항목
- 사이클링 도핑 사례 목록
- 지로 디탈리아 종합 순위 우승자 목록
- 그랜드 투어 종합 순위 우승자 목록
- 투르 드 프랑스 종합 순위 우승자 목록
- 부엘타 아 에스파냐 종합 순위 우승자 목록
- 옐로 저지 통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