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초기
자이르 다 로사 핀투는 1921년 3월 21일, 리우데자네이루주 쿠아치스에서 태어났습니다.
2. 선수 경력
자이르 다 로사 핀투는 1930년대 후반에 선수 경력을 시작하여 1960년대 초반까지 브라질의 여러 유명 클럽에서 활약했으며, 브라질 국가대표팀의 주축 선수로서 중요한 국제 대회에 참여했습니다.
2.1. 초기 경력
자이르는 1938년 마두레이라에서 레프트 윙어로 축구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민첩한 움직임과 강력한 슈팅 능력으로 빠르게 명성을 얻었습니다. 선수 생활 시작 2년 후인 1940년 3월 5일,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브라질 국가대표팀에 데뷔했으며, 이 경기에서 브라질은 1대 6으로 패했지만 자이르는 브라질의 유일한 골을 기록했습니다. 그는 브라질 국가대표팀에서 총 39경기에 출전하여 22골을 기록했습니다. 1940년대 내내 그는 국가대표팀의 주전 선수로 활약했으며, 클럽 경력으로는 먼저 바스쿠 다 가마로 이적했고, 1943년에는 바스쿠 다 가마가 1944년 브라질 리그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이후 1947년에는 플라멩구로 이적하여 리우데자네이루에 머물렀지만, 그 시즌에 플라멩구는 리그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자이르의 가장 빛나는 순간 중 하나는 1944년 상파울루에서 열린 우루과이와의 친선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는 1946년과 1949년에도 우루과이를 상대로 두 번의 멀티골을 기록하며 그들에 대한 강한 면모를 보였습니다. 1949년, 브라질은 1949년 코파 아메리카에서 우승을 차지했으며, 자이르는 파라과이와의 결승 2차전에서 두 골을 기록하여 브라질의 7대 0 대승에 기여했습니다.
2.2. 1950년 FIFA 월드컵
1950년, FIFA가 브라질에서 FIFA 월드컵을 개최하면서 자이르의 재능은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지징요 및 아데미르와 함께 브라질 대표팀을 이끌며 토너먼트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들은 빠른 속도, 화려한 기술, 그리고 골문 앞에서의 치명적인 결정력으로 공격적인 플레이를 선보였으며, 6경기에서 22골을 기록하며 전 세계 축구 팬들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월드컵 결승전이었던 우루과이와의 최종전에서 브라질은 패배하며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습니다. 브라질이 초반 경기를 지배하던 시기에 자이르가 골대를 맞히는 아쉬운 장면도 있었으나, 프리아사의 선제골에도 불구하고 우루과이가 2대 1로 역전승을 거두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월드컵을 위해 특별히 지어진 마라카낭 경기장에 모인 20만 명의 팬들은 실망감에 잠겼습니다.
브라질에서 축구는 항상 특별한 의미를 지녔습니다. 유명한 브라질 작가 넬송 호드리게스는 당시 경기에 대해 "모든 곳에는 피할 수 없는 국가적 재앙이 있다. 마치 히로시마와 같은 것이다. 우리의 재앙, 우리의 히로시마는 1950년 우루과이에게 패배한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패배는 너무나도 큰 충격을 주어 브라질 국가대표팀이 현재의 상징적인 노란색 유니폼으로 바꾸게 되었으며, 지금도 브라질에서는 단순히 '그 패배(The Defeat)'라고 불립니다.
2.3. 후기 클럽 경력 및 은퇴
1950년 월드컵 패배 이후, 자이르는 "나는 그 패배를 무덤까지 가져갈 것이다"라고 말하며 깊은 상실감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1956년 1월까지 국가대표팀에서 제외되었다가 두 경기에 잠깐 복귀한 후 다른 유명 선수들에게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이후 그는 상파울루 지역 클럽들을 옮겨 다니며 선수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파우메이라스와 산투스 FC에서는 비교적 길고 성공적인 활약을 펼쳤습니다. 특히 파우메이라스에서는 1949년부터 1955년까지 뛰면서 1950년 상파울루 주립 리그 우승, 1951년 리우-상파울루 토너먼트 우승, 1951년 코파 리우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특히 1955년에는 파우메이라스가 라이벌 상파울루 FC와의 경기에서 무승부만 기록해도 리그 우승을 확정할 수 있는 상황에서, 팀이 1대 0으로 뒤처지고 있을 때 자이르가 득점하여 팀의 우승에 기여했습니다.
1956년 그는 산투스 FC로 이적하여 1960년까지 활약했습니다. 산투스에서 그는 입단 첫 시즌에 팀이 7점 차로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산투스에서 뛰는 동안 팀은 리그에서 항상 2위권 이내를 유지했으며, 1958년과 1960년에는 주립 리그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이 시기에 자이르는 어린 시절의 펠레와 함께 뛰기도 했습니다.
1960년 40세의 나이로 산투스를 떠난 그는 1시즌 동안 상파울루 FC에서 뛰었고, 이후 폰치 프레타로 이적하여 선수 경력을 마무리했습니다. 그는 1963년, 42세의 나이로 은퇴했습니다.
3. 감독 경력
선수 경력을 마친 후, 자이르는 축구 감독으로도 활동했습니다. 그는 한때 자신이 뛰었던 산투스 FC, 파우메이라스, 그리고 데뷔 클럽인 마두레이라 등 여러 팀의 지휘봉을 잡았습니다. 특히 산투스 선수 시절, 그는 위대한 선수인 펠레가 산투스 팀에 성장하여 자리 잡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4. 수상 기록
자이르 다 로사 핀투는 선수 경력 동안 다양한 팀 및 개인 수상 기록을 남겼습니다.
- 클럽
- 바스쿠 다 가마
- 리우 주립 리그: 1945
- 파우메이라스
- 상파울루 주립 리그: 1950
- 리우-상파울루 토너먼트: 1951
- 코파 리우: 1951
- 산투스
- 상파울루 주립 리그: 1956, 1958, 1960
- 리우-상파울루 토너먼트: 1959
- 국가대표팀
- 코파 아메리카: 1949 (우승)
- FIFA 월드컵 준우승: 1950
- 개인
- 코파 아메리카 득점왕: 1949
- FIFA 월드컵 올스타팀: 1950
- 바스쿠 다 가마
5. 사망
자이르 다 로사 핀투는 2005년 7월 28일, 84세의 나이로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폐렴으로 사망했습니다.
6. 유산과 영향
자이르 다 로사 핀투는 브라질 축구사에 중요한 인물로 남아 있으며, 특히 1950년 월드컵 패배는 그 자신과 브라질 사회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6.1. 1950년 월드컵 패배의 영향
1950년 월드컵에서 브라질이 우루과이에 패배한 것은 자이르 개인에게 깊은 감정적 상처로 남았습니다. 그는 이 패배를 "무덤까지 가져갈 것"이라고 언급할 정도로 평생 잊지 못하는 경험이었습니다. 국가 차원에서도 이 패배는 단순한 스포츠 경기의 결과를 넘어섰습니다. 당시 브라질 사회에는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작가 넬송 호드리게스가 이를 브라질의 '히로시마'에 비유할 정도로 국가적 비극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은 유니폼 색깔을 바꾸는 등 변화를 겪었고, 이는 브라질 축구 역사에서 상징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6.2. 문화적 영향
자이르 다 로사 핀투의 이름은 브라질의 현대 정치사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브라질의 전 대통령인 자이르 보우소나루는 자이르 다 로사 핀투가 태어난 지 34년째 되는 날에 태어났으며, 그의 이름은 축구 선수 자이르에게서 영감을 받아 지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