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자크 마르케트는 프랑스에서 태어나 예수회 교육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고, 이후 사제로서 초기 활동을 시작했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자크 마르케트는 1637년 6월 1일 프랑스의 랑에서 태어났다. 그는 로즈 드 라 살(Rose de la Salle)과 니콜라 마르케트(Nicolas Marquette) 사이의 여섯 자녀 중 셋째였다. 드 라 살 가문은 부유한 상인 가문이었고, 마르케트 가문은 여러 구성원이 군대와 공직에서 봉사하며 오랫동안 존경받아왔다.
마르케트는 9세에 랭스에 있는 예수회 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했다. 그는 17세에 예수회에 입단할 때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1.2. 예수회 입단 및 사제 서품
17세에 예수회에 입단한 마르케트는 오세르에서 1년간 가르쳤고, 1659년까지 퐁타무송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이후 그는 1665년까지 퐁타무송, 랭스, 샤를빌, 랑그르에서 가르치는 일을 했다.
이 기간 동안 마르케트는 여러 차례 선교 활동에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다. 누벨 프랑스(뉴프랑스) 예수회 선교단 책임자인 제롬 랄레망(Jerome Lalemant) 신부는 다섯 부족과 함께 일할 선교사들이 필요했다. 마르케트는 1666년 3월 7일 툴에서 성 토마스 아퀴나스 축일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몇 달 뒤인 9월 20일, 그는 퀘벡에 도착했다.
2. 선교 활동
마르케트의 선교 활동은 북미 원주민과의 깊은 교류와 문화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는 여러 중요한 선교 단체를 설립하고 운영했다.
2.1. 북미 선교사 파견
퀘벡에 도착한 마르케트는 처음 실러리에 있는 생 미셸 선교 단체로 파견되었다. 이 선교 단체는 여러 부족 출신의 평화롭고 친근한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새로운 선교사들을 훈련시키기에 이상적인 장소로 여겨졌다. 마르케트는 실러리에서 자주 돌보던 알곤킨족, 아베나키족, 이로쿼이족 사람들의 언어와 관습을 연구했다.
이후 그는 세인트로렌스강 변의 트루아리비에르로 파견되어 가브리엘 드뤼예트를 보조했다. 이 선교 단체는 상설 상점과 술집이 있는 강변 마을에 위치해 있었는데, 다섯 부족의 잦은 공격으로 인해 많은 프랑스 병사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마르케트는 이 선교 단체에서 2년 동안 현지 언어를 연구하는 데 전념하여 여섯 개의 방언에 능통하게 되었다.
2.2. 주요 선교지에서의 활동
1668년, 마르케트는 상관들에 의해 세인트로렌스강 상류의 선교 단체들로, 그리고 서부 오대호 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 해 그는 드뤼예트, 루이 브롬(Louis Broeme) 형제, 클로드장 알루에 신부와 함께 현재 미시간주에 위치한 수세인트마리에 선교 단체를 설립하는 것을 도왔다. 선교사들은 작물을 심고, 예배당과 헛간을 지었다. 그들은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오타와족과 오지브와족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고, 대부분의 유아와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줄 수 있었다. 마르케트는 오지브와족이 훌륭한 사업가이며 세인트메리스강의 급류에서 빙어를 잡는 데 매우 능숙하다고 언급했다.
많은 부족의 사람들이 빙어를 구매하기 위해 여행하곤 했다. 마르케트와 다른 선교사들은 방문하는 수족, 크리족, 마이애미족, 포타와토미족, 일리노이족, 메노미니족에게 그들의 신앙을 설명했다. 그들은 이 방문객들이 자신들만의 예수회 선교사, 즉 원주민들이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라고 불렀던 선교사를 갖는 것에 관심을 갖기를 바랐다.
1669년, 마르케트는 라 포인트 뒤 생 에스프리 선교 단체에서 알루에를 대신하도록 지명되었다. 클로드 다블롱 신부는 수세인트마리에서 선교 활동을 계속하고 확장하기 위해 도착했다. 마르케트는 8월에 슈피리어호 남쪽 해안을 따라 카누를 타고 새로운 임지로 향하는 804670 m (500 mile) 여정을 시작했다. 일행은 곧 호수에서 겨울 같은 날씨를 만났고 밤에 상륙했을 때 종종 불을 피울 수 없었다. 일행은 9월 13일에 목적지에 도착하여 페툰 휴런족의 환영을 받았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다시 오게 된 것을 기뻐하며, 그들은 재빨리 연회를 준비했다.
마르케트는 페툰 휴런족 외에도 세 오타와 부족(케누슈, 시나가우, 키스카콘)을 위한 선교 활동을 맡았다. 마르케트는 네 개의 정착지 모두를 방문하고 돌보았다. 그는 키스카콘족이 기독교를 가장 잘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심지어 그들의 마을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기도 했다.
라 포인트에 머무는 동안 마르케트는 일리노이 부족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그에게 중요한 교역로인 미시시피강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들은 그를 자신들의 마을로 초대하여 주로 남쪽에 위치한 사람들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다. 마르케트는 이 강을 탐험하기를 간절히 원했고, 선교 활동에서 휴가를 가질 허락을 요청했지만, 먼저 긴급한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라 포인트의 휴런족과 오타와족은 이웃한 라코타족과 싸움을 시작했다. 라코타족의 공격을 두려워한 마르케트는 선교 단체를 위한 새로운 장소를 찾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다블롱도 새로운 선교 단체가 필요하다는 데 동의하고 위치를 찾아주겠다고 제안했다. 일부 남자들은 남아 싸우고 싶어 했다. 마르케트는 임박한 전쟁을 막으려 노력했지만, 대부분의 남자들은 입장을 고수했다. 그는 전쟁을 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선교 단체로 데려갈 것을 약속하고 동쪽으로 이동할 준비를 하라고 말했다.
1671년 봄, 마르케트와 그의 일행은 새로운 세인트 이그내스 선교 단체로 여정을 시작했다. 카누에는 남자, 여자, 어린이, 동물, 개인 소지품이 실렸다. 그들은 슈피리어호를 거쳐 매키나 해협으로 이동했다. 다블롱이 그들을 위해 설립한 선교 단체는 매키나 섬에 위치해 있었다. 이들은 이미 섬에 거주하고 있던 소수의 오타와족으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새로운 거주자들이 섬에 도착한 직후, 그들은 겨울철 기아의 가능성을 걱정하게 되었다. 그들은 사냥감이 부족하고 옥수수가 자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한 무리의 원로들이 이러한 우려를 가지고 마르케트에게 다가왔고, 마르케트는 이에 동의했다. 가을에 선교 단체는 본토의 세인트 이그내스로 옮겨졌다.
2.3. 원주민 언어 및 문화 이해
마르케트는 북미 원주민 선교 활동에 있어 그들의 언어와 문화를 깊이 이해하는 것을 핵심 접근 방식으로 삼았다. 그는 실러리 선교 단체에서 알곤킨족, 아베나키족, 이로쿼이족의 언어와 관습을 연구했으며, 트루아리비에르에서는 2년 동안 현지 언어를 집중적으로 학습하여 여섯 개의 방언에 능통하게 되었다.
그의 언어 능력은 선교 활동에 필수적이었으며, 마이애미족 일리노이 방언과 같은 다양한 부족의 언어로 소통할 수 있었다. 그는 단순히 종교를 전파하는 것을 넘어, 원주민들의 생활 방식과 문화적 특성(예: 오지브와족의 뛰어난 상업 능력과 어업 기술)을 관찰하고 기록했다. 특히, 키스카콘족 마을에서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기독교 수용에 가장 준비된 부족으로 판단한 점은 마르케트가 피상적인 접촉을 넘어 원주민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를 추구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문화적 이해를 바탕으로 그는 다양한 부족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하고 상호작용할 수 있었다.
3. 탐험 활동
1673년 마르케트의 선교 활동 휴가 요청이 승인되어 미시시피강 탐험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탐험은 북미 지리에 대한 유럽인의 이해를 크게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3.1. 미시시피 강 탐험 계획
마르케트는 프랑스계 캐나다인 탐험가 루이 졸리에의 원정대에 합류했다. 당시 유럽인들은 미시시피강의 존재는 알고 있었으나, 그 길이 태평양으로 이어지는지 혹은 다른 바다로 흐르는지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다. 누벨 프랑스 총독 루이 드 뷔아드 드 프롱트나크는 미시시피강이 극동으로 향하는 쉬운 교역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에 졸리에에게 강과 그 흔적을 찾도록 지시했다. 원주민 언어에 능통한 마르케트는 졸리에의 원정에 동반하게 되었고, 그의 언어 능력은 탐험의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3.2. 탐험 경로 및 발견
1673년 5월 17일, 마르케트와 졸리에, 그리고 다섯 명의 프랑스-원주민 혼혈 보야저들(자크 라르길리에, 장 플라티에, 피에르 모로, 장 티베르제 등)은 세인트 이그내스를 출발했다. 그들은 두 척의 카누를 타고 휴런호와 미시간호를 거쳐 그린베이로 들어섰다.
그린베이에서 그들은 처음으로 원주민을 만났다. 그들은 "야생 쌀 사람들"으로 알려진 메노미니족을 만났다. 마르케트는 그들에게 강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 종교를 전파하는 자신의 임무를 설명했다. 메노미니족은 강과 그 주변에 사는 사람들의 위험에 대해 경고하며 마르케트 일행의 탐험을 만류하려 했다.
탐험대는 다음으로 폭스강을 거슬러 거의 수원지까지 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마이애미족, 마스쿠텐족, 키카푸족이 거주하는 마을에 도착했다. 원주민들은 마르케트가 기독교를 가르치는 것을 허락했고, 주의 깊게 들었다. 마르케트는 특히 마이애미족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마르케트는 그들이 전사라는 평판에도 불구하고 외모와 성품이 유쾌하다고 언급했다. 마르케트 일행이 마을을 떠날 때, 두 명의 마이애미족이 위스콘신강으로 가는 길을 돕기 위해 동행했다. 마이애미족의 안내로, 그리고 아마도 도움을 받아, 그들은 거의 3219 m (2 mile)에 달하는 습지와 참나무 평원을 가로질러 카누를 포티지하여 위스콘신강으로 들어섰다. 이 포티지 구간은 수년 후 포티지, 위스콘신주라는 도시가 건설되고 이름 붙여진 유서 깊은 길이었다. 그들은 포티지를 벗어나 6월 17일 현재 프레리 뒤 시엔 근처에서 미시시피강으로 진입했다.
8일 후, 탐험가들은 디모인강 근처에서 발자국을 발견하고 조사에 나섰다. 그들은 근처의 세 작은 마을에 사는 피오리아족에게 열렬히 환영받았다. 마르케트 일행은 원로들의 환영을 받으며 숙소를 제공받고 연회를 대접받았다. 피오리아족은 그들에게 많은 선물을 제안했다. 마르케트와 일행은 여행 중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제안을 거절해야 했다. 마르케트는 추장이 준 칼루멧을 받아들였다. 추장은 그것이 평화의 상징이며, 마르케트에게 우호적인 의도를 나타내기 위해 그것을 들고 다닐 것을 조언했다. 일행이 마을을 떠날 때, 피오리아 추장은 그들에게 너무 남쪽으로 가지 말라고 경고했다.

일행이 계속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마르케트는 샤누아난족을 찾기를 바랐다. 그들은 프랑스인에게 친근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마르케트는 그들이 기독교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고 느꼈다. 그들은 샤누아난족을 찾지 못했지만, 마르케트는 와바시강 지역에서 철을 발견했다. 여름 더위와 모기가 심한 불편을 주기 시작하자, 그들은 밤에 상륙하는 것을 멈췄다. 그들은 카누에서 잠을 자며 돛을 모기장으로 사용했다. 이는 일부 원주민의 주의를 끌었고, 그들은 탐험가들에게 총을 겨누었다. 마르케트는 칼루멧을 머리 위로 들었다. 그는 휴런어를 사용하여 소통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그는 원주민들이 총을 든 사람들의 의도를 오해했을 수도 있고, 그들을 마을로 초대했을 수도 있다고 느꼈다. 마르케트의 생각이 맞았고, 그와 다른 사람들은 그들을 따라 마을로 가서 쇠고기와 흰 자두를 대접받았다.
세인트 프랜시스강 어귀에서 그들은 한 마을을 발견했다. 그들은 전쟁 함성을 들었고, 남자들이 강으로 뛰어들어 그들에게 다가오려는 것을 보았다. 마르케트는 칼루멧을 머리 위로 들었고, 강둑에 서 있던 원로들이 이를 보고 공격을 중지시켰다. 그들은 미시간아족 마을로 초대되었다. 미시간아족 중 한 명이 마이애미 일리노이 언어로 마르케트와 대화할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소통은 제스처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생선과 옥수수 스튜를 대접받고, 밤에 잠자리를 제공받았다.
아침에 미시간아 전사들은 통나무 카누를 타고 그들을 아칸세아 콰파족에게 데려다주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칼루멧을 든 카누를 탄 남자들 무리의 환영을 받았다. 마르케트 일행은 마을로 초대되었고, 많은 주민들이 프랑스인들을 보러 나왔다. 한 추장이 그들을 원로들과 다른 추장들이 모여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마르케트는 통역사를 통해 그들 남쪽에 무엇이 있는지 물었다. 그는 그곳이 극도로 위험하다고 들었다. 사람들은 적대적이었고, 잘 무장했으며, 자신들의 교역 방해자를 공격할 것이라고 했다.

졸리에-마르케트 원정대는 멕시코만에서 700063 m (435 mile) 이내까지 탐험했다. 마르케트와 다른 사람들은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는지 고려하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 그들은 몇몇 원주민들이 유럽제 장신구를 가지고 다니는 것을 보았고, 스페인 탐험가나 식민지 개척자들과의 조우를 두려워했다. 탐험가들은 그들이 탐험했던 지역의 식물상, 야생동물, 자원 등을 지도에 기록했다. 아칸세아족과 이틀 밤을 보낸 후, 탐험대는 탐험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7월 17일, 그들은 아칸소강 어귀에서 되돌아왔다. 그들은 미시시피강을 거슬러 올라가 일리노이강 어귀에 다다랐는데, 현지 원주민들로부터 그곳이 오대호로 돌아가는 더 짧은 경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시카고 포티지를 통해 현재의 시카고 지역 근처 미시간호에 도달했다. 탐험대는 카스카스키아족 마을을 만났는데, 그들은 마르케트에게 돌아와 선교 단체를 설립해달라고 초대했다. 탐험가들이 마을을 떠날 때, 일부 카스카스키아족은 자신들의 카누를 타고 그린베이에 있는 성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선교 단체까지 동행했다. 졸리에는 퀘벡으로 돌아가 자신들의 발견 소식을 전했다.
3.3. 탐험의 의의 및 영향
자크 마르케트와 루이 졸리에의 미시시피강 탐험은 북미 대륙의 지리적 인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당시 유럽인들에게 미지의 영역이었던 미시시피강의 경로와 주변 지역을 상세히 지도화하고 기록하여, 북미 내륙에 대한 유럽의 지식을 크게 확장시켰다. 이 탐험은 단순히 지리적 발견을 넘어, 프랑스의 북미 대륙 확장 정책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미시시피강이 멕시코만으로 흐른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은 프랑스가 북미 내륙에서 영토적 주권을 주장하고 교역망을 확장하는 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했다.
또한, 이 탐험은 다양한 원주민 부족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유럽인과 원주민 사회 간의 초기 문화적 교류를 촉진했다. 마르케트는 원주민 언어와 문화를 이해하려 노력하며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고, 이는 향후 선교 활동과 교역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스페인 탐험가들과의 잠재적 충돌을 우려하여 탐험을 중단한 것은 당시 유럽 열강 간의 식민지 경쟁 맥락을 보여주며, 이러한 탐험이 가져온 사회적, 정치적 변화의 다층적인 측면을 조명한다.
4. 마지막 여정과 죽음
마르케트는 미시시피강 탐험 후 마지막 선교 활동을 이어갔지만, 건강 악화로 인해 생을 마감했으며, 그의 사망 장소는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4.1. 마지막 선교 활동
1674년 말, 마르케트와 그의 일행은 일리노이 지역으로 돌아왔고, 시카고 시가 될 곳에서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겨울을 보냈다. 일리노이 연방의 환영받는 손님으로서 탐험가들은 가는 길에 연회를 즐겼고, 사거마이트와 같은 의례 음식을 대접받았다. 마르케트의 약속대로, 그는 카스카스키아족을 위한 '무염시태 선교 단체'를 설립했다.
4.2. 사망 및 매장
1675년 봄, 마르케트는 서쪽으로 이동하여 스타브드 록 근처 일리노이 대촌락에서 공개 미사를 집전했다. 미시시피 탐험 중에 걸린 이질로 인해 그의 건강은 쇠약해졌다. 세인트 이그내스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1675년 5월 18일, 37세의 나이로 현재의 러딩턴, 미시간주 근처에서 사망했다. 그의 동료인 피에르 포르테레트(Pierre Porteret)와 자크 라르길리에(Jacques Largillier)는 마르케트가 선택한 장소에 그의 시신을 매장하고 큰 십자가로 표시했다. 포르테레트와 라르길리에는 선교 단체에 소식을 알리기 위해 세인트 이그내스로 계속 이동했다.
2년 후인 1677년, 세인트 이그내스 선교 단체의 키스카콘 오타와족은 마르케트의 묘지를 발견했다. 그들은 시신을 옮기기 위해 그의 뼈를 깨끗이 씻었다. 오타와족과 휴런족은 약 서른 척의 카누를 타고 그들을 선교 단지로 동반했다. 마르케트의 유해는 누벨(Nouvel) 신부와 피에르콘(Piercon) 신부에게 전달되었다. 그들은 장례식을 주관한 후 1677년 6월 9일 생 이그내스 선교 단체 예배당에 그의 뼈를 매장했다.
2018년, 세인트 이그내스 주민들 중 일부는 마르케트가 선교 단체로 이끌었던 후손들로, 마르케트의 뼈 한 온스가 마켓 대학교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주민들과 대학 간의 협상이 시작되었고, 오지브와 문화 박물관은 뼈의 반환을 공식적으로 요청했으며, 마켓 대학교는 이 요청을 수락했다. 2022년 3월, 두 명의 아메리카 원주민 남성, 그중 한 명은 아니시나아베족 원로였는데, 대학에 도착했다. 그들은 마르케트의 뼈를 받아 자작나무 상자에 담아 세인트 이그내스로 돌아왔다. 2022년 6월 18일, 의식 후 대학에서 회수된 뼈는 나머지 마르케트의 뼈와 함께 다시 매장되었다.
4.3. 사망 장소 논쟁

자크 마르케트의 정확한 사망 장소는 오랫동안 역사적 논쟁의 대상이었다. 미시간주 러딩턴에 있는 미시간 역사 표지판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위대한 예수회 선교사이자 탐험가인 자크 마르케트 신부는 1675년 5월 18일 미시간호 해안 어딘가에서 두 프랑스 동료에 의해 사망하고 매장되었다. 그는 1673년에 미시시피 지역을 탐험하기 위해 떠났던 세인트 이그내스 선교 단체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그의 정확한 사망 장소는 오랫동안 논란의 대상이었다. 이 언덕의 남동쪽 경사면 근처, 페레 마르케트강의 고대 하구 근처의 한 지점은 초기 프랑스 기록과 지도, 그리고 과거의 지속적인 전통에 의해 확인된 사망 장소와 일치한다." 표지판은 또한 마르케트의 유해가 1677년에 세인트 이그내스에 재매장되었음을 명시한다.
그러나 미시간주 프랭크포트에 있는 또 다른 미시간 역사 표지판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마르케트의 죽음: 1675년 5월 18일, 위대한 예수회 선교사이자 탐험가인 자크 마르케트 신부는 하반도의 미시간호 해안 어딘가에서 두 프랑스 동료에 의해 사망하고 매장되었다. 마르케트는 1673년에 미시시피와 일리노이 지역으로 탐험 여행을 떠났다가 세인트 이그내스 선교 단체로 돌아오던 중이었다. 마르케트의 정확한 사망 장소는 오랫동안 논란의 대상이었다. 1960년대에 제시된 증거에 따르면, 1900년까지 이곳에 있던 언덕의 북동쪽 모퉁이, 벳시강의 자연적인 하구 근처 이 장소가 마르케트의 사망 장소이며, 벳시강이 초기 프랑스 기록과 지도에 나오는 '리비에르 뒤 페레 마르케트'이다." 이 표지판 또한 마르케트의 뼈가 1677년에 세인트 이그내스에 재매장되었다고 언급한다.
세인트 이그내스 시내의 주립 거리(State Street)에 있는 마르케트의 묘지 옆에는 현재 오지브와족 문화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5. 유산 및 기념
자크 마르케트의 업적은 오늘날까지도 다양한 지명, 기관, 기념물, 그리고 국가적 기념 활동을 통해 기려지고 있으며, 이는 그가 북미 역사에 미친 지대한 영향을 보여준다. 20세기 초, 마르케트는 이 지역의 가톨릭교 창립자로 널리 칭송받았다.
5.1. 지명 및 기관
마르케트의 이름은 수많은 지명과 기관에 남아 있다. 여기에는 마케트 카운티(미시간주, 위스콘신주)가 포함된다.
여러 공동체도 그의 이름을 따랐는데, 다음과 같다.
- 마케트(미시간주)
- 마케트(위스콘신주)
- 마케트(아이오와주)
- 마케트(일리노이주)
- 마케트 하이츠(일리노이주)
- 페레 마르케트 차터 타운십(미시간주)
- 마케트(매니토바주)
교육 기관으로는 다음과 같다.
- 마켓 대학교 및 마케트 대학교 고등학교(밀워키, 위스콘신주)
- 마케트 가톨릭 고등학교(올턴, 일리노이주)
- 마케트 아카데미 가톨릭 고등학교(오타와, 일리노이주)
- 에콜 페레 마르케트(몬트리올, 퀘벡)
지리적 특징 및 시설물도 그의 이름을 따랐다.
- 휴런호의 마케트섬
- 미네소타주의 마케트호, 퀘벡의 마케트호
- 페레 마르케트강과 페레 마르케트 호수 (미시간주 러딩턴에서 미시간호로 유입)
- 퀘벡의 마케트강
- 밀워키의 페레 마르케트 공원
- 그래프턴 근처의 페레 마르케트 주립공원
- 시카고, 일리노이주의 마케트 공원
- 피오리아의 호텔 페레 마르케트
- 게리, 인디애나주의 마케트 공원
- 매키나섬의 마케트 공원
- 세인트루이스의 마케트 공원
- 머스키건의 공공 해변인 페레 마르케트 해변
- 미시간주의 페레 마르케트 주립 산림
- 페레 마르케트 철도
- 그의 출생지인 랑의 쿠브롱에 있는 나토 공군 기지에 미국인들이 건설했던 과거 미국 도시 기지인 "시테 마르케트"(1956~1966년)
- 마케트 교통 회사 (그의 카누 실루엣을 엠블럼으로 사용하는 예인선 회사)
건물들 또한 그의 이름을 사용한다.
- 마케트 빌딩(시카고)
- 마케트 빌딩(디트로이트)
- 마케트 빌딩(세인트루이스)
- 피오리아의 페레 마르케트 호텔
- 미니애폴리스의 큰 거리인 마케트 애비뉴
5.2. 기념물 및 동상
마르케트는 다양한 동상, 기념물, 역사 표지판을 통해 기념되고 있다. 그의 동상은 다음을 포함한 여러 곳에 세워져 있다.

-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 미시간주 포트 매키나
- 미시간주 마케트
- 위스콘신주 밀워키의 마켓 대학교
- 위스콘신주 프레리 뒤 시엔
프랑스와 미국 각지의 주요 기관에도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 일리노이주 유티카
- 프랑스 랑
- 미국 국회의사당의 국립 조각상 홀
- 퀘벡 주의회 의사당
지역 사회에 세워진 다른 기념 동상들도 많다.





또한, 그는 다음과 같은 국립 기념관 및 역사 유적지에서 기려지고 있다.
- 페레 마르케트 국립 기념관 (미시간주 세인트 이그내스 근처)
- 시카고 포티지 국립 역사 유적지 (루이 졸리에와 함께, 일리노이주 라이언스 근처)
시카고 공립도서관 레글러 분점에는 중서부 예술가 R. 페이어웨더 밥콕(R. Fayerweather Babcock)의 복원된 벽화 "야생, 겨울 강 풍경"이 전시되어 있다. 이 벽화는 마르케트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강가에서 교역하는 모습을 묘사하며, 1934년 공공사업진흥국의 자금으로 레글러 분점을 위해 의뢰되었다.
5.3. 우편 기념 및 기타 기념
마르케트는 미국에서 발행된 우표에 두 차례나 기념되었다.

- 1898년 발행된 1센트 우표는 트랜스-미시시피 발행의 일부로, 미시시피강에 있는 그를 보여준다. 이는 미국 우체국에서 가톨릭 사제를 기린 첫 번째 사례이다.

- 1968년 9월 20일 발행된 6센트 우표는 그가 수세인트마리에 예수회 선교 단체를 설립한 지 300주년을 기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