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임칙서(林則徐린쩌쉬중국어, 1785년 8월 30일 ~ 1850년 11월 22일)는 청나라 말기의 저명한 정치인이자 학자이다. 자는 소목(少穆), 호는 문충(文忠)이며, 도광제 시기 총독과 흠차대신을 역임했다. 그는 특히 아편 중독으로 인한 사회적 폐해에 맞서 국가 주권을 수호하려 했던 강력한 노력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그의 개혁적인 면모가 부각된다.
임칙서는 1838년 아편 금수 흠차대신으로 임명되어 광저우에서 영국 상인들의 아편을 대규모로 몰수하고 폐기하는 단호한 조치를 취했다. 이는 당시 중국 사회의 심각한 아편 문제를 해결하고 국가 재정의 유출을 막으려는 그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그의 이러한 아편 단속은 아편 전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으나, 그는 외세의 경제적 착취와 침략에 맞서 국가의 이익을 옹호하고 주권을 지키려 했다는 점에서 중국 역사에서 높이 평가받는 국민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또한 임칙서는 서구의 지리, 과학, 국제법 등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 활동을 펼쳤으며, 이는 당시 중국 지식인으로서의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그는 비록 아편 전쟁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좌천되기도 했으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사회 발전에 기여하려 노력했으며, 그의 사상과 업적은 후대 중국의 개혁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생애 및 배경
임칙서는 1785년 8월 30일 푸젠성 푸저우시의 후관(侯官, 현 푸저우시 구러우구 중산로 19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과거에 여러 번 낙방하여 가난한 훈장 생활을 했다.
2.1. 어린 시절과 교육
임칙서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 학문에 정진했으며, 어린 시절부터 "비범한 재능"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1811년(가경 16년), 27세의 나이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며 최고 학위를 취득했다. 같은 해 그는 한림원에 입학하여 많은 행정 자료를 접하고 연구에 몰두했다. 그의 학문적 탁월함은 널리 인정받았으며, 이는 그의 관직 생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2.2. 초기 경력
한림원 입학 이후 임칙서는 다양한 지방 관직을 거치며 빠르게 승진했다. 그는 농촌 재건과 치수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했으며, 특히 동하 하도 총독(東河河道總督)으로서 치수 사업에 큰 기여를 했다. 또한 그는 부패한 관료들을 대규모로 숙청하는 등 부정부패 척결에 단호한 모습을 보였다. 그의 지방 행정관으로서의 능력은 오늘날까지도 높이 평가된다.
그는 중국의 개방에 반대했지만, 외국인에 대한 더 나은 지식의 필요성을 느끼고 세계 지리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는 데 힘썼다. 서구 지식에 대한 그의 관심은 실용적인 관점을 반영한 것으로, 서구의 영향을 인정하면서도 서구의 지배에는 저항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그의 아편 근절 노력 또한 이러한 지방관으로서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3. 주요 활동 및 업적
임칙서의 경력 중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었던 활동은 아편 단속 임무와 그로 인해 촉발된 아편 전쟁에서의 역할이다.
3.1. 아편 단속 임무
아편 중독으로 인한 사회적 폐해에 맞서 국가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임칙서의 노력은 그의 공직 생활의 정점이었다. 그는 아편 무역으로 인해 국가의 부가 유출되고 국민의 건강이 황폐해지는 상황에 깊은 우려를 표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단호한 조치를 취했다.
3.1.1. 광저우 파견 및 준비
1837년(도광 17년) 임칙서는 후베이성과 후난성을 아우르는 호광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관할 지역에서 아편 근절에 큰 성과를 거두었으며, 황작자의 아편 엄금론에 동참하여 상소를 올렸다. 도광제는 그의 실적과 논의의 정밀함을 높이 평가하여 1838년 임칙서를 아편 금수 흠차대신으로 임명했다.
당시 중국은 영국의 아편 대량 유입으로 인해 은이 해외로 유출되어 국가 재정이 고갈되고 있었다. 아편 수입 금지 조치가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도광제는 임칙서를 흠차대신으로 삼아 아편 문제의 핵심 지역인 광저우에 파견했다. 임칙서는 자신이 매우 중대한 책임을 맡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친구들에게 "길흉을 불문하고, 나는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편이 근절되기 전에는 결코 수도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1839년 3월 10일, 두 달간의 여정 끝에 광저우에 도착한 임칙서는 이튿날 두 장의 공고문을 게시했다. 한 장은 자신이 흠차대신의 신분으로 광저우에 온 목적은 항구를 불태운 사건을 조사한다는 내용이었고, 다른 한 장은 아편 단속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는 흠차대신인 임칙서가 광저우의 관리와 백성, 그리고 외국인에게 최초로 자신을 드러내면서 복잡한 숙제를 풀어가기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 광저우로 가는 도중에 임칙서는 광범위하게 조사를 했으며, 광저우에 도착해서도 6~7일의 현장 조사를 진행한 다음 3월 18일에 13행(行)의 행수를 소환해 심문했다. 13행이란 청 정부가 대외 무역을 특별히 허가한 13개의 상점으로, 차와 비단 무역 등을 독점했다. 이들은 대외 무역의 특권을 누리는 관료 상인으로, 흡화행의 오소영, 광주행의 노계광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임칙서는 또한 광둥의 총독 등정진과 해군 제독 관천패와 만나 아편 밀수를 중단하고 해상 방어를 강화하기로 합의했다. 현지 주민들도 아편 운반 선박을 검사하고 마약상 명단을 제공하는 등 정부를 도왔다. 임칙서는 그들의 열정에 크게 고무되어 젊은이들을 모집하여 군사력을 강화했다. 주강 하구에는 서양 전함이 중국 해역으로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통나무를 엮어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는 외국 상인과 아편을 밀매하는 현지 상인들로부터 많은 저항에 직면했다. 그는 그들에게 "아편 소비가 계속되는 한, 나는 여기에 머물면서 내 일을 끝까지 해낼 것이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이 말을 행동으로 증명했다. 아편 금지에 대한 엄격한 공고문이 모든 거리에 게시되었고, 아편과 아편 흡입 도구를 당국에 제출할 기한이 정해졌다. 그는 아편 상인들에게 3일의 시간을 주어 아편 재고를 제출하도록 했고, 아편굴은 봉쇄되었다. 또한 임칙서는 외국 상인들을 소집하여 화물을 내리고 당국에 제출하도록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는 빅토리아 여왕에게도 아편 무역의 도덕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공개 서한을 보냈다. 그는 영국이 자국 내에서는 아편을 금지하면서 중국에서는 아편 무역을 용인하는 영국의 도덕적 기준에 대해 질문했다. 이 서한은 "폐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해 공식적으로 통보받지 못하셨을 수 있으며, 우리 법률의 심각성을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변명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우리가 이 해로운 약물을 영원히 근절할 것임을 확신합니다"라고 명시했다. 이 서한은 "사람을 해치는 물건으로 끝없이 이익을 추구할 수 없다"는 통상의 원칙을 제시했다. 영국이 아편을 가져오지 않았다면 중국인들이 어디서 아편을 사고 흡입할 수 있었겠는가, "한 사람을 죽이면 사형에 처하는데, 하물며 아편은 얼마나 많은 사람을 해쳤는가!"라고 주장했다. 임칙서의 논리는 도덕적으로는 틀림이 없었지만, 서구 자본주의의 영리적 관점에서는 그의 간청이 무의미했다. 이 서한은 여왕에게 전달되지 못했지만, 나중에 런던 더 타임스에 재인쇄되어 영국 대중에게 직접적인 호소로 작용했다.

3.1.2. 아편 몰수 및 폐기

1839년 3월, 임칙서는 아편 무역을 근절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그는 유능하고 도덕적 기준이 높은 강력한 관료였으며, 영국에 의한 불법 아편 수입을 중단하라는 도광제의 칙명을 받았다. 그는 몇 달 만에 변화를 이끌어냈다. 그는 1,700명 이상의 중국 아편 거래상을 체포하고 70,000개 이상의 아편 파이프를 압수했다. 그는 처음에는 외국 회사들이 차와 교환하여 아편 재고를 포기하도록 시도했지만, 이는 결국 실패했다. 임칙서는 서양 상인 거주지에서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한 달 반 후, 상인들은 약 120.00 만 kg의 아편을 포기했다.
1839년 6월 3일부터 500명의 인부가 23일 동안 아편을 파괴하는 작업에 투입되었다. 아편은 석회와 소금과 섞여 후먼진 외곽의 바다에 버려졌다. 임칙서는 자신의 행위가 바다의 신들을 오염시킨 것에 대해 사과하는 비문을 지었다. 이 대규모 아편 폐기 사건은 중국 사회의 건강과 공중 보건을 위한 그의 헌신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역사학자 조너선 스펜스는 임칙서와 도광제가 "광저우 시민들과 그곳의 외국 상인들이 단순하고 어린아이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어 단호한 지침과 간단하고 명확한 용어로 제시된 도덕적 원칙에 반응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고 평했다. 임칙서나 황제 모두 문제의 깊이나 변화된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국제 무역 구조의 변화, 사적 상인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영국 정부의 의지, 그리고 아편을 포기할 영국 상인들의 위험을 알지 못했다.
3.1.3. 영국과의 외교 및 갈등
임칙서는 영국 정부 및 상인들과의 외교적 접촉을 시도했으며, 서한 교환을 통해 외세의 경제적 착취에 맞선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국과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3.2. 아편 전쟁
임칙서의 아편 단속은 1839년 제1차 아편 전쟁으로 알려진 중국과 영국 간의 공개적인 적대 행위를 촉발했다. 이는 외세 침략에 맞선 국가 주권 수호의 맥락에서 조명된다.
3.2.1. 원인과 전개
아편 전쟁 발발의 직접적인 원인은 임칙서의 단호한 아편 단속 조치였다. 전쟁이 시작되자 찰스 엘리엇과 임칙서의 말에 따라 양측은 모든 무역을 금지했다. 그 전에 임칙서는 마카오의 포르투갈 정부에 압력을 가했고, 이로 인해 영국인들은 홍콩의 척박한 항구 외에는 피난처를 찾지 못했다. 그러나 중국군은 곧 동인도 회사의 증기 전함 네메시스와 개선된 무기를 포함한 영국 해군 함대에 직면하여 곧 패배했다.
영국군은 광둥이 아닌 톈진에 나타났다. 함대가 코앞에 닥치자 청나라 고위층은 당황하여 임칙서를 해임하고 영국에 저자세로 일관했다. 임칙서의 후임인 기선은 영국에 굴종적인 태도를 취했고, 그 결과 청나라는 대폭 양보한 난징 조약을 맺게 되었다. 1840년 6월, 영국군은 광둥에 도착하여 폭격을 시작했으며, 이 전쟁에서 관천패는 영웅적으로 전사했다.
3.2.2. 결과와 영향
아편 전쟁의 결과, 청나라는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 조약 체결을 강요받으며 주권을 상실하고 사회적 변화를 겪게 되었다. 이는 중국 근대사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자 국제 질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임칙서는 이러한 패배의 희생양이 되어 조정의 정치적 공방 속에 모든 책임을 떠안게 되었다.
3.3. 지적 탐구와 저술 활동
임칙서는 서구의 지리, 과학, 국제법 등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 활동을 펼쳤다. 이는 당시 중국 지식인으로서의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그는 광둥에서 아편 단속 임무를 수행하면서 원덕휘와 같은 영어 능통자들을 참모로 두었으며, 광저우 의료 선교회의 미국인 의사 피터 파커의 협력을 얻어 영자지, 서구 지리서, 국제법 및 무기 관련 문헌을 번역하고 수집하여 연구했다. 이를 통해 임칙서는 외국 상인의 내항 및 무역 자체를 금지하는 것이 비현실적이고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으며, 영국 측이 청나라의 서구 사정에 대한 무지를 이용하려 해도 틈을 주지 않았다.
흠차대신 해임 후, 임칙서는 신장 이리(伊犁)로 좌천되는 도중 양저우에서 친분이 있던 위원을 방문하여 수집했던 서구 번역 문헌들을 맡겼다. 위원은 임칙서가 맡긴 문헌 자료를 바탕으로 『해국도지』를 저술했다. 『해국도지』는 일본에도 전해져 에도 막부 말기 지식인들의 해외 정세 및 국방에 대한 인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또한 임칙서는 신장 이리에서 러시아 제국과 국경을 접하는 현지 실정을 접하고, 이후 섬감총독으로 부임하기 전까지 3년간 러시아에 대해 고찰하여 『아라사국기요(俄羅斯國紀要)』를 저술했다. 그는 영국과 러시아 양국을 접한 경험을 바탕으로 영국보다 러시아가 청나라의 국방에 더 큰 위협이 될 것이라고 인식했으며, 이러한 생각을 교류하던 요인들에게 전했다。 그의 사위인 심보정이 이 생각을 계승했으며, 1849년(도광 29년) 임칙서가 운귀총독에서 퇴임 후 푸젠성으로 귀향하는 도중 창사에서 좌종당의 방문을 받아 회담했을 때 러시아 관련 수집 자료를 주기도 했다. 이들을 비롯하여 국방의 중점을 대러시아 정책에 두는 지도자들은 '새방파'라고 불리게 된다.
임칙서는 50세에 자손들을 훈계하기 위해 『십무익(十無益)』이라는 10가지 무익한 행동에 대한 격언을 창작했다. 각 격언은 그가 지은 8구의 시로 해설되어 있으며, 오늘날에도 깊은 교육적 의미로 많은 이들에게 읽히고 있다.
- 마음에 불선(不善)을 품으면 풍수(風水)가 무익하다.
- 부모에게 불효하면 제사(祭祀)가 무익하다.
- 형제간에 화목하지 못하면 친구가 무익하다.
- 행실이 바르지 못하면 독서(讀書)가 무익하다.
- 고집을 부리면 총명(聰明)이 무익하다.
- 교만하고 오만하면 학문(學問)이 무익하다.
- 운이 통하지 않으면 헛된 추구가 무익하다.
- 남의 것을 훔치면 보시(布施)가 무익하다.
- 원기(元氣)를 보존하지 않으면 약(藥)이 무익하다.
- 음란하고 법을 어기면 덕(德)을 쌓는 것이 무익하다.
4. 망명과 후기 경력
아편 전쟁 이후 임칙서는 정치적 부침을 겪었으나, 말년까지 공직자로서 역할을 다했다.
4.1. 신장 지역 망명

아편 전쟁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1840년 9월, 임칙서는 외딴 신장(新疆)의 이리 지역으로 좌천되었다. 그의 직위는 기선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임칙서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곳에서 농지 개혁을 추진하고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이곳에서 러시아 제국의 남하 위협을 직접 목격했으며, 이는 그에게 큰 수확이었다. 그는 후배 진사들에게 "장래 청나라의 가장 큰 위협은 영국보다 오히려 러시아일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 생각은 훗날 좌종당 등의 새방파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신장에 머무는 동안 임칙서는 중국 학자 중 최초로 그곳의 이슬람 문화의 여러 측면을 기록했다. 1850년, 그는 한 시에서 이리의 무슬림들이 우상을 숭배하지 않고 소와 말의 꼬리가 달린 기둥으로 장식된 무덤에 절하고 기도한다고 기록했다. 이는 널리 퍼진 샤머니즘적인 투그를 세우는 관습이었는데, 중국 문헌에 기록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그는 또한 카자흐어 구전 설화 중 하나인 호수의 녹색 염소 혼령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했는데, 이 혼령의 등장은 우박이나 비의 전조라고 한다. 이러한 관습에 대한 임칙서의 기록은 당시 제국 내 문화적 다양성을 보여주며 중국 내 소수 민족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데 기여했다.
4.2. 복권 및 관직 복귀
청나라 정부는 결국 임칙서를 복권시켰다. 1845년 그는 섬감총독(산시성-간쑤성)으로 임명되었다. 1846년에는 산시성 순무를 지냈고, 1847년에는 운귀총독(윈난성-구이저우성)이 되었다. 이러한 직책들은 광저우에서의 이전 직위보다 덜 명예로운 것으로 여겨졌으며, 그의 경력은 그곳에서의 실패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 그러나 임칙서는 이 자리에서도 아편 정책 개혁을 계속 주장하고 지방 행정 및 부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며 공직자로서의 역할을 지속했다.
5. 사망
1850년, 임칙서는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광시성으로 파견되던 도중 푸닝시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향년 65세였다.
6. 평가 및 유산
임칙서는 중국 내외에서 다양한 평가를 받으며, 그의 업적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6.1. 역사적 평가

비록 그는 처음에는 제1차 아편 전쟁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청나라 말기 아편 생산 및 무역을 다시 근절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지면서 임칙서의 명예는 회복되었다. 그는 아편 및 기타 마약 거래와의 싸움의 상징이 되었고, 그의 이미지는 시위에서 사용되었으며, 그의 저술은 아편 반대 및 마약 반대 개혁가들에 의해 긍정적으로 인용되었다.
당시 중국과 영국 간의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중국학자 허버트 자일스는 임칙서를 칭찬하고 존경하며 "그는 훌륭한 학자이자, 정의롭고 자비로운 관리였으며, 진정한 애국자였다"고 평했다. 임칙서가 해임된 이유 중 하나는 당시 청나라 관료들 중 다수가 광둥 상인들로부터 뇌물을 받았는데, 임칙서의 단속으로 인해 그들의 수입이 끊기자 그를 원망하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만약 임칙서가 광둥에서 계속 지휘를 맡았다면 영국을 격퇴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후대 중국인들은 아쉬워했다. 그는 항상 청렴결백하고 사적인 일을 돌보지 않았으며, 좌천되어서도 항상 국가를 생각하는 모습을 보여 후대인들에게 깊은 존경을 받았다.
6.2. 문화적 영향 및 기념

임칙서의 삶과 업적은 문학, 예술, 기념 사업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중국에서 마약 남용에 맞선 국민 영웅이자 문화 영웅으로 널리 존경받는다. 6월 3일, 임칙서가 아편을 몰수한 날은 대만에서 비공식적으로 '아편 금지 운동의 날'로 기념된다. 또한 6월 26일은 임칙서의 업적을 기려 '마약 남용 및 불법 거래 국제의 날'로 지정되었다.
푸저우의 역사적인 삼방칠항(三坊七巷) 지구에 위치한 임칙서의 옛 집은 대중에게 공개되어 있다. 이곳에는 아편 무역을 포함한 그의 공직 생활, 농업 개선 노력, 수자원 보존(푸저우의 서호를 논밭이 되는 것으로부터 구한 노력 포함), 그리고 부패 척결 운동이 잘 기록되어 있다.
전 세계 중국인 공동체에는 임칙서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미국 뉴욕시 맨해튼 차이나타운의 채텀 스퀘어에는 임칙서의 동상이 서 있다. 동상 기단에는 영어와 중국어로 "마약과의 전쟁 선구자"라고 새겨져 있다. 런던의 마담 투소 밀랍 인형 박물관에도 임칙서의 밀랍 인형이 전시되어 있다.
최근에는 아미타브 고시의 『연기의 강』(River of Smoke)이라는 소설에 임칙서가 등장하는데, 이 소설은 아편 전쟁을 배경으로 억압된 역사를 조명하고 세계화에 대한 현대적 비판을 제시한다. 이 소설은 임칙서가 광저우에 도착하고 외국인과 중국 관리들 간의 긴장이 고조되던 1838년에서 1839년 사이를 배경으로 한다. 그는 또한 1997년 영화 『아편 전쟁』에도 등장했다.
임칙서의 손자인 임태증은 북양함대의 장교였으며, 청일 전쟁 (1894~1895) 동안 중국이 1880년대에 독일에서 구입한 두 척의 현대식 전함 중 하나인 『진원』을 지휘했다. 그는 배가 좌초되어 버려야 했을 때 아편 과다 복용으로 자살했다.
임칙서가 광둥에서 흠차대신으로 재직할 때 쓴 다음 대련은 특히 유명하다.
해납백천, 유용내대. (海納百川,有容乃大중국어)
벽립천인, 무욕즉강. (壁立千仞,無欲則剛중국어)
바다는 온갖 강물을 받아들이니, 그 관용으로 인해 위대해진다.
절벽은 천 길 높이로 솟아 있으니, 욕심이 없기에 강인하다.
특히 이 대련의 앞 구절은 중국어 위키백과의 모토로 채택되었다.
7. 관련 항목
- 아편 전쟁
- 태평천국
- 우루무치
- 심보정
- 마약 남용 및 불법 거래 방지의 날
- 중국의 아편 역사
- 마약 금지
- 7145 Linzexu