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자크 라피트Jacques Laffitte자크 라피트프랑스어는 1767년부터 1844년까지 활동한 프랑스의 선도적인 은행가이자 정치인이었다. 그는 프랑스 은행 총재를 역임했으며, 프랑스 복고 왕정과 7월 왕정 시기에 하원 의원으로서 자유주의 진영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프랑스 산업화 초기 단계에서 새로운 은행 기법을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특히 1830년 7월 혁명에서 샤를 10세를 대신하여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를 왕위에 앉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혁명 이후, 라피트는 새로운 시민 왕의 국무회의 의장 겸 재무 장관으로 임명되었으나 (1830년 11월 2일 - 1831년 3월 13일), 131일간의 짧은 재임 기간 동안 '운동당'을 이끌며 개혁과 사회 질서 회복을 동시에 추진하려 했으나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그는 정치적으로 신뢰를 잃고 재정적으로 파산한 채 물러났지만, 1836년 상공업 일반 은행(Caisse Générale du Commerce et de l'Industrie프랑스어)을 설립하며 재기했다. 이 은행은 크레디 모빌리에와 같은 19세기 후반 프랑스 투자 은행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비록 상공업 일반 은행은 1848년 혁명으로 인한 금융 위기를 이겨내지 못했으나, 라피트는 프랑스 금융 시스템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자크 라피트는 장인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근면함과 재능을 보이며 금융계에 발을 들였다.
2.1. 출생과 어린 시절
자크 라피트는 1767년 10월 24일 프랑스 바스크 지방의 피레네아틀랑티크에 있는 바욘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피에르 라피트(1789년 사망)는 장인 목수였고, 어머니는 에티에네트 로제르였다. 라피트는 네 명의 아들과 여섯 명의 딸을 포함한 총 열 명의 자녀 중 한 명으로,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 그는 12살에 아버지 밑에서 목수 견습생으로 일했으며, 이후 2년 동안 바욘의 한 공증인 사무실에서 3급 서기로 근무했다. 14살에는 같은 도시의 상인 포르말라게스(Formaragues) 씨 밑에서 점원으로 일하며 상업적인 경험을 쌓았다.
2.2. 교육 및 초기 경력
1788년, 21세가 된 자크 라피트는 후견인의 추천서를 받아 파리로 상경했다. 그는 저명한 스위스 은행가 장프레데리크 페레고Jean-Frédéric Perregaux장프레데리크 페레고프랑스어 (1744-1808)의 은행에서 평범한 서기 직책으로 입사했다. 페레고 은행은 외국과의 관계 덕분에 당시 공안위원회의 은행이 되었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재정 고문 중 한 명이 될 정도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라피트는 회계 장부를 담당하는 직책에 고용되었으며, 이곳에서 뛰어난 자질과 은행 업무에 대한 탁월한 소질을 보여주었다. 사교적이고 활발하며 쾌활한 성격에, 대단한 업무 능력과 명석판명한 정신을 지닌 라피트는 빠르게 출세 가도를 달렸다.
3. 은행가로서의 경력
라피트는 페레고 은행에서 서기로 시작하여 실질적인 수장으로 성장했으며, 프랑스 은행의 요직을 거쳐 복고 왕정 시기 주요 금융 활동을 주도하고 금융 혁신에도 기여했다.
3.1. 페레고 은행에서의 활동
페레고는 라피트의 성장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그에게 점점 더 중요한 책임을 맡겼다. 라피트는 1800년에 공동 경영자로 발탁되었고, 1804년에는 페레고의 뒤를 이어 은행의 책임자가 되었다. 1806년에는 동업자가 되었으며, 1807년 페레고의 건강이 나빠지면서 은행의 전무이사 겸 실질적인 수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은행의 이름은 '페레고, 라피트 앤 컴퍼니'(Perregaux, Laffitte and Company프랑스어)로 변경되었다. 페레고의 아들 알퐁스(Alphonse, 1785-1841)와 그의 누이는 잠자는 파트너(commanditaires프랑스어)로 참여했다. 역사가 비르지니 모니에(Virginie Monnier)는 "프랑스 은행 역사상 처음으로 서기가 후원자의 직책을 직접 승계했다"고 평가했다.
3.2. 프랑스 은행에서의 역할
1808년 페레고가 사망하자 라피트는 프랑스 은행의 15인 이사 중 한 명으로 그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1810년부터 1811년까지 파리 상공회의소 회장을 역임했으며, 1813년에는 센 상업 재판소 판사로 임명되었다.
1814년 나폴레옹이 패배한 후, 즉위한 루이 18세에 의해 프랑스 은행의 임시 총재로 임명되었다. 나폴레옹은 1815년 워털루 전투 이후 최종 유배길에 오르면서 라피트의 은행에 600.00 만 FRF을 예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26년 나폴리에옹의 유산이 논쟁에 휘말렸을 때, 라피트는 자신의 은행이 지불해야 할 금액을 이자를 포함하여 385.61 만 FRF으로 계산했다. 복고 왕정 정부가 나폴레옹의 예치금을 몰수하려 했으나, 라피트는 이를 거부하고 대신 제정기 프랑스군에 대한 미지급금 200.00 만 FRF을 사비로 지불하기도 했다. 라피트는 1814년부터 1820년까지 프랑스 은행 총재직을 유지했다.
3.3. 복고 왕정 시기 사업 활동
프랑스 복고 왕정 시기에 '자크 라피트 앤 컴퍼니'(Jacques Laffitte and Company프랑스어)는 파리에서 가장 부유한 사설 은행 중 하나였으며, '오트 방크 파리지엔'(haute banque parisienne프랑스어)이라 불리는 약 20개의 선별된 은행 중에서도 선두를 달렸다. 라피트의 은행은 1817년 12월 '자크 라피트 앤 컴퍼니'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이때 그의 형제 피에르 라피트(Pierre Laffitte, 1765-1846), 알퐁스 페레고(Alphonse Perregaux), 장 샤를 클레르몽(Jean Charles Clarmont) 등이 동업자로 참여했고, 은행 자본은 200.00 만 FRF에서 600.00 만 FRF으로 증액되었다.
이 시기 은행들의 자본 자원은 제한적이었지만, 이들은 주요 정부 대출의 보증을 서고 유망한 민간 기업을 자금 조달하기 위해 연합했다. 라피트는 뱅자맹 들레세르Benjamin Delessert뱅자맹 들레세르프랑스어, 장 콘라트 호팅게르Jean Conrad Hottinguer장 콘라트 호팅게르프랑스어, 제임스 드 로스차일드{{lang|fr|James de Rothschild|제임스 드 로스차일드]] 등과 협력하여 1817-18년 프랑스의 해방 대출 주식 발행을 위해 강력한 외국 은행들인 베어링 브라더스(Baring Brothers, 런던) 및 호프 앤 컴퍼니(Hope & Company, 암스테르담)와 경쟁하기도 했다.
3.4. 금융 혁신 및 투자
라피트는 금융 시스템 발전에 기여한 혁신적인 시도들을 여럿 선보였다. 1816년, 그는 들레세르와 함께 선구적인 주식회사 형태의 해상 보험 회사인 '왕립 해상 보험 회사'(Compagnie Royale d'Assurances Maritimes프랑스어)를 설립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 회사의 자본금은 1000.00 만 FRF이었고, 라피트가 사장을 맡았다. 1818년에는 동료 은행가이자 산업가인 뱅자맹 들레세르와 함께 프랑스 최초의 저축은행인 '파리 저축 및 예방 금고'(Caisse d'Épargne et de Prévoyance de Paris프랑스어) 설립에 핵심적인 인물로 참여했다. 이때 라피트가 총재로 있던 프랑스 은행 이사회의 거의 모든 구성원이 새 은행의 관리자로 등재되었다.
라피트는 1818년 무렵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당시 그는 파리 근교의 이벨린주에 위치한 17세기 건축물인 메종 라피트 성Château de Maisons메종 라피트 성프랑스어을 구입할 만큼 충분히 부유했다. 이 성은 유명 건축가 프랑수아 망사르François Mansart프랑수아 망사르프랑스어가 설계했으며, 혁명 전에는 루이 16세의 동생이자 1824년 샤를 10세로 즉위할 아르투아 백작의 소유였다. 바욘 출신 목수의 아들인 라피트에게 이 성을 소유하고 프랑스 사회의 저명인사들을 초대할 수 있게 된 것은 "벼락부자의 꿈"(le rêve d'un parvenu프랑스어)이 실현된 것이자 개인적인 승리였다.
1821~1822년에는 정부가 시작한 대규모 운하 건설 프로그램에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네 개 운하 회사'(Compagnie des Quatre Canaux프랑스어)의 설립을 주도했다. 이 주식회사는 '오트 방크' 회원들의 자본 자산을 동원했으며, 라피트의 컨소시엄은 정부 대출 총액의 절반을 확보했다. 그러나 1825년, 라피트가 프랑스의 대규모 산업 발전을 위한 은행 신용을 제공할 사설 투자 은행으로 구상한 '산업의 코망디테 사회'(Société Commanditaire de l'Industrie프랑스어)의 설립은 조제프 드 빌렐레Joseph de Villèle빌렐레 백작프랑스어의 울트라 왕당파 내각에 의해 승인되지 않았다. 이 '코망디테'는 라피트를 사장으로 하고 1.00 억 FRF의 자본금을 계획했으며, 프랑스 산업가들, 파리의 '오트 방크' 회원들, 그리고 런던, 제네바, 프랑크푸르트의 주요 은행가들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당시 라피트가 샤를 10세 정부의 자유주의 야당 지도자였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시기가 좋지 않았고, 영향력 있는 프랑스 은행의 보수적인 이사들과 정부 관료들로부터도 너무 야심 차다는 평가를 받았다. 라피트는 1830년 7월 혁명 이후에 다시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4. 정치 경력
라피트는 의회에서 자유주의적 목소리를 내며 7월 혁명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총리직을 수행했으나 재정적 어려움에 부딪히며 좌절을 겪었다.
4.1. 의회 활동 및 자유주의적 입장

라피트는 처음에는 부르봉 왕조의 복귀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루이 18세에게 재정 지원을 제공했으며, 1814년부터 1820년까지 프랑스 은행 총재직을 유지했다. 1815년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824년부터 1827년까지를 제외하고는 복고 왕정 기간 내내 의원직을 수행했다. 동료 의원이자 은행가인 카지미르 피에르 페리에Casimir Pierre Périer카지미르 피에르 페리에프랑스어와 마찬가지로, 그는 의회에서 '좌파' 자유주의적 입장을 취하며 입헌 군주제, 언론의 자유, 기업의 자유, 국가 행정의 능력, 정부 재정 투명성 등을 지지했다.
1820년 이후 부르봉 정권이 점점 더 보수적이고 왕당파적으로 변하자, 라피트는 불만을 표출하며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카지미르 페리에와 함께 1820년대 의회에서 빌렐레 백작의 운하 건설 프로그램 재정 처리에 강력히 반대했다. 1825년에는 혁명 기간 중 몰수된 토지에 대한 귀족 보상안에 찬성표를 던져 인기를 잃기도 했으나, 1828년 딸 알빈 라피트가 존경받는 미셸 네이Michel Ney미셸 네이프랑스어 원수의 아들 나폴레옹 조제프 네이(Napoleon-Joseph Ney)와 결혼하면서 대중적 지지를 되찾았다. 라피트는 1801년 마린 프랑수아즈 라외(Marine-Françoise Laeut, 1783-1849)와 결혼했으며, 딸 알빈 에티엔느 라피트(Albine-Étiennette Laffitte, 1881년 사망)가 유일한 자녀였다. 그녀는 이후 네이 모스크바 공작부인이 되었다.
1824년 샤를 10세가 즉위한 후 상황은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다. 국왕은 증가하는 자유주의적, 심지어 공화주의적 반대에 대한 우려로 1829년 울트라 왕당파인 쥘 드 폴리냐크Jules de Polignac폴리냐크 공작프랑스어 내각을 출범시키는 재앙적인 조치를 취했다. 1830년 선거에서 울트라 왕당파가 패배하자, 국왕은 1830년 7월 25일 악명 높은 7월 칙령을 발표하며 언론의 자유를 중단하고, 하원을 해산하며, 토지 귀족에게 유리하도록 선거법을 변경했다. 이는 7월 혁명으로 이어졌다.
4.2. 1830년 7월 혁명에서의 역할
라피트는 샤를 10세와 그의 대신들을 축출하고 1789년 혁명을 지지했던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를 새로운 정부 수장으로 옹립하는 가장 초기이자 가장 단호한 지지자 중 한 명이었다. 파리에 있는 그의 자택은 루이 필리프를 개혁된 입헌 군주제의 '시민 왕'으로 만들려는 '운동당'(Party of Movement프랑스어)의 본부가 되었다. 파리에서의 대중 봉기와 지방에서의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이 계획은 성공했다. 샤를 10세는 영국으로 도피했고, 그의 대신들은 체포되었으며, 루이 필리프 1세가 왕위에 올랐다. 당시 샤를 10세는 7월 칙령을 철회한 뒤, 앙투안 모리스 아폴리네르 다르구Antoine Maurice Apollinaire d'Argout앙투안 모리스 아폴리네르 다르구프랑스어 백작을 라피트에게 보내 조각 협상을 시도했으나, 라피트는 "이미 늦었다. 더 이상 샤를 10세는 없다"며 이를 거부했다.
라피트는 8월 3일 하원 의장에 취임했으며, 8월 9일에는 의장으로서 루이 필리프 1세의 1830년 헌장에 대한 선서를 지켜보았다.
4.3. 국무회의 의장 및 재무 장관
1830년 11월 2일, 라피트는 국무회의 의장 겸 재무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로써 그는 '운동당'의 수장으로서 개혁을 공약하는 내각을 이끌었다. 그러나 라피트는 왕을 옹립하는 인물이나 정치 지도자로서보다는 은행가이자 금융가로서 훨씬 유능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의 정부는 프랑스의 질서를 유지해야 할 필요성과 파리 시민들을 달래야 할 필요성 사이에서 갈등하며 둘 다 성공하지 못했다.
카지미르 페리에와 같은 중도 온건파 하원 의원들, 심지어 국왕 자신에게도, 라파예트 장군과 같은 대중 혁명가들과의 관계는 프랑스를 공화국 설립으로 위험하게 몰아가고 있다고 보였다. 페리에는 라피트 내각과의 어떤 협력도 거부했다. 라피트 내각은 자유주의적 개혁과 사회적 소요 진압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추구하려 했으나, 이탈리아 봉기 지원 문제에서 국왕의 반대에 부딪혔고, 체포된 샤를 10세 대신들의 처형 요구를 거부하며 대중적 지지를 잃었다. 재정난은 개선되지 않았으며, 자크 샤를 뒤퐁 드 뢰르Jacques-Charles Dupont de l'Eure자크 샤를 뒤퐁 드 뢰르프랑스어 법무부 장관과 라파예트 국민위병 사령관도 사임했다.
131일간의 혼란과 우유부단 끝에 라피트는 결국 1831년 3월 13일에 사임할 수밖에 없었고, 페리에의 '저항당'(Party of Order프랑스어)이 새로운 내각을 구성했다. 라피트는 1831년 이후에도 하원 의원직을 유지했지만, 다시는 내각을 이끌거나 참여하지 못했다.
4.4. 정치적 실패와 재정적 파산
1830년 프랑스의 복잡한 정치에 뛰어든 라피트는 막대한 재정적 손실을 입었다. 혁명은 이미 어려움을 겪고 있던 프랑스 경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라피트 앤 컴퍼니' 은행은 1300.00 만 FRF의 손실을 입었고, 결국 1831년 1월 청산해야 했다. 은행의 손실을 메우기 위해 라피트는 프랑스 은행 총재에게 전례 없는 700.00 만 FRF의 은행 대출을 주선하도록 설득했다. 그는 파리의 아르투아 거리(현재 라피트 거리)에 있는 자택과 미술 컬렉션을 매물로 내놓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600.00 만 FRF에 브르퇴유(Breteuil)에 있는 가족 소유의 삼림지를 국왕 루이 필리프에게 매각한 것이었다. 이 매각은 큰 도움이 되었지만, 국왕이 이 거래를 공개하면서 라피트에게 정치적, 재정적으로 큰 타격을 주었다.
그럼에도 라피트는 메종 라피트 성을 매각으로부터 지켜냈지만, 광대한 부지를 분할하여 부유한 파리 시민들에게 판매할 시골 빌라 건설용 토지로 조성했다. 이는 1838년 M. 드 루비에르(M. de Rouvières)가 준비한 메종 라피트의 역사와 그림 같은 묘사(Histoire et description pittoresque de Maisons-Laffitte프랑스어)라는 소책자에도 설명되어 있듯이, 교외 부동산 개발의 놀랍도록 창의적인 초기 실험이 되었다. 라피트와 그의 형제 장 바티스트 라피트(Jean-Baptiste Laffitte)는 파리에서 메종까지 약 15 km 거리에 마차 노선을 개설했다. 그의 조카 샤를 라피트(Charles Laffitte, 1803-1875)와 사위 모스크바 공작은 프랑스 최초의 초원 경마장을 추가로 조성했다.
5. 회복 및 후기 경력
라피트는 재정적 파산에도 불구하고 사업을 재건하려는 의지를 잃지 않았으며, 훗날 근대적 투자 은행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금융 기관을 설립했다.
5.1. 금융 사업 재건
1836년에서 1837년 무렵, 라피트는 자신의 재정 상태를 충분히 정리하고 1825년 구상했던 '코망디테'(Commanditaire프랑스어) 계획을 다시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1837년에 '상공업 일반 은행'(Caisse Générale du Commerce et de l'Industrie프랑스어)을 설립하여 산업 기업에 장기 신용을 제공하고자 했다.
5.2. 상공업 일반 은행 설립
1837년 7월 15일 설립된 '상공업 일반 은행'은 어음 할인과 산업 투자를 모두 수행하는 은행으로, 자본금은 5500.00 만 FRF이었다. 이 기업은 주식회사 형태보다는 코망디테(commandite프랑스어, 합자회사) 형태의 조합을 사용했다. 프랑스 은행은 "은행"(Banque프랑스어)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없다는 등의 일부 제한을 가했지만, 전반적으로 이 사업은 성공적으로 승인되었다. 라피트의 주요 동업자로는 그의 동생 마르탱 라피트(Martin Laffitte, 1783-1840)와 설탕 산업가 프랑수아 르보디(François Lebaudy, 1799-1863)가 있었다.
이 회사가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대형 주식 투자 은행의 원형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서 계속 연구되고 논의되고 있다. 라피트 자신도 상공업 일반 은행이 자신이 꿈꾸던 진정한 '사업 은행'(banque d'affaires프랑스어)을 완전히 구현하지 못했음을 인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회고록에 "내가 원했던 것과 같은 위대한 신용 기관을 결코 만들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상업과 내 가족에게 오랫동안 유용할 위대한 은행을 지었다. 70세 노인에게는 충분히 사내다운 업적이다. 비록 나 이후에 다른 사람들이 위대한 신용 기관을 만드는 데 성공하더라도, 나에게는 시도했다는 자부심이 남을 것이다"라고 썼다.
1843년까지 '상공업 일반 은행'은 이미 북부 회사Compagnie du Nord북부 철도 회사프랑스어의 철도 건설에 1000.00 만 FRF의 대출을 제공하며 철도 금융 분야에 진출했다. 라피트의 조카 샤를 라피트가 이 투자에 관여했으며, 그는 7월 왕정 시기 파리에서 은행가로 활동하며 1841년부터 1847년까지 파리-루앙 철도의 promoter 역할을 했다. 그러나 상공업 일반 은행은 1848년 프랑스 혁명으로 인한 금융 위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파산했다. 후임 책임자였던 은행가 알렉상드르 구앵(Alexandre Goüin, 1792-1872)은 미출간 자서전에서, 이 회사의 설계 실패는 금융 위기 시기에 장기 투자와 단기 상업 대출을 모두 적절히 처리할 수 없었던 점이라고 언급했다.
6. 개인 생활
자크 라피트는 1801년 마린 프랑수아즈 라외(Marine-Françoise Laeut, 1783-1849)와 결혼했다. 그들의 외동딸 알빈 에티엔느 라피트(Albine-Étiennette Laffitte, 1881년 사망)는 미셸 네이 원수의 아들 나폴레옹 조제프 네이(Napoleon-Joseph Ney)와 결혼하여 모스크바 공작부인이 되었다. 그의 형제로는 사업가이자 하원 의원인 마르탱 라피트Martin Laffitte마르탱 라피트프랑스어와 장 바티스트 라피트(Jean-Baptiste Laffitte, 1775-1843)가 있었다. 장 바티스트 라피트는 앙투아네트 루이즈 르페브르데누에트(Antoinette Louise Lefebvre-Desnouettes)와 결혼하여 은행가 샤를 라피트Charles Laffitte샤를 라피트프랑스어를 두었다.
7. 사망

자크 라피트는 폐 질환으로 심하게 앓다가 1844년 5월 26일 파리에서 7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묘는 페르 라셰즈 묘지 30구역에 위치해 있다.
8. 유산과 평가
자크 라피트는 프랑스 금융계의 근대화에 기여한 혁신적인 은행가이자, 자유주의적 개혁을 추진했던 정치가로 평가받는다.
8.1. 금융계에 미친 영향
라피트는 프랑스 은행 총재로서, 그리고 사설 은행가로서 금융 시장의 안정과 발전에 기여했다. 그는 '왕립 해상 보험 회사'와 '파리 저축 및 예방 금고'의 설립을 주도하며 주식회사와 저축 은행이라는 현대적 금융 기구의 도입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비록 '산업의 코망디테 사회'와 '상공업 일반 은행'이 그의 원대한 비전을 완전히 실현하지 못했거나 오래 지속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발전할 새로운 형태의 투자 은행, 즉 산업 발전을 위한 장기 신용을 제공하는 은행의 중요한 선구자로 여겨진다. 그의 노력은 프랑스 산업화 과정에서 자본 동원의 새로운 길을 제시하며 금융 시스템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8.2. 정치적 평가 및 비판
정치인으로서 라피트의 유산은 다소 복합적이다. 그는 프랑스 복고 왕정에 대한 자유주의적 반대의 상징이자, 7월 혁명에서 샤를 10세를 축출하고 루이 필리프 1세를 옹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혁명적 인물로 평가된다. 특히, 그의 자택이 혁명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다는 점은 그의 적극적인 개입을 보여준다.
그러나 국무회의 의장 겸 재무 장관으로서의 그의 재임 기간은 정치적 한계를 드러냈다. 그는 질서 유지와 대중과의 화합 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못했으며, 이탈리아 봉기 지원 문제에 대한 국왕과의 갈등, 그리고 장관 처형을 거부하면서 대중적 지지를 잃는 등 여러 문제에 직면했다. 결국 그의 내각은 실패로 끝나고 재정적인 파산으로 이어졌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는 그가 은행가로서의 탁월한 역량과는 달리, 복잡한 정치적 국면을 효과적으로 이끌어가는 데 어려움을 겪었음을 시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피트는 프랑스의 정치적 격동기에 자유주의적 가치를 옹호하고 입헌 군주제를 지지하며 중요한 전환점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